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의 청춘일기...
언제나 긴 머리를 휘날리며 포효하는 영원한 로커 김종서.
80년대 후반 한국 록을 대표하는 그룹 부활과 시나위의 리드 싱어
를 거쳐 솔로로 변신, 현재는 6집 `시즈'에서 `에필로그'와 `희망
가'를 히트시키며 변함없는 인기를 과시하고 있다.
그의 젊은 날이 그대로 담겨 있는 80년대 언더그라운드 록의 분위
기, 또 현재 한국 대중음악계의 중심축으로 변신한 당시 주역들의
이야기를 그의 입을 통해 들어본다
몇해전 일본에 들렀을 때, 나는 도쿄의 한 서점에서 두 권짜리 비틀
스의 악보집을 발견했다. 고교시절 내가 본 책, 바로 그 책이었다.
레드 재플린을 거쳐 비틀스에 심취해 있던 고교 시절,
동네 음악사 아저씨가 갖고 있던 비틀스 전곡의 악보집을 복사해다
가 성경처럼 달달 외웠다.
나는 그날 다시 새 책을 사다가 옛날 복사해서 묶어둔 책 바로 옆에
꽂았다.
80년대 후반, 한국을 휩쓴 록의 황금기는 짧고도 찬란했다.
다시 그런 시절이 돌아올지 모르지만 그때 우리는 시대를 이끌어간
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설명이 필요없는 이승철, 시나위의 신대철, 김현식의 `내 사랑 내곁
에'를 작곡한 오태호, 김완선의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를 만든
손무현, 삐삐밴드의 강기영,
프로듀서로 맹활약중인 이태윤 김태원, 그리고 정현철(서태지)….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내 이야기이자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될 것이
다.
현재의 모습들은 모두 다르겠지만 그때는 모두들 `한 배를 탄 사람
들'이라는 마음이었다. 물론 그 이전의 모습들도 사뭇 달랐다.
지금도 사람들은 날 보고 내성적이라고들 하지만 사실은 많이 나아
진 편이다. 고교시절까지 나는 헤드폰을 꽂고 늘 구석에 앉는, 있으
나 없으나한, 잘 모르는 그런 타입이었다.
고교시절까지 나의 관심사는 음악 듣기와 노래하기, 그리고 스케이
트 보드가 전부였다.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곳이면 어디든 크게 음
악을 틀어놓은 아이들이 있었고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
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다 있는 세계였다.
스케이트 보드를 타려면 넓은 곳이 필요했기 때문에 여의도 광장이
나 태릉 푸른동산을 자주 찾았다. 자주 나오는 아이들은 10여명 정
도라 금방 친해졌다. 개중엔 여자아이들도 3∼4명 정도 있었는데 여
기서 나는 첫사랑의 시련을 겪게 된다.
이름은 HJ 정도로 해두자.
상당히 유복한 집안의 딸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시원시원한 외모
에 성격도 활달해 안타깝게도 나 말고도 `팬'들이 많았다.
그녀 앞에서 스케이트 보드 묘기를 보여주려다가 넘어지는 친구들
은 왜 그리도 많았는지.
지나치게 소심했던 나는 그냥 좋아한단 말 한마디 못해보고 고3이
됐고 결국 짝사랑으로 끝났다.
멋진 얘기가 나올 걸로 기대했던 분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이게
전부다. 그 시절 나는 자신감이라곤 전혀 없는, 내성적인 소년이었
다.
큰 키도 아닌데다 공부를 잘 하는 것도, 부잣집 아들도 아니었던
나. 그리고 당시엔 나의 매력 포인트인 긴 머리도 없었다는 점
(고교생의 머리는 내가 고2때이던 82년 간신히 박박머리에서 벗어났
고 83년 교복이 사라졌다)을 생각해주기 바란다.
집안은 초등학교 5학년때, 아버님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급속히 기울
었다. 등록금 낼 때면 항상 마감을 넘겨 종례시간에 이름이 불리는
게 싫어 학교에 가지 않으려 할 정도가 됐다.
자연히 공부에도 관심이 없어졌고 그저 음악 속으로 빠져들었다.
중2때였던 79년 어느날. 라디오에서 레드 제플린의 `더 송 리메인스
더 세임'을 들었다. 이것이 아마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한때 전자기타를 연주하기도 했던 넷째형을 비롯해 형들은 모두 음
악에 심취해 있었고 비록 백판(불법복제 LP)이지만 음반도 제법 있
었다.
CCR, 아바의 음악을 듣던 내게 레드 제플린은 망치로 맞은 듯한 충
격을 줬다.
당시 아현동에서는 일반 레코드 가게에서도 백판을 팔았다.
나는 동네 가게를 뒤져 레드 제플린의 전 음반을, 이어 딥 퍼플의
전 음반을 구했다. 그날 이후로 내 인생은 변했다.
노래라면 유치원때부터 한가닥 하는 실력. 비슷한 세대라면 다 알겠
지만 작은별 가족의 막내 강인봉이 녹음한 만화영화 주제가 앨범은
나의 18번이었다.
레드 제플린에 심취한 뒤로는 밤낮 노래를 흥얼거려
주위에선 "로버트 플랜트(레드 제플린의 보컬리스트)를 똑같이 따라
하는 녀석이 있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입시에는 실패해 재수생이 됐지만
나는 드디어 머리를 기르고 앵클 부츠를 신을 수 있게 됐다는 생각
에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로버트 플랜트의 차림을 흉내내는 것만으로 행복할수 있을 정도로
그는 나의 우상이었다.
85년, 서대문의 서울학원에서 재수하던 기간에는 학원 근처 음악다
방(DJ가 있는 다방)을 근거지로 음악에 관심있는 친구들이 상당수
모여들었다.
그중 강종수(시나위 1집의 드러머)가 있었다.
그해 겨울, 학력고사를 치른 뒤 1년 아래인 종수가 "신대철이 형을
만나보고 싶어한다"고 얘기를 해줬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 록을 한다면 당연히 고개를 숙여야 할 신중현님의 2세.
젖먹이때부터 기타를 만졌다는 신대철은
이미 고교시절부터 학교 밴드에서 활동해 "아버지보다 낫다더라"는
소문이 짜하게 나 있었다.
그가 고교 졸업과 함께 시나위라는 팀을 만들어 보컬을 구하고 있었
는데 내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종수와 함께 방배동 신대철의 집으로 가는 나는 마냥 들떠 있었다.
집 안에 들어가 나는 또 한번 놀랐다. 집 안에 연습실이 있었던 것이
다. 방음설비가 된 방 안에 악기와 간단한 음향설비가 돼 있었다.
또 벽에 걸린 기타들, 집안 책꽂이마다 가득 꽂힌 음반과 악보들을
보며 나는 별세계에 온듯한 느낌이었다.
여기서 아버님(신중현)을 처음 뵙고 인사를 드리면서도 가슴이 콩닥
콩닥 뛰었다. 인자해 보이는 아버님과는 달리 대철에게선 냉정함과
카리스마가 풍겼다.
당시 대철은 희고 예쁘장한 얼굴로 여학생들에게도 엄청난 인기였
다.
바짝 긴장해 오디션에 나선 나는 레드 제플린의 `록 앤 롤'과 `블랙
독'을 불렀다. 그리 잘 불렀던 것 같지는 않다.
제대로 음악교육을 받은 적은 한번도 없었고, 자신있는 거라곤 쇳소
리 나는 고음뿐이었다. 중저음은 전혀 낼줄 몰랐다.
그러나 대철은 잠시 다른 멤버들과 의견을 나누더니 OK를 냈다.
1월초 무대에 서야 하니 그동안 열심히 연습하자는 말과 함께. 다음
달이라지만 며칠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공연까지 나날은 꿈처럼 흘러갔다.
방배동 아버님 댁은 내겐 천국같았고 이런 환경에서 자란 대철과 윤
철 석철 형제가 너무 부러웠다.
방음장치도 시원치 않은 집에서 밤낮 시커먼 녀석들이 들락거리며
퉁탕거리니 그리 조용하진 않았을게다.
그러나 동네 주민들의 항의는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신중현'이
란 이름 석자 때문에 주민들이 봐주지 않았나 싶다.
85년초. 드디어 시나위의 첫 공연 날이 왔다.
무대는 아버님이 이태원에 열고 있었던 `라이브'라는 카페. 공연장
은 지금도 부족했지만 그때는 정말 귀했다. 첫 무대의 감격은 지금
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무엇보다 좋아하던 노래를, `우리' 팀이 연주하고 내가 거기 맞
춰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거기에 환호하는 청중들이 있다. 그날 죽
었어도 여한이 없었을 터였다.
오디션때 불렀던 레드 제플린의 노래, AC/DC의 `훌 로타 로제', 오
지 오스본의 `아이 돈 노' 등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을 부르며 나는
평생 느껴보지 못한 황홀감에 빠졌다.
그러나 몇분 사이에 이 천국은 그대로 지옥으로 바뀌고 만다.
공연을 마친 직후, 대철은 딱 잘라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하곤 안되겠다"는 거였다. 해고 통보.
너무 기가 막혀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집에 어떻게 돌아갔는지도 기
억이 나질 않는다.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아무리 생각해도 길은 하나였다.
두고 보자. 자기가 신대철이면 다냐. 제발 같이 해달라고 조를 정도
로 훌륭한 보컬이 되고 말겠다는 오기가 불끈 솟았다.
공부에는 별 뜻이 없었지만 대유공전 기계공학과에도 합격했다.
학교에 가니 `보컬반 모집'이란 공고가 붙어 있었다.
원래는 대학가에 흔히 있는 통기타 서클이었지만 내가 8기로 들어
간 뒤로 분위기가 록 뮤직 서클로 바뀌었다.
1년 위인 7기 선배들에겐
시나위라는 제법 알려진 그룹의 보컬(비록 공연 1번만에 잘렸지만)
출신인 나의 등장이 상당히 흥분되는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곧 록그룹이 짜여졌다.
팀 이름은 `나무꾼'이란 뜻의 로거스(Loggers). 시나위에 대한 복수
심으로 나는 연습에 열을 올렸다.
명창들은 폭포 밑에서 소리를 다듬듯 나는 마포대교 밑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그해 5월, 온갖 언더그라운드 록그룹들이 참가하는 `그룹사운드 페
스티벌'이 열렸다. 당시 실력을 인정받던 그룹은 시나위 외에 재미
교포 출신 무당, 지금도 건재한 주상균의 블랙홀 등이 있었다.
우리 팀도 그룹으로 인정받으려면 거기 끼어야 했다.
비교적 `알려진 인물'인 내가 "오프닝이라도 좋으니 한번만 하게 해
달라"고 사정해 간신히 참가 승낙을 받았다.
당일 세종문화회관 별관(현 서울 시의회)은 참가자인 우리까지도 놀
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10여팀 중 무당과 시나위, 디 엔드가 다른 그룹들을 압도했다.
`강북의 자존심'이라고 불리던 디 엔드는
당대의 기타 천재중 하나인 김태원과 이지웅의 트윈 기타에 이태윤
의 베이스가 탄탄했고 뛰어난 보컬은 없지만 멤버 전원의 하모니가
인상적이었다.
참고로 말하면 이때까지 자작곡을 연주한 팀은 아무도 없었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유명 그룹의 곡들을 카피하는 수준이었는데도
팬들의 성원은 엄청났다. 감춰져 있던 젊은이들의 욕구가 이토록 뜨
거울 줄은 아무도 몰랐다.
내게 놀랄 일은 공연이 끝난 뒤 일어났다.
디 엔드의 매니저라는 백강기씨(가수 민해경의 오빠)가 내게 함께
활동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제의해온 것이다.
언더그라운드 그룹에 매니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랄 일이었다.
물론 나로선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실력은 별로였지만 로거스 멤버들과는 "앨범을 낼때까지 열심
히 해보자"며 서로 격려했었다. 내가 빠지면 그룹이 깨질 것은 불보
듯 뻔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팀에서 음악을 해보고 싶다는 욕심은 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태원형과 함께 하기로 했고 5인조가 된 `디 엔
드'는 이름을 `부활'로 바꿨다. 이것이 부활의 탄생이었다.
부활이란 이름에 팬들은 곧바로 이승철을 연상하지만 부활은 그의
합류 1년 전부터 라이브 무대에서 잘 알려진 그룹이었다.
우리는 연말까지 세종문화회관 별관, 남산 숭의음악당 등에서 30여
회 공연을 펼치며 팬들을 끌고 다녔다.
신문에까지 록그룹 라이브 신드롬을 다룬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자작곡 하나 없었고 방송출연은 꿈도 꿀수 없었지만 부러운게 없었
다.
당시 `제도권'에서 활동하던 록그룹이래야 배철수 형이 이끌던 송골
매 정도. 그러나 그해부터 쑥쑥 자라나기 시작한 언더그라운드 그룹
들의 `한국 헤비메탈의 1세대'란 자부심은 엄청났다.
딱히 선배라고 부를 대상들이 없어 기고만장해 있던 시절.
물론 다른 쪽에는 포크에 기반을 둔 신촌블루스, 김현식, 그리고 들
국화 같은 선배들이 있었지만 우리같은 헤비메탈 계열과는 별 교류
가 없었다.
아버님(신중현)이 활동하던 70년대부터 약 10년간은 대마초 파동과
장발 단속 등으로 헤비메탈이 도저히 발붙일 수 없었다.
그 어두운 시절을 살아남은 록 기타리스트래야 최이철 이중산 선배
정도였다. 최이철 선배는 그룹 사랑과 평화의 기타리스트로 잘 알려
져 있지만 이중산 선배는 록을 하는 후배들 사이에도 `기인' 정도로
만 알려져 있다. 바람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는데 아무도 어디
서 연습을 하는지, 생계는 어떻게 이어가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기타 실력만큼은 누구나 인정했다. 나중 얘기지만 고교생이
던 서태지를 발굴해낸 사람이 바로 이 기인 이중산이었다.
85년 겨울 록 전문 공연장인 이태원 록월드가 생겼고 팬들은 여전
히 객석을 가득 메웠다. 이때부터 간혹 자작곡을 연주하는 밴드들
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때부터 부활은 인기와 함께 내분에 시달렸다.
두 기둥인 김태원과 이태윤 사이에 갈등이 심각해졌고 나도 팀을 유
지하는데 미련이 없어져 팀을 떠났다. 마침 신대철로부터 "음반을
만들어 보자"는 제의가 왔다.
원한(?)은 잊은지가 오래였지만 이때는 나도 내가 중심이 되어 그룹
을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이 있어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한국의 디오(블랙 사바스 출신 록 보컬 로니 제임스 디
오)'란 별명이 붙은 임재범 형이 등장했다.
로버트 플랜트를 동경해온 나는 내 고음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
문에
처음엔 "뭐야, 목소리도 안 올라가고…"라며 무시했지만
그 낮고 힘있는 목소리가 청중들을 장악하는 매력이 있다는 것을 인
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신대철은 내가 망설이는 사이 임재범과 손을 잡았고
김태원도 이승철을 영입하며 팀을 정비해 시나위와 부활은 모두 나
를 빼놓고 첫 앨범 제작에 들어갔다.
자료제공 : 락타운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