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정신
자연은 바로 생명의 근원이며 영원한 인간의 안식처이다. 자연에서 태어나 울고 웃으면서 한 평생을 살다가 그 속으로 연기처럼 사라진다. 우리는 그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숱한 고난과 역경에 마주치고 이를 이겨낸다. 그 자연을 노래하며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는 사람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사람은 당연히 다양한 부류의 예술작가다.
소위 작가정신(作家精神)은 창작 활동을 통해 내면의 정신을 표현하는 작가의 목소리다. 반면에 시대정신(時代精神)이란 그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절대적인 정신이다. 동서고금의 동서양 역사에 나타나는 인류 보편적인 절대적 가치로서 한 시대의 획을 긋는 역할을 하기 마련이다. 대개는 도도한 강물처럼 흐르는 커다란 시대정신 속에서 다양하고 개별적인 작가정신은 구현된다.
그들은 그 시절 아무도 짐작조차 못했던 사안의 내부속살을 미리 내다보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처럼 시대의 버림을 받았더라도 언젠가는 우리 곁에 부활하여 다가온다. 그래서 작가정신은 작가의 고결한 품격이요, 미래를 비추는 희망의 등불이다. 이들의 노력에 힘입어 역사는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문화는 신세계를 창조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문화와 인간의 삶이 살 찌워진다.
무엇보다 기전체(紀傳體)의 사서를 저술한 역사가인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소설가인 「도스토예프스키」가 남긴 저작들은 불멸의 금자탑으로 인류와 함께할 것이다. 물론 최고의 가치가 있는 각 종교의 경전(經典)과 고전(古典)은 지고지순한 위치에서 인류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준다. 두 사람(「사마천」과 「도스토예프스키」)은 인간으로서 극심한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고 시대를 넘어 생생한 교훈과 영향을 준 최고의 작가라고 생각한다. 죽음 직전까지 나락(奈落)에 떨어졌다가 자신의 의식자체를 승화(昇華)시켜 전혀 새로운 차원의 정신력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위대한 인간 승리의 고결함 바로 그 자체이다.
「사마천」은 궁형(宮刑)을 받고 죽음을 생각했으나 그의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전대미문의 역사를 완성한 『사기(史記)』를 후세에 전했다. 그의 투철한 사관은 여성인 「여후(呂后)」를 제왕의 지위에 합당한 『본기(本紀)』에 기록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름 없는 자객이나 풍류객, 도적, 상인들 까지도 그 행적을 기록하여 『열전(列傳)』에 남겨 역사를 이루는 주체에 대한 폭넓은 지평을 확대하였다.
「도스토예프스키」 역시 사형 직전에 풀려나서 시베리아에서 수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인간으로서 극한의 고생을 하였다. 더구나 극심한 가난과 간질병에다 도박의 중독으로 보통의 사람들과는 판이한 생활을 하면서도 인간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을 소설로 표현하였다. 이 두 사람이 역사와 문학에 남긴 의미와 영향은 너무도 지대하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작가정신을 발휘한 작가들이 많이 있다. 과문(寡聞)하지만 「정비석」과 「안수길」, 「이범선」과 「최인훈」, 「남정현」과 「천승세」와 「조세희」 그리고 「황석영」 등을 꼽는다. 「정비석」의 『자유부인』, 「안수길」의 『북간도』, 「이범선」의 『오발탄』, 「최인훈」의 『광장』, 「남정현」의 『분지』, 「천승세」의 『황구의 비명』,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황석영」의 『장길산』 등은 한 시대를 밝힌 소설이다. 물론 이들 외에도 「이병주」의 『관부연락선』과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아리랑』, 「송기숙」의 『녹두장군』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또한 「윤흥길」의 『장마』와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 「안정효」의 『하얀 전쟁』 등은 한국전과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수작이다.
이들 중에서도 「이범선」, 「남정현」과 「천승세」는 한국 전쟁 후 궁핍하게 살아가야하는 일반서민의 아픔과 분단의 현실을 직시하였다. 어떤 작가는 실질적인 미국의 지배를 받는 조국의 현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했지만 사법처리의 대상이 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세희」는 산업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가난과 새로운 산업 지배세력의 등장에 따른 노동자의 긴장과 아픔을 그렸다. 고단한 삶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잡초처럼 살아가며 희망을 잃지 않는 민초들을 주목했던 것이다.
반면에 「이병주」 등은 과거 일제의 통치아래 나름 데로 독립운동을 하면서 좌절하고 분노한 젊은 지식인들을 내세워 우리의 역사를 반성하고 새로운 통합과 화해를 모색하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였다.
작가는 조용하게 미래를 밝히는 등불의 역할을 한다. 조선사회에서는 오랫동안 왕도정치 하에서 신분세습의 압제 속에서 살았다. 이것이 「허균」의 『홍길동전』으로 표출되었다. 일제하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민족정신을 일깨워 항거했고, 해방과 한국전쟁의 공간에서는 이념과 사상의 대결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고통을 고발하기도 하였다. 영원한 친구로만 알았던 미국과의 뜻하지 않은 마찰을 고발하고 산업화에 따른 노동자의 고난에 귀 기울였다. 다수의 의지와는 다르게 물려받은 시대의 아픔을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이들이 제시한 작가정신은 많은 어려움과 좌절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는 미증유(未曾有)의 역할을 하였다. 사실 작가가 추구하는 작가정신은 대개 일반적인 보통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한다. 그래서 당시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민심의 척도가 된다. 따라서 섣부르게 그들의 견해를 경시하거나 외면할 수가 없다. 오히려 세태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라가 어지럽고 젊은 세대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 역사소설(歷史小說)이 앞장을 선다. 사회가 안정되면서 사치와 향락이 번지면 인간의 관능을 자극하는 대중소설(大衆小說)이 판을 친다. 그리고 사회 분위기가 일방적으로 기울어 가난과 소외를 받는 사람이 많아지면 소위 참여소설이 유행하며 시대를 이끌어 간다. 다양한 소재별로 전쟁, 해양, 농민, 추리 소설 등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형적인 분류의 의미는 그다지 크지 않다. 그나마 시대와 이념을 넘어 진정한 문학의 정수를 계승하는 순수소설이 있어 예술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순수소설이 아닌 장르의 소설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강국을 지향하는데 작가의 역할이 크다. 그들은 끊임 없이 우리말을 갈고 닦는 파수꾼의 역할을 한다. 이미 우리말이 죽으면 민족의 혼이 사라진다는 것을 경험하였다.
최근 들어 겨우 습작 수준의 작품이 남발되고, 젊은이들은 자극적인 웹 소설 혹은 만화에나 관심을 기울이는 현상은 매우 아쉽다. 학생 시절부터 체계적인 독서와 글쓰기 지도가 필요하다. 부모와 선생님의 최우선 과제가 바로 이런 노력들이다. 그래야 지성인다운 품성이 배양되고 세상을 살아가는 참다운 지혜를 터득하게 된다.
특히, 좋은 작가는 오랜 기간 충분한 습작 기간을 통해 갈고 닦으며 시대에 맞는 작가정신을 담아야함은 당연지사이다. 곧 이 나라의 작가에게 모두가 기다리는 노벨문학상의 영광이 주어지길 소망한다.
(2023.5.12.작성/2024.2.28.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