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9장 묵상
출처 : KTSM 대표 최승호
47. 제자들에게 능력과 권위를 주심 (눅 9:1-9)
◆ 능력과 권위를 주심
(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주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능력과 권위를 주셨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없었던 것인데, 부여되는 순간에 갖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능력과 권위를 주셨다. 우리에게 있는 능력과 권위가 누구로부터 왔는지를 절대 잊으면 안 된다. 능력과 권위는 혼동되기 쉽고, 또 실제로 구별 없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구별해야 한다.
능력은 헬라어 '뒤나미스(δυναμις)'를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일을 처리하는 실제적인 힘(power)이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졌을 때 예수님에게서 빠져나간 그것이 바로 뒤나미스다. 폭발물 다이너마이트(dynamite)의 어원이 바로 뒤나미스다.
권위는 헬라어 '엑수시아(εξουσια)를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위치적인 힘(authority)이다. 백부장이 자기 하인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청할 때, 예수님이 가시자 백부장은 사양하면서 말씀만으로 고치실 것을 간청하면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눅 7:8)라고 할 때, 수하라는 말이 엑수시아다.
권위가 생기면 힘이 따라오고, 힘이 생기면 권위가 따라오는 경우가 매우 많기 때문에 종종 이 둘은 혼동해서 쓰이기도 한다. 가령 대통령이란 위치는 권위와 힘을 동시에 갖게 한다. 대통령이란 위치가 권위라면 대통령의 명령으로 움직일 수 있는 군대는 힘이다. 이렇게 권위와 힘은 종종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권위와 능력을 함께 주셨다. 귀신을 제어하는 것은 권위다. 병을 고치는 것은 능력이다. 우리가 귀신을 쫓아낼 때는 힘으로 쫓아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권위, 곧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과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제자된 권위를 가지고 쫓아내는 것이다. 자기 신분에 대한 확신이 있는 자만이 이런 권위를 제대로 행사할 수 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능력과 권위를 주셨듯이 오늘날 성도된 우리에게도 능력과 권위를 주셨다. 기본적인 능력과 권위를 알고 살 필요가 있다. 모든 성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며, 귀신을 물리칠 수 있는 권위가 있다. 그리고 세상의 어두움을 밝힐 수 있는 빛과 소금으로서의 능력이 있다.
아, 많은 성도가 자기 신분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두려워하고 제대로 권위를 행사하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별 볼 일 없어 보일지 몰라도 '이래 봬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큰소리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큰소리칠 수 있는 자들만이 귀신을 쫓아낸다. 의심에 가득 찬 자가 어떻게 큰소리칠 수 있겠는가? 자기 신분을 확신하지 못하여 주눅이 들어있고, 죄책감에 빠진 자가 어떻게 담대히 명령할 수 있겠는가? 그런 자들은 귀신을 쫓아내기 어렵다.
신분에 대한 확신이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십자가의 은혜를 믿기보다는 자기 의를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직도 자기 의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더 의를 쌓아야 무언가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나의 의를 의지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의를 힘입은 자들이다. 곧 십자가의 은혜로 당당히 선 사람들이다. 자기 의를 의지하는 자는 겸손이 아니라 불신이다. 의심하는 악한 마음과 싸워야 한다.
◆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
(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이자 특권이다. 모름지기 교회란 이 세상에 머무는 하나님 나라로서 군대로 말할 것 같으면 최전방부대와 같다.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장에서 적군과 대치하고 있는 실감 나는 전쟁터다. 후방 부대에 배치될 것을 기대하지 말라. 후방 부대는 죽어서 가는 곳이다.
전방 부대의 가장 큰 역할은 잘 싸우는 일이다. 즉 교회의 가장 큰 의무는 자기 편 군사들을 보호하는 것과 더불어 잘 싸워서 적편의 군사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곧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데리고 오는 것이다.
복음 전파는 우리 성도들의 최고의 사명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기회를 얻든 못 얻든 복음을 전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꼭 길거리 전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터넷 댓글로도, 카페 글로도, 블로그로도, 친구들의 말을 들어줌으로써, 간증함으로써... 수많은 다양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우리 신앙도 빈약해진다. 직접 전도하기 어려우면 제대로 선교하는 곳에 헌금이라도 하라. 헌금도 어려우면 기도라도 해라. 그것도 거절한다면 당신은 하나님 나라 시민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셨다(2).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주신 사명이다(마 28:19-20). 복음을 전하고, 상처난 자들을 위로하며 낙심한 자들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주님, 복음의 일꾼으로서 불러주심을 감사합니다. 성도에게 주신 능력과 권위를 감사드립니다. 침묵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제 신앙이 진실하게 해주십시오.
48.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심 (눅 9:10-17)
◆ 무리를 영접하심
(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열두 사도들이 각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고 돌아오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가셨다. 여기에서 '따로'(10) 라는 말은 무리와 분리하여 제자들과만 시간을 가지려고 한적한 곳을 찾으셨다는 의미다. 제자들과 예수님은 종종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막 3:20).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에서 예수님께서 조용한 시간을 가질 만한 장소는 없었다. 광야에 나가면 거기로 몰려왔고, 산속에 머물면 거기로 몰려왔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한 번도 역정을 내시거나 지겨워하지 않으셨다. 오늘 본문에서 '그들을 영접하사'(11) 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님, 이러한 주님의 온유하심과 너그러우심을 제가 배우게 해주십시오.
탕자가 이것저것 변명할 것을 생각하고 아버지께로 왔지만, 아버지는 무조건 받아주었듯이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모두 받아주신다. 심히 위축되어 있는가?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께서는 자기에게 오는 자를 결코 내쫓지 않으신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아멘.
◆ 오병이어의 기적
(17)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예수님께 몰려온 무리가 남자만 오천 명쯤 되었다고 하니 여자와 아이를 합치면 적어도 칠천 명은 넘었을 것이다. 엄청난 수다. 사람들은 잠깐 모임을 하고 해산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모여들고, 온종일 머물렀으며, 심지어 며칠을 함께 한 적도 있다(막 8:2).
이들은 대부분 개인적으로 먹을 것을 준비하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먹을 것이 다 떨어지자 대부분이 굶주리게 되었다. 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면 되지만, 예수님은 굶주린 이들이 길에서 기진하여 쓰러질까 염려하셨다(마 15:32).
결국 예수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이들을 먹이셨다. 놀라운 기적이다. 기적을 믿지 않는 어떤 신학자는 이것을 이렇게 해석했다.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주변 사람들과 나누어 먹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감동하여서 꼭꼭 숨겨둔 자기 도시락을 옆 사람과 나누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제법 멋있는 해석이다. 이웃과 나누는 삶이라니!
그러나 나누는 삶이야 멋있지만, 오늘 본문에 대해서만큼은 헛소리다. 그래서야 어떻게 배불리 먹을 수 있겠는가? 오늘 본문에는 수천 명이 되는 사람들이 '먹고 다 배불렀더라'(17)고 했다. 더구나 자기 것을 나누어 먹었으면 아쉬운 마음에 도시락에 떨어져 있는 빵가루까지 싹싹 털어먹었을 텐데 오늘 본문에는 사람들이 먹고 남은 빵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었다고 했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모일 때마다 이런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공생애 기간에 이런 기적을 딱 두 번만 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매번 모일 때마다 이런 기적을 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만일 그러했다면 오히려 부작용이 더 많았을 것이다. 요한은 이 사건을 보다 깊이 있게 다루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요 6:14-15). 그리고 사람들은 생명의 말씀보다는 빵 먹으려고 예수님을 찾기 시작했다(요 6:26). 영적인 것에 관심이 식고 물질적인 관심이 폭발했다. 이러면 사람들을 많이 불러 모을 수는 있을지 모르나 결국 썩어지고 없어질 것만 쫓다가 사라질 것이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말씀하셨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 사람들은 심히 배고플 때 기적적으로 배부르게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보면 감동하고 열광한다. 그러나 물질적인 필요를 채우신 것에만 열광하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게 되고, 조금만 힘들면 원망해대는 초보적인 수준에서 못 벗어난다.
기적을 체험했을 때, 우리는 그 기적보다 그런 기적을 일으키신 주님께 더 열광해야 한다. 주님께서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더 깊이 알게 됨을 기뻐해야 한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면 그 후에는 설사 배부르지 않아도 그분의 선하심을 찬양할 수 있으며, 감사할 수 있게 된다.
주님,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주님의 능력보다, 무리를 영접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그 주님의 성품을 더 갈망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관용과 사랑이 제게 충만하게 해주십시오.
49. 나를 누구라 하느냐? (눅 9:18-26)
◆ 하나님의 그리스도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이 묻자 베드로는 명확하게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The Chirst of God)"
우리나라 말에는 정관사가 안 나와 있지만, 원어에는 정관사가 붙어있다. 그리고 영어는 명확하게 사용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 A Christ)'가 아니라 '그 그리스도(The Christ)'다.
참된 성도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기준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이다. 세상은 예수님에 대해 나름대로의 평가를 한다. 위대한 선생이니, 혁명 청년이니... 그러나 우리는 명확하게 고백한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내내 예언된 그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는 이 고백에서 어떤 양보도 타협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귀는 너무나 그럴싸한 궤변으로 이 사상을 흐트러 놓았다. 자신도 인류 평화와 고통받는 자를 위해 죽으면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멋진 말 같고 그 사상을 따르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을 것처럼 말하지만, 궤변이다. 세상은 내가 그리스도가 되어야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유일한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 앞에 굴복해야 아름다워진다.
일부 사람들이 어설프게 그리스도 흉내를 낸다. 제법 의를 위해 사는 것처럼 거들먹거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름을 꽤 과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자랑이 '의'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 것일 뿐이다. 성경에서 말씀하셨듯이 인간의 의란 더러운 옷과 같고(사 64:6), 음식 쓰레기 냄새보다 더 역겹다.
욥처럼 탁월하게 의로운 자도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에 대한 자만과 건방짐을 깨닫고 회개했을진대 하물며 욥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당신이 자기 의로 그리스도가 되어보겠다는 것이 어찌 가당하겠는가? 모름지기 성도란 그리스도가 되려고 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건방 떨던 내가 죽고 예수님을 유일한 그리스도, 곧 나의 왕으로 받아드림으로써 구원을 얻은 자들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실 때, 비로소 나는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고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 있다.
주 예수여! 온 세상이 이구동성으로 예수님의 유일성을 부인하고, 마귀가 떼창을 하며 예수님을 대적해도 저는 주 예수님께서 저의 유일하신 구주이시며 왕이심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 제 삼일에 살아나심
(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의 부활에 모든 기독교의 운명이 걸려있다. 부활이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불교보다 못한 수준 낮은 종교다. 그러나 부활이 역사적인 사건이라면, 세상의 모든 철학과 종교는 한낱 잡소리일 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며칠 만에 부활하셨는가가 의외로 논쟁이 많다.
마가복음에는 주님께서 '사흘(three days)만에 살아날 것'(막 8:31)이라고 하셨는데, 누가복음에는 '제삼일(he third day)'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후에 돌아가시고,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다. 엄밀히 따지자면 48시간도 채 안 된다. 이것이 팩트다. 누가는 이것에 대해서 누가복음 24장 21절에서 다시 한번 부활이 사흘째(the third day)임을 시사한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밤낮 사흘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요나를 예로 드셨기 때문에(마 12:40) 예수님도 그리하셨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예수께서 수요일에 돌아가셨다느니, 목요일에 돌아가셨다느니라고 주장한다. 만일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돌아가시고 일요일에 부활하셨다면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 틀린 것이 되지 않는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종종 사용하시는 관용적 표현일 뿐이다.
가령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으리라'(마 24:2)는 말씀이 정말 돌 하나가 돌 위에 있으면 틀린 말씀이 되는가? 아니다. 그것은 철저히 파괴될 것임을 의미하는 관용적 표현일 뿐이다. 성경이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는 말을 그런데 적용하면 안 된다. 사람들은 학창시절에 단 하나의 예외 때문에 틀려 버렸던 수학 시험 트라우마가 있다.
성경에서 우리는 소통언어에 팩트 여부를 따지면 안 된다. 지나친 문자주의를 따르는 해석가들이 종종 그런 오류를 범한다. 그들의 논리를 따르게 되면 성경이 맞기 위해서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아야 하며(시 19:5,6). 지구는 평평해야 한다(잠 30:4).
◆ 자기를 부인하고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을 금욕이나 극기라고 오해를 하는데, 아니다. 그런 것은 힌두교나 불교의 수도자들이 더 탁월할 것이다. 그런 자들을 만나 보면 자신이 못 박혀있는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더 살아있다.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진정한 의미는 자기 의, 자기 영광, 자기 자랑에서 죽어버림을 의미한다. 더는 잘난 체하지 않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엡 2:9).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추구하며, 주님의 영광에 장애가 되면 과감히 버리는 것이 제대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다(골 3:1-5).
오늘 말씀은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기가 막힌 진리의 말씀이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시면서, 진정으로 자기를 얻으려면 자기를 잃으라고 하신다. 목숨을 얻고 싶으면 목숨을 잃어야 한다고 하신다. 육신적 자아를 버림으로써 영적이 자아를 얻고, 육신적 목숨을 버림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이 놀라운 원리를 어떻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없이 이룰 수 있겠는가?
오, 주 예수님. 주님께서 유일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저를 잘난 체에서 건져주십시오.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싶어 하고 자랑에 찌든 제 영혼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제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해주십시오.
50. 예수께서 용모가 변화되시다 (눅 9:27-36)
◆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
(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지금 열두 제자들과 함께 있다. 그런데 이들 중에 하나님 나라를 볼 자가 있다고 하셨다. 이 말씀을 제자 중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살아있는 자가 있을 것임을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누가는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라는 말을 함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이 재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팔일 후에 일어날 사건을 가리킴을 암시하고 있다.
나라는 언제 성립하는가? 단순히 백성이 모여있다고 나라가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백성을 통치하는 왕이 나타날 때 비로소 나라가 성립한다. 애굽에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모여 살았어도 나라가 아니었다. 홍해를 건너고 광야에서 따로 모여 있었어도 나라가 아니었다. 율법이 주어지고,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고, 그림자였다면 이제 진짜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그 나라의 왕이 나타나셨다. 그분이 누구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하나님 나라의 왕
(29-30)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예수님께서 제자 중에 셋만 데리시고 산 위로 올라가셨다. 이 산이 어느 산인지 모르나, 사람들은 예수께서 변화되셨다는 이유로 '변화산'이라고 부른다. 학자들은 갈릴리 부근의 '다볼산'일 것으로 짐작한다. 그 산에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용모가 변화되어서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며,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모세와 엘리야는 이스라엘에서 절대 비교불가인 대표적인 선지자들이다. 모세는 율법을 전해주었고, 엘리야는 각종 능력을 보여주고, 불병거타고 승천했다. 이 둘은 판단 대상이 아니라, 판단 기준이었다. 즉 이 둘을 비판함은 스스로가 이단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둘과 대화를 하고 계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예수께서 진짜 구약성경에서 말해온 그 그리스도가 맞으며, 하나님나라의 왕이심을 확증하는 것이다! 더구나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는데,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을 '택함을 받은 자'라고 하니 마치 수많은 사람들 중에 특별히 선택된 자인듯한 뉘앙스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우리로서는 헬라어 Nestle판을 근거로 번역한 개역개정성경이나 NIV보다는 헬라어 Stepen판을 근거한 번역한 킹제임스버전(KJV)의 '사랑하는 자(Beloved)'가 더 잘 적절하다고 보여진다.
왕이 오셨다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확증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서 진짜 왕이심을 목격함으로써 이 땅에 정말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확인했다. 사람들에게 보여진 당장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지극히 초라하고 작아보이지만, 다니엘의 환상에서 보여주었듯이 이 왕이 세운 나라가 결국 온 세상을 깨부술 것이다(단 2:34-35).
예수께서는 이 광경을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지시하셨다(마 17:9).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일, 곧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어떤 장애나 방해도 받으면 안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이 모든 것을 만천하에 공개할 것을 지시하셨다(행 1:8).
후에 베드로는 말년에 쓴 서신서에서 예수께서 일으키신 수많은 기적보다 이 광경에 더 충격받았음을 시사하는 글을 남겼다.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벧후 1:17-18)
나는 이런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 종종 사람들은 어머니의 은혜를 노래하지만, 내가 우리 어머니의 은혜에 가장 감사하는 부분은 나를 교회로 데려가서 예수 믿게 하신 것이다. 그게 너무나 고맙다. 그리고 내 자녀들에게도 이와 같은 복을 받게 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다.
주님, 저를 구원하시고, 하나님 나라 백성을 삼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의 통치를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 함께 싸우고 함께 고난받으며, 함께 영광을 누리는 자로 살게 해주십시오.
51.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눅 9:37-45)
◆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4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제자 셋과 변화산에서 하룻밤을 지내시고 내려오시자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고 소동이 있었다. 어떤 사람의 외아들이 귀신 들려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제자들이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은 한탄하셨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이 말씀은 무리를 향하여 하신 말씀일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일까? 당연히 제자들에게 하신 책망이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 '패역'은 '도리에 어긋나고 순리를 거스름'이란 의미다. 예수님의 제자 된 도리로서 마땅히 귀신을 쫓아내야 하건만, 그러지 못하는 것은 패역이다.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만 직무 유기가 아니라 하지 못하는 무능함도 직무 유기다.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41)
44절에서 주님께서는 곧 세상을 떠나실 것을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 이제 이 모든 사역의 온전한 몫을 제자들이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렇게 무기력하게 살면서 주님이 직접 해주시기만을 바라야 하는가? 주님만 의지하고 사는 것이 이런 무능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제자들은 왜 귀신을 못 쫓아내었는가?
제자들은 왜 귀신을 못 쫓아내었을까? 예수님의 이들의 문제를 단번에 짚어내셨다. '믿음이 없고 패역'했기 때문이다. '패역'은 헬라어 '디아스트렙포'를 번역한 것인데, 그 의미는 왜곡하고 어그러지게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총독에게 전도하자 엘루마라는 박수무당이 예수를 못 믿게 하려고 힘썼다. 사도 바울은 그 엘루마를 향해서 '마귀의 자식이요, 의의 원수여, 주의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책망할 때 '굽게 하는'이 '디아스트렙포'다(행 13:10).
모름지기 제자란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흔들리지 말아야 하건만, 오히려 마귀가 주는 의심을 더 신뢰하고 심약한 마음을 가질 때 그는 '패역한 자'가 된다. 마치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을 더 신뢰했듯이 진리에 서 있기보다는 자기의 감정이나 주변의 환경이나 세속적인 이론을 더 신뢰할 때 주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자'라고 호통을 치실 것이다. 오, 이 정신이 번쩍나는 책망을 잊지 말자.
적어도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이런 책망을 들으면 안 된다. 특별한 사람만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다. 모든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 귀신을 쫓아내는 첫 번째 조건은 자신의 신분에 대한 확신이다.
아무리 부패하고 타락한 경찰일지라도, 자신의 신분이 경찰이라면 그는 범죄자 앞에서 담대해야 한다. 그가 범죄자를 무서워하고 피하면 직무 유기다. '나 같은 자가 무슨 자격으로'라는 자괴감에 빠져있으면 경찰복 벗어야 한다. 경찰이란 개인의 도덕적 자격으로 범죄자를 잡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최근에 제대로 신앙생활을 했는지 여부에 의해서 귀신을 쫓아낼 자격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성도라는 그 신분 자체가 충분한 자격이다.
학교 교사였던 어떤 청년이 학교 제자가 자기 친구가 귀신이 들렸다고 도와달라고 해서 달려갔다. 기도실에 가보니 한쪽 구석에서는 여집사님들이 모여서 이 학생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하고 있었고 다른 쪽 구석에서는 귀신 들린 학생이 히죽히죽 비웃으면서 이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가 막힌 광경이었다. 귀신은 이런 식으로 쫓아내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해서 쫓아내야 한다. 그것은 거대한 능력이 필요하지 않다. 단지 성도라는 신분만 있으면 된다. 이 청년은 건방진 귀신(?)을 향해 화가 났다. 당장 무릎 꿇으라고 소리쳤고, 예수 이름으로 나가라고 외쳤다. 그러자 학생은 쓰러졌고, 잠시 후에 온전해졌다.
누가복음에는 없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나중에 예수께로 와서 왜 자신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지를 물었다고 했다. 그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마 17:20).
자기 신분에 대해서 의심하고 우유부단한 자가 어떻게 귀신을 쫓아내겠는가? 여기에서 믿음이란 내가 '믿-씁니다' 해서 키운 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총을 진심으로 믿는 믿음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이 똑같은 질문에 마가복음에서는 다른 대답이 적혀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해석한 것이거나 주님께서 더 많은 설명을 하신 것을 추려놓은 것일 수 있다.
결국 종합해서 결론 내리자면 귀신을 못 쫓아낸 것은 믿음이 없었던 탓인데, 그 믿음을 키우는 가장 좋은 수단은 '기도'다. 킹제임스성경에는 '기도와 금식'이라고 나와 있다. 기도하면 주님을 묵상하게 되고 더욱 그분을 신뢰하게 된다. 그러므로 평소에 기도하라. 그래서 더욱 주님을 더욱 믿고 신뢰하라.
참으로 애통할 일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마귀가 넣어준 의심을 더 믿는다. 더 그럴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패역한 자가 되지 말자.
주님, 제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자가 되지 않기를 구합니다. 아쉬운 일도 많고 속상한 일도 많지만,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이 모든 것을 감사합니다.
52. 누가 크냐? (눅 9:46-56)
◆ 누가 크냐
(48)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나의 과거에서 가장 부끄러웠던 기억은 잘 난 체하고 무엇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행세한 것이다. 그것이 믿음에서 나온 신분의 확신이면 좋으련만, 세속적이고 헛된 자랑에 불과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거들먹거리고, 선생 노릇 하면서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행세하고 그것으로 형제들을 함부로 비판했다. 이 모든 것은 오늘 제자들이 다투었던 '누가 크냐?'와 뿌리가 같다. 이런 다툼은 인간 원죄의 본질 곧 '자기 자랑'과 '교만'에 기원을 둔다.
마귀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사 14:13)라고 뻐겼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빌 2:5-11).
세상 법정에서는 교만을 처벌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교만은 모든 죄악 중에서 가장 역겨운 죄로 취급된다. 교만처럼 모순된 죄성이 없다. 가령 도둑놈들은 다른 도둑놈을 크게 나무라지 않는데, 교만한 사람은 타인이 교만한 것을 절대로 용납하는 법이 없다. 반드시 야단치고 지적하며 다툰다. 자기는 모든 사람을 무시하면서 남이 자신을 무시하면 불같이 화를 낸다. 모순 중의 모순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서로 비교하는 제자들에게 정신이 번쩍나는 교훈을 주신다. 어린아이를 곁에 세우시고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당시 문화에서 어린아이란 숫자에 들지도 못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 그 오천 명이란 숫자 속에 여자와 아이의 숫자는 없었다(마 14:21). 그런데 그런 어린아이를 섬기라니?
높은 사람을 섬겨야 그 대가가 쏠쏠한데,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긴다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지치고 힘들 뿐이다.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려면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섬길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아담의 죄성에 찌든 자가 어떻게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여기에 믿음의 비밀이 있다. 작은 자를 섬김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신다. 다시 말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분에게서 오는 칭찬과 영광을 구하는 자만이 이런 말씀을 받고 그러한 삶을 실천할 수 있다.
자기 자랑을 추구하던 옛사람은 절대로 이런 삶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오직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새사람으로 사는 자만이 이런 믿음의 삶을 살아낼 수 있다.
◆ 요한의 월권
(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요한은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함께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금지했다. 요한에게는 그런 권리가 주어진 적이 없건만, 이게 무슨 일인가? 일종의 특권의식이며 월권이다. 조금만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생각하면 즉시 이런 월권행위가 나오려고 하는 모습이 내게는 없는지 돌아보게 한다.
오늘 본문에는 요한에 관련된 에피소드가 또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셨다. 변화산 부근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은 직선거리로 100km이고 현대 도로로는 대략 150km쯤 되는데, 하루에 가기에는 좀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대부분 중간에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그런데 갈릴리와 예루살렘 사이에 사마리아가 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사이가 안 좋았다.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무시하니 사마리아인도 유대인들을 무시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동쪽 요단강 쪽으로 우회해서 가고 여리고를 통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회하지 않고 사마리아를 통과하려고 하셨다.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가자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족 감정상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감정이 상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만일 내가 일본에 갔는데, 어떤 호텔에서 한국 사람이라 받아줄 수 없다고 한다면 기분이 좋겠는가? 그 호텔 망하기를 빌지 않겠는가?
요한은 감히 자신들을 무시하는 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격분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54) '우리가 불을 명하여' 참으로 기개가 하늘을 찌른다. 하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요한은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변화산에서 주님의 엄청난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으니 무서운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요한은 지금 주님을 위해서 분노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조금도 반가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요한을 꾸짖으셨다. 주님께서는 다른 마을로 가셨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거절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않으시고 양보하시고 기다릴 줄 아셨다. 후에 사마리아 사람들도 무수히 주님을 믿었다. 주님보다는 요한을 더 닮은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요한은 모든 사도보다 더 오래 살았는데, 말년에는 몹시 사랑이 많아서 사람들에게 사랑의 사도로 불렸다. 그리고 100살이나 되어서 쓴 요한복음에는 자신의 이름을 감출 정도로 겸손의 사도였다. 그런 요한도 젊었을 때(아마도 이십 대?)는 이렇게 치기 어린 행동을 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람이 요한이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바뀐다와 절대로 안 바뀐다는 것으로 논쟁하지만, 우리는 과거에 어떤 행동 하나로 그 사람이 여전히 그러할 것이라고 판단하면 안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날마다 새롭게 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믿음 안에서 어떻게 주님을 닮아있을지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주 예수님, 나를 거절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않게 하시고, 어린아이를 섬길 수 있는 겸손을 허락해주십시오. 사람들의 칭찬을 갈망하지 않고,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칭찬만을 갈망하겠습니다.
53. 제자의 도 (눅 9:57-62)
◆ 제자의 도 1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당시에 여러 사람이 예수님이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이분을 따름으로써 얻을 수많은 기회와 이익을 계산했던 듯하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한 이 서기관(마 8:19)도 다소 불순한 동기로 이러한 헌신을 고백하자 예수님께서는 단숨에 파악하시고 대답하셨다.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이 한마디로 그의 불순한 동기는 여지없이 파괴되었다.
오늘날 주님을 섬기겠다고 나선 수많은 사람 중에 순수하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자가 몇이나 될까? 나의 이익을 따지며 계산하는 순간 나는 이 서기관과 같은 수준의 사람임을 잊지 말자. 제자의 도는 이렇게 세상적으로는 아무것도 없이 사신 주님을 기꺼이 따르는 자들이 걷는 길이다. 세속적인 복을 기대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복을 생각하면서 신앙생활하자.
◆ 제자의 도 2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따를 것을 명하자 이 사람은 먼저 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아마도 방금 부친이 돌아가셨거나, 임종이 가까운 듯하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다.
주님께서 매우 매정하시다고 느껴질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알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 3년 중 마지막 해, 거의 마지막 시기에 일어났다. 예수님께 남은 시간이 얼마 없던 시기다. 모름지기 제자라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단 하루도, 아니 단 한 순간도 놓치면 안 되었다. 녹음기도 없던 시절에 현장에서 들어서 기억하는 것이 제자로서의 최고의 의무였다. 이것은 한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수 많은 사람의 영혼 구원과 관계된 것이다. 그런데 장례를 치르게 되면 일주일 정도가 소모되고, 그 사이에 하나님의 아들의 교훈은 놓칠 것이다.
또한 공생애 초기에는 예수님은 숙소가 있었지만, 그 후에는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머리 둘 곳도 없이 정처가 없으셨다. 핸드폰같이 특별한 전달 수단도 없던 시절에 한 번 헤어지면 정말 만나기가 어려웠다. 예수님을 찾다가 만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우선순위라는 것이 있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 도중에 모친 사망을 전달받았지만, 장례식에 참여할 수 없었다. 우리 민족 중에서 그것을 매정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당시 제자들이 이런 긴박감을 가졌어야 했다고 믿는다. 예수님은 수십 년 동안 이 땅에 머무실 분이 아니라, 이제 겨우 몇 달 후에 하늘로 돌아가실 분이시다. 순간순간이 천금 같은 시간이었고, 제자라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단 한마디라도 놓치지 말고 잘 기억해야 하고 당장 하시는 명령도 열심히 수행해야 할 때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아버지 장례 치르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달라든가, 가족들에게 작별할 시간을 달라는 것은 한가한 소리다. 아버지의 장례도 중요하고, 가족들과의 작별도 중요하지만, 당장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가 다가오는 예수님에게는 그들을 기다려줄 시간이 없으시다. 지금 당장 주님을 따르는 것이 장례식보다 작별하는 일보다 백 배, 천 배 더 중요하다.
오늘 본문에는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라'(60)고 하셨는데 마태복음에서는 '너는 나를 따르라'(마 8:22)고 기록되어있다. 이것은 같은 의미다. 하나님 나라를 전하려면, 하나님 나라를 배워야 하고,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가능하다. 무조건 예수님과 함께해야 한다.
'죽은 자들로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장례를 치르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 나라를 아는 너는 지금 하나님 나라를 위해 드려져야 함을 명령하심이다.
우선순위를 아는 자가 진정한 제자다. 그러나 이런 당시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무조건 교회 일을 우선으로 하여 수련회 참석하느라, 또는 교회 모임 때문에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다는 식의 적용은 곤란하다.
◆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뒤를 돌아보는 것은 여전히 세상 일에 미련이 남아서 주님의 일에 미적대는 모습이다. 주님을 따르려면 단호하게 끊어야 할 일이 많다. 먹고 사는 문제, 진로 문제, 사람과의 관계 등 모두 중요하지만, 우리는 우선순위를 잊으면 안 된다. 만일 직장이 내 신앙에 장애가 된다면 굶어 죽을지언정 그 직장을 다니면 안 된다. 만일 친한 친구가 내 신앙에 방해가 된다면 절교도 어쩔 수 없다. 우리에게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우선순위와 가치가 있다. 주님을 따를 때는 단호해야 하고, 우유부단하면 안 된다.
세상일 다 처리하고 나서 시간이 남으면 주님의 일을 고려해보겠다는 사람에게서 무슨 제자의 모습을 보겠는가? 인터넷의 오만 가지 기사를 다 읽고 난 후에도 시간이 남으면 말씀을 보겠다는 사람에게서 무슨 신앙을 기대하겠는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내 인생 속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다시금 깨닫고 결심하게 된다.
주님, 제게 최우선순위가 주님이며, 하나님 나라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매 상황에서 우선순위를 구별하고 적용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세상 사람 눈치를 보느라 타협하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