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제16대황제 소종 황후는 광산김씨
元나라 제16대황제 必里秃皇帝(昭宗)의 황후(皇后)는 광산김씨.
- 문숙공(휘 周鼎)의 次子인 시중공(휘 流)의 次子, 판도판서공(휘 允藏)의 따님. -
16대 황제 昭宗 본명: 보르지킨 아유르시리다르
(孛兒只斤 愛猷識里達臘)
/在世1338~1378/在位1370~1378)
生前 칸호(汗號): 아유르시리다르 칸(愛猷識里達臘 汗),
빌레그트 칸(必里克圖可 汗),
원 시효: 武承和孝皇帝
元 廟號: 昭宗.
武承和孝皇帝(昭宗) 즉 必里秃圖可 汗은 원나라의 12代 황제, 몽골제국의 16대 대칸(大汗)이다.
* 보르지킨(孛兒只斤): 징기스칸 직계라는 뜻.
* 칸(汗) : 황제의 몽골식 칭호.
* 우리나라 사서에 만만태자(蠻蠻太子)로 기록하였는바 이는 명나라를 의식해서 오랑캐만(蠻)자를 중첩한 기록으로 元史, 新元史, 蒙古源流, 明史 등 중국측 사서에는 만만태자(蠻蠻太子)라는 기록은 없다.
아버지는 元나라 혜종(惠宗), 宣仁普孝皇帝/在世1320~1370/在位1333~1370)이다.
본명 : 보르제킨 토곤테무르(孛兒只斤 妥懽帖睦爾)
생전 칸호: 토곤테무르 칸(妥懽帖睦爾 汗) 원 묘호: 惠宗 원 시호: 宣仁普孝皇帝
몽골시호:烏哈噶圖 汗오하트 칸
명 시호: 順帝/(*大明皇帝以帝知順天命,退避而去,特加其號曰順帝(明史 本紀第四十七 順帝十)
어머니는 고려인 기황후(奇皇后) 즉 보현숙성황후(普顯淑聖皇后).
몽골명: 얼제이투코톡토(完者忽都)/1318~1370)이다.
행주산성 아래 내성리(內城理)에서 기자오(奇子敖)의 세째딸로 출생.
원나라 昭宗은 1353년 7월 황태자가 되고, 8월에 고려에 와서 김윤장 女를 태자비로 간택하여 원나라로 데려갔다.
[참고]
[昭宗 生甲 考]
1《蒙古源流》必里秃皇帝 生于戊寅年(即至元四年/*1338년)。
《元史·脱脱傳》爱猷識理達臘 至正三年(/*1343)时六歲
(/*1338년),
烏蘭《〈蒙古源流〉研究》,第265、288p。
2 明权衡《庚申外史》至元五年(/*1339년)冬 皇太子生。
李毂《金剛山長安寺重興碑》聖天子龍飛之七年,
皇后奇氏以元妃生皇。/*1339년
3.《朴通事諺解》太子令辰十二月二十四日。喜蕾文。
(*박통사언해:1677년 辭書)
4《高麗史節要》忠惠王后元年(庚辰年, 元惠宗后至元六年)
元封奇氏爲第二皇后。后, 本国人, 总部散郎子敖之女,
生皇太子 爱猷識理達臘。元惠宗后至元六年 /*1340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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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高麗史 卷三十八 世家 卷第三十八
恭愍王 2年 8월 庚子 (1353년 8월 6일 음력/1353년 9월 3일 양력)
원이 만만태자를 보내 영안왕대부인에게 패아찰잔치를 베풀다
八月 庚子 元遣巒巒太子 定安平章來, 錫孛兒扎宴于榮安王大夫人.
○高麗史 卷三十八 世家 卷第三十八
恭愍王 2年 8월 甲寅 (1353년 8월 20일 음력/1353년 9월 17일 양력)
왕이 만만태자를 찾아가 예물을 주다 (1353년 8월 20일 음력)
甲寅 幸太子及平章館, 贈禮幣.
○高麗史 卷三十八 世家
공민왕 2년 8월 23일(丁巳) (음력)
태자가 김윤장(金允臧)의 딸과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그 딸을 데리고 갔는데, 앞서 시투태자(實逗太子)가 왔을 적에도 만호(萬戶) 임숙(林淑)의 딸과 결혼하고 함께 귀국했던 일이 있었다.
○ 丁巳 太子·平章還, 王餞于郊. /太子約娶金允臧女, 以其女歸, 先是, 實逗太子之來也, 亦娶萬戶 林淑之女而還./ (高麗史 卷三十八 世家)
* 사료에 의하면 태자책봉 1년 전인 1352년 8월
복안부원군(福安府院君) 권겸(權謙)이 원 나라에 가 딸을 황태자에게 바쳤다./ 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절요 제26권 공민왕 원년(1352년) 8월
福安府院君 權謙,如元納女于皇太子
복안부원군 권겸이 원에 가서 황태자에게 딸을 바쳤다.
○高麗史 列傳 權謙 傳
權謙, 政丞溥之子. 恭愍初, 以福安府院君,如元納女于皇太子
권겸은 정승 權溥의 아들이다.
공민왕초에 복안부원군이 원나라에 가서 황태자에게 딸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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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종황제의 아들 아유르시리다르(우리나라 사서에 만만태자로 기록)는 16세 때인 1353년 7월 태자로 책봉되고, 한 달 후인 1353년 8월에 고려에 와서 8월 6일 외조모를 위한 큰 잔치를 베풀고 8월 23일 원나라로 돌아갈 때 김윤장의 딸을 데리고 원나라로 돌아 갔다.
- 아유르시리다르(愛猷識里達臘)가 태자책봉 받기 전인 1352년 8월, 권겸이 원나라에 가서 딸을 받쳤으나, 1353년 7월 태자책봉 받은 한 달 후인 8월에 외조모를 위한 잔치를 베풀러 고려에 와서 김윤장의 딸을 황태자비로 간택했으니 이는 원나라 황실과 외척인 행주김씨 집안 및 고려정부 주선으로 찬성사 김윤장의 딸을 태자비로 간택한 것으로 여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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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19대황제 엘베그대칸은(額勒伯克大汗)은 김윤장 외손.
초명(初名): 買的里八刺
생전 칸호: 恩克可 汗
칸호(汗號): 額勒伯克·尼古坍蘇克齊汗 / * 鞑靼(蒙古大汗)
/在世1362年—1399年/ 在位1394年—1399年
몽고사 전문가 宝音德力根교수는 원나라 소종때 어머니와 명나라에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매적리 팔라가 일베그 대칸(額勒伯克 大汗)이라 하였다.
몽고원류에 탈고사첩목아의 차자(明史 할단열전 기록)라고 했으나 탈고사첩목아의 장자 천보노(天保奴)는 1388년 아버지와 함께 피살되었고, 차자 지보노(地保奴)는 明나라에 의해 유구(琉球)로 유방(流放/유배)되어 탈고사첩목아의 후는 이미 끊어졌다는 기록이 1394년작 황금사(黄金史)에 기록되었다.
1362년에 출생한 额勒伯克 尼古坍蘇克齊可汗이 1350年에 출생한 脱古思帖木兒의 次子가 될 수 없으며 생갑과 이름의 뜻으로 미루어 보아 昭宗의 아들 매적리팔라가 額勒伯克大汗이라고 논증(論證)하였다.
[참고]
《蒙古源流》認爲額勒伯克是兀思哈勒可汗的次子,但是《明史·韃靼列傳》記載,脱古思帖木兒(即兀思哈勒可汗)次子地保奴被明軍俘获,后流放琉球。
蒙古史專家宝音德力根認爲他是元昭宗被明所俘虏后放歸的買的里八剌。
1388年,脱古思帖木兒長子天保奴與其父一同被殺,次子地保奴又被明廷流放到琉球。至此,在蒙古脱古思帖木兒后裔已絶。据《黄史》,额勒伯克尼古坍蘇克齊可汗三十三歲時即位,在位四年;佚名《黄金史綱》說他在狗年(1394年)即位。由此可以知,额勒伯克尼古坍蘇克齊可汗生于1362年,他不可能是1350年出生的脱古思帖木兒之次子。從额勒伯克尼古坍蘇克齊可汗的生年、名字以及明人的有關記載来看,他應是買的里八刺:一,额勒伯克尼古坍蘇克齊可汗與買的里八刺生年相同,均生于1362年。二,兩人的名字:詞義相同。额勒伯克·尼古埒蘇克齊”(Elbeg nigülesügči)是“買的里”(Maidari,源自梵文Maitriya,爲菩薩名,漢文音寫“弥勒”,譯“慈氏”,因“修得慈交棄味,故稱爲慈氏”)的蒙古語意譯。“額勒伯克”(Elbeg)意爲“富有·富于”,修飾意爲“慈心”的“尼古埒蘇克齊”一詞,兩詞結合表示“富有慈心”。至于買的里八刺這個名字的后半段“八刺”(源自梵文Bala,漢文音寫“婆羅”,譯“愚夫”)未譯出。(蒙元大汗、皇帝名字梵文、蒙文互通對譯的情况屢見不鮮,元仁宗名“爱育黎拔力八逹”既是“寿山”一詞的梵語音譯,本雅失里”(Buniyasiri)也是個梵文名字,意爲‘’福德吉祥”。本雅失里的汗号“完者秃”,正是他名字后半段“siri”的蒙古語意譯。)
額勒伯克於1399年被殺,原因是,额勒伯克在瓦剌首領浩海逹裕的建議下,霸占了美貌的弟媳(或兒媳)豁阿哈屯,殺死了弟弟(或兒子)哈尒古楚克都古楞特穆尒鸿台吉。豁阿哈屯爲夫報仇,請求大汗殺死了浩海逹裕。這個擧動引起了瓦剌人的報復,大汗安撫了浩海逹裕的兒子巴圖拉,但是土尒扈特部首長烏格齊哈什哈攻殺了大汗。他死後烏格齊哈什哈立坤帖木兒於1400年繼位。
参考資料
《中国名人志 第八卷》 > 额勒伯克汗
宝音德力根:《15世紀中葉前的北元可汗世系及政局》蒙古史研究 第六辑
註釋
1.^ 蒙古文見殿本《蒙古源流》卷五和兩《黄金史》。漢語見《欽定蒙古源流》,是經由滿語轉譯譯而得。現代学者多稱其爲可汗。
2.^ 《蒙古源流》作1393年,羅氏《黄金史》、《黄金史綱》作1394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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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장의 외손 매적리팔라(買的里八剌 1362年-1399)
1370년 조부 惠宗(順帝) 사후(음력)5월 응창에서 어머니 김황후와 함께 명군의 포로가 되어 북평으로 移置. 崇禮侯 관작과 第宅을 사급받아 5년간 살다가 1375년 9월 원나라로 귀환하여 1394년 에슈다르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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買的里八刺: 元顺帝(惠宗)妥歡帖穆爾의 孫子,元昭宗 爱猷識理逹臘 子.
生于至正二十二年(1362年)[1]。1370年,其祖父死后,陰曆五月在應昌被明軍俘虏,買的里八剌被俘五年,明廷封爲崇禮侯,赐給宅第。1374年陰曆九月明太祖将在应昌俘获的元昭宗之子買的里八剌送還元廷,招谕修好。有人说后来北元皇帝的脱古思帖木儿即是買的里八剌,但年龄不合,而蒙古史料稱脱古思帖木兒是元昭宗的弟弟。
蒙古史学者宝音德力根 認爲,買的里八剌就是后来的蒙古大汗额勒伯克。
1388年,脱古思帖木兒長子天保奴與其父一同被殺,次子地保奴又被明廷流放到琉球。至此,在蒙古脱古思帖木兒后裔已绝。據《黄史》,額勒伯克尼古坍蘇克齊可汗三十三歲時即位,在位四年;佚(*逸의古)名《黄金史網》說他在狗年(1394年)即位。由此可以知,额勒伯克尼古坍蘇克齊可汗生于1362年,他不可能是1350年出生的脱古思帖木兒之次子。從额勒伯克尼古坍蘇克齊可汗的生年、名字以及明人的有關記載来看,他應是買的里八刺:一,额勒伯克尼古坍蘇克齊可汗與買的里八刺生年相同,均生于1362年。二,兩人的名字:語義相同。額勒伯克·尼古埒蘇克齊”(Elbeg nigülesügči)是“買的里”(Maidari,源自梵文Maitriya,爲菩薩名,漢文音写“弥勒”,譯“慈氏”,因“修得慈交棄味,故稱爲慈氏”)的蒙古語意譯。“額勒伯克”(Elbeg)意爲“富有·富于”,修飾意爲“慈心”的“尼古埒蘇克齊”一詞),兩詞結合表示“富有慈心”。至于買的里八刺這個名字的后半段“八刺”(源自梵文Bala,漢文音寫“婆羅”,譯“愚夫”)則未譯出。(蒙元大汗、皇帝名字梵文、蒙文互通對譯的情況屢見不鲜,元仁宗名“爱育黎拔力八逹”既是“壽山”一詞的梵語音譯,本雅失里”(Buniyasiri)也是個梵文名字,意爲‘’福德吉祥”。本雅失里的汗号“完者秃”,正是他名字后半段“siri”的蒙古語意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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参考资料
• 《明史》
• 宝音德力根(*內蒙古大學교수):《15世紀中葉前的北元可汗世系及政局》蒙古史研究 第六輯
1. 葉子奇的《草木子》中曾提及了買的里八剌的年齡信息:“至正二十二年间;黄河自河東清者千余里,河鱼歷歷,大小可数。庚申帝闻之,惨然不樂者数日。群臣奏曰:“河清,王者之瑞,胡爲不樂耶?”上曰:“傳云,黄河清,聖人生,当有代朕者。”群臣復曰:“皇太子生子,是陛下聖孫,即其應也。”上笑而釋。 ”元惠宗生于庚申年(1320年),又稱爲庚申帝,至正二十二年是公元1362年。《新元史·昭宗本紀》
2. 《蒙古源流》作1393年,羅氏《黄金史》、《黄金史網》作1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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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황실에서 김윤장의 딸을 황태자비로 간택했는데 김윤장은 광산김씨족보에 판도판서로 기록되었다.
이는 版圖司 判書의 줄인말이며, 판서는 판도사의 으뜸벼슬이다.
高麗가 元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자 戶部를 고친 이름으로 25대 忠烈王 1년(1275)에서 24년(1298) 正月까지, 충렬왕 24년(1298) 8월에서 34년(1308)까지, 27대 忠肅王때부터 31대 恭愍王5년(1356)까지, 恭愍王 11년(1362)에서 18년(1369)까지, 恭愍王 21년(1372)에서 34대 恭讓王 1년(1389)까지의 일컬은 관원이름이다. (뒤에 戶曹로 고침)
* 판도사는 호구(戶口)ㆍ공부(貢賦)ㆍ전량(錢粮)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이다.
김윤장의 관직은 씨족원류에 /(史)僉議參理(評理/ 별칭), 版圖判書, 恭愍王元年 贊成事/로 기록되었다.
◎ 김윤장은 공경대부(公卿大夫) 가문출신의 고려말 유학자이다.
(父)金流: 都僉議中贊(門下侍中 별칭), 太學士/ (祖)金周鼎: 知都僉議事 諡 文肅公/ (曾祖)金鏡亮: 大將軍, 贈 門下平章事/ (高祖) 金光世: 中郞將, 贈 尙書 左僕射/
(伯父) 金深: 兵馬都元帥, 鎭國上將軍, 化平府院君, 諡 忠肅公/
(兄) 金仲幹: 上護軍, 同知密直司事/
(從兄弟) 金石堅: 僉議右政丞, 化平府院君/ 金承嗣: 三司左使, 兵馬都元帥/ 金承漢: 密直副使/ 金承晉: 上護軍, 光山君/ 金承魯: 禮曹判書/ 金實利: 元 泰定皇后/
(堂叔) 金台鉉: 僉議中贊, 大提學, 諡 文政公/
(再從兄弟) 金光軾: 文科 摠部議郞/ 金光轍: 文科 判密直司事, 化平君, 諡 文敏公/ 金光載: 文科 大提學, 諡 文簡公/ 金光魯: 文科 嘉安部錄事/
(再堂叔) 金之淑: 僉議中贊, 上護軍, 諡 光節公/ 金由祉: 平章事, 上將軍/ 金瑫: 重大匡 密直副使, 光山君/
(三從兄弟)金仁沇: 贊成事, 光山君, 諡 敬烈公/ 金仁衍: 光山君/ 明德太后: 忠惠王,恭愍王母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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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朴宜中(1337~1403)의 貞齋先生 逸稿卷之三 摭遺 華海師 傳
/ 華海師全 歷代轉理歌 [麗末 儒學者]
金允藏: 恭愍王때 元나라 使臣을 위한 宴會에서 先王의 行動이 禮에 어긋난다고 諫諍하다 彈劾되었다./
[참고]
貞齋는 朴宜中(1337~1403)의 號이다.
본관은 密陽. 초명은 實. 字는 子虛, 호는 貞齋. 할아버지는 版圖判書 華이며, 아버지는 版圖摠郎 仁杞이다. 이색(李穡)의 문인이다. 1362년(공민왕 11)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典儀直長으로 등용되었다. 그 뒤 獻納이 되었고, 우왕 때 門下舍人, 左司議大夫 大司成 등을 거쳐 密直提學이 되었다.
1388년(우왕 14)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그들이 옛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설치한 철령위(鐵嶺衛)의 철폐를 교섭하여 성취하고 돌아와, 그 공으로 창왕 때 공신에 봉하여졌다. 공양왕 때 서운관(書雲觀)에서 이미 개경의 지운(地運)이 다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야 한다는 소를 올리자, 음양에 의한 지리설의 허황됨을 역설하여 이에 반대하였다. 그 뒤 예문관제학 겸 대사성이 되었고, 1392년(태조 1)에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고려사』를 수찬할 때,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그 공정성을 기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 뒤 태종이 檢校參贊議政府事를 내려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특히, 성리학에 밝았으며 문장이 우아하기로 유명하였다. 시호 文敬이다.
저서로 貞齋逸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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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蒙古大汗 (1189-1635)
# 카툰은 몽골의 황후를 뜻함.
- 몽골은 정식으로 칸이 선출되기 전에 전임 칸의 카툰이
임시로 대행하는 관례가 많았음 -
제1대 테무진 칭기스칸 (1189-1227)
임시 툴루이 에젠 (1227-1229),
제2대 오고데이칸 (1229-1241)
임시 투라키나 카툰 (1241-1246),
제3대 구유크칸 (1246-1248)
임시 오고르카미시 카툰 (1248-1251),
제4대 뭉케칸 (1251-1259)
제5대 쿠빌라이 세첸칸 (1260-1294)
제6대 테무르 울지투칸 (1294-1307)
제7대 카이산 훌레그칸 (1308-1311)
제8대 아유르바리바트라 보얀트칸 (1312-1320)
제9대 샤드발 게겐칸 (1321-1324)
제10대 예슨 테무르칸 (1323-1328)
제11대 아시드헤우칸 (1328)
제12대 후슬렌칸 (1329)
제13대 투그테무르 자야트칸 (1329-1332)
제14대 린친발칸 (1332)
제15대 토곤테무르 오칸트칸 (1333-1370)/ * 혜종(순제)
제16대 아유시리다르 빌레그트칸 (1370-1378)/ *김윤장 사위
제17대 토쿠스테무르 우스칼칸 (1378-1388)
제18대 엔크 조리그트칸 (1388-1392)/ *권겸 외손서
제19대 엘베그 니굴세그츠칸 (1393-1399)/ *김윤장 외손
제20대 군테무르칸 (1400-1402)/ *김윤장 외증손
제21대 우그츠하시하칸 (1403-1408)
제22대 울지티무르칸 (1408-1411)/ *김윤장 외증손
제23대 델베그칸 (1411-1415)
제24대 에세쿠칸 (1415-1425)
제25대 아다이칸 (1426-1438)
제26대 타이산칸 (1439-1452)
제27대 아그와진조논칸 (1452)
제28대 에센 타이시칸 (1452-1455)
제29대 메르쿠스우헤그트칸 (1455-1456)
제30대 몰론칸 (1456-1462)
제31대 만둘칸 (1463-1467)
임시 만두하이 카툰 (1467-1470)
제32대 바투뭉케 다얀칸 (1470-1517)
제33대 바르스볼드 조논칸 (1517-1519)
제34대 보디알라그칸 (1520-1547)
제35대 다라이산 구덴칸 (1548-1557)
제36대 투멘자사그트칸 (1558-1592)
제37대 부얀체첸칸 (1593-1603)
제38대 리그덴 호타그트칸 (1603-1634)
제39대 에제이 칸(ejei khan,?–1661) /재위 1634~1635)
몽골 최후의 보르지긴 대칸이다.
*에제이 칸은 리그덴 칸의 아들이다. 에제이칸 이후로 몽골제국은 공식적으로 멸망하고 몽골 대칸의 칭호는 청나라 (테종)홍타이지에게 넘어간다.
17세기 초기부터 대칸의 권력은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리그덴칸이 죽고 난 1634년, 에제이 칸과 그의 어머니는 1635년 2월 만주기병대의 기습으로 포위당하게 된다. 이에 항복을 결정하고 후금(뒤에 청) 홍타이지에게 원나라의 옥새와 대칸의 칭호를 바치게 된다.
그리고 진왕의 작위는 그가 죽고 난 1661년 동생 아부나이에게 상속된다.
아부나이는 공개적으로 청 황실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다 1669년,강희제에 의해 선양에 유폐된다. 그의 작위는 그의 아들 보르니에게 같은 해 9월에 상속된다.
아부나이의 아들인 보르니가 청 황실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지 않게 하기 위해였지만
결국 1675년 그의 동생 루브증과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차하르 외에 다른 몽골족까지 가세할거라고 믿었으나 몽골족들은 가세하지 않았고 오히려 반란은 실패하게 된다. 그리고 몽골은 청나라에 완전히 정복된다
/ 성봉.
첫댓글 성봉일가님,
안녕하세요.
소중한 정보와 자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