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호 기행문 2023.9.30.
새벽부터 집을 나서서 서석한시협회에 8시 30분에 도착하니 청담이사장과 이송희 총무, 죽파, 만포, 지당, 해인, 아겸이 기다리고 있었다. 각각 차3대에 타고 면앙정에 가니 홍수지, 문선영, 고순남, 김인원선생들이 벌써 와 있었다. 머침 송순선생이 돌아가신지 504년이 되었고 회방연 444년이 된 날이었다.
이현채원장님께서 행사부탁을 하시므로 제17차 한시기행을 겸한 면앙정 한시백일장을 주재하게 된 서석금낭회에서는 전주, 정읍 익산, 대구 경주 밀양, 광주 전남에서 온 시인들과 ‘追慕俛仰亭 宋純先生’을 시제로 하고 蕭韻目을 걸고 백일장을 열었다. 그 결과 밀양에서 온 이태호씨가 장원, 차하는 경주에서 온 조삼승, 차하는 전주에서 온 윤재남, 참방 4명, 가작 20명을 뽑았다. 점심도 못 먹은 채 고선하고 상장 준비하여 시상식까지 하고, 반찬없는 찰밥 하나씩 주어서 대충 때우고 나니 2시30분이었다. 또 회방연 당시 정철선생이 제안하여 송순선생을 남녀에 태우고 뜰을 돌았다 하여 내가 가마를 타는 행운을 얻었다. 4명의 가마꾼들이 시원찮아 뒤뚱뒤뚱 몇 발짝 가다가 내렸으나 웃고 즐기는 가운데 판소리와 삼현육각의 흥겨운 잔치가 막을 내렸다.
송순선생의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수초(遂初) 또는 성지(誠之), 호는 기촌(企村) 또는 면앙정(俛仰亭). 담양 출신. 증 이조판서송태(宋泰)의 아들이다.
생애와 활동사항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를 시작으로 1520년(중종 15)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마친 뒤, 1524년(중종 19)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고 1527년(중종 22)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533년(중종 28)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잡자, 귀향하여 면앙정을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송순은 1537년(중종 32)김안로가 사사된 뒤 5일 만에 홍문관부응교에 제수되고, 다시 사헌부집의에 올랐다. 이어 홍문관부제학, 충청도어사 등을 지냈고, 1539년(중종 34)승정원우부승지에 올라 4월 명나라의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오자 선위사가 되어 서행(西行)하였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사간원대사간 등의 요직을 거쳐 50세 되던 해인 1542년(중종 37)윤원형과 황헌(黃憲) 등에 의하여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547년(명종 2)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중종실록』을 찬수하였다. 그해 5월에 주문사로 북경에 다녀와 개성부유수가 되었다.
1550년(명종 5) 대사헌·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진복창(陳福昌)과 이기(李芑) 등에 의하여 사론(邪論: 도리에 어긋난 논설)을 편다는 죄목으로 충청도 서천으로 귀양 갔다. 이듬해에 풀려나 1552년(명종 7)선산 도호부사가 되고, 이 해에 면앙정을 증축하였다.
이 때 기대승이 「면앙정기」를 쓰고 임제(林悌)가 부(賦)를 쓰고, 김인후(金麟厚)·임억령(林億齡)·박순(朴淳)·고경명(高敬命) 등이 시를 지었다. 이후 전주부윤과 나주목사를 거쳐 1562년(명종 17) 70세의 나이로 기로소(耆老所 : 조선시대에, 70세가 넘는 정이품 이상의 문과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에 들고, 1568년(선조 1)한성부좌윤이 되어, 『명종실록』을 찬수하였다.
이듬해 한성판윤으로 특별 승진하고 이어 의정부우참찬이 된 뒤, 벼슬을 사양하여 관직생활 50년 만에 은퇴하였다. 송순은 성격이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특히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고,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일찍이 박상(朴祥)과 송세림(宋世琳)을 사사하였고, 교우로는 신광한(申光漢)·성수침(成守琛)·나세찬(羅世纘)·이황(李滉)·박우(朴祐)·정만종(鄭萬鍾)·송세형(宋世珩)·홍섬(洪暹)·임억령 등이 있다. 문하 인사로는 김인후·임형수(林亨秀)·노진·박순·기대승·고경명·정철(鄭澈)·임제 등이 있다.
면앙정은 그가 41세 되던 해인 1533년(중종 28) 담양의 제월봉 아래에 세운 정자로서 호남 제일의 가단(歌壇)을 형성하였다. 여기에는 임제·김인후·고경명·임억령·박순·이황·소세양(蘇世讓)·윤두수(尹斗壽)·양산보·노진 등 많은 인사들이 출입하며 시 짓기를 즐겼다.
면앙정가단은 그 후에 나타난 호남의 성산가단(星山歌壇), 영남의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노가재가단(老稼齋歌壇) 등의 선구이며, 영남의 가단이 전문 가객 중심이라면 면앙정가단은 사대부 출신의 문인 가객이 중심이었다.
특히 송순은 벼슬에서 물러나 강호생활을 하면서 자연예찬을 주제로 한 작품을 지음으로써 강호가도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으며, 「면앙정삼언가」·「俛仰亭題詠」 등 수많은 한시(총 505수, 부1편)와 국문시가인 「면앙정가」 9수, 「자상특사황국옥당가(自上特賜黃菊玉堂歌)」·「오륜가」 등 단가(시조) 20여 수를 지어 조선 시가문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문집으로는 『俛仰集』이 있다. 담양 구산사(龜山祠)에 신주가 모셔졌다.
호남의 높은 정신문화를 이끌어 주는 몇 분중 한사람인 송순선생의 추모행사에 뿌듯한 의미를 더하고, 호남의 높은 정신문화를 이끌어 주는 몇 분중 한사람인 송순선생의 추모행사에 뿌듯한 의미를 더하고, 일행들과 뒤처리하고 다시 총무차로 서석한시협회로 오니 4시가 넘었다. 한시를 지어 보면 너무 어렵다는 걸 느끼지만 몇 년이 지나도 시 한 수 발표도 없고 노력도 안한 사람들에 대해 청담이사장의 인문학의 뿌리와 전통문화사적 정의와 내력에 대한 훈계를 듣고 다시금 허송세월했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앞으로 하늘이 나에게 얼마의 시간을 허락해 줄지 모르지만 값진 생활을 하리라 다짐했다. (창강 정채호)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견한잡록(遣閑雜錄)』
『패관잡기(稗官雜記)』
『순오지(旬五志)』
『지봉유설(芝峰類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