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은 베트남전쟁 종전 40년입니다. 그리고 한국군 전투병 파병 50년입니다. 지금까지 학자들과 언론인들은 베트남전쟁이 왜 발발했고,
어떻게 진행됐는가에 대해 천착해왔습니다. 많은 자료들이 발굴되고, 베트남전쟁 피해자들과 참전 군인들의 증언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는 있을 뿐, 가해자는 진실의 물음에 응답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베트남전쟁이 왜'라는 물음을 넘어서 한국사회는 "왜 민간인을 학살했는가", "어떻게 사죄해야 하는가"에 대해 늦었지만 답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평화를 만들어어야 합니다.
<통일뉴스>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함께 <나비기금>이 마련한 '베트남 나비평화기행'(2~9일)에 함께
합니다. 우리가 저지른 학살에 당사자가 사죄하고 해결에 나서기를 바라며 평화를 찾는 동행기를 마련했습니다.
▲ 낌따이촌 입구에 세워져 있는 '한국군 증오비'.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낌따이촌에서 학살된 이들이 묻힌 무덤에 나비평화기행 참가자들이 4일 향을 피우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떠이선현 떠이빈사 고자이마을. 맹호부대가 이 곳에서 학살을 하기 전까지 빈안(平安)사였다. 하지만 이후 떠이빈(西英)으로 이름을 바꿨다.
더 이상 편안할 수 없다는 반증이다.
한국군의 대표적인 민간인학살로 손꼽히는 빈안지역에서는 1966년 음력 1월 23일부터 2월 26일까지 15개 지역에서 총 1,004명이
학살됐다. 학살의 마지막 날에 고자이마을에서는 1시간만에 380명이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학살된 주민들이 묻힌 땅 위에 위령비가 세워졌다. 위령비에는 '이곳에서 1966년 2월 26일 남조선 괴뢰군이 미 제국주의의
지휘아래 무고한 주민 380명을 학살하다'라는 문구와 함께 피해자의 이름이 적혀있다. 그리고 '미 침략 적군에 대한 증오를 깊이 새긴다'라는
구호가 새겨졌다.
그리고 중앙에 있는 위령비 뒷편에는 맹호부대가 민간인을 학살하던 당시의 장면이 묘사된 모자이크 벽화가 있다.
학살당시 생존자인 런 아저씨의 눈에는 한국군이 쏜 총알이 빗발치고 수류탄의 파편으로 팔다리가 잘린 사람들의 모습이 여전히 또렷하다. 그리고
엄마와 여동생의 죽음도 목격해야 했다.
▲ 고자이마을 중앙 위령비.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고자이마을 학살 피해자들이 묻힌 무덤 위에 세워진 위령비. 참가자들이 분향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5일 나비기행 참가자들은 푸깟현 쯔엉탄 마을과 프억흥(福興)절을 찾았다. 한국군은 한 주민의 집 마당으로 마을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영문을
모른 채 주민들은 총을 맞고 수류탄에 이어 박격포의 공격을 받았다.
조그만 마을에 14가구 58명이 몰살됐다. 인적이 사라진 쯔엉탄마을, 가족들을 반겼을 한 주민의 집 마당은 거대한 무덤으로 변했다. 그리고
무덤 뒤 위령탑 옆에는 '참살'이라는 단어와 함께 '남한 병사들은 58명의 양민 주로 노인,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을 살해하였습니다'라고 한글로
적혀있다.
나비평화기행 참가자들이 쯔엉탄 위령비를 참배하는 도중 한 할머니가 들어왔다. "가족 8명을 여기서 잃었다. 한국군이 왔다. 모조리 쐈다.
수십 명이 죽었다. 우리가 무엇을 아는가. 여기 있으면 너무 힘들다"라고 나즈막히 말하고는 홀연히 자리를 떴다.
쯔엉탄마을을 내려다보는 할머니산이라는 뜻의 '누이바'의 품에서 태어난 틱 동 꾸아 스님은 4살에 출가해 참살, 뜻 그대로 비참하고 끔찍한
상황을 면했다. 스님은 참살된 고향주민들을 위해 프억흥절에서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매일 천도제를 지내고 있다.
▲ 쯔엉탄마을 위령비. 위령비 앞 푸른 잔디는 무덤이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쯔엉탄위령비에는 설명문구가 한글로 적혀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증오', '학살', '참살'. 혐오스럽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정도로 비난하게 만드는 가혹하게 마구 죽여 비참하고 끔찍한 일을 벌인 자는
누구인가. 세 지역에 있는 구조물은 '남조선 괴뢰군' '한국군', '남한 병사'를 지목한다. 바로 '맹호부대'이다.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고 당시 채명신 주월사령관이 말했다. 맹호부대원들은 사령관의 명령을 어긴
것인가. 아니면 채 사령관은 부하들의 행위를 감추려고 한 말인가.
진실은 단 하나다. 한국정부와 참전군인들은 민간인 학살행위가 없었다고 주장하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50년이 되도록 한국군을 증오하는
생존자와 목격자들이 있다. 생존자와 목격자들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한국군을 지목하고 50년 가까이 증오하고
있는가.
낌따이촌은 1966년 1월에 벌어진 학살로 "'따이한'이 온다"는 말에 지금도 울던 아이도 눈물을 그친다. 그리고 베트남전쟁 당시
남베트남군으로 미군을 도운 응우옌 꾸앙 안 할아버지는 위령비 재조성 공사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안 할아버지는 "베트콩이 쏜 총에 한국군 한 명이 전사했다. 한 명이 죽었다고 우리 마을 주민들을 무참하게 죽였다고 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끔찍하다"라고 말했다. 한국군 편에 섰던 할아버지가 한국군의 학살을 부인할 법한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한국군에 의해
학살된 주민들의 넋을 달래는 일에 팔을 걷어부치고 있다.
▲ 낌따이촌에서 위령비 재조성사업에 동참하고 있는 응우옌 꾸앙 안 할아버지.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쯔엉탄마을 출신인 틱 동 꾸아 스님은 프억흥절에서 매일 천도제를 지낸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한국인도 잘 찾지 않는 외진 곳에 위치한 쯔엉탄 민간인 참살 위령비는 다른 위령비와 달리 한글이 적혀있다. 쯔엉탄 위령비는 국제 공용어도
아닌 한글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가. 틱 동 꾸아 스님은 한국정부가 외면하는 58명의 피해자를 위해 왜 천도제를 지내고 있는가.
'증오', '학살', '참살'의 진실의 물음에 한국정부가 답해야 할 차례다. 용맹한 호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맹호는 침묵의 나약함이 아니라
진실을 위해 용기를 내야 한다. 그리고 진실을 통한 진정한 평화의 길에 함께해야 한다.
빈안사 민간인학살 생존자 런 아저씨가 말했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학살 속에 있던 사람이고 내가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직접 몸으로
겪은 이야기고 이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들춰서 또다시 한국과 베트남에 증오나 원한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비평화기행 참가자들은 "당 티 카오, 응옌 티 바..팜 반 노" 쯔엉탄 위령비에 적힌 58명의 피해자 이름을 읽으며 진실을 위한
초혼을 불렀다.
▲ 프억흥절에 있는 쯔엉탄마을 학살 피해자 영정.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빈딘성박물관에 전시된 고자이마을 학살자들이 숨어있던 방공호에서 발견된 유물. 학살자들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소위 베트콩)이 아님을
증명한다.[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빈딘성박물관. 1969년 맹호부대와 한진(현 대한항공)에 의해 지어진 한월문화회관으로 베트남이 승전한 뒤 접수해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출처: <통일뉴스> 2015.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