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 (몬 1:1-25)
가족은 소위 '사회적 동물'인 사람이 나누게 되는 여러 종류의 관계들 중에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제일 가까운 관계입니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 지속되는 관계이며, 무엇보다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대로 아주 끈끈한 혈연으로 맺어진 인간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는 친 가족이 아니면서도 가족처럼 여겨지는 관계, 혹은 아예 가족보다 오히려 더 친밀하게 지내는 관계가 생기기도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만, 애완동물을 어느 때부터인가 '반려동물'이라고 부르면서 그야말로 자기 인생의 반려자처럼 여기는 것이라든지, 영화에 나오듯이 마피아끼리 서로 '패밀리'라고 부르면서 의리를 다지는 것 등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정말 자기 부모나 형제자매나 배우자나 자녀보다 더 사랑하는 '가족 같은 사람'이 생기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 표현을 쓰는 대부분의 경우는 그만큼 친밀한 관계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가족'이라는 말을 그런 과장법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용하는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형제자매가 된 기독신자들인데, 바로 오늘 본문에서 그처럼 진정 육신의 가족보다 더 가까운 영적 가족이 된 성도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가정의 달'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이 이 경향 공동체를 중심으로 나누고 있는 영적 관계가 과연 왜 실제로 육신의 가족보다 더 가깝고 친밀한 사이가 되는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기독신자는 '같은 하나님의 집에 속한 가족'입니다.
1절부터 3절의 말씀에 "1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2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3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서두에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이라고 발신인을 소개하고 있는 것은 이 빌레몬서 역시 사도 바울이 로마에 제1차로 투옥되었을 때에 썼던 '옥중서신'의 하나임을 보여 줍니다.
그때에 바울은 감옥이 아니라 어떤 집에 연금 상태로 있었으며 그 안에서는 방문자를 만나는 것이 자유로웠는데, 그런 가운데 그는 나중에 10절 이하에 나오는 "오네시모"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오네시모는 주인에게서 도망친 종이었는데 바울의 전도를 받고 아주 신실한 기독신자가 되었으며 그 후에 바울의 옥살이를 돕는 "심복"(12절)이 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오네시모를 자기 곁에 "머물러 두어" 자신의 사역을 위해 "섬기게 하는"(13절) 동역자로 삼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은 당시 로마법에 도망친 종이나 노예는 체포되는 즉시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일단 자기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그에게 보내는 편지 즉 '빌레몬서'를 오네시모의 손을 통해 전해 주었습니다.
그 내용은 바로 오네시모가 저지른 잘못을 용서하고 이제부터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16절)로 영접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즉 이전에 자신의 종이었던 사람, 그것도 몰래 도망쳐 버렸던 종을 아무 조건도 없이 해방시켜 줄 뿐 아니라, 한술 더 떠서 이제는 자기와 동등한 형제처럼, 자기가 사랑하는 가족의 한 사람처럼 받아들이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사회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말도 안 될 무리한 요구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어떻게 그런 요청을 할 수 있었습니까?
왜냐하면 빌레몬은 이미 바울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빌레몬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고 있을 때 전도를 받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후 빌레몬은 신실한 기독신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사도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동역자'까지 되었는데, 바로 본문 2절에서 "네 집에 있는 교회"라고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골로새교회'를 통해서였습니다.
즉 빌레몬은 자기 집을 골로새교회 성도들의 예배처소로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며 아마 그 교회의 지도자급에 있었던 인물임이 분명합니다.
본문에 빌레몬과 함께 수신자로 언급되고 있는 "압비아"는 아마 빌레몬의 아내였을 것으로,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아킵보"는 그의 아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측이 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각각 "자매"요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교회를 통하여 같이 '예수 안에서의 형제자매'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군사'처럼 가까운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과도 그처럼 교회를 통해 피차 지극히 '사랑하는 동역자'로서의 관계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오네시모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신앙인이 되었으니 똑같이 '사랑 받는 형제'로 받아 주어야 한다고 부탁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가족이란 '한집'에 거하는 관계입니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같이 살지 않으면 점점 더 소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부부지간이라 해도 별거하게 되는 순간부터 이미 남남이나 마찬가지이고, 자녀 역시 출가하게 되면 '한 지붕 밑에서 살던' 때와는 아무래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실로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내 집뿐이라"라는 유명한 노래 가사처럼, '가족'(family)이란 '집'(home)이라는 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신자들 역시 '한 집'에 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가족'이 됩니다.
그 집이란 바로 '하나님의 집' 곧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 '같은 하늘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으며, 말세에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과는 달리 더욱 '모이기를 힘쓰며 신앙생활의 고락을 같이 나누는' 그리스도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성도의 이름에는 '어느 교회의 교인'이라는 수식어가 반드시 붙어 다니기 마련입니다.
마치 세상 사회에서도 '어느 가문의 자손' 혹은 '어느 집안의 자녀'라고 하듯이, 저는 그냥 '목사'가 아니라 반드시 '경향교회의 목사'로, 여러분은 그냥 '성도'가 아니라 반드시 '경향교회의 성도'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야말로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한 '개인 신자'에게 있어서 새로운 '집'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베드로처럼 확실한 신앙고백을 한 개인 신자들을 모아서 당신의 교회 공동체 안에 살도록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우리 모두를 영원한 '하늘나라의 집'으로 영접해 주시는 그날까지 이 세상에서도 '교회'를 통하여 그 '천국권속'끼리 나누는 사랑의 교제를 미리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독신자는 '같은 예수 보혈을 나눈 혈연'입니다.
4절부터 7절에 기록하기를 "4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5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6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7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을 생각하며 기도드릴 때마다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 대한 소식만 듣고도 자신의 옥살이 중에도 "평안함을 얻고"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골로새교회'를 위하여 자기 집을 제공할 정도로 충성스러웠을 뿐 아니라,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칭찬이 자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성도'가 나오고 이어서 '사랑'과 '믿음'이 나오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주 예수에 대한 믿음', 그리고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 이렇게 연결하는 것이 가장 간단명료하며 또한 교리적으로도 잘 들어맞기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번역해 둔 성경들도 많이 있습니다.
만약 이 부분의 헬라어 원어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으로 시작해서 그 다음에 '네 믿음과 사랑'이라고 되어 있다면, 당연히 먼저 나오는 단어들과 나중 나오는 단어들을 각각 짝지어서 그렇게 번역하는 데에 아무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원문의 어순은 바로 우리 개역한글성경에 번역되어 있는 순서 그대로이기 때문에, 굳이 '예수에 대한 믿음'과 '성도에 대한 사랑'이라고 짝을 맞추려는 것은 억지가 되는 감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그냥 있는 그대로, 즉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 이 양자를 같이 묶어 놓고 그 다음의 '사랑과 믿음' 역시 같이 묶어서 앞에 나온 양자에 연결시키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즉 빌레몬은 예수님께 대해서도 '사랑과 믿음'을 동시에 발휘했고 주변의 성도들에 대해서도 바로 그 '사랑과 믿음'을 함께 나타내었다고 해석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교리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으며 무엇보다도 문맥에 더 잘 들어맞는 번역이 됩니다.
이 사실은 참된 신자라면 반드시 체험하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은 그 예수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자연히 동반되는 것이며, 성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먼저 참된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결국 믿음과 사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며, 예수 신앙과 성도 사랑 역시 마찬가지로 불가분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6절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한다"고 했는데, 여기서도 우선 "믿음의 교제"라는 표현을 통해서 '예수 신앙'과 '성도 교제'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참된 성도의 교제를 하는 가운데 신자로서의 '선한 생활' 역시 완성되어 가고, 그 모든 것의 목표는 '그리스도께 미치는' 즉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닮는 '영화'의 단계 혹은 그리스도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최고의 선'에 이르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5절과 6절을 합치면, 참된 신앙이 참된 사랑을 나타내게 만들고, 그렇게 참된 성도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결국에는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로 도달하게 만드는 것이니, 이 두 절은 온통 '예수 신앙'과 '성도 사랑'의 일치로 가득 차 있는 셈입니다.
우리 기독신자들이 육신의 가족보다 더 진한 사랑으로써 서로 교제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예수 신앙'이 자신의 심령에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우리 속에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믿음이 생기게 된 이유는 바로 그 예수님께서 날 위해 대신 흘려주신 '십자가 보혈'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벧전 1:2)가 됨으로써 새로운 '피의 관계' 즉 혈연이 된 것입니다.
가족이 세상의 다른 관계보다 훨씬 더 각별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한 피를 나눈'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부모와 자녀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해도 부모에게 있어서 자녀는 곧 자신의 '피붙이'이며 자녀에게 있어서 부모는 '피를 물려 준 어버이'임에는 변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그런 혈연의 피보다 훨씬 더 진한 피로 함께 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그것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의 피가 아니라 영원히 살게 해 주시는 '영생의 피'이니, 자연히 성도는 육신의 가족보다 더 가까운 영의 가족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을 하지만, 실상 그 피보다 훨씬 더 진한 것이 바로 '십자가 보혈'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는 죄로 인하여 오염되어 결국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육신의 피 대신에 이처럼 예수님께서 지극한 사랑으로써 대신 흘려주신 십자가의 피를 똑같이 수혈을 받게 되었음을 '믿음'으로써 그처럼 '한 피 받아 한 몸'을 이룬 영적 혈연 사이의 '사랑'도 뜨겁게 나누는 지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기독신자는 '같은 성경 말씀을 먹는 식구'입니다.
8절 이하 21절에 "8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9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13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15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16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19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20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21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자기가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즉 연금 상태에서 전도하여 '해산신자'로 만든 "오네시모"를 용서해 주고 해방시켜서 이제 자유롭게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에게 이미 '아들' 같은 사람이 되었으니 빌레몬 역시 그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로 영접해야 마땅하다는 말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연유에서 사도 바울은 8절에서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라고 했습니다.
즉 지금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에 대하여 빌레몬에게 부탁하는 일은 참된 기독신자라면 "마땅한 일" 즉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부탁조로 말하지 않고 '네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라고 담대하게 명령할 수도 있는 문제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렇게 명령조로 말하는 대신에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네게 간구하노라"고 아주 간절히 부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바울은 만약 오네시모가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고까지 했습니다.
즉 오네시모가 도망을 치면서 빌레몬의 돈까지 훔친 것이 있다든지, 그렇지 않더라도 그로 인하여 빌레몬이 무슨 경제적 손실을 본 것이 있으면 자기가 대신 다 갚아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이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고 덧붙인 이유는, 빌레몬도 바울을 통해 전도를 받고 구원을 얻음으로써 본인 역시 '복음에 빚진 자'가 되어 있음을 상기시켜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왜 바울은 사도로서 빌레몬에게 마땅히 '명령'할 수 있는 문제를 이렇게 '간구'로 대신하고 있었습니까?
아마 빌레몬은 사도 바울이 명령으로 해도 그 말을 순종했을 것이지만, 이렇게 부탁하는 말을 순종하는 편이 이 문제를 훨씬 더 은혜롭게 해결하는 길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냥 사도가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순종하는 것보다는 빌레몬 자신이 "자의로" 즉 자발적인 마음으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영접하는 편이 본인에게도 열 배, 백 배 더 나은 일이며 오네시모에게도 훨씬 더 감격스러운 일이며 또한 사도 바울에게도 훨씬 더 기쁜 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빌레몬이 자신의 이 요청에 결국 "순종"할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빌레몬은 사도의 가르침에 대하여 그야말로 '하나를 들으면 열을 할 줄 아는' 순종의 자세를 평소부터 늘 보여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미 참된 구원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바로 그 말씀을 계속 순종함으로써 신실한 사명인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로부터 그처럼 '사랑을 받는 자'로서 '동역자'의 교제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가족은 '한솥밥을 먹는' 관계이기도 합니다.
가족을 '식구(食口)'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입 구멍으로 같은 밥'이 들어가는 '식솔'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각박한 현대사회에서는 바로 이 '같이 밥을 먹는' 가족의 가장 기본적인 일상마저 상실함으로써 가족 간의 유대관계도 절로 약해지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기독신자 역시 식생활을 함께 나누는 가족입니다.
하지만 그 상에 차려지는 것은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바로 영의 양식인 성경 말씀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말씀의 상' 자체가 제대로 차려지지 않는 지상교회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바로 애당초 '성경중심'으로 세워져 있지 않는 교회들입니다.
또한 교인들 스스로도 말씀을 통해 '꿀보다 더 단 맛'을 느낄 줄 모르는 경우도 상당히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마치 어릴 때부터 간식에만 익숙해져서 결국 건강을 망치는 사람처럼, 처음부터 '구원의 복음에 빚진 자'로서 신앙생활이 시작되지 않고 그저 '소원 성취'나 '인생 평안' 따위를 목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결국 시험에 아주 취약한, 환난 앞에 간단히 파선하고 마는 '약골 교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독신자는 바로 '교회'라는 집을 통해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시는' 영적 식사를 늘 함께 나누는 식구입니다.
식당에서도 밥을 먹을 수는 있지만 '집 밥'이 제일 건강에 좋은 것처럼 성도는 자기 교회의 강단에서 매주일, 매일 선포되는 말씀을 잘 먹어야 건강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요즘 군대에서 제공되는 식단을 보면 옛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다양하고 맛있는 것들이 나오지만 정작 그것을 먹는 군인들은 역시 '어머니의 손맛'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듯이 성도는 '별식'보다는 자기 교회 목사의 설교에 항상 은혜를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는 '권면'이나 '위로'로써, 때로는 '명령'이나 '책망'으로써 다양하게 주어지지만 참된 성도는 그 어떤 말씀이라도 편식하지 않고 똑같이 '순종'으로 받아먹게 되어 있음을 명심하면서, 이 경향초장을 통해 늘 '말씀의 꼴'을 함께 먹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비록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라는 표현은 쓰지만 실제로 타인을 자기 부모나 자식이나 형제자매보다 더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비윤리적'이라는 지탄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인간사회에서만 본다면 혈육보다 더 가까운 관계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에게는 진짜로 '육신의 가족'보다 더 가까운 가족이 정말로 있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선포하신 '영적 가족'입니다.
이 말씀은 결코 육신적인 혈연을 무시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맺게 되는 천국권속의 관계는 인간사회에서 가장 가까운 육신적 가족과는 아예 차원부터가 다른 것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종'과 '주인'의 관계란 원래는 인간관계들 중에서도 가장 먼 관계가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도망친 종'과 '그 종을 잡으려는 주인'은 피차 상대방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원한이 맺힌 사이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예수 안에서의 새 가족'은 그런 원수관계까지도 서로 '사랑하는 형제관계'로 바꾸어 버리고 맙니다.
그 결과 주인이 종을 자기 '동무'처럼 대해 줄 뿐 아니라 마치 '사도를 영접하듯이' 극진한 사랑을 베풀어 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회사에서도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일제 때 전라북도 금산에서 테이트(Tate)라는 선교사가 그 지역의 최고 부자였던 조덕삼이라는 사람을 전도함으로써 바로 그의 집 사랑채에서 금산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조덕삼에게는 경상남도 남해에서 태어나 어릴 때 부모를 잃고 난 후에 우연히 조덕삼의 집에서 마부로 일하게 된 이자익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도 주인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금산교회가 성장하여 교인이 백 명 정도 되었을 때에 장로 한 명을 세우게 되었는데 거기에 조덕삼과 이자익이 나란히 후보로 올라오게 되었고 개표 결과 놀랍게도 이자익이 피택되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종'이었던 사람이 자기 '주인'을 제치고 금산교회의 첫 장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일은 조덕삼이 그 공회의 결정을 하나님의 뜻으로 겸손히 받아들이면서 이자익을 교회의 장로로 극진히 존중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조덕삼도 역시 금산교회의 두 번째 장로가 되었지만 그는 이자익을 계속 선임 장로로 잘 받들었을 뿐 아니라 그를 평양신학교에 보내어 공부를 시켜 목사가 되게 했고, 그 결과 이자익 목사는 금산교회의 2대 담임목사가 되었으며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세 번씩이나 역임한 인물까지 되었습니다.
'양반'과 '상놈'의 차별이 여전히 극심하던 시절이었지만 예수 안에서 새 가족이 된 성도 사이에서는 그처럼 '주인'이 자신의 '종'이었던 사람을 '사도를 대접하는 것'과 똑같이 받들어 모시는 놀라운 일이 정말로 벌어졌던 것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바로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형제요 자매요 모친' 같은 가족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경향교회의 권속'이 된 '한집안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 보혈'이라는 한 피를 나눈 '영적 혈통'입니다.
우리 경향 가족은 매일 '성경 말씀의 상'에 둘러앉아서 영생의 양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천국 식구'인 것입니다.
세상의 가족이 인생에 활기를 더해 주고 하루의 고된 일과 후에 안식을 주는 작은 낙원이 되듯이, 오직 진정한 예수 가족 사이에서만 나눌 수 있는 참된 '기쁨'과 '평안'을 바로 이 경향공동체를 통해서 평생토록 함께 나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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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