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정리: 2003.7.17
04:38구례구역-05:10의신마을-05:50삼정마을-06:10이현상격전지-07:15삼정갈림길-07:40벽소령골-08:00신설교-08:25벽소령대피소-09:00출발-09:55선비샘-11:00망바위-11:05칠선봉-11:25영신봉-11:30세석대피소-13:15출발-14:50한신폭포-15:00오층폭포-15:20한신지계곡 갈림길-16:00백무동
지난번 산행에 이어 의신으로 산행 들머리를 잡았다. 동료 1명이 지리산에 입문하는 첫 산행이라 코스가 비교적 쉬운 벽소령으로 오르기로 한다. 구례구역에서 콜밴으로 의신마을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5시. 날은 이미 밝았다. 삼정마을까지 이동하려고 했으나 몸도 풀 겸 의신에서 출발한다. 의신에서 삼정마을까지는 약 3km 정도이며 길은 비포장으로 40여 분 소요된다. 최근 들어 조금씩 포장공사가 끝나 콘크리트 길이 이어진다. 아마 조만간에는 완전 포장이 될 거 같다. 그러면 삼정마을뿐만 아니라 빗점골 합수 내까지도 쉽게 오르게 될 것이다.
이른 아침을 맞이한 조용한 삼정마을을 지나면서부터 본격적인 지리산행이 시작된다. 만약 벽소령 작전도로를 버리고 삼정마을로 오르면 언덕마루까지 40여 분간을 비지땀을 줄줄 흘려야 한다. 오늘은 이곳으로 처음 산행을 하는 동료들과 빗점골 이현상 격전지를 들러볼 요량으로 벽소령 산판도로 쪽으로 향한다. 의신마을을 출발한 지 한 시간이 지나서 이현상 격전지에 도착한다. 어두컴컴하고 웃자란 산죽을 헤치고 나니 거대한 너덜지대를 만난다. 수없이 널브러져 있는 돌 들. 이곳에서 전설적인 빨치산 총수 이현상이 최후를 마쳤다.
이현상은 박헌영, 김삼룡, 이주하, 이승엽의 뒤를 이어 남로당 서열 4위로 유일하게 빨치산과 동고동락을 하였다. 그런 당의 고급간부가 빨치산과 산중생활을 하니 존경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박헌영이 북한에서 김일성에게 숙청된 후 이현상은 평당원으로 강등당해 백의종군하면서 어떠한 생각을 하였을까. 자신과 남로당을 괴멸한 김일성을 위해 빨치산 활동을 계속해 나갈 의욕과 에너지가 있었을까. 이현상은 김일성의 남로당 숙청과 함께 이미 자신의 운명도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빨치산들은 다만 김일성의 소모품이었다. 휴전협정에 빨치산 문제가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것이 이를 여실히 증명해준다. 후에 김일성은 평양 열사 능에 이현상의 묘를 그럴듯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현상 동지 남조선혁명가 1905년 9월 27일생 1953년 9월 17일 전사". 아마 선전효과를 노린 듯하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현상의 월북한 무남독녀를 특별히 보살펴 주는 인정을 보이기도 한다. 딸 이상진 씨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같이 김일성대학을 나왔으며 현재 그의 배려로 북한에서 최고위층으로 건재하다.
빨치산들이 자주 이용하던 루트 토끼봉 쪽으로 오르는 왼골은 오늘도 수많은 물을 쏟아내고 토해내며 비경을 연출한다. 빗점골 합수내에서 맛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다시 작전도로로 나와 벽소령 대피소를 향해 출발한다. 이 작전도로는 지금부터 30여 년 전 만들어졌으며, 지리산 빨치산 토벌 때 많은 고생을 한 군당국이 효율적인 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것인데 지금은 곳곳에 쓰러진 축대와 커다란 돌덩이들이 구르고 무너져 내려 점차 옛날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애를 쓰고 있다. 산등성이를 굽이굽이 한참을 돌고 돌아 삼정마을로 곧장 하산하는 길목에는 이정표가 서 있다. 이현상 아지트 2.3km, 벽소령 3.5km, 삼정 1.2km. 그러니까 이현상 격전지를 경유하고 이곳까지 오는 데는 약 3km 정도를 우회하며 더 걸었다. 이곳서부터는 정말 편한 길이다. 주능에서 비상 탈출로로 산님들이 간혹 이용하며 평상시에는 이곳으로 오르는 산님들은 별로 없다. 계곡의 물소리가 커졌을 때 도착한 곳이 덕평봉과 벽소령에서 발원한 벽소령 골. 평상시와 달리 제법 많은 수량의 물들이 흘러 내린다.
이곳부터 벽소령 대피소까지 40여 분간은 꼼짝없이 구슬땀을 흘리며 치고 올라야 한다. 지금까지 널널한 산행을 해왔던 대가로 누구도 면할 길이 없다. 화개장터에서 벽소령까지는 50여 리의 길로 장꾼들이 장터목과 화개재처럼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 조금 오르니 마지막 이정표를 만난다. 벽소령 대피소 0.7km. 거리는 짧지만 상당한 힘과 시간이 소요된다. 앞을 바라보니 그동안 못 보던 나무다리가 설치되어 골짜기를 건너고 우측으로 너덜 길이 진행된다. 지리산을 처음 찾은 임 선생은 얼굴이 노래지기 시작하더니만 다리의 근육통을 호소한다.
정면을 바라보니 싱그러운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빛을 발산하며 벽소령 안부가 보인다. 호랑이와 뱀의 전설을 간직한 범뱀샘에서 목을 축이고 식수를 확보하고 종주 길에 나선 학생들이 진을 치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벽소령 대피소 앞마당에 도착한 시간은 의신마을을 출발한 지 3시간 반이 지난 오전 8시 30분이다. 온통 구름바다를 이룬 마천과 중북부 능선의 삼정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담는다. 튀김과 과자를 안주 삼아 소주 한 병을 게눈 감추듯 비운다.
한 달여 년 전에 걸었던 주능 길을 다시 걷는다. 덕평봉으로 오르면서 바라본 토끼봉 능선과 불무장등 능선, 왕시루봉 능선이 장관이다. 뒷당재-앞당재-느진목재가 일직 선상으로 배열되어 풍광이 근사하다. 선비샘에서 잠시 피곤한 다리를 위로하고 길을 재촉하는데 임 선생이 무척 힘들어한다. 칠선봉과 영신봉을 넘어야 하는데 걱정이다.
칠선봉을 앞두고 망 바위에서 조망하며 시간을 보낸다. 저 멀리 남쪽으로 섬진강이 눈에 들어올 듯 잡히고 백운산도 시야에 들어온다. 삼신봉에서 원강재를 넘어 악양의 성제봉이 우뚝 솟았다. 그리고 가까이 칠선봉이. 그 너머에는 영신봉과 촛대봉. 그리고 연하봉과 장터목, 제석봉, 천왕봉, 중봉, 하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이 장관이다. 첩첩산중이라 했던가. 이처럼 광활한 지리산에 올라 조망을 하며 봉우리를 더듬고, 골짜기를 헤아리는 것은 신바람이 나고 가슴 설레는 일이다.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최석기)’을 읽어 보면 김종직은 함양군수 시절 40세 초반에 많은 일행을 거느리고 시중을 받으며 천왕봉에 올랐다. 그 가운데 같이 갔던 해공이라는 중이 동서남북을 헤아리며 28개의 산봉우리를 김종직에게 알려주는데 그 중의 조망을 하는 식견이 가히 놀라울 뿐이다. 김종직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른 이 지리산행에서 유람기인 유두류록(流頭流錄)을 남겼으며, 그 산행기는 보석 같은 글로 옛 선비들의 사상과 자기 수양적 성찰을 자연을 통하여 얻으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남명 조식은 "산을 보고 물을 보고 그리고 인간을 보고 세상을 본다."라고 하였다.
망 바위에서 일행들의 점심 준비를 위하여 홍 선생과 세석까지 빠르게 치고 나간다. 칠선봉에서 영신봉까지는 난코스. 칠선봉에서 영신봉까지 급격하게 80m의 고도를 높이기 위하여, 밧줄을 잡고 바위를 오르고, 200여 개의 나무계단을 차고 올라야 한다. 나무계단을 오를 때는 계단 한 칸마다 굵은 땀방울을 한두 개씩 찍는 흔적을 남기고서 영신봉에 올라설 수 있었다. 영신봉에서는 반야봉을 핵으로 한 서부의 지리산을 한눈에 보여 주는데 조망에 관한 한 언급이 필요 없을 듯하다.
우리가 세석대피소에 도착했을 때는 11시가 못 되어 쉽게 자리를 잡고 중식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샘터에 내려가 물 한 짐을 지고 올라와 점심 준비를 완료하니 그제야 일행들이 도착한다. 세석에는 제법 바람이 불어 재킷을 꺼내 걸친다. 얼큰한 찌개를 끓여 안주 삼아 소주잔을 주고받는다. 천왕봉을 향하는 종주 길에 나선 대학생들이 점심으로 라면을 수십 개를 꺼내 놓아, 그것을 바라보며 웃음을 짓는다. 오후 1시가 조금 넘어 한신계곡으로 하산한다.
한신계곡을 처음 알았던 것은 18년 전 5월이었다. 총각이었던 나는 그때 같이 근무했던 동료 1명과 여선생 3명을 팀으로 꾸려 지리산 종주를 시작했는데 뱀사골에서 1박을 하면서 비를 만났고, 연하천 산장 앞에서 2박째를 보냈는데 역시 비를 맞았다. 텐트 1동에 모두 들어가 혼숙을 했는데, 플라이를 두드리는 빗소리를 음악 삼아 들으며 밤을 지새웠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행복하고 소중했던 시간이었다. 이제 모두 40대 중년이 되었다. 다음날 벽소령을 지나 세석에 도착한 후 천왕봉을 오르지 못하고 한신계곡으로 어렵게 하산을 하여 백무동에 도착했고, 민박집에서 3박을 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아련한 과거다.
주 능선을 넘어서 가파른 초입을 한참을 내려서야 길이 양호해진다. 급한 협곡인 한신계곡은 비가 내릴 때마다 파헤쳐져 상류 쪽은 많이 손상되었지만, 하류로 내려갈수록 멋진 비경을 열어 놓는다. 두려울 정도로 검푸른 소(沼)와 담(潭). 급한 물살로 내리꽂는 폭포수. 우거진 원시림. 한신계곡은 폭포가 많은 지리산의 대표 골짜기로서 그 위용을 마음껏 뽐내고 있다. 동료들은 그 풍광에 감탄사를 연발한다.
한신폭포를 지나면서 길은 무척 얌전해진다. 오층폭포 아래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탁족한다. 계류에 담긴 발은 그 차가움에 전율을 느끼게 한다. 지리산의 계곡물은 어디나 이렇게 수온이 낮다. 그러다 보니 겁 없이 뛰어들다 심장마비를 일으켜 목숨을 일으킬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한신 지계곡과 작은새골 갈림길을 지나면서 지프로 통행이 가능할 정도로 길은 신작로이다. 백무동 야영장은 매점 위로 또 한 곳이 새로 단장되었고 휴일을 맞이하여 많은 사람이 계곡 가에 몰려 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다.
주능 쪽을 바라보니 비구름이 몰려온다. 아까 세석대피소에서 오늘 오후부터 많은 비가 예상되어 하산 권유 안내방송을 내보내기도 하였다. 배차시간을 알아보니 인월까지 나가는 완행버스가 30여 분 후에 있다. 막간을 이용하여 도토리묵에 하산 주를 마신다. 버스 뒤창 가에 앉아 멀어져가는 지리산정을 바라본다. 우리가 인월에 도착하니 어두운 잿빛 하늘에서 굵은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상쾌하다. 남원역전에 도착하여 단골 목욕탕에서 몸도 닦고, 콩나물국밥을 먹고 났을 때도 비가 뿌리고 있어 우리들의 마음까지도 촉촉이 적셔 주었다. 쾌적한 새마을호에서 찻장 밖의 들녘을 바라보며 마셨던 캔맥주의 미각은 이번 산행과 함께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