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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그때를 아시나요? 스크랩 우리나라 `음악감상실` 추억의 그때 그시절~!!
정태하 추천 0 조회 175 15.12.29 22: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우리나라 '음악감상실'의 역사.

▲ 1980년대를 풍미했던 음악감상실 풍경. DJ 부스 벽면을 가득 메운 레코드판과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은

채 눈을 감고 음악을 즐기는 청년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고도성장을 구가하면서도 아직은 궁핍했던 1980년

대 젊은이들에게 음악감상실은 최고의 힐링 공rks 이었다.

값비싼 오디오를 가질 수 없었던 청춘들은 매킨토시 진공관 앰프와 JBL 하스필드 스피커 등으로 무장한

음악감상실에서 바그너와 브람스, 슈베르트를 들으며 낭만을 희구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감상실은 '녹향.

 

▲고전음악감상실"옥향" 이창수씨

[사진출처 - 한겨레신문]

○.1946년 대구 향촌동에서 국내 최초의 고전 음악감상실로 문을 열었습니다.(지금은 대구지역 박물관에)

향촌동의 다방 한 켠에서 故 이창수 선생님께서 자신이 직접 소장하고 있던 레코드를 틀면서, 역사가 시작

르네상스

○1951년 대구에서 출발한 르네상스는, 故 박용찬씨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1954년 상경, 종로구 인사동(? 쎄시봉 길 건너, 청진동 쪽?)에 6년간 문을 염.

[르네상스가 있던 무교동 그 자리에는 지금은~!!!]

○ 1960년 12월부터 종로1가 영안빌딩 4층에 자리잡고 전성기를 구가했다가 1987년 가정용 CD와

오디오의 보급화로 인해, 안타깝게도 1987년 문을 닫게 됩니다

(당시의 음악기기와 LP판들은 현재, 덕수궁 석조전 3층의 음악자료관에 보관 되어 있음)

<르네쌍스그시절~>

○ 자주빛 커튼을 제치고 50여평의 실내에 들어서면 베토벤 모차르트 슈만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만날 수

있었고,.모든 것이 궁핍하던 시절이지만, 르네상스에만 가면 정신적 포만감을 느끼고 안식과 낭만을 추구할 수

있어 단발머리 교복차림의 여고생부터 대학생연인,공무원,예술인,실업자에 이르기까지 르네상스의 단골

어만 갔다.그래서 당시 젊은이들은 「르네상스 00년도생」으로 연배를 따질만큼 르네상스의 음악과 분위기를

사랑했다.

○ 시인 천상병씨는 음악에 푹빠진 표정이 벽면에 걸려있던 베토벤 석고두상을 닮았다고해서 「쁘띠베토벤」

이란 별명을 얻었고, 정경화·명훈 남매는 일요일마다 이곳에서 하루종일 음악을 감상하며 연주기법을 익혔다.

○ 70년대 산업화의 물결속에 디스코·오디오에 밀려 83년에는 폐업위기에 처했으나, 『르네상스는 우리

모두의 고향으로 절대 문닫게 할 수 없다』는 단골들의 성화때문에 87년까지 유지됐다. 그 후 추억 속으로.

[서울의 음악감상실]

○ 사실상, 우리나라의 음악감상실의 역사는 1950년대 말에 충무로(지금의 무교동 SK 건물 자리)에 문을 연

쎄시봉’이 시발이었다. 음악다방 형태로 출발한 '쎄시'봉의 초대 마담은 기독교방송의 성우였던 천선녀였다

○ 명동의 은하수’가 최초라는 주장도 있다.그후 생겨난 종로2가 뒷골목의 ‘디쉐네’,미도파 옆 시대백화점 자리에 ‘라 스칼라’,화신백화점 3층의 ‘메트로’,충무로의 ‘카네기’등도 70년대까지 전성기를 이뤘다고 한다.
○ 이 시절 지방에서도 음악다방의 열기는 대단했다.부산의 ‘무아 음악감상실’은 국내 최고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부산의 대중음악문화를 선도했다.해운대의 ‘뿌리’‘명작’등의 음악다방과 남포동의 ‘거목’ ‘약속’서면의 ‘대호’‘태평양’등의 음악다방들도 인기를 누렸었다.

 

▲ ‘돌체’

1940년대의 가족 사진. 하석암·정두형 부부와 아들 하일부/ 하일부씨 제공

▲.1940년대의 가족 사진. 하석암·정두형 부부와 아들
하일부/ 하일부씨 제공 [출처] 조선닷컴
창업자 하석암씨가 설립 .김기림·김수영·박인환·서정주·오상순·이어령·전혜린·전숙희·정한숙·정현웅·조병화·
조지훈·천상병(문인), 송지영·이봉구·조덕송(언론인), 김환기·변종하·박고석·박서보·백영수·이중섭(화가),
노경희·최무룡·백성희(배우), 전태기(영화감독), 정영일(영화평론가), 나운영(작곡가), 한기봉(현대무용가),
백건우(피아니스트)….명동의 클래식 음악다방 ‘돌체(IL Dolce)’를 드나들던 단골손님이라것................!!!!

1966년의 명동공원 주변 모습. 노란색 테두리 2층집이 하석암·정두형이 '2층 돌체'를 운영하던 곳이다/ 사진제공: 명동이야기
▲.1966년의 명동공원 주변 모습. 노란색 테두리 2층집이 하석암·정두형이 '2층 돌체'를 운영하던
곳이다/ 사진제공: 명동이야기
1940~1960년대를 명동에서 보낸 작가·예술가들의 글과 그림에 은성, 모나리자 등과 함께 반드시
등장한다. 또 이들이 명동 시절을 회상할 때 누구나 돌체에 얽힌 추억을 끄집어내곤 한다. 요절한 천재
예술가에게 연모의 정이 사무치듯 단명한 돌체는 늘상 그런 존재였다. 기자 역시 20대에 돌체를 이렇게
알았다. 가난한 작가와 예술가들이 모여 모차르트·베토벤·차이코프스키 등을 감상하며 사랑과 예술을
논하고, 때로는 술에 취해 시대를 성토하며 울분을 토로하던 음악다방의 추억이다.

동화백화점(지금의 신세계백화점) 5층에 ‘동화음악궁전’

충무로에 ‘카네기’

인사동에 르네상스’ 등이 속속 문을 열었다.

또한, 1950년대 '기독교방송' 건물 지하에 있던 ‘영보다방’

명동의 ‘은하수다방’ 과 함께 우리나라 음악다방의 본산지로 꼽히는 곳.

초원다방

그후, 음악다방의 틀을 갖춘 곳이 조선일보사 옆 2층짜리 공연윤리위원회 건물 건너편에 문을 연

‘초원다방’이었다.

동아방송(DBS)의 디스크자키(DJ) 최동욱이 낮에 한두 시간 나와 당시 유행하던 팝 음악을 소개해 주었다.


'약속' 레스토랑

쎄시봉 골목에서 뒤쪽으로 나와 광교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약속’레스토랑이 있었는데,

‘약속’이란 상호는 ‘뚜아 에 무아’의 이필원이 자신의 노래 제목에서 딴 것.

‘필하모니’

'르네상스 옆 건물에는 화신백화점에서 이전한 ‘필하모니’가 있었다.

‘아폴로’, ‘메트로’

종로2가 사거리에서 광교 쪽 조흥은행 본점 못 미쳐 ‘아폴로’와 ‘메트로’가 나란히 있었다.

‘무아다방’

○ 르네상스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가다보면 MBC DJ 박원웅이 운영하던 ‘무아다방’ 이 있었는데,

실내 벽면에 외국 가수들의 사인이 들어간 레코드 재킷을 전시해 눈길을 끌었다.


○ 당시 음악감상실은 대학생 이상만 입장을 시켰다.

음악감상실은 극장처럼 입구에서 30원짜리 입장권(196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당시 자장면 한

그릇이 65원, 커피 한 잔이 35원, 쌀 한 가마가 4만 원이었다)을 끊으면 음료권과 음악을 신청하는

리퀘스트권이 함께 나왔다.


[한국 포크의 발상지,]

▲무교동 ‘쎄시봉'

 

○오늘날 우리가 ‘포크의 발상지’를 거론할 때 자주 등장하는 곳이 ‘쎄시봉’이다. 쎄시봉(C'est Si Bon) 은 ‘그것은 멋지다’라는 뜻의 곡명을 가진 프랑스 샹송으로 샹송 가수 샤를르 트레네가 처음 불렀고, 재즈 뮤지션 루이 암스트롱이 미국으로 가져가 다시 불러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이 노래는 우리나라에서도 1950년대에 크게 유행했다.

 

 

○통기타가수하면 바로 김민기나 양희은 혹은 한대수나 양병집, 서유석을 떠올릴 것 이다. 지금이야 포크전사로 재평가되어 함께 묶여 거론되거나 아니면 몇가지 역사적 특징만으로 서로를 변별하며 나누곤 하지만 과거 이들은 소박하게 말해 음악살롱에서 노래하는 통기타 가수들이었다.

 

○음악살롱 혹은 음악감상실이라고 불리던 곳중 가장 유명한 쎄시봉은 당시 통기타 가수라면 누구나가 거치고 싶어하던 유명한 무대였다. 앞에 거론된 사람들은 물론 소위 통기타 1세대로 불리던 송창식, 조영남, 윤형주, 김도향, 서유석, 김세환 등이 이곳 출신이다. (물론 양희은은 두번째 무대인 오비스캐빈에서 주로 활동하였지만 고등학교 YMCA활동 시절부터 이 1세대들과 함께 움직였다.)

 

 

○ 종로가 젊은이의 거리로 부상하면서 ‘쎄시봉’ 충무로에서 종로2가 YMCA 뒤로 이전했다. 쎄시봉은 우리나라에서 라이브 공연이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 데 크게 기여한 공간이었다.


○ 1960년대 종로2, 3가에는 YMCA학원, EMI학원, 파고다학원 등 유명 학원이 많아 대학생이나 재수생들로

붐볐다. 그러다 보니 종로 일대는 음악감상실이 많이 포진해 있었다.

통기타 음악 대중화의 길잡이 '셀부르'

○ 광교 사거리 쪽으로 가다가 우회전 하면 ‘쉘부르’가 있었다.(MBC. DJ 이종환이 인수하여 운영하다가 1970년대에 명동으로 이전)

○ 명동 통기타 시대는 70년대 중반 '쉘부르'가 문을 열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젊은이들 사이에 식을 줄

모르던 생맥주 붐도 한몫 했다.

 

○ 1973년 종로 2가에 문을 연 음악감상실 '쉘부르'에는 내로라 하는 통기타 가수들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주인장은 MBC 라디오 PD 겸 DJ였던 이종환. 그는 음악하는 후배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면서 당시 단성사에서 개봉한 영화 '쉘부르의 우산'에서 떠올려 쉘부르란 간판을

내걸었다.

 

 

 

○ 극장식 무대에는 쉐그린(이태원, 전언수), 어니언스, 고(故)김정호, 김세화 등의 포크 가수들과

MC 허참 등이 오후부터 밤까지 잇따라 공연을 펼쳤다. 이들은 쉘부르 '종로 시대'의 스타들이었다.

 

○ 1975년 11월 쉘부르는 명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위일청, 권태수, 남궁옥분, 신계행, 강승모,

양하영, 최성수 등 한층 풍성한 가수들이 이 무대에 올랐다. 아마추어를 위해 오디션도 열렸고 주말,

월말 대회를 거쳐 1등을 하면 무대에 서는 자격을 줬다. 말 그대로 요즘 오디션 프로그램의 원조

뻘인 스타 등용문이었다.

 

○ 손님들은 테이블도 없이 의자에 앉아 음료수를 한잔 들고는 라이브 음악에 빠져들었다. 공연한

가수들에게는 딱히 시간당 정해진 개런티도 없었다. 가수들은 이종환을 '사장'이 아닌 '대장'이라고

불렀던 그시절 그추억 지금은 대장님을 볼수없으니 아쉽기만...!!~~

 

○ "정해진 고정 출연료가 없었지만 대장 이종환은 때론 '오늘은 자장면 쏜다'고 하면 우르르 몰려가

먹었고, 차비가 없으면 차비도 주고 불러서 용돈도 잘주는 후덕한 사장님이었다

그러나 70년대 말부터 명동 통기타 살롱들은 급속히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비지스, ABBA 등 가요계에

분 디스코의 바람과 77년 시작된 대학가요제 등의 영향 탓이다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쑈 시그널 음악]

종로2가 YMCA 뒷골목에 ‘디쉐네’,

명동 미도파백화점 옆 시대백화점(이후 미우만백화점에서 미도파백화점으로 흡수됨) 자리에 라 스칼라’

종로 화신백화점 3층에 ‘메트로’

충무로의 ‘카네기’

종로2가 태극당 뒤 ‘뉴월드’

조선일보사 옆 아카데미극장 건물에 ‘아카데미’

명동극장 옆 골목에 ‘시보네’ 가 등장했다.

○ 종로가 젊은이의 거리로 부상하면서 ‘쎄시봉’ 충무로에서 종로2가 YMCA 뒤로 이전했다.

쎄시봉은 우리나라에서 라이브 공연이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 데 크게 기여한 공간이었다.


○ 1960년대 종로2, 3가에는 YMCA학원, EMI학원, 파고다학원 등 유명 학원이 많아 대학생이나 재수생들로

붐볐다.

그러다 보니 종로 일대는 음악감상실이 많이 포진해 있었다.


디쉐네

○종로2가 뮤직홀(음악감상실을 지칭하는 다른 용어) ‘디쉐네’는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음악감상실로

기록될 텐데, 줄잡아 300평 정도로 웬만한 극장보다 컸다.

뒤쪽에 안이 훤히 보이는 유리벽으로 만든 DJ 부스...이곳의 스타는 DJ 이종환.

 

○그즈음 디쉐네에서는 주말이면 트위스트 파티를 열어 장안에서 춤 꽤나 춘다는 춤꾼들이 모여 춤 솜씨를

뽐내곤 했는데, 우승자에게 금반지 1돈을 줬다.


‘뉴월드’ 뮤직홀

YMCA에서 인사동 방향으로 약 300m 내려가다 보면 인사동 입구 사거리 못 미쳐 길 건너 태극당제과점 옆

골목에 ‘뉴월드’ 뮤직홀이 있었다.

규모는 디쉐네보다 작았지만, 당시 음악감상실 DJ들한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뉴월드 홀 안에는 48개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향은 다른 음악감상실들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음질

이었고, 미국에서 직접 공수해 온 원판들은 경쟁업소의 부러움을 샀○다.



[70년대 종로와 명동은 음악다방 천국]


 

○해방 후 음악다방 1호로 기록되는 명동의 ‘은하수다방’ 그러다가 1965년경 차츰 음악감상실이 라디오

방송 앞에서 자취를 감추면서 기존의 다방 형태에서 음악을 앞세운 음악다방이 본격 등장했다.

○음악다방은 음악감상실처럼 DJ가 멘트를 하다가 음악만 틀어 주는 형식으로

바뀌어 갔는데, 그 발단이 된 게 광화문 ‘초원다방’ 이고, 명동에서는 ‘심지다방’ 이 원조다.


○명동에서는 1966년부터 1969년 사이에 음악감상실 ‘시보네’ 가 있었다.

뮤직홀 시보네

뮤직홀 시보네는 명동극장(지금의 하나은행 자리) 옆 막다른 골목에 있었다.


심지다방

음악다방의 1번지는 유네스코회관 골목으로 들어서 약 500m가량 올라가다

보면, 코스모스빌딩(OB's 캐빈) 2층에 위치한 ‘심지다방’이었다.

[70년대 명동의 심지다방]

청자다방

○명동 미즈백화점(지금의 조흥은행 자리)은 음악가 집안 정경화, 정명화, 정명훈 남매의 부모가 차린

백화점으로, 그 옆 건물에 ‘청자다방’ 이 있었다.

[칼라로보는 70년대 명동거리 청자다방]

○심지다방이 매머드 음악다방이었다면, 청자다방은 음악감상실 분위기를 못 잊는 손님들을 겨냥해

저녁시간에 외부 전문 DJ를 초빙했다.

[칼라로보는 70년대 명동거리 청자다방]



꽃다방

○ 청자다방 다음 골목에 ‘꽃다방’ 이 있었고, 여기서 을지로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다방 ‘은하수다방’이 예전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조촐하게 클래식만을 틀어댔다.

[1970년대의 명동 꽃다방 ]


여기서 을지로로 거의 다 내려오면 구 내무부(지금의 외환은행 자리)가 있었고, 골목 끝에 있던 오양

빌딩(지금의 밀러타임 건물) 내의 ‘오양다방’ 로얄호텔 ‘로얄커피숍’ 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드나들었다.

본전다방

○ 그런가 하면 사보이호텔 근처 충무로에 ‘본전다방’도 유명했는데, 이곳은 국내 최초로 오페라극장식의

2층 홀을 만들어 인기를 모았다.

[본전다방 성냥갑]


본전다방 옆에 뒤늦게 문을 연, 음악감상실 ‘르 시랑스’‘내시빌’ 이 나란히 있었다.

양지다방

종로2가 지금 YMCA건물 맞은 편에 있었던 양지다방은 200평이상의 대형다방으로.74년 당시 인근에서는 최대 규모의 다방이 하도 커서 사람을 찾기는 힘들지만 카운터에서 방송으로 사람을 찾아주고 개인적으로 최고의 음악을 들려주는 DJ 및 운영진과 각별한 친분도 있었다. 커피값은 50원으로 기억난다..

[70년대 양지다방 주변모습..아쉽게도 양지다방 간판이 나무에 가렸네요~^^]

 

다방

그외도 1970년대의 대표적인 음악다방으로는 종로 1가의 "희다방", 그리고

통키타노래를 들려주는 "향원"

팝송 외에 당시 인기 있던 통기타 가수들의 노래를 들려주던 “향원”

동숭동 대학로의 다방

○ 동숭동 대학로에는 "슈만과 클라라" "학림다방" "참스다방" "대학다방"있었다. 아래 사진은 "학림다방"이다.

이 다방은 지금까지 존재한다. 50년이 되었다.

▲ 대학로 혜화역 3번출구와 4번 사이에 위치해 있는 학림다방커피한잔

5천원~6천원 사이인데. 옛날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다방입니다.

[학림다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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