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켜/김희자
공원 벤치에 앉아 이슥한 가을에 취해 있다. 나뭇잎들이 마지막 혼을 태운다. 버려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아는 순간 나무는 가장 눈부시게 물이 든다. 잎을 어루만지며 지나가는 바람의 옷자락에 깊은 가을이 배어 있다.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던 울긋불긋한 나뭇잎이 하나 둘 셋 조막손을 놓는다. 방하착(放下着). 제 몸의 전부였던 것을 내려놓으며 나무는 생의 절정에 달한다. 가을이 되면 나무는 새로운 계절을 만날 채비를 한다. 앞날 위해 본성을 비우는 초연한 나무들은 여름 내내 키워온 이파리를 떠나보낸다. 나무가 잎을 떨어뜨리는 것은 겨울나기를 위한 기지(機智)이다. 낙엽이 질 무렵이면 잎 꼭지가 붙은 가지에 떨켜가 생긴다. 이 특이한 세포층은 잎의 양분을 줄이고 수분이 통하지 못하게 하여 잎을 지게 만든다. 잎이 떨어지고 나면 그 자리를 보호하여 또 다른 잉태를 꿈꾼다. 떨켜로 인해 잎이 저무는 것은 사람의 은퇴나 완경(完經)과도 다를 바 없다. 새로운 계절을 준비하며 기꺼이 자신을 포기하는 나무를 보니 완경에 이른 언니가 쪽빛 하늘에 떠오른다. 나보다 세 살을 더 먹은 언니는 지난봄부터 폐경기에 들었다. 여자들은 생리가 오락가락하는 오십 세 전후에 갱년기 장애를 겪는다. 갱년기는 난소에서 더 이상 배란시킬 난자가 없어져 생기는 증후다. 가임기에 있던 여인이 폐경에 이르렀으니 몸의 변화를 받아들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고초를 겪는 언니를 위해 주말마다 B도시로 가는 열차에 올라탔다. 몸에 변화가 생기니 자연 감정에도 변화가 오는 것 같았다. 언니는 평소 빈혈로 고생을 하던 터라 갱년기 증세에 유독 민감했다. 기분이 만만하게 좌우되고 몸이 화끈거리며 땀이 난다고 이불을 걷어찼다. 두통이 일고 우울증으로 기운이 딸려 눕기만을 자청했다. 늘어지는 언니를 위해 영양주사를 놓아주고 속절없이 슬픈 마음도 달래주었다. 증세가 지속되던 육 개월 동안장애를 겪었다. 그 누구도 언니의 고통을 해결해줄 수 없었지만 피붙이들의 다정한 위문이 갱년기를 받아들이게 했다. 영양보충도 요긴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의지로서 자연스런 변화를 시인하며 방하착(放下着)을 해야 했다. 갱년기(更年期)에서 '更'은 '다시' 이외에도 '바뀌다, 새로워지다, 고치다'의 뜻을 지녔다. 어쩌면 갱년기는 하늘의 뜻을 헤아리는 나이가 되었으니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받아들이라는 지침서 같은지도 모른다. 지천명이 되면 인생의 이치를 바로 알고 또 다른 내일을 위한 준비 또한 필요함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희끗희끗 머리털이 세는 반백에 이르면 투정부리던 푸른 객기도 어르고 달래며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나무처럼 자연의 순리에 따라야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나무가 떨켜를 만들지 않고 버틴다면 단풍은 얼어 죽을 수밖에 없다. 사람 역시 매한가지다. 생에 대한 충분한 준비 없이 무조건 붙들고 있으면 추해 보인다. 내려야 할 때 내려놓지 않으면 오히려 쓰라리다는 것을 언니는 호되게 경험했다. 떨켜가 나무와 나뭇잎을 보호하듯 사람도 몸의 변화를 받아들이며 나이 들어야 병을 얻지 않는다. 쉽게 내려놓는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떨켜를 보며 한번쯤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는 나무. 그래서 단풍은 곱다. 낙엽은 스스로 버림으로써 얻는 나무들의 생존 전술이다. 사람은 살아가기 위한 양분을 식물이나 다른 동물에게서 얻고 필요 없는 것은 몸 밖으로 배설한다. 반면 나무는 자신이 살기 위해 필요한 양분을 만드는 부분이 노화하면 몸 자체를 버린다. 낙엽이나 마른 가지는 식물의 배설 작용으로 버려지는 것과 진배없다. 나뭇잎을 떨어뜨리기에 앞서 잎에 있는 양분의 반을 줄기로 이동시켜 잎이 지게 만드는 것이 떨켜이다. 저무는 잎은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것이 아니다. 우수수 지는 낙엽에도 우리네 인생처럼 준비된 지혜가 있다. 낙엽 지는 순서는 숲의 가장자리나 높이, 바람의 세기에 따라 다르지만 가장 먼저 돋아난 잎이 가장 늦게까지 붙어 있고 제일 늦게 돋아난 나뭇잎이 제일 먼저 떨어진다. 줄기의 안쪽부터 낙엽이 지기 시작하여 꼭대기의 잎이 마지막까지 남았다가 떨어진다. 낙엽은 그렇게 빛나는 임종을 마치며 다음생의 거름으로 돌아간다. 잎이 진 잎자루에는 떨껴가 생기고 아프지만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며 빈 가지로 남는다. 이처럼 가을은 나무들이 마지막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새 삶을 위해 정리하는 계절이다. 사람들은 떨켜 없는 나무를 자아가 강해서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으로 비유한다. 떨켜가 없는 밤나무나 참나무의 나뭇잎은 갈색으로 변해 끝까지 나무에 붙어 있다. 그러다 늦가을의 찬바람에 하나, 들씩 지고 만다. 떨켜를 만들지 않고 악착같이 버티다 떨어지는 모습은 초라하고 추하다. 떨켜가 있어야 가지와 잎을 보호하고 내일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오십 고개를 코앞에 둔 나도 머지않아 언니처럼 폐경에 이를 것이다. 나무가 떨켜를 만들어 자기를 보호하듯 나 또한 그렇게 나이 들고 싶다. 누구나 인생의 가을은 찾아들기 마련이다. 화려하고 울울창창한 여름날에 대한 미련은 누구나 갖지 않을까. 갱년기를 겪는 언니를 보며 느낀 바가 많다. 훗날 내게도 찾아들 완경을 넓은 가슴으로 자연스레 들이고 싶다. 온전하게 비울 때 마음은 자유로워진다. 일몰 무렵 소멸을 꿈꾸는 노을에 나를 내맡기며 비우는 연습을 하고 싶다. 바람 한 점 지나가자 잎들이 앞 다투어 낙하를 한다. 가을 끝자락에서 이제 남은 것은 나무들이 겨울을 잘 견뎌내는 일이다. 겨울을 나고 봄이 되면 나무가 새싹을 틔워 새로운 삶을 시작하듯 언니 또한 새롭게 주어지는 몸의 변화와 환경에 적응하리라 믿는다. 나도 이 가을 끝에서 아집과 번뇌, 세상에 대한 미움과 원망 같은 잎들을 버리고 싶다. 용기와 결단이라는 떨켜를 만들어 부질없는 사랑과 욕망에 연연하지 않고 빈가지로 남고 싶다. 내 생각의 가지에 새로운 움이 돋을 따뜻한 봄날을 그리며 가을 벤치에서 일어선다.
<2013년 현대수필 봄호> |
* 『떨켜』 김희자
플롯이 문예창작의 본질적 방법인 것은 사실이다. 노현희의 「할머니 이야기」한 편을 통해서도 우리는 충분히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과연 아리스토텔레스는 문예창작론의 시조라 할 만하다. 그러나 현대(Contemporary) 문학에 들어오면 사정은 많이 달라진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대표적인 문학 양식은 시극이었다. 시극은 무대 위에서 완성되는 공연예술이다. 그러므로 '있었던 일'을 플롯작업을 통해서 '있을 법한 이야기'로 만들어 내는 과정 중에 남을 수 있는 문학적 이야기 만들기의 미숙한 분량을 무대 위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서 보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고 있는 시, 소설, 수필은 순전히 문장예술이다. 다행히 시, 소설, 희곡은 작품 밖에서부터 소재에 대한 허구화 작업을 시작하는 문학이므로 '있었던 이야기' 분량이 남을 여지가 없다. 그러나 수필은 그렇지 않다. 수필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극처럼 '있었던 일' 자체를 무대 위에 올려야 하는 독특한 문학양식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롯작업과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있었던 사실의 이야기'를 충분히 '있을법한 이야기'로 변화시킬 수 있었을 테지만 오늘날의 창작에세이 작가들에게는 플롯만 있지 무대 위 배우들의 연기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수로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아 시, 소설 같은 완전한 상상적 · 허구적 창작문학으로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대답을 직접 작품을 통해서 해 주고 있는 것이 김희자의「떨켜」이다.
인류가 발명한 문학예술의 양대 산맥은 운문(시)문학과 산문(서사)문학이다. 즉 시 문학과 서사문학이다. 운문 문학은 시문학이 처음부터 독차지해 버렸고. 서사문학은 소설이 완전 점령해 버렸다고 해고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늦게 출발한 창작에세이(수필)는 무엇을 가지고 '나도 창작문학이다'라고 외칠 수 있단 말인가? 시 창작 기본법은 창조적 언어(시어) 만들어내기에 있다고 할 수 있고, 소설 창작의 기본법은 허구적 이야기 만들어내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와 소설은 이 같은 일견 단순해 보이는 기본 작법을 가지고 그 얼마나 다양한 노래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그런데 에세이는 처음부터 창작문학도 아닌 있었던 일을 가지고 현실의 이야기를 하는 일반산문문학으로 출발한 문학이다. 다행히 문학이란 본성적으로 변화, 진화하는 속성을 가진 발명품인지라 에세이도 지난 5백 년간 끊임없이 창작문학 쪽으로 진화하여 온 결과가 오늘 우리 몫이 된 창작에세이인 것이다.
여기서 태산 같이 크고 큰 의문이 아니 일어날 수 없으니 도대체 창작에세이는 시의 시어 창조도 아니고, 소설의 허구적 이야기 만들기도 아닌 어떤 새로운 창작양식을 창안해 내었기에 당당하게 시, 소설에 맞서 '우리도 창작문학이다'라고 외칠 수 있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다름 아닌 이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 즉 시문학 양식과 서사문학 양식에서 뽑아 낸 문예창작법의 엑기스 같은 제3의 새로운 창작양식인 〈소재에 대한 비유 창작 + 창조적 구성법〉인 것이다.
이 작품의 소재는 폐경이다. 주제는 폐경의 의미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일반산문문학과 창작문학의 다른 점은 일반산문문학이 주제에 대한 새로운 해설이나 의미를 직접적인 지시어 문장법으로 진술하거나 설득하는 글쓰기라면 창작문학은 주제를 형상화하여 보여주는 방법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를 형상화해야 된다고 하니 주제를 대신 말해 줄 어떤 사물 · 존재 대상을 끌어와야 된다는 것이 작법의 한 가지로 등장하게 된다. 이 작품은 바로 제목으로 잡은「떨켜」를 폐경의 의미를 형상화해 보여줄 수 있는 표현(형상화)매체로 찾아내서 작품 속에 끌어들이고 있다.
떨켜가 폐경의 의미를 형상화해 줄 수 있게 된 까닭은 떨켜는 나무의 폐경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떨켜와 폐경 사이에 동질성 발견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창작에세이가 시 작법도 아니고, 소설 작법도 아닌 창작에세이만의 독자적인 제3의 작법을 창안해 내지 않으면 창작문학의 반열에 끼어들 수 없다는 절제절명의 문제 앞에서 발명해 낸 제3의 창작양식의 다름 아닌〈소재에 대한 비유(은유·상징)창작〉이었던 것이다.
소재에 대한 비유창작이 어떻게 제3의 창작양식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 이유는 첫째로 모든 예술창작은 본질적으로 비유적이라는 데에 있다. 그 중에 문예창작에서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은유창작은 두 이질적 대상 사이의 동질성 발견에 근거한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이고, 세 번째는 은유는 원관념이 보조관념 속으로 투시하여 들어가 존재론적인 변화를 일으킨다는 점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하면 마음이 호수가 되어버린다.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작법이 소재에 대한 비유 창작이라는 뜻은〈사실의 소재〉가 창작한 비유 속으로 투시되어 들어가 비유적 존재로 변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작품의 경우 현실의 폐경이 상상적이고 허구적인 떨켜로 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폐경에 대한 은유인 떨켜를 창작, 형상화하는 순간 사실의 소재가 창조적인 비유(은유 + 상징)적 존재 · 사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아무도 창작에세이(수필)라는 이름의 문학을 향해서 '그것은 여전히 사실의 이야기가 아니냐?'는 시비를 걸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는다는 에세이문학의 태생적 본질을 배반하는가? 아니다. 창작에세이는 여전히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 속으로 끌고 들어와서 그것을 작품의 제재로 삼아 거기서부터 창작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그렇다면 창작에세이는 플롯(구성)을 소홀히 해도 되는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플롯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학적 신앙대로 문예창작의 목적이며 영혼이라, 창작에세이가 제아무리 시적 언어 창작을 능가할 비유를 창작한다 할지라도 구성이 안 되어 있으면 반값도 못 받거나 폐기처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의 서두는 낙엽 지는 공원 벤치에 앉아 감상에 젖는 데서 시작된다. 전개 문단에 들어오면 폐경기를 맞은 언니 이야기가 전개된다, 후반부로 넘어오면 서두 문단에서 슬쩍 제시해 두었던(복선법) 떨켜 이야기에 방금 에서 서술한 언니의 폐경 이야기를 접목 시킨다. 종결문단으로 넘어오면 다시 서두 문단의 낙엽 지는 벤치에 앉아 감상에 젖어있는 수필화자 '나'로 돌아온다. 이것이 이 작품의 구성법이다.
그러면 이 같은 구성법을 우리는 어떤 종류의 구성법이라고 할 수 있나? 문학을 읽어온 독자라면 우리가 방금 위에서 살펴 본 구성법은 시작품에서는 별로 본 일이 없고, 혹 소설을 관심 있게 공부삼아 본 독자라면 액자구성과 비슷하지 않느냐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 작품의 구성법은 액자구성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낙엽 지는 벤치 이야기 → 폐경 이야기 → 낙엽 지는 벤치 이야기〉모양으로 되어 있는 문학적 장치로서의 액자는〈폐경 이야기〉를 작품이 되게 하는 액자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 생활 속의 액자는 그림을 돋보이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그러나 문예창작법의 액자구성법은 문학작품이 되게 하는 형식과 구조로서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앞서 일반산문문학은 지시어법의 문장을 통해서 작가 자신의 의견이나 사상을 진술, 설득하는 방식의 글쓰기이지만 창작문학은 주제를 형상화하여 보여주는 작법의 문학이라고 하였다. 주제를 형상화하기 위해서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 주제를 존재론적 대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사물 · 존재를 찾아내야 된다고 하였다. 이를 T.S. 엘리엇은 '객관적 상관물'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객관적 상관물 혹은 보조 관념 소재를 찾아 낸 다음 해야 할 일은 이것들을 어떻게 조합해서 작품이라는 하나의 존재론적 모양이 될 수 있게 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즉 구성법(플롯)의 문제인 것이다.
시는 운문적 구성법 (행과 연 구분 등)을 통해서 형상화 목적을 달성하고, 소설은 발단, 전개, 위기, 대단원이라는 기본적인 서사 구성법을 통해서 형상화 목적을 달성한다. 창작에세이도 그 같은 기본적인 플롯 법만으로도 「할머니 이야기」를 통해서 확인한 대로 작품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나도 창작문학이다'라고 외치기에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 한 대로 그렇게 해서 사건들을 창조적으로 배열하여 문학화 시켰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사실의 이야기가 아니냐'는 의심을 필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창작에세이만의 독자적인 기본 작법은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인가?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찰스 램 이후 이 땅의 수많은 창작문예수필 작가들의 외침이다. 김희자도 그 한 사람이다.
창작문예수필(창작에세이)의 기본 작법은〈소재에 대한 비유창작 + 구성법〉에 있다는 것이 찰스 램 이래 모든 창작에세이 작가들의 한결같은 작법 개발로 나타나고 있다.
*맺는 말
갑오경장(1894) 이래 우리 문학예술 전반은 고전문학적 방법을 버리고 서구문예 사조에 의한 새로운 창조적 예술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직 수필만이 스스로 여기에서 제외되어 제3의 길을 걸어왔다. 수필이 선택한 '붓 가는 대로'는 현대문학의 창작론이 아님은 물론 고전문학의 개념도 아니다. 그렇게 '붓 가는 대로 ' 1세기를 흘러온 결과가 '신변잡기'에 '수필도 문학이냐'는 사회적 조롱이다.
그러나 천만다행하게도 문학은 진화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몽테뉴의 에세이도 몽테뉴의 손을 떠나는 즉시 변화 · 진화되기 시작하여 찰스 램에 이르러서는 창작적인 에세이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찰스 램 이후 다시 2백여 년의 세월이 지나고 있는 오늘의 수필(에세이) 문학은 더 이상 몽테뉴의 (비창작)일반산문문학이 아닌 시, 소설, 희곡에 이은 제3의 창작문학 양식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기본 작법이 본고에서 실제 작품을 통해서 확인 해 본〈소재에 대한 비유창작 + 창조적 구성법>이다.
출처 :수필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 김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