80년대 초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이라는 책을 쓴 김성호 선생은 2개의 백제 설을 내세우면서 한성을 중심으로 해(解)씨 세력의 온조 백제와 공주를 중심으로 진(眞)씨 세력의 비류 백제가 존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비류백제 왕 응신이 고구려 광개토 태왕에게 패하여 왜열도로 들어가 야마토 왜국을 건설하였다고 하였으나 처음부터 온조계 외 별도의 비류계 왕력을 잘 알 수가 없어 점점 가설로 그치고 말았다.
여기서 필자는 온조 백제 왕력 속에는 온조계 단독으로 혈통이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두개의 왕권 세력인 온조계와 비류계가 서로 혼재하고 있다는 사실의 진상을 파악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면 소서노가 온조의 친부인 고추모(주몽)가 예 부인을 맞아들이고 유리태자를 책봉하면서 자신을 버린 정치적 배신행위에 격분하고 있었던 차에 이제 대륙에서 한반도로 옮겨와 새 나라를 세워 출발하려던 계획이 고추모의 아들 온조가 십제(十濟) 국으로 분가하면서 차질을 빚게 된다.
이로 인해서 소서노와 비류계 세력은 온조가 있는 위례성으로 쳐들어가 싸우다가 오히려 소서노가 패하여 죽게 되지만 소서노가 비록 죽었다고 치더라도 당시 백제세력의 주종을 이루었던 비류계 세력이 아주 사멸한 것은 아니라고 사료된다.
이처럼 백제국의 초기 역사가 고주몽과 그의 아들 온조의 정치적 배신으로 백제 태동 초기부터 온조계와 비류계로 나누어져 왕권을 놓고 서로 치열하게 싸우는 비극적인 출발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만 한다.
그래서 필자는 초기 왕권을 잡은 온조계 세력에게 이들 살아남은 비류계 세력이 대항하면서 오랫동안 서로 백제왕권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다투게 되는 역사가 전개되므로 <한 개의 백제국 안에 온조와 비류계의 양대 왕력이 혼재되어 등장한다>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한편 비류계 제 8대 고이왕 13년(AD 246년 8월), 위나라 관구검의 고구려 침입으로 동천왕이 한반도 이북까지 쫓겨 와 백제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자 진충 장군을 보내 소탕하면서 중국 요서지역 대방(소서노가 세운 초기 어라하 지역)으로 재진출하게 되었고 이후 제 9대 책계왕과 제 10대 분서왕으로 이어지면서 요서 백제를 확고하게 통치하였다.
여기서 대류백제가 존재하였다는 국내외 문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 심약(沈約)이 488년에 편찬을 완성한 <송서 백제 전>에는 “백제국은 본시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천여 리 되는 곳에 위치하여 요서군, 진평군이라 일컬었으며, 그 후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하여 차지할 때 백제도 역시 요서를 빼앗아 차지하였다”고 기록한다.
또한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는 그가 당나라 부성군 태수시절에 태사시중에게 올린 상소문에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할 때 강병 백만을 보유하여 남으로 오, 월을 침범하고 북으로는 유, 연, 제, 노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성가신 존재)이 되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그의 저서 <조선 상고사>에서 “백제 근초고왕의 아들 백제 제 14대 근구수왕이 바다건너 지나(支那) 대륙을 경략하여 선비 모용씨가 세운 북의 연나라(前燕, 337~370)와 부씨가 세운 남의 진나라(東晉, 317~420)를 정벌하여 지금의 요서, 산동 반도, 강소성, 절강성 등지를 모두 경략하여 광대한 영토를 장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초기 왕권을 잡은 온조계 세력에게 비류계 세력이 대항하다가 AD 4C 초부터 요서백제에서 백제왕권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극심하게 다투는 역사가 전개된다.
즉 비류계 제 10대 분서왕 사후에 온조계 제 11대 비류왕이 왕위를 찬탈하였으나 분서왕의 아들인 제 12대 계왕이 왕위를 되찾게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었던 온조계 제 13대 근초고왕이 왕위를 되찾기 위하여 AD 346년 비류계 제 12대 계왕을 시해하는 등 AD 4C 초부터 백제국은 그야말로 비류계와 온조계 간의 처절한 왕위 쟁탈전이 계속 이어지게 된다.
결국 AD 346년 비류계 제 12대 계왕이 온조계 제 13대 근초고왕에게 왕권 다툼에서 패한 것이 원인이 되어 계왕의 후손 세력이 한반도 남부로 도피하여 들어오게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계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진정(眞淨) 등 비류계 세력이 온조계 근초고왕에게 밀려 AD 348년 경 한반도로 도피해 들어와 경북 고령(대가야)을 중심으로 경남 합천(다라) 및 함안(안라) 지방을 석권하면서 이들 졸본 부여계 비류 백제인 들을 중심으로 하여 AD 350년 경 임나가라(任那加羅) 국을 세우게 되고 이어서 출운국(出雲國, 시마네 현) 등 왜열도로 진출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 후 AD 367년에 온조계 근초고왕의 명령으로 아들 근구수 태자가 임나가라를 침공하자 이들에게 임나가라 지역을 빼앗기게 되고 결국 이들 비류계 백제인 들이 왜열도로 진출하여 일본의 고대국가인 야마토 와(大和倭)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필자가 대가야 고령지역을 임나라고 칭하는 이유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지은 역사지리서 ‘아방강역고’의 임나고 편을 보면 경북 고령지역이 임나(任那)라고 분명히 나와 있고 일본서기에는 이 지역(고령 가야대학 우두산)이 미오야마로서 야마토(해 뜨는 터)라고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국내 사학계에서는 대륙에서 내려 온 북방 기마민족에 의한 가야지방 정복을 언급하지 않고 단지 기존 금관가야 등 전기 가야 동맹세력이 낙동강 상류로 진출하여 고령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동맹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일본 동경대 사학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가 주장한 북방 기마민족이란 학술적으로 앞서 요서백제에서 한반도 남부로 내려 온 졸본 부여계 비류 백제인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경북 고령에 있는 지산동 고분의 봉분 형태가 부여 식 매장형태인 순장(왕 사망 시 부하 신하들을 함께 생매장하는 행위) 및 후장 제도가 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임나가라 국은 주변 농경민족이 세운 것이 아니라 분명히 대륙에서 쫓겨 내려온 졸본부여 인들에 의해서 수립 되었던 사실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
또한 한반도 남부를 세력권으로 하여 임나가라 국을 세운 진정 세력은 동으로 탁순국(대구)과 신라지역을 거쳐 AD 355년 경 동해를 곧바로 건너 왜열도 해안에 들어 가 현지를 괴롭히는 북방계 세력(읍루 오로치 족)을 정벌하여 출운(出雲 이즈모, 시마네 현)국을 세우고 이어서 북방으로 진출하여 월전(越前 고시, 후꾸이 현의 쓰루가 지방)국까지 진출하게 된다.
위의 역사적 사실을 고분에 나오는 유물로서 증거를 밝힌다면, 현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 중 금동 관, 백제식 고리칼인 환두대도, 북방기마 민족을 표방하는 각종 마구 류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와 비슷한 부장품이 일본 후꾸이 현에 있는 일본송산(日本松山, 니혼마스야마)고분에서도 나오고 있는 것에서 잘 알 수가 있는 것이다.
AD 4C 중엽에 북방 기마민족인 졸본부여계 비류 백제인들에 의해서 수립된 임나가라를 부인하고 AD 42년에 형성된 전기 6가야 동맹의 하나인 대가야가 처음부터 계속 유지되다가 나중에 후기 가야 동맹으로 연장된 것이라고 표방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고령 현지에서의 역사관계자들이 임나 지역에서 왜열도로 진출하여 일본의 고대 국가를 이룩한 비류 백제인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부인하고 애초부터 남방 농경민족에 의해서 대가야로 계속 존속하여 왔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역으로 말해서 일제가 왜열도에서 AD 4C 경 한반도 남부에 들어와 식민통치를 했다고 조작한 역사를 인정하는 상황에서 이를 방어하려는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고대 비류백제 인들이 요서백제에서 내려 와 한반도 남부 가야 지방을 쳐서 정벌한 후 당시 진정 등 고대 백제 인들이 왜열도 건너 간 이유로 현재 그들의 후손이 일본인으로 살고 있으므로 AD 4C 중엽, 임나가라를 세워 그 후 정치적 연고권을 가졌던 사실만은 일본 역사로 교묘히 편입하여 고대 한일 역사의 전개 방향을 180도 정반대로 왜곡하였던 것이 임나일본부설의 실체인 것이다.
백제의 속국이었던 왜국이 백제 본국이 망하자 AD 670년 일본으로 변신한 이후 한반도 남부 임나가라 지역은 역할을 하게 되는 양국의 이해관계가 겹쳐지는 뜨거운 감자 지역(Overlapping Area)으로 나타나게 된다. 아무튼 야마토 왜의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 가야 지방은 자신의 출발지로서 본향인 원천지가 되기에 임나(任那 미마나 - 임이 계신 그리운 땅)라고 불리어지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