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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레 추천 0 조회 37 14.05.08 13:1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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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에시스와 필리오케 20080311.pdf


노에시스와 필리오케

전 철 (신학동네 http://theology.kr)

2008년 3월 17일

차 례

차 례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

1 들어가며 : 지향성과 기하학적 변형 . . . . . . . . . . . . . . . . . . . . . . . . . . 1

2 노에시스noesis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

3 플레로마와 크레아투라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

4 개성화의 관점과 플레로마-크레아투라 . . . . . . . . . . . . . . . . . . . . . . . . 4

5 노에시스의 사건론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4

6 노에시스와 필리오케filioque의 문제 . . . . . . . . . . . . . . . . . . . . . . . . . . 5

7 나가며.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6



1 들어가며 : 지향성과 기하학적 변형

우리는 저 밖의 무엇을 파악한다. 그 파악의 산물은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이 세계

이다. 우리는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파악된 것이 세계로서

드러난다. 이 세계는 ’저 밖’이 기하학적 변형1)을 통해서 구현된 세계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일종의 나에 의해 구현된 사태이다. 내가 보는 컴퓨터, 저 밖의 숲, 그리고

내 귀에 들리는 새소리, 새하얀 햇살 등등은 이미 나화된 사건이다. 이것은 표상이기

도 하며 일종의 ’저 밖의 자연’이 나에 의해 변형되고 나화된 세계이다.

그럼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물질Materie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만약 ’저 밖’의 무

엇을 나화시켜서 구현한 사건이 이 세계라고 한다면, 적어도 이 세계라는 이 그림Bild

에는 전통적인 의미의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그림 자체가 정신화의

산물이다. 물론 나의 그림 자체는 일종의 실체적 정신이 아니다. 그것은 오해이다.

1) 전 철, 주체, 감각, 기하학적 변형 (2006.02.18) ; 전 철, 경험과 기하학적 변형, in: 정신과 자연에

관한 에세이 35 (2007.05.30)

1

내가 구현한 이 전체 세계는 나의 정신작용에 의해 구현된 사건이며 이 사건은 표

상화된 사건이다. 그러나 표상화된 사건 자체는 물질이 아니며 정신도 아니다. 그저

개념화 한다면 ’물리화된 사건’ 혹은 ’물리화된 정신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여전히 정확한 기술은 될 수 없다. 오히려 여기에서 정신과 물질이라

는 실체적 특성은 사건event라는 특성에 융해되고 수용된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적실한

설명이다. 바로 이러한 사건의 기저에는 이러한 사건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작용

력이 있다. 이 작용력을 우리는 활동성, 힘, 그리고 force라는 다양한 개념들의 용법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

2 노에시스noesis

내가 고민하는 저 밖과 이 안의 문제, 기하학적 변형의 문제의 발원은 브렌타노Franz

Brentano (1838-1917)나 훗설Edmund Husserl (1859?1938)의 현상학이라는 통찰 속

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브렌타노의 지향성Intentionalit?t 개념이나 훗설의 노

에시스noesis 개념은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를 시사한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이 세

계는 내 의식의 저 세계를 향한 지향성에 의거하여 구현된 사태이다. 이러한 안에서

밖으로의, 밖에서 안으로의 의식적 상호지향으로 인하여 탄생되는 세계에 관한 가설

은 이 세계의 근원적 토대를 순수한 코키토로 정초한 데카르트를 극복한다. 사실 데

카르트에 있어서 안에서 밖으로의 지향개념은 어디에도 논의될 구석이 없어 보인다.

지향성에 대한 성찰이 배제된 의식과 현실, 정신성과 물질성의 교배는 성공적일 수

없는 이원론으로의 귀결일 뿐이다. 이 지향성이라는 개념을 나는 활동성, 힘, force로

재해석 한다.

3 플레로마와 크레아투라

우리는 나와 세계의 문제, 안과 밖의 문제, 정신과 물질의 관계에 대한 선조들의 유용

한 접근 가운데 하나를 그레고리 베이트슨(1904-1980)의 ’크레아투라’와 ’플레로마’

라는 개념의 검토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나는 크레아투라와 플레로마라는 개념을

칼 구스타프 융(1875-1961)의 ’죽은 자를 위한 설법’Septem Sermones ad Mortuos2)

이라는 짤막한 책3)을 읽었을 때 발견했다. 이는 산 자와 죽은 자, 산 세계와 죽은

세계에 대한 자신의 기술과 진술에서 채택된 개념이다. 그러나 이후의 몇몇 사상가

들은 이러한 크레아투라와 플레로마라는 개념을 자신의 사상적 철학적 반성 속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베이트슨은 ’천사가 두려워하는 곳’(Wo

Engel z?gern, 1986)이라는 말년의 저서에서 그의 ’정신작용’의 가장 중요한 기초를

2) 전 철, 융의 죽은 자를 위한 설법에 대한 주해 (1995)

3) Carl Gustav Jung, Die sieben Belehrungen der Toten (1916)

2

설명하는 과정에서 융의 두 개념에 대한 설명을 시도한다. 이 저서는 성스러움에 대

한 인식론을 포괄적으로 정리한 그의 말년의 역작이다.

나는 칼 융의 개념을 검토하고 수용하면서 전개한 베이트슨의 정신과 물질에 대

한 논의를 상당한 의미를 지닌 중요한 가설중의 하나로 채택하고 있다. 베이트슨의

정신과 물질에 대한 접근, 그리고 정신작용에 대한 논의는, 힘의 철학적 의미에서 구

성된, ’표면’, ’막’, ’변형’, ’안에서부터 나가는 것과 밖에서부터 들어오는 것’, ’정위’, ’

기하학적 변형’의 문제를 매우 정확하고 치밀하게 논구한 이전의 작업이었다고 판단

하고 확신한다. 이에 간략하게 베이트슨의 논의를 여기에 인용하고자 한다.

"겉으로 보기에 크레아투라와 플레로마 사이의 양분에 이원론이 있다

하여도, 이 양자는 설명을 위한 양분 이외에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분리되

거나 분리할 수 없다. 한편으로는, 모든 크레아투라는 플레로마 안에서,

그리고 플레로마를 통해서 존재한다. 크레아투라라는 개념의 사용은 그

자신이 물질적인 것이 아닌 어떤 유기적이고 소통적인 특성이 있음을 예

시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클레로마는 플레로마에 대한 인식을 소유한다.

우리는 이 양자를 단지 결합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고 어떠한 경우로든

분리되지 않는다. 물리학과 화학의 법칙들은 크레아투라에 있어서 무관

하지는 않고 유효하지만, 그러나 크레아투라를 위한 설명에 충실한 것들

은 아니다. 그러므로 크레아투라와 플레로마는 데카르트의 정신과 물질과

같은 분리된 실체가 아니다."4)

처음에 내가 기초관념으로 정립했던 자아와 세계의 문제는 오히려 동적 특성을

담고 있다. 즉 이것은 내 안에서부터 밖으로 나아가는 힘, 그리고 밖에서부터 안으로

들어오는 힘의 특성을 나와 세계라는 명사로 기술한 것 뿐이었다. 만약 우리가 현상

학의 노에시스와 노에마, 융과 베이트슨의 플레로마와 크레아투라 개념을 적극적으

로 수용한다면 이러한 표현으로 바뀌어질 수 있는 것이다. 나적인 것은 크레아투라

이며, 저 밖의 것들은 플레로마이다. 즉 ’저 밖의 별’은 순수하게 플레로마적인 것이

며, 그 플레로마적인 세계의 접근가능성은 근본적으로는 크레아투라적인 나에 있어

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 곳은 일종의 물자체와 같은 곳이다. 이에 비해 ’저 밖의 별’

4) "... Obwohl in dieser Dichotomie zwischen Creatur und Pleroma scheinbar ein Dualismus besteht, ist

es wichtig, sich dar?ber im klaren zu sein, dass beide außer als Beschreibungsebenen in keiner Weise

getrennt oder trennbar sind. Einerseits existiert alle Creatur im und durch das Pleroma; oder Gebrauch

des Begriffes Creatur unterstellt das Vorhandensein gewisser organisatorischer und kommunikatorischer

Eigenschaften, die selbst nicht materiell sind. Andererseits besitzt nur die Creatur Erkenntnis

des Pleroma. Wir k?nnen die beiden nur in Verbindung antreffen niemals getrennt. Die Gesetz der

Physik und Chemie sind f?r die Creatur keinesweges irrelevant ? sie gelten nach wie vor ? aber sie

reichen zur Erkl?rung nicht aus. Somit sind Creatur und Pleroma keine getrennten Substanzen wie

Descartes’?Geist? und ?Materie?. ..." Gregory Bateson / Mary Catherine Bateson, Wo Engel z?gern.

Unterwegs zu einer Epistemologie des Heiligen. STW 1769 (Frankfurt: Suhrkamp, 2005) 33-34.

3

을 보고자 하는 내 안에서의 활동은 크레아투라적인 것이다. 그리고 ’저 밖의 별’을

나의 동시적 세계에 투사함으로 인해 구현된 저 별은, 플레로마와 크레아투라의 접촉

면으로서 등장한 사건event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어떠한 방식의 물질과 정

신이라는 정태적 도식은 들어설 자리가 비교적 없는 것이다. 오히려 물질과 정신은

실재의 비매개성과 매개성이라는 양가적 측면과 특성을 진술하는 터미놀로지일 뿐,

실재론적 정당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4 개성화의 관점과 플레로마-크레아투라

융은 우주의 대극쌍으로서 ’플레로마’와 ’크레아투라’를 말한다. 융에게 있어서 플레

로마는 원형의 세계이고 자기 (Self)의 세계이고 영원의 세계이고 무(無)의 세계이

다. 플레로마는 이 세계의 근원이자 뿌리이다. 그리고 플레로마와 대극의 자리에는

크레아투라가 놓여있다. 크레아투라는 자아(自我)의 세계이고 의식의 세계이다. 융

은 의식의 기원을, 이해하고자 하는 지칠줄 모르는 충동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이해는 지(知)이고 그것은 분별(分別)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무의 세계인 플레로

마의 세계에서 분별의 세계인 크레아투라로 나아가려는 것, 그것은 플레로마 자신이

자신을 밝히 드러내어 보이려는 강렬한 의지이고 신념이다.

그런데 플레로마와 크레아투라의 긴장적 대극적 운동은 플레로마의 세계인 무로

와해되는 것, 그리고 크레아투라의 세계인 끊임없는 분열상으로 와해되는 것을 동시

에 지양한다. 크레아투라를 통하여 플레로마가 승화되어 드러나는 과정, 혹은 플레

로마의 중심인 자기로 향해 가는 과정이 개성화(個性化)이다. 이 개성화의 과정은

자기실현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다. 깨달음이란 고통스러운

것이며 고통을 거치지 않은 깨달음이란 또한 없기 때문이다. 또한 플레로마의 무로

와해되지 않고 크레아투라의 구별로 와해되지 않는 고양과 상승의 과정으로서의 개

성화는, 결국, 세계를 배제하지 않고 수용한다.5)

5 노에시스의 사건론

이러한 정신과 물질, 안과 밖의 문제, 의식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성찰은 불가결하게

우주론의 문제를 끌고 들어온다. 나는 무엇인가, 자아는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바라

보는 이 세계와 우주의 본성과 그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우리의 고민에

노에시스의 사건론은 어떠한 단서와 적절한 해명을 제시하는가.

지향성에 의거하여 ’저 밖’을 바라보고 구현하는 행위는 주체의 독자적인 세계 구

현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각자의 세계상을 구현해 내고 있다. ’저 밖’의

5) 전 철, 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 - 인간 정신의 깊은 바다를 연 한 의사의 삶과 사상 (한신 23,

1996)

4

무엇이 우리의 지향성에 의해 탄생된 세계이며, 불치의 자아와 의식에 의해 저 밖은

우리에게 노에마noema로서만 불가결하게 주어진다. 우리는 우리의 의식과 신체를

통하여 자기화된 세계를 구현하는 궁극적 작인이며, 그 구현된 세계 안에 우리는 존

재한다. 우리는 세계를 탄생시키며, 그 안에 우리는 거한다.

우리의 의식은 적어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정신성의 원천이다. 그 정신성은 저 밖

의 물리적 질료에 특정한 사적 형상을 부여하는 정신성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그 의

식과 정신성의 내면은 비매개성의 특성을 담지한다. 우리는 의식을 통하여 환경을

자기화한다. 의식과의 관련성 속에서 환경은 상대적으로 물리적 특성의 담지자이다.

그러므로 의식과 세계 저편의 관계는 정신성과 물질성이라는 전통적 관념의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 정신성은 저 밖의 물리적 질료에 형상을 부여하는 작인이라는 관점

에서, 형상과 질료의 관계로도 이해될 수 있다. 의식과 정신은 저 밖의 물리적 질료

들을 자신의 정신성을 매개로 새롭게 연금하고 빚어낸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신의 연금술에 있어서 노에시스와 활동성은 어떠한 지위를 차

지하고 있는가가 문제가 된다. 즉 노에시스와 활동성은 정신의 술어인가? 아니면 이

러한 활동성에 의거하여 정신은 술어적으로 활동하는가? 이것이 노에시스의 사건론

이 다루는 핵심적 테제이다.

만약 정신이 정신의 속성인 노에시스에 의해 저 세계를 사건화 한다면, 노에시스

는 정신과 세계의 해리적 도식을 매개하는 개념적 가교일 뿐이며, 이러한 이유로 그

것은 변종된 이원론적 사유로 귀결될 뿐이다. 그러므로 노에시스적 활동성은 정신의

부속적 기능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노에시스적 활동성의 근원성에 의거하여 정신은

조직화되고 구현된다. 즉 노에시스적 활동성은 정신이라는 존재방식의 근거가 되며

그 바탕 위에서 환경에 대한 정신적 기능은 구현된다. 노에시스적 활동성은 그러므로

정신과 자아에 우선한다.

6 노에시스와 필리오케filioque의 문제

자아Ich와 세계Welt의 탄생에 대한 우주론적 논의는 사유의 근원성에서 볼 때 삼위

일체론의 사유와 원형성을 공유한다. 여기에서는 다양한 논의의 줄기 가운데 우리의

논지와 결부해서 필리오케 문제6)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필리오케 논쟁의 원 텍스트

는 주후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7)의 신조서에 의거한다. 그 본문에는 성령에 대

한 진술에 있어서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그는 주이시고 생명을 주신다. 그는 성부로부

6) Vgl. Bernd Oberdorfer, Filioque : Geschichte Und Theologie Eines okumenischen Problems (Vandenhoeck

Ruprecht, 2001)

7) Vgl. Erstes Konzil von Konstantinopel

5

터 나오시고.."8)

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후 589년 톨레도 회의에서는 성자로부터Filioque9)라

는 단어를 첨가함으로서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는 갈라진다. 필리오케의 문제를 여러

관점에서 우리는 조명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문맥을 전제하면서 우리는 이러한 필리

오케의 문제를 소위 사유-지리적Denk-geographisch 관점에서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성령聖靈Heiliger Geist이라는 신학적 개념은 소위 생명과 존재와 삶의 활동성, 생명

성이라는 관념을 그 근원성에서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존재와 생명의 활동성으로서

의 성령을 서양교회의 사유방식에서는 동방교회와는 달리 성자라는 존재Sein의 속성

으로 이해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활동성과 생성과 생명력에 대한 관념 또한 존재의

속성으로 이해되어져 왔다. 즉 서방교회의 사유방식에 있어서 성령은 모든 존재의 원

형적 근원인 성부 뿐만 아니라 존재의 실질적 구현인 성자에 의거하여 활동한다. 상

대적으로 동방교회는 활동성의 근원을 성부에 귀속시키지만, 존재의 실질적 구현인

성자로 귀속시키지는 않는다.10)

사유-지리적 관점에서 서양의 성령론에 대한 서방과 동방의 차이는 소위 노에시

스, 활동성, 힘의 지위를 어떻게 정위하느냐의 문제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서방은 생

명의 활동성과 힘의 문제를 (현)존재의 속성으로 정위하려는 경향을 강하게 보여왔

음을 우리는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동방은 활동성과 힘의 문제를 단

지 존재의 속성으로만 정위하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러한 서양교회 내부의 존재와

생성에 대한 상이한 이해는, 서양과 동양이라는 더 큰 지리적 관점에서 조명해 볼 때

더욱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동양의 사유 내부에서도 미시적으로는 분명히 다양한 사

유방식이 역사적으로 존재함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오히려 서양의 기본정조인 존재

신론적 관점과는 대립되며, 오히려 존재, 신, 절대자라는 표상을 넘어서는 생성론적

관점을 동양에서는 자연스러운 세계관으로 구비해 왔다고 조심스럽게 추측할 수 있

을 것이다. 즉 성령으로 표상되는 생성과 활동성의 범주를 성자라는 존재에 가두지

않으려는 동방교회의 사유방식이, 동양적 사유에서는 더욱 더 적극적으로 개진되고

성찰되어져 왔다고 보는 것이다.

7 나가며

이 테제의 출발점은 브렌타노와 훗설의 지향성, 융과 베이트슨의 플레로마와 크레아

8) http://de.wikipedia.org/wiki/Filioque

9) ?… Et in Spiritum Sanctum, Dominum et vivificantem, qui ex Patre Filioque procedit …“

10) 위르겐 몰트만은 이러한 서방교회의 성자 그리스도의 위계에 복속된 성령에 대한 이해 패러다임이

서구신학의 역사관, 자연관, 우주론에 어떻게 기여되었으며, 그 현실적인 폐혜가 무엇이었는지를 비

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Vgl. J?rgen Moltmann, Trinit?t und Reich Gottes (1980), ders, Gott in der

Sch?pfung (1985)

6

투라에 의거한다. 이러한 개념들은 소위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적 양식, 그리고 자아

와 세계의 탄생에 대한 우리들의 질문에 대한 비교적 적실한 설명도구이다. 철학적,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우리는 힘, 활동성, 노에시스의 지위의 문제를 접근하였다. 그

러나 이러한 생명성, 활동성, 노에시스의 화두는 신학적 관점에서 삼위일체의 위계

와도 연결이 된다. 특히 필리오케 논쟁은 활동성으로서의 성령과 존재로서의 성자의

문제에 관한 서방교회의 독특한 재정의의 문맥을 지닌다. 필리오케에 의거해 구현

된 서방교회 사유의 원형성은 19세기 말까지 존재신학의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왔고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부터 존재신학의 의미와 한계에 대한 새로운 논의11)와 신학

적 비판에 이르게 된다. 사유지리적 관점에서 활동성보다 존재를 강조했던 존재신론

적onto-theologisch 서양사유와는 달리, 동양사유는 활동성과 힘에 대한 지위를 상이

하고 독특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우리는 조심스럽게 추론할 수 있다. 활동성Aktivit?t,

생명력Lebendigkeit, 힘force이라는 화두는 오늘날의 성령의 본성과 지위에 대한 신

학적 재해석에 있어 매우 중요한 표상이며 유용한 통찰을 제시할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12)

에드문드 훗설Edmund Husserl (1859?1938)

11) Dazu vgl. Martin Heidegger, Sein und Zeit (1927)

12) 이 글은 정신과 자연에 관한 에세이 7. 크레아투라와 플레로마 (2006년 9월 16일)의 내용을 수정,

첨가한 글이다 (2008년 3월 11일 초고).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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