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8:1-22
찬송가 294장 하나님은 외아들을
우리말 성경은 현재 우리가 살피는 사무엘상을 역사서 범주에 넣습니다. 하지만 히브리 성경에서 사무엘상은 예언서로 분류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만 아니라 인류 역사는 우주를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말씀이 펼쳐지는 장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은 사무엘서의 한 분기점입니다. 여기서부터 이스라엘의 사사 제도가 막을 내리고 왕정이 들어서기 때문입니다.
앞선 사무엘상 7장에서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 사무엘은 잦은 국가 위기가 영적 타락 때문임을 알고 미스바에서 성회를 열어 백성의 참회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국경을 침공한 블레셋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이스라엘 전역에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사실이 있습니다. 죄로 물든 인간 본성은 어려울 때보다 풍족하고 평안할 때 하나님을 버리기 쉽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8장은 7장과 단 한 줄 만큼의 여백으로 나뉘어 있지만 여기에는 꽤 긴 시간이 담겨 있습니다. 그 사이 사무엘이 나이 들어 늙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 긴 시간 유지되었던 평화가 뒤틀리는 움직임이 생깁니다.
사무엘과 그의 아들들(1-3절)
(1-2)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어느덧 노년에 이른 사무엘이 자신의 두 아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삼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사직은 아들에게 승계하지 않습니다. 사무엘 바로 전 사사였던 엘리도 두 아들에게 사사직을 계승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직을 물려주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사무엘이 어떤 이유로 자기 아들들을 사사로 세웠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한편 사무엘의 장자 이름 ‘요엘’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차자 이름 ‘아비야’에는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시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무엘은 두 아들에게 자기 신앙고백이 담긴 이름을 지어주었고, 이들을 브엘세바 지역을 관장하는 사사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3)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두 아들이 사무엘과 달랐습니다. 이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뇌물을 받고 한쪽으로 치우치게 판결했습니다. 정의로운 재판관 이어야 할 사사 역할을 반대로 수행한 것입니다. 특히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로 번역된 말의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아버지의 길로 걷지 않았다.’가 됩니다. 즉, 두 아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손에 꼽는 정면교사 사무엘을 앞에 두고도 구부러진 길을 걸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시 사무엘은 라마에 거주했고 거기서 인근지역 벧엘, 길갈, 미스바를 순회하며 활동했습니다. 한편, 두 아들이 있던 브엘세바는 라마에서 약 80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동시에 이곳은 이스라엘 남방 경계지로서 이방 나라 에돔과 가까웠습니다. 이때 이들과 아버지 사이 먼 물리적 거리가 영적인 거리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이들은 물리적으로 아버지보다 우상과 가까워 그릇된 문화에 젖어 들어갔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아버지는 자신들과 관계 맺기에 너무 바빴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은 죄 주변을 배회하고 맙니다. 이러한 사무엘의 가정에 비추어 오늘 우리 모습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자녀 혹은 가족과 얼마 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습니까? 아니,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는 한 사람이 기독교를 믿기를 결정하고 교회에 오는 이유를 연구했습니다. 이때 그가 찾은 주요한 답은 바로 ‘먼저 그 종교를 믿은 사람들과의 사회적 유대’였습니다. 바로 관계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느 순간 갑자기 삼위일체가 믿어졌거나, 하나님 창조 섭리가 이해됐거나, 성경이 진리인 게 깨달아졌기 때문입니까. 그게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 같은 가까운 누군가의 권유로 오지 않았습니까? 아니면 그들로부터 받은 문제와 상황을 뛰어넘은 섬김 때문은 아닙니까. 그러다 점점 가랑비에 옷 젖듯, 작은 점으로 시작한 믿음이 지금 우리 온몸을 적시고 감싸 지금 이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너무 바빠서, 일에 치이고 스트레스에 절어서 가족 친구 이웃과 영적 거리를 둘 때가 많습니다.
이때 우리 가까이, 아니 우리 안으로 우주적 거리를 좁히고 찾아오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기억하십시다. 신이면서도 이 속 좁고 지저분한 내 안으로 기꺼이 들어오신 그분 사랑에 힘입어 자리에서 일어나십시다. 내 상황에 매이기 보다 가족 친구 이웃에게 매여 그들과의 영적 거리를 좁히기 위해 말입니다. 짧은 시간이라도 만나 대화하고, 가능한 만큼 밑가지가 되어 그들을 섬김으로 내가 먼저 받은 주님의 넘치는 사랑 흘려보내기 위해 말입니다. 그때 우리 가정은 사무엘의 집처럼 갈등의 씨앗이 아닌 이 나라를 맑힐 마중물이 될 것입니다. 한편, 사무엘은 외면했어도 오랫동안 이어져 온 사사들의 문제가 다시 또 반복되는 걸 좌시하지 않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장로들의 요청과 사무엘의 반응(4-9)
(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장로들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이들은 사무엘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장로들은 두 아들을 사사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더는 사사가 아닌 왕의 다스림을 받겠다고 요구합니다. 그렇지만 이들이 사사제도를 완전히 무시한 건 아닙니다. 5절 하반절의 ‘다스림’은 히브리 원문에 ‘샤파트’라는 단어로 쓰였습니다. 이는 ‘재판하다’라는 뜻으로 ‘사사’의 어원입니다. 즉, 장로들이 왕을 요구하며 제안한 왕의 기본 역할은 사사와 유사했습니다. 게다가 장로들의 요청은 그리 터무니없지 않았습니다. 우선 이들은 지난 300여 년 사사들의 통치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같은 이방 민족과의 전쟁 크기는 전처럼 국지전이 아닌 국가 전면전 수준으로 커졌습니다.
실제로 사사제로 대표되는 지파 연합체는 전쟁 하기에 비효율적입니다. 적이 나타나면 그제야 주먹구구식으로 군사를 소집했고, 규모 없이 우왕좌왕했습니다. 그렇지만 중앙집권형 왕정은 문제에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제안은 잠시 후 하나님이 직접 밝히시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들이 ‘다른 모든 나라와 같아지기’를 원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오래전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애굽기 19:6)”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켰습니다. 노예로 살던 그들에게 자유를 주시며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셨습니다. 바로 제사장 나라입니다. 이는 이들이 죄로 물든 세상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 단절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잇는 가교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지금 장로들은 이 정체성을 거부합니다. 이들은 세상과의 다름이 아니라 닮음을 선택합니다. 이런 장로들의 요구에 대한 사무엘의 반응이 이렇습니다.
(6b)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어지는 사무엘의 행동을 한 단어로 설명합니다. ‘기도’입니다. 사무엘은 작금의 상황을 두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비록 그가 자녀 교육에 있어선 아쉬운 모습을 보였지만, 지금 민족의 중대사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그는 역시나 위대한 사사다웠습니다. 장로들은 문제를 보고 사무엘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는 지혜는 하나님에게서 옴을 알았습니다(약 1:5). 이때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주신 응답은 이렇습니다.
(7-9)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세 가지를 지시하셨습니다. 먼저 백성의 말을 다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백성이 요구하는 것,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동시에 이때 하나님은 친히 장로들의 행동을 주석하셨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백성이 내세운 표면적 동기는 꽤 타당했습니다. 그렇지만 내면적 동기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백성의 요구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왕좌로부터 내쫓으려는 시도였습니다. 게다가 이 일은 지금 처음이 아닙니다. 출애굽 당시부터 긴 세월 이어져 온 습성이었습니다. 그때 백성의 선조들은 하나님이 매일 양식으로 배 불리시고, 밤낮 보살피시며, 옷이 해지지 않고, 발도 부르트지 않게 보호하신 것을 생생히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백성은 세상에 한눈을 팔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사모하고 의존했습니다. 지금 장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새 젖어 든 평화에 취해 그 평화를 주신 하나님 아닌 더 좋게 보이는 다른 걸 갈구합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어쩌면 오늘 신앙인으로 사는 우리의 내면도 장로들과 같지 않은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실제로 의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겉으론 하나님만 믿는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다고 하지만, 사실 높은 교육 수준, 두둑한 은행 잔고, 든든한 보험과 연금에 기대지 않습니까. 물론 이것들 자체가 나쁘지는 않습니다. 이것들은 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 중심에 하나님 아닌 이것들을 둔다면, 이는 곧 하나님이 주권을 삶 속에서 거부하는 일입니다. 즉 우상숭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우리 내면을 속속들이 다 보고 아십니다. 그러니 장로들의 그릇된 시선과 하나님의 더 깊은 시선을 의식하며 우리 내면의 동기까지 살피십시다. 그리고 우리 안에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이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것을 당장에 제하여 버리십시다. 혹 이 일이 어렵다면 겸손히 하나님께 구하십시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말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분명히 응답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녀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는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우리는 말뿐이고 겉만 번지르르한 장로가 아닌 진실한 신앙 선배이자 모범으로 자라갈 것입니다.
왕의 제도를 가르치는 사무엘(10-18)
이어지는 본문 10절에서 18절은 하나님 명령에 순종해 백성을 향해 입을 연 사무엘의 말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무엘의 발언 중 세 번째로 긴 이 단락에서 사무엘은 왕의 제도의 위험성을 설명합니다. 이때 사무엘이 전하는 왕의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왕은 ‘취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왕은 백성의 아들딸들을 취해 군인, 농사꾼, 대장공, 요리사 등의 일을 시킬 것입니다. 또 밭이나 포도원을 취해 그 열매를 거둬갈 것입니다. 또한 가축도 취해 일을 시킬 것이고 십일조까지 취해 사용할 것입니다. 그렇게 왕은 백성의 삶 전 영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입니다. 그때 백성의 처지는 이렇게 될 것입니다.
(17b-18)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
백성의 신분이 자유인에서 종이 됩니다. 이는 그들이 이집트에 살던 상황으로 돌아가는 일, 역출애굽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길 밖의 길을 내셔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지만, 지금 백성은 길을 굽게 간 사무엘의 아들들은 비난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U턴하겠다고 합니다. 게다가 앞으로의 상황은 그때보다 더 나쁩니다. 왜냐하면, 그때 하나님은 백성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지만, 앞으로는 왕의 폭정으로 부르짖어도 반응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말을 마치자 백성이 답합니다.
하나님의 응답(19-22)
(19-20)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사무엘은 히브리 단어로 85단어의 긴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단 한마디로 답합니다. ‘아니로소이다.’ 백성은 사무엘의 경고를 듣지 않습니다. 그렇게 자신들 요구를 관철합니다. 이에 사무엘이 반응합니다.
(21-22) 사무엘이 백성의 말을 다 듣고 여호와께 아뢰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니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성읍으로 돌아가라 하니라
사무엘은 하나님께 백성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이십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고 말입니다. 사무엘도 이 말에 순종해 백성을 돌려보냈습니다. 요청을 적절한 방식으로 처리하려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무엘을 통해 그렇게 길게 왕정의 문제를 말씀하셨고 무엇보다 하나님 본인이 왕이신데 왜 인간 왕 세우기를 허락하셨는지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왕정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미 오래전에 왕정을 약속하기까지 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창세기 17:6)”
또한 하나님은 왕정이 가져올 위험성도 아시고 미리 모세를 통해 신명기에서 왕을 세울 때 지켜야 할 것을 알려주기까지 하셨습니다(신17:14-20).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지금 하나님의 반응을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는 다 계획이 있다.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 어떠한 행동도 자신이 다 받아내고 소화해낼 능력이 있다. 그렇게 하나님은 자녀가 아무리 멀리 돌아가도 끝내는 다시 돌아오게 하고야 말 자신이 있으시다. 그리고 그때까지 기다리실 사랑이 있으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백성에게 내버려 두심과 허락하심이라는 응답을 하셨다.”
생각해보면 얼마 전 우리가 살핀 룻기에도 하나님의 이런 통 크심이 있었습니다. 바로 나오미가 모압으로 간 걸 그대로 두신 일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다윗만 아니라 세상에 진정한 왕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해 언약을 깬 나오미가 모압에서 룻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릇된 선택에서 발현한 위대한 역전입니다. 이는 사람으로는 상상도 실현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장로들의 왕정 요청도 이와 같습니다. 오늘 본문부터 이스라엘에 심어진 왕정은 이후 사람들에게 500여 년의 고통의 시간을 선사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통해 사람들은 진정한 왕 그리스도를 대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신 왕,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준비한 궁극의 해결책 그리스도는 진정한 우주적 역전을 일으키십니다. 바로 창조주가 피조물을 섬기는 지각변동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왕이 종보다 낮아지고, 종이 왕만큼 높아지는 현상이 이 땅에 펼쳐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이 뒤집힘의 수혜자로서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이 기막힌 일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쓰신 거대한 이야기, 위대한 역사의 현장을 걷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는 수십 번 갈팡질팡하고 넘어질지 모릅니다. 스스로를 속이고 또 우상숭배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다. 오늘이 바로 하나님 섭리 한 페이지를 경험하는 중임을 말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만 아니라 오늘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심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 백성은 하나님을 거절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도 속이며 스스로 왕이 되려 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은 이들 요구에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묵묵히 자기 일을 하셨고, 오래오래 기다리시며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독생자 그리스도를 진정한 왕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온 것도 하나님 사랑이 실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넘어질 수 있지만 하나님이 이런 우릴 붙드심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 주님이 예비하신 우리 앞의 길을 당당히 걷겠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사랑에 젖어 들며 주님의 자녀로 자라가는 우리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오늘 나는 내 가족, 친구, 이웃들에게 어떤 영적 영향력을 끼치고 있나요? 그들과 관계 맺는 모습을 중심으로 생각해보세요.
2.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부하면서까지 인간 왕을 요구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3. 이스라엘 백성의 왕정 요구는 하나님의 다스림 받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이들 요청을 들어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4. 오늘 나는 누구 혹은 무엇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지 생각해보세요.
(작성: 이종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