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령 옛길
천년의 역사가 흐르는 명승길 15Km
예언서인 격암유록을 남김 조선 중기의 풍수가인 南師古(1509~1571)가 말을 타고 가면서 소백산을 바라보고는 즉시 말에서 내려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며 넙죽 절을 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소백산 자락길에는 죽령길이 있다
심심하고 할 일 없으니 어디로 튈 가 하다가 내일은 또 포천이나 갈 가 생각하는데 벨이 울린 다
“나요~”
“그려” 하니
“왜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어요” 하길래 “못 챙겼는데...”라- 죽령 옛길을 걷자고 하니 일언지하로 O.K다 평소에 걷고 싶은 길이다 일정이 잡히면 그 곳에 대한 자료를 검색하는 습관이 있는데 죽령에 대하여 알아보다가 문득 시조시인 자경 전선구의 시가 눈에 띄었다
죽령마루
산 넘어 구름밖에 여울지는 노을 따라
까아만 새 한 마리 서천으로 날아간다
찬란한 황금빛 무늬 아름다운 만다라여
일시: 2020년6월16일 화요일 맑음
동행: 파란문 이 대장 홍 선생
갈 때: 청량리 발 7시38분 2호 20 22 24(7400월)
올 때: 풍기 발 15시51분 5호 33 35 37(8600원)
동선
단양역→소백산목석공예(버스)→당림→장림아랫마을→사인암 갈림길→장림교→농공교→당동리경로당→단양IC→용부원1리→출렁다리→용부원2리경로당→산신각→죽령→희방사
죽령옛길은 소백산자락길 3코스로서 경북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을 잇고 옛길구간에는 죽령옛길 용부원길 장림말길이 있다
• 죽령옛길: 2.8Km(느티쟁이주말터→주점터→죽령마루)
• 용부원길: 3.9Km(용부언리(버들마을)→보국사지→샛골(죽령분교)→용복사 →죽령터널)
• 장림말길: 4.7Km(용부원리(매바우 음지마을)→장림리)
들머리를 희방사역으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한데 희방사역은 소백산역으로 바뀌었지만 그 마저도 금년(2020년) 10월이면 폐쇄되어 추억 속으로만 남게 될 것이라 하니 애석하고 나는 젊었을 때 친구들과 희방사를 들려 비는 내리는 밤을 지새우며 타령을 부르고 연화봉을 오르다가 혼줄이 난 추억이 가슴속에 스며 있는데 우리들은 들머리를 단양역으로 잡았다
07시38분 청량리역을 출발한 1621 열차는 8시51분 원주역 9시36분 제천역을 지나서 단양역에 9시56분에 도착되었다
단양역에는 조남두의 “단양팔경가에서” “나그네의 쉼터 준공에 부처” “天地
文化財宣布 신기석” 표석과 안내문이 있는데 그 중에서 조남두의 “단양팔경 가에서” 를 옮긴 다
소매끝 도는 구름 두둥실 감기는 하늘
퇴계선생 기침소리 유곡 산란 바람소리
상 중 하 신선바위
어깨춤 물굽이여
구담봉 머리 끝에 선학이 푸득인다
천년을 물 속 도시란 큰 뜻이 우람쿠나
어느 제 하늘 갈련가
내 벗 예 머문 기록
중중으로 줄이어 쌓인 석병 훈풍길에
너울너울 풍류자락 날리며 송강을 대작할 까
남한강 선경 감돌이 휘감기는
미기 두향 옥가락아
단양군의 단양팔경은 너무나 알려졌고 생태유람길에는 물소리길과 느림보미학길이 있는데 나는 물소리길 1코스를 걸어 본 바가 있고 예전에 한양에서 물길로 단양까지 올 수 있었단 다 그리고 단양아라리가 있는데-
• 단양아라리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제작년 봄참에도 되돌아 왔는지
뗏사공 아제들이 연실 내려 오네
남우집 낭군은 사향내가 팔팔 나는데
우리집 멍뎅이 낭군은 땀내만 나네
요총각 조총각 치매꼬리 놓게
친정 부모가 당사실로 박은 치매를 총각이 붙들어
콩튀듯 합니다 아야 -요약-
10시12분
단양역에서 버스를 타려면 행선지를 확인하고 타야지 자치하다가는 단양읍으로 갈 수도 있고 택시도 대기하고 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소백산목석공원 앞에서 내렸지만 당림리행을 타야한 다 곧 GS 주요소가 나왔고 도로 따라 걷다가 횡단보도를 건너니 장림 아랫마을이 나왔고 사인암 갈림이 이어서 나왔다
장림리를 지나면 장림리면서무소 앞에 “다자구야 할머니” 스토리 텔링 안내판이 있고 장림교에 죽령은 9.1Km 그리고 농공교가 나오고 소백산자락길 4구간이라는 푯말이 보이고 당동리 경로당 앞을 지나서 횡단하면 단양IC 진입로가 있고 용부원리 표석이 있고 용부원리에는 “음지마을”과 “美德”이라는 알림이 있다
그 방향으로 진입하면 정자가 나온 다 모처럼 정자에서 잠시 휴식을 하면서 담소를 하다가 길을 재촉하면 시멘트도로를 따르다가 출렁다리를 건너면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었고 숲길로 접어들면 곳곳에 긴 의자와 작은 무지개다리들이 나오고 산길에는 야자매트가 깔렸고 데크가 설치되어 있다
서서히 오르막이 죽령고개 까지 이어진 다 죽령천의 물소리가 요란하고 멧돼지 출현 지역이라면서 종들이 달려 있어 위험신호를 보낼 수 있다 기찻길 죽령터널 앞이 나왔고 죽령폭포가 보였다 시원스럽게 물줄기가 뿜는 다 그리고 죽령천은 오른쪽이고 천(川) 가까이러 걷다가 오르막을 오르면 길은 또 세멘트포장 길이고 좌측으로 틀어야 한 다
• 기차길은 1942년 중앙선으로 신작로는 1934년에 개통되었다 그 이전에는 죽령 옛길로 다녔을 것이다
시멘트도로를 따라 굽이굽이 돌면 그늘진 곳도 있고 땡볕이 내리 쬐는 구간도 있지만 고도가 높아지면서 바람이 솔솔 부는데 계속 오르막을 걸었더니 체력이 바닥나고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리고 점심시간은 훨씬 전에 지나갔는데 새벽에 누릉지 반 그릇 먹고 집에서는 11시30분이면 점심을 먹었었는데 13시 넘었는데도 먹은 것은 없고 죽령 산자락은 멀기만 하다
용원2리 경로당이 나왔다 사과나무 과수원에는 사과의 크기가 콩알보다 조금 크고 봉지들을 씌워져있고 죽령 옛고개 마을 안내도가 보인 다
산신당이 보인 다
※ 丹陽 竹嶺 山神堂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죽령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신당이다.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의 민속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고 죽령은 명승 제30호다
산신당은 한국의 토속신인 산신 곧 산신령을 모시는 곳으로, 마을과 절을 수호하는 기능을 가진다. 용부원리 마을의 산 중턱에 자리한 이 산신당 내부에는 竹嶺山神之位라 적은 위패를 모셔두고 있다. 죽령산신을 모시는 곳으로, 마을에서는 죽령산신을 “다자구 할머니”라고 부르고 있어 이 건물 역시 “다자구할머니당”이라 칭하고 있다. 다자구할머니를 죽령산신으로 모시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 이곳에는 산적들이 밤낮으로 나타나 백성을 괴롭혔는데, 산이 험준하여 관군도 산적을 토벌하기 힘들었다. 이 때 한 할머니가 나타나서 산적소굴에 들어가 ‘다자구야’하면 산적이 자고 있는 것이고, ‘덜자구야’하면 도둑이 안자고 있는 것으로 관군과 계획을 짰다. 두목의 생일날 밤 술에 취해 산적이 모두 잠들자 할머니가 “다자구야”라고 외쳐 이 소리를 들은 관군이 산적을 모두 소탕할 수 있었다. 나라에서는 이러한 할머니의 공적을 기리도록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백과사전)
14시30분
전화벨이 울린 다 파란문이다 “어디 계서...” “산신당 앞” “빨리 오셔라” 누군 빨리 가고 싶지 않나- 계속되는 오르막에, 나이 탓에, 먹은 것은 없고, 파김치가 되어 가는데 어떻게 빨리 간단 말이냐~ 허나 고개까지는 100m 남았다 아픈 다리를 질질 끌고 죽령마루에 도착하니 백두대간 왕복으로도 왔었고 소백산 등산하려고도 왔었다 죽령고개에는 표석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단양군에서 또 하나는 영주시에서 세운 것이며 영주 방향에는 죽령루가 있고 경북과 충북의 경계요 백두대간 표석도 있는 데 남진하면 도솔봉(1314m) 그리고 북진하면 소백산 비로봉(1439.7m)으로 갈 수 있는데 소백산에는 천문대가 있으며 죽계구곡을 품고 소백산 아리랑도 있지만 소백산 철쭉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 소백산 아리랑
아리아리랑 쓰리쓰리아리랑
소백산아리랑
소백산 천년주목 그세월이 얼마야
풍기인견 배짜던 아가씨
연~화봉 천문대위에
별처럼곱던님 그~리워라
내고향희방사 소백산 철쭉꽃은 곱게피는데
아~아고운님 그리워서 불러보는 소백산아리랑
불러보는 소백산 아리랑~~
죽령루에 오르면 풍기읍의 아파트들이 보인 다 이 고개를 최초로 길을 열었다는 竹竹과 광개토왕 그리고 온달장군의 스토리텔링도 있고 삼국시대의 요충지로서 죽령산성도 있다 정도전 김시습 허목 유호인 김종직 황준량 송상도와 나그네들 그리고 보부상등 많은 사람들이 넘으면서 애환을 남겼다 특히 금성대군은 유배길로 넘었고...
• 의상스님: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사상을 전파
• 안향: 성리학을 들여 옴
• 주세붕: 풍기군수로 최초의 백운동서원을 세우고 인삼재배에 성공
• 이현보는 한양에서 벼슬살이 청산하고 76의 나이로 고향을 찾으려고 죽령 을 넘으면서 주세붕과 시를 주고받는 다
※ 落鄕길의 이현보를 마중 하려고 中宗 37년(서기 1542년) 7월 풍기 군수 주세붕이 나귀에 술을 싣고 죽령에 와서, 예안(안동 禮安)으로 歸鄕하는 선배 이현보(호 聲巖)를 마중했다.
높은 학식과 行德으로 士林의 우러름을 모은 이들은 30여 년간 선후배였으며 뜻을 같이 하는 특별한 사이로, 여기 고갯길에서 盃盤의 자리를 베풀어 회포를 나누었으니, 다음은 그 두 분이 읊은 詩이다.
草草行裝白首郞: 초라한 행장을 한 머리 쉰 사나이가
秋風匹馬嶺途長: 가을바람 불 때 죽령 먼 길을 말 타고 가는데
莫言林下稀相見: 나무 밑에 모처럼 만난 사람과 말하지 말라
落葉歸根自是常: 낙엽이 떨어져 뿌리로 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이현보
飄飄歸興趁漁郞: 나부끼며 돌아가는 어부같이
直沂驪江玉帶長: 바로 긴 한강을 거슬러 왔네.
今日竹領回首意: 오늘 죽령으로 돌아온 뜻은
乾坤萬古是綱常: 천고만고의 강상이 아니랴.- 주세붕
※ 주세붕(1495~1554)의 스토리는 영덕의 망일봉에도 시가 있는데 조선 전기의 학자로 오륜가를 남겼으며 우리나라의 최초의 서원 백운동서원을 세웠고 그리고 자생 주산지 풍기 산삼을 재배(우리나라 최초)에 성공하여 민초들이 산삼 공납량을 해결하였는데 산삼 자생지역(평창군 및 산촌마을)에서는 공납량 채우려고 민초들이 큰 고심을 하면서 많은 고통을 받았다
• 오륜가
사람 사람마다 이 말씀을 들으려므나
이 말씀 아니면 사람이라도 사람 아니니
이 말씀 잊지 않고 배우고야 말 것이니라 <제1수>
※ 李賢輔(1467~1555)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시조 작가. 호는 농암(聾巖) 설빈옹(雪靈翁). 1498년(연산군 4) 식년 문과에 급제, 76세 때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둘 때까지 내외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조선 전기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농암집” 외에 고려 가요 “어부가”를 장가 9수, 단가 5수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 “농암가” 등의 시조 작품 8수가 전한다
漁父歌- 이현보
이 중에 시름 없으니 漁父의 生涯로다
一葉片舟를 萬頃波에 띄워 두고
人世를 다 잊었거니 날 가는 줄을 알랴.
굽어보면 千尋綠水 돌아보면 萬疊靑山
十丈 紅塵이 얼마나 가렸는고
江湖에 月白하거든 더욱 無心하여라.- 이하 생략-
• 퇴계의 수제자 趙穆도 넘으면서 시를 남겼는데-
“장림에 숲이 자라지 않고 죽령에 대나무가 없는데, 실제로 없는 것들을 어 찌 인간들이 장림과 죽령이라 했나”-이라고 시를 지었다.
原文: 長林無長林 竹嶺無竹嶺 大抵實不存 人間幾林嶺
※ 퇴계와 온계 형제의 형제애
棧雲臺ㆍ矗泠臺
明宗 3~4년(1548~1549) 풍기군수 李滉,(號 退溪)이 그 仲兄 해(瀣, 호 溫溪)를 마중하고 배웅하던 자리다. 퇴계의 형 온계는 그 무렵 충청감사로 있으면서, 말미를 얻어 고향 마을 예안에 다니는 길에 매양 퇴계는 酒肴를 마련하여 여기 죽령에서 마중하고 배웅했다. 퇴계는 이 고갯길 경치 있는 한 굽이를 다듬어 형제의 우애를 즐길 자리로 동ㆍ서 두 대(대)를 쌓았으니, 동쪽을 棧雲臺, 서쪽을 矗泠臺라 했다. 棧雲이라 함은 저 成宗조의 학자 명신 兪好人의 詩 “竹嶺行百盤 棧道浮雲邊(서리 서리 죽령길 높기도 해라. 가파른 사다릿길 구름에 닿네)”에서 취함이요, 「촉령(촉령)」이라 함은 같은 때의 학자 김종직(김종직)의 “雲根水矗矗泠泠(구름은 삐죽삐죽 물소리 시원)”에서 취함이다. 여기서 읊은 퇴계 형제의 시가 전한다. -
爲破天荒作一臺 : 자연을 다듬어서 대를 꾸미니
鴒領原常苃送迎來: 감사형님 마중 배웅 위함이로세
冷冷恰似歡情溢 : 기쁘고 정겨워라 물소리 졸졸
矗矗眞如別恨堆 : 이별이 아쉬운 양 멧부린 우뚝
鴈影峽中分影日: 안영협 냇가에서 나뉜 그림자
銷魂橋上斷魂時: 소혼교 다리에서 애끓이는데,
好經嶺路千盤險: 평안히 넘으소서 험한 고갯길,
莫負明年再到期: 명년 다시 오실 기약 지키옵소서. -퇴계-
西日奄奄苦不遲: 어느덧 서산에 해는 지는데
躊躇橋上酒柬時: 술 끝나도 다릿가에 서성거리네,
雲山聽我丁口寧: 說 구름 산도 분명 내말 들었으려니
好待明年來有期: 내년에 다시 오리 기다리게나. -온계-
영주시와 영주시의 인근에는 대중가요도 많은데 “최현의 육십리 죽령고개” 는-
육십리 죽령고개-최헌
노을 진 소백산에 해가 저물고 / 방울새가 우는데/ 굽이마다 굽이마다 사연을 남겨놓고 / 돌아서며 한숨만 쉬네/ 희방사 종소리가 처량하게 / 산바람에 날리면/ 석양 길 나그네는 갈 길을 재촉하고 / 별들은 손짓 하네 육 십리 죽령고개/ 우뚝 선 장승도 이별이 싫어 / 소리 없이 우는데
그리고 다음과 같은 노래도 있다
• 소백산 아리랑
• 풍기아가씨-설운도
• 부석사 연가-유갑순
• 순흥 아가씨- 홍인숙
• 내 고향 영주- 박수미
죽령루에서 내려와서 嶺南關門竹嶺 표석에 눈짓하고 선비의 고장 영남으로 행로를 잡으면 옛길은 백두대간 도솔봉 푯말에서 밑으로 갈라지면 길이 큰돌이 박혀 험하니 매우 조심스럽게 걸어야 한다 그리고 산림이 우거져 햇빛도 스며들지 못하니 덩굴식물들이 어우러져 있다
• 죽령예실 덩굴 식물
1, 청가지 덩굴 2. 으름 덩굴 3. 노박 덩굴 4. 인동 덩굴 5. 칡 덩굴
6. 종 덩굴
데크가 설치되어 있고 야자매트도 깔렸다 그리고 곳곳에 안내문과 Story Telling아 았다
※ 안내문과 판넬
• 무쇠달 마을의 유래
• 죽령의 개척자 竹竹
• 죽령의 산신 “다자구 할머니”
• 죽령 옛길은...
• 선종이 보인 이변
• 침략과 수탈의 죽령
• 퇴게 선생과 온계선생의 애틋한 형제애
• 죽령옛길과 온달
안내도와 판넬 내용은 정확해야 하는데 가끔 시비가 있다 "죽령길의 개척자 竹竹"의 내용은 죽령길을 처음으로 열은 사람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158년에
신라의 竹竹으로 되어 있는데 어느 사람은 삼국사기에는 죽죽이 열어다는 내용이 없고 열전에만 죽죽 이름이 보인다고 말하고 그리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죽죽이 열었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하니 누구 말을 믿어야 할 까- 정확했으면 좋겠다
과수원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영주의 사과 맛은 알려젔다 과수원을 벗어나면 돌탑 3개가 보이고 중앙고속도로와 중앙선 철로를 지나면 소백산역은 500m라는 푯말이 있다
15시35분
희방사역(소백산역)에 도착하니 파김치가 되지만 역 근처에 장승들이 몇 개 보이는데 영주시에는 우리나라에서 장승이 가장 많다고 한다 나 때문에 풍기로 가려던 것을 단축하고 풍기에서 15시51분에 발차하는 기차를 타야하기 때문에 먹거리집을 찾을 수 없이 열차를 타야 했지만 죽령옛길(소백산자락 3코스)을 완주하니 평소에 걸어봐야지 하던 소원이 이루어졌다
동행들에게 고마움과 감사함을 잊지 않을 것이다 柳方善(1388~1443)은 죽령을 넘으면서 태재집에 죽령시를 남겼는데 그의 문하에는 서거정 한명회 권람 강효문등이 있었고 영남성리학의 학퐁을 후데에 계승 발전 시켰으며 죽령을 넘으면서 서거정은 소백산을 읊었다
竹嶺- 柳方善(1388~1443)
匹馬晨登竹嶺山: 필마로 죽령의 산을 새벽에 오르니
憑高半日暫盤桓: 높은 곳에 의지해 반나절을 잠시 머뭇거리네
己知行止皆綠命: 이미 가고 멈추는 것이 모두 인연임을 알았으니
當把吾生且自寬: 마땅히 나의 삶이 또한 스스로 편안하네
끝으로 영주시 문수면 무섬로 234번길 31-12에 무섬마을에 조지훈의 시비가 있고 “별리”의 시가 있다
別離- 조지훈
푸른기와 이끼 낀 지붕너머로
나즉히 흰 구름은 피었다 지고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초록 저고리 당홍치마 자락에
말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
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 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가고
방울소리만 아련히
끊질듯 끊질듯 고운 뫼아리
발 돋우고 눈 들어 아득한 연봉 바라보나
이미 어진 선비의 그림자는 없어
자주고름에 소리 없이 맺히는 이슬방울
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
원앙침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꼬
꾀꼬리 노래하던 실버들 가지
꺽어서 채찍삼고 가옵신 님아
※ 옛길 단상
문경에는 옛길 박물관이 있다
• 대관령 옛길 • 미시령 옛길 • 죽령 옛길 • 구룡령 옛길 • 산막이 옛길
• 경기옛길(의주로 삼남로 영남로) • 문경새재 • 무등산 옛길 • 기장 옛길 (동래)
• 한티재 옛길(낙동정맥 12구간) • 금강산 가는 길 옛길(양구)
• 송정 옛길 • 만리재 옛길 • 남태령 옛길 • 구수천 팔탄 천년 옛길(상주)
죽령 옛길을 걷고
소백산목석공예 앞에서
696m 고개를 넘어
희방사역 까지 15Km
옛길을 걷는 다
죽령천의
맑은 물은
죽령폭포를 만들고
나뭇잎새들은
짙어져서
햇빛도
스며들지 못한 다
데크가
조성되었고
야자매트도
산길을 덮었다
멧돼지
출현지역에는
위험을 알리는
종이
가끔씩 달렸다
한양
버슬살이 접고
고향으로 낙향하며
이현보도 넘었고
퇴게선생의
으뜸 제자
趙穆 선생은
“長林無長林
竹嶺無竹嶺”
詩를 남겼지만
길손은
무엇을 남길 가~
2020년6월16일 화요일 맑음
竹嶺樓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
높이 696m
고갯마루는
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시를 가르고
정자에 올라
다리품 풀며
풍기읍을 조망하면서
옛 상념에
젖으면
터덜터덜
영남의 선비들
청운의 꿈을 품고
과거를 보러 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선비들
구름도
쉬어가는 소백산
아흔아홉 구비
허리를 돌고
나그네와
보부상들의
숱한 애환이 숨쉬는
영마루
정자에 올라
나는
산야도 조망하지만
이 고개를 넘은
옛님들을
떠 올린 다
나는
이제 돌아가지만
樓는 억만년을 남을 거- 2020년6월16일 화요일 맑음
竹嶺
뒤쪽에 잣나무 숲
앞쪽에 낙엽송 숲
령 마루엔 옛 길도 남았거니
죽령주막도 있다
아흔아홉
구비-구비 도는 고갯길
천년이 자났거니
또
천년이 닥아 온다
신라 아달라왕
5년 서기 158년
竹竹이 개설 코
고구려 신라의
국경 요새로
빼앗고 뺏기고
바보 온달 장군
이야기도
“다자구”야 “들자구”야
할매 전설도 있다
경상도 선비
청풍명월 고장 지나
한양으로
넘나들던 고개
주막집에서
막걸리 사발 기울이며 “옛 사람은 가고 흔적은 남았구나“ 탄식 합니다
2008년10월18일 토요일 백두대간 종주길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