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호의 문학산책)
문인열전 (文人列傳)
최 경 호
2023년 한국문협에서는 특별기획으로 『문인열전(文人列傳)』을 발간한 바 있다. 그 중 필자가 집필한 10명의 글을 올린다. 필자의 10명 외의 대구의 문인열전은 시인 김춘수(도광희,시인), 소설가 이태원(오은주,소설가), 시인 이설주(임헌영,평론가), 시인 이윤수(박희.수필가) 소설가 정소성(백시종,소설가), 소설가 현진건(채종인,소설가) 시인 구상 (김봉군,평론가) 수필가 김규련(최원현,수필가) 시인 문인수(박제천,시인) 등의 글이 보인다. 대구문인의 경우 박훈산 시인에 대해서는 청도의 민병도 시인에게 전화로 문의하였고 나머지는 대구문협에서 발간한 자료를 참고했음을 밝힌다.
1. 소설가 이광수(李光洙,1892-1950)
춘원(春園) 이광수(외배.長白山人)는 평안도 정주 출생이다. 몰락한 양반 이종원의 아들로서 태어났으나 전염병으로 11세 때 고아가 되고 누이마저 잃는다. 동학단체의 서기로 있다가 송병준의 일진회의 도움으로 일본에 유학 1905년 다이세이(大成)중학교를 거쳐 메이지 학원에서 공부한다. 귀국하여 오산학교 교사로 잠시 있다가 1915년 와세다 철학과에 입학하고 「젊은꿈」(1915), 「무정」(1917),「개척자」(1918)를 쓴다. 「무정」은 춘원이 경제적으로 고난한 시기에 쓴 소설로서 신소설의 한계성을 극복한 신문학사상 최초의 장편소설이다. 동경에서 ‘2⸱8독립선언문’(1919)을 썼고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독립신문을 발간한다. 1921년 허영숙과 함께 귀국한 춘원은 조선 책 20만여 권을 불사른 사이토 마코트(齊縢實) 총독을 만나고 그해에 「민족개조론」(1922)을 내놓는다. 수양동우회 사건(1938)으로 6개월 간 투옥되었고 「무명(無明)」(1938)은 그때의 체험이다. 조선문인협회장(1939)을 맡고 진화론적 관점에서 「내선일체와 조선문학」(만선일보,1940)을 쓴다. 그러함에도 한국 근대문학기의 춘원의 존재는 우뚝했다. 최남선에 이어 소년을 개혁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춘원은 인도주의 사상, 신학문과 근대문명에 대한 동경, 자유연애 등 근대적 사상을 일깨운 작가요 논객이다. 「무정」,「사랑」,「흙」,「원효대사」등 장⸱단편 60여 편과 「금강산유기」,「돌베개」 등을 남기고 있다. 민족자강론 또는 ‘농민속으로’라는 브나로드운동을 배경으로 한 「흙」(1932)은 농촌문학의 단초를 연 소설이다. 식민지시대의 농민 억압과 전선으로 나가는 젊은이들에게 ‘감격의 기회’라고 부추기는 양면성, 조선의 미개함을 비판하던 개화인들은 결국 ‘불구자’가 되거나 하향한다는 플롯은 주목에 값한다. 주제와 주인공이 불일치한 시대의 문학에는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서의 삶과 작가 춘원으로서의 고뇌가 모순적인 담론으로 녹아 있음에서 식민지시대의 비극성을 확인하게 된다. 혁혁한 독립운동가요 교육자였던 운허(耘虛) 스님은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춘원에게 봉선사에 머물게 했으나 납북(拉北)된 춘원은 자강도 강계에서 폐결핵으로 고독하게 죽음을 맞았던 불운한 시대의 큰 작가다.
2. 소설가 이무영(李無影,1908-1960)
‘흙내의 작가’ 이무영(李無影)은 이 땅 현대문학사에 ‘농민문학’을 일구고 정착시킨 대표적 작가다. 충북 음성군 음성읍 석인리 오리골에서 태어나 본명은 갑룡(甲龍) 아명은 용구(龍九)로 유년시절을 보내고 휘문고보를 거쳐 도일하여 세이조(成城)중학 중퇴, 가또오 다게오(加藤武雄)의 집에 기숙 문학수업을 받는다. 1927년 장편 「의지할곳없는청춘」을 발표하고 동아일보에 「한낮에꿈꾸는사람들」의 희곡이 당선된다. 1934년 동아일보 기자, 구인회(九人會) 멤버였고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경성에서 글을 쓸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농촌으로 귀향하여 「제1과제1장」(1939), 「흙의 노예」(1940) 등 문제작을 내놓는다. 1950년 해군에 입대 국방부 정훈국장을 역임하면서 PEN클럽, 문총, ⟪자유문학⟫지 등에 깊히 관여한다. 서울대 문리대, 연희대학교 문리대에서 소설론을 강의하고 단국대 교수로 재직한다. 희곡작가로서 「구두쇠」(1938) 「논개」 「퀴리부인」 「이순신」 「벽」(1959) 등 많은 희곡을 무대에 올리고 「여명전후」(만선일보,1940)를 발표한다. 이무영의 농민문학은 ‘농촌을 인간의 본연적인 귀향지’로 신념한 사실과 농민문학의 주인공은 농민이라는 의식에 있다. 「흙을그리는 마음」의 반도시성,「우심(牛心)」(1934)과 「만포노인」(1935)에서는 주인공이 일제자본과 식민지정책에 저항한다. 「제1과 제1장」(1939)의 수택은 농민이 농사를 열심히 지어도 살 수 없는 현실을 목도하고 「흙의 노예」(1940)에서는 흙의 노예로 살던 아버지가 도리어 자진한다는 비극성을 보인다. 특히 「농민」(1950)은 「농군」(1953),「노농」(1954)과 더불어 이무영의 농민문학 5부작을 의도한 야심작이다. 「농민」에서 농민 장쇠가 동학군 대장이 되어 김 승지를 징치하고 화해하는 플롯, ‘뜸부기 소리를 듣고 아시, 이듬, 그루 논매기를 알고 가새목진 보리싹을 보고 입동임을 안다’는 이무영의 농민문학은 독보적이다. 서울시문화상(1956)을 받고 국제 펜 런던 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한다. “이 나라의 현대문학에 새 밭을 일구셨네 / 토박이 농사군과 한 모습을 하셨었네.../“세월이 야박하오매 더더욱 그리웁네.”구상 시인은 묘비에서 그렇게 추모한다.
3. 시인 이상화(李相和: 1901-1943)
시인 이상화는 서기 1901년 신축 4월 5일 우남 이시우 공의 제2자로 태어나 서기 1943년 계미 4월 21일 43세로 세상을 떠나니 대구는 그의 출생지요 종언지이다.(‘상화시비’,1948) 상화(尙火) 시인의 삶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일찍이 개화된 가문의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이고 하나는 백조시대를 대표하는 낭만주의 시인으로서다. 목우 백기만과 함께 동인지 <거화(炬火)>(1917)를 발간하고 기미독립운동에 가담하는 것을 계기로 의열단 이종암사건, 장진홍 조선은행대구지점 폭파서건 등으로 수차례 투옥되고 일경의 가택 수색으로 고월 이장희 유고와 자신의 많은 원고가 압수당한다. 교남(嶠南) 학교에서 권투부를 창설한 일화도 있다. 이러한 저항의 이면에는 그의 유년기로부터의 아픔과 좌절의 상처도 겹쳐진다. 7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는 사실, 중앙고보 중퇴와 금강산 일대를 방황한 것, 일본유학의 중도 좌절과 19세의 조혼, 사랑하던 유보화의 죽음 등은 시인을 밀실로 갇히게 한다. 당시 백조파의 낭만주의 시인들 박종화,홍사용,나도향은 현실 초월로서의 밀실을 찾았고 죽음을 찬미했다. 상화의 「나의 침실로」(1922)는 이러한 배경에서 태어난 시다. ‘섬세한 상상력’의 「나의 침실로」는 세기말적 관점에서 해석할 것이냐 시 자체의 ‘내면적 갈구’를 텍스트로 할 것이냐를 제기한다. 내 안의 여자가 성모 ‘마돈나’일 때 나의 침실은 신화적인 ‘부활하는 동굴’이 된다. 「나의 침실로」는 뒷날 「이별」로 승화되고 자아는 ‘사느니보다 차라리 바라보며 사는 별’이 되기도 한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는 식민지시대의 민족적인 상실감을 비유한 절창이다. 시인은 봄날 대구 수성구 들판을 거닌다. 그때만 해도 ’가르마 같은 논길’이었고 ‘삼단 같은 보리밭’인 그러나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의 들이었다. 첫 구절에서 시상을 열고 끝 구절을 반전으로 이끄는 비극적 결말은 식민지 현실을 벗어나지 못한 시인의 ’자포(自暴)‘적 감정과 겹쳐진다. 「가장 비통한 기원」,「금강송가」,「이중의 사망」,「가을의 풍경」,「이별」,「역천」 등의 가작을 남겼다. 사후 문집으로 『상화와고월』,『이상화전집』 등이 있다. 차라리 시대의 불꽃이었던 상화 시인은 국가 없는 민족에게 저항하는 행동과 고뇌하는 절창의 시를 남김으로써 민족정신을 일깨웠던 시인으로 그 자신은 고독했던 민족시인이다.
4. 시인 이 장희 (李章熙, 1900-1929)
시인 이장희는 대구 출신으로 호는 고월(古月)이다. 일본 코오토중학(京都中學)을 수료하고 시인 백기만의 추천으로 1924년 ⟪금성(金星)⟫지에 「청천의 유방」 「실바람 지나간 뒤」 로 등단한다. 그는 당대의 문인들 백기만,이상화,현진건 등과 교류하고 예리한 감각으로 모더니즘 시를 남겼으나 시대의 압력과 삶에 대한 회의로 20대에 음독자살할 만치 스스로를 자학한 시인이다. 1924년 ⟪금성⟫에 「봄은 고향이로소이다」를 발표하여 주목을 받는다. 「봄은 고향이로소이다」(1923) 「靑天의 乳房」 (1922) 등은 “당시의 감상적이고 퇴폐적인 풍조와는 달리 청신한 감각과 예기가 깃든 작품을 썼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본 상징주의 시의 영향이라는 것과는 별개로 “시는 광채가 없고 탄력성이 없고 자극성이 없는 굵다란 철사선이어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시론에서 보면 봄의 생기를 고양이의 털,눈,입술,수염으로 환유된 시상은 하나의 놀라움이다. 「하일소묘」(신민(新民),1926,8월)에서는 얼음,설탕,테이블,유리잔을 등장시켜 시각적이고 주지적인 모더니즘의 경향을 보인다. 당시의 백철 평론가는 ‘모더니즘 이론가는 김기림이고 모더니즘 시의 선구자는 이장희와 정지용이’ 라고 하였고 오상순은 「봄은 고향이로소이다」에 대하여 ‘엄숙한 경이’를 느낀다고 했다. 고월은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하고 신동으로 불려졌으나 5세 때 어머니를 잃은 후에는 복잡한 가정사로 하여 고독한 삶이었다. 「가을ㅅ 밤」(⟪조선문단⟫1926,서울에서)에서 시인은 ‘피에르의 슳업은 신세를 생각하’거나 「쓸쓸한 시절」(1926)에서는 ‘그대여/우리들 머리 숙이고/고요히 생각할 그때가 왔다’고 숙연함을 보임으로서 생의 어떤 피안을 생각한 것인가. 그는 순문학과 경향문학이 각축하던 시대 모더니즘 시의 선구자로서 6⸱25 전란 중 대구에서 90명의 문인이 발기했던 ‘상고예술학원’의 상고(尙古)는 상화와 고월의 호를 딴 것이다. 이장희 시인은 예의 시 외에 「눈은 나리네」, 「쓸쓸한 시절」 「고양이의 꿈」, 「동경」, 「저녁」, 「버레우는 소리」 등 가작을 남기고 있다.
5. 시인 정공채(鄭孔采:1934-2008)
성촌(星村) 정공채 시인은 경남 하동출신이다. ⟪현대문학⟫(1957)지에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부산일보, 민족일보 기자를 거쳐 MBC 프로듀서를 하면서 시인으로서 활동을 한다. 시인은 1960년 4⸱19가 일어나자 국제신보 1면 사설란에 4⸱19 최초의 저항시 「하늘이여」를 발표한다. 시인은 “가난한 본심의 시인이 되고 싶었”고 진정한 ‘자유’를 갈망한 시인이다. 그러나 1960년대 한국은 「자유한켤레」로 전락되고 이 시기의 장시 「미8군의차」(⟪현대문학⟫,1963)가 일본의 문예지 ⟪문학⟫, ⟪제3세계문학⟫ 등에 게재된 이유로 필화를 입는다.「미8군의차」에 투영된 귀납적 명제는 주둔군 18년에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의 시대적 물음이었고 그 근저에는 여인 ‘인다이’와의 사랑이 「종착역」에 있음을 오독한 결과였다. 그로부터 시인은 「망실기」의 무력한 남자가 된다. 첫 시집 『정공채 시집있습니까』(1979)로 제4회 시문학상을 『해점』(1981)으로 한국문협상, 이어 편운문학상본상 등을 받고 한국시인협회장(1998)으로 활동한다. 정공채 시인의 시적 모티브는 도시적 상상 속에 바다와 항구의 고독에서 유추된 ‘내 안의 여신’과의 대화다. 패기와 비판적 자아는 원초적 욕망과 내면적인 동혈로 갇히게 하더니 후반기의 시적 자아는 「빈등」,「외등」으로, 사랑과 우수의 시인은 소유의 개념조차 잃어버린 무하유(無何有)의 세계(「별층도」)로 잠적한다. 시인은 『정공채 시집 있습니까』『해점』 『아리랑』 등 시집 7권, 평전으로 『우리어디서만나랴 공초 오상순』 『아,전혜린』, 『우리 노천명』, 역사소설 『초한지』등을 남기고 있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시인 정공채는 모두가 연명에 급급해 할 때 보들레르의 ‘금제의 쾌락’을 훔쳐 스스로 그 몸뚱이를 씻고자 했던 한 ‘피에로’로서 자신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의인(義人)이요 대시인의 풍모였다. 고향을 사랑했던 성촌 정공채 시인의 시비 「찬불이하동가 燦不二河東歌」는 경남 하동군 섬호정 섬진강이 흐르는 문학공원에 있다. ‘하동이 어디냐고 묻지 말게나 /하동 땅 어떠하냐 묻지 말게나 /산수 좋고 인물좋고 풍광도 으뜸일세’
6. 소설가 최인욱(崔仁旭:1920-1972)
하남(河南) 최인욱 작가는 경남 합천 출신으로 본명은 상천(相天)이다. 동국대 전신인 해인불교전문학원 고등과를 졸업하고 니혼대학 전문부 종교과 중퇴, 이후 귀향하여 문학에 전념한다. 19세 때 「산신령」(매일신보,1939),「월하취적도」(조광,1939)로 등단하고 「멧돼지와 목탄」(춘추,1942)으로 주목을 받는다. 6⸱25가 일어나자 대구에서 국방부 전시편수관, 공군본부 작가단으로, 1950년-1960년대까지 서라벌예대,중앙대.단국대 등에서 현대소설론을 강의한다. 백철, 이무영, 구상, 조지훈, 박목월, 최정희, 김용호, 김남조, 김송, 유주현, 김종문 등과 교류한다. 작가의 1930년대 문학은 식민지시대의 민족적 수난을 유랑적인 노마디즘(Nomadism)으로 조명한다. 「시들은 마을」(1938)의 만주이민,「월하취적도」(1938)의 현실도피,「구름과 꽃소녀」(1949)의 한글학자의 수난 등에서다. 6⸱25는 이산가족을 양산시키고 전후 사회는 퇴폐적으로 전락한다. 「저류」(1952)의 미군과 누나,「설한기」(1950)에서는 가난이 극한에 이른다. 「동자상」(1950)의 소년은 가난한 시절의 자전적 이야기다. 작가는 한때 신문사의 기획으로 전후사회와 자유연애를 다룬 대중소설을 썼으나 그것이 작가의 정신적 거점은 아니었다. ‘보여줌으로써 타매(唾罵)하는 교훈’이거나 오이디푸스적인 ‘억압의 기제’다. 따라서 최인욱 작가에게 역사소설은 하나의 전환기적 의미를 갖는다. 1950년대는 「죽죽과용석」「역도라는이름의사형수」등 단편과 「저류」「탁류」의 시류소설이 혼류되더니 역사소설 「초적(草笛)」(1959)을 내놓아 주목을 받는다. 「초적(草笛)」은 문경⸱상주 중심의 동학농민운동을 취재한 것으로 전봉준의 고부 동학농민운동보다 앞선다. 문제작 장편「林巨正(임꺽정)」(1962)에서는 고증을 통한 조선 명종조의 역사에서 임꺽정이 왜 반항해야하는가 등 시대정신을 스케일이 큰 대하소설로 다루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임꺽정」전5권을 출판하고 홍명희의 「임꺽정」(1939)보다 재미있다는 평가에 ‘파안대소하던 모습’을 지울 수 없다. 「만리장성」(1965),「태조왕건」(1967),「자규야알랴마는」(1968),「여왕」(1969),「우림야화」(1969) 등 장편을 발표하고 건강의 이상 징후를 일으켜 50대초에 생애를 마감했으니 한국문단으로서는 애석한 일이다. 해방 전후 격변기에서 어떤 이념에도 편향되지 않았던 하남 최인욱 선생은 식민지시대로부터 민족해방기, 산업화시기까지의 민족적 현실을 역사의식으로 비판한 대표적 작가다.
1. 7. 시인 박곤걸(朴坤杰,1935-2008)
박곤걸 시인은 경북 경주 출신으로 1964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서 시 「광야」와 ⟪현대시학⟫(1975)의 「환절기」, 「숨결」 천료로 등단한다. 시인은 첫 시집 『환절기』(1977)로부터 『숨결』1982), 『빛에게 어둠에게』(1987), 『가을산에 버리는 이야기』(1995), 『딸들의 시대』(1998), 『화천리무지개』(2001), 『하늘말귀에눈을열고』(2002) 『무지개너머』(2006)를 낼 때까지 많은 동인활동을 거친다. ‘칡덩굴’(1956)로부터 ‘죽순’(1985), ‘동해남부시’(1998) 등이다. 대구 영남공고교장으로 재직하면서 대구지역 시인들에게 이론과 창작의 갭을 조화시키는데 노력한다. 뿐만 아니라 한국문협 부이사장,국제펜클럽대구지역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지방과 중앙문단의 교류 및 문인의 권익옹호를 위해 기여한 시인이다. 대구시문화상,금복문화예술상,국제펜문학상,대한불교문학상본상 등을 수상한다. 시인들이 시집을 무상으로 나누어주는 것을 반대한다는 시인은 시집을 그냥 주는 것은 시인의 자존심 문제라고 했다. 만년에는 지금 어디 계시느냐고 문자 보냈더니 아들이 살고 있는 서울의 어느 병원에서 투병중이라며 엽서를 보내온 것이다. 엽서를 받은 이튿날 운명하시니 어느 겨를에 엽서를 썼을까. 『환절기』(1977)로부터 『하늘 말귀에 눈을 열고』(2002)까지의 공통된 이미지는 ‘자연과 생명성‘이다. 등단작인 「광야」의 ’퍼어러히 목련꽃 내음‘에서 「살결」의 ’씨앗뼈’ 「해동기」, 「환절기」, 시집 『숨결』은 물론 「딸들의시대⸱28」에서 인간도 자연처럼 베푸는 것이 생명성임을 암시한다. 시집을 해설한 장윤익, 조병무, 신규호, 김선굉, 이유식, 성기조, 윤강로, 신동한 그리고 이진흥 등 시인과 평론가들의 분석이다. 그의 생명성은 고향 화천리(花川里)로 회귀되고 그것은 유토피아로의 귀향 전 단계가 된다. 신(神)이 있을 법한 무지개 너머의 세계를 동경했던 시인의 순수성은 그대로 ‘굿굿한 지조’가 되어 “서른여섯 살 울음을 울먹이고” 다시 “내 땅의 내 밭에 반백년 씨를 심었”(「화천리(花川里⸱ 59」)던 민족을 사랑한 시인이다.
8. 시인 신동집(申瞳集,1924-2003)
신동집 시인의 본명은 동집(東集)으로 대구출생이다. 서울대 문리대 정치외교과를 나와 1959년 미국 인디에나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다. 6⸱25 동란에 종군하고 대학 재학 중 시집 『대낮』(1948)으로 등단하더니 시 22편을 수록한 『서정의 유형』(1954)으로 자유문학상을 받으면서 주목을 받는다. 경북대에서 명예문학박사를 육군사관학교, 청구대학을 거쳐 계명대 교수로 재직한다. 시집으로『대낮』 『서정(抒情)의 유형(流刑)』, 『제2의서시』,『모순의물』,『빈콜라병』(1967) 『추일별곡』(1970) 등이 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고 아시아자유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 큼직한 상을 받는다. “시는 표현할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표현이 바로 대상을 창조하는 일이”라며 “대위법적(對位法적)인 충돌이 시의 시간을 낳는다.”고 한다. 이태동 평론가는 신동집 시의 미학은 “존재의 근원적인 탐구로서 ‘원(圓)의 도식화(圖式化)’와 같은 질서와 의미부여”라고 분석한다. “빈 콜라병에는 가득히 /빈 콜라가 들어 있다.” 지금 읽어도 좋은 시의 반어적 충돌은 존재에 대한 고뇌이던가. 6⸱25시기의 향토문단은 피난문인들과 어울려 폐허의 현실을 견뎌냈다. 이 시기의 신동집, 김종길, 박양균, 박훈산, 최태응 등은 향촌동 다방과 주점이 활동 무대였다. 시인은 늘 중후한 모습이었고 당시 서울에 가면 ’대구에는 신동집 시인이 있지요.‘ 라 하던 대구를 대표한 시인이다. 시인은 김춘수 시인과 함께 1970-80년대 대구시단을 사실상 이끌며 왕성한 활동을 했으나 고혈압으로 갑자기 쓰러지게 된다. 고혈압과 투병하면서도 『신동집시전집』,『송별』『여로』 『누가 묻거든』 등을 발간한다. 초인적인 열정의 시인은 이후 그의 모든 시집과 남은 원고 일체를 시우(詩友) 이태수 시인에게 부탁하고 떠난다. 대구 두류공원의 시비 「낙엽 落葉」에서 “무엇이 남아 있는가.”라고 회의하고 “억만광년(億萬光年)의 현암(玄暗)을 거쳐” 생의 원점으로 돌아간 원주 위의 시인이다. 「어느 날 아침」(1973) 「탑이 있는 구도」(1973) , 「목숨」 「낙엽」 「기폭과날개」 등이 지금도 회자된다.
9. 시인 박훈산 (朴薰山,1919-1985)
박훈산 시인은 경북 청도 출신으로 본명은 유상(裕相)이다. 경북 청도군 금천면 선암로 선암공원에 세워진(2015) 박훈산 시비에 의하면 박훈산 시인은 ‘들장미 아름답고 애국충정의 기품이 서려있는 청도 금천면 신지리 마을에서 태어나 1985년 타계할 때까지 일생을 시와 함께 하였다.’고 회고한다. 시인은 일본대학 법과를 졸업(1941) 하고 1946년 ⟪국제신보⟫에 「노래 다시 부르리」를 발표하면서 등단한다. 6⸱25때는 공군 종군단 ‘창공구락부’ 16 명의 한 멤버가 되어 마해송, 조지훈, 최인욱, 최정희 박목월, 박두진, 김동리 등과 교류한다. 창공구락부와 육군종군단 문인들이 전란중의 국민을 위로하기 위하여 1952년 1월부터 단막극 ‘고향사람들’을 대구 부산에서 공연하였는데 박훈산 시인도 배우가 되어 참여한다. 첫 시집 『날이 갈수록』(1958)으로 경상북도문화상을 받았으며 한국문협 중앙위원, 시협 창립발기, 유치환 시인과 예총경북지부를 창립하고 초대 사무국장, 효성여대 강사를 한다. 시집 『날이 갈수록』(1967, 재판)에 이어 출판한 『박훈산시선집』(1976)에는 해방 직후부터 활동한 것 중 50편을 자선하여 묶는다. 신동집,김종길,박양균 등 시인과 향촌동 중심으로 전후시절을 보냈으나 피난문인들이 상경한 후에도 향촌동을 떠나지 않았다. 법조인이 아닌 시인으로서 산다는 것 큰 키에 늘 베레모를 쓰고 다니던 호남형인 시인의 말기적 양식은 “일생동안 떨치지 못한 실의와 좌절을 문학으로 달랬던 비운의 시인”이었다. 청도에 세워진 시비 「보리고개」에서 대구 두류공원의 시비 「날이 갈수록」에 이르기까지 시적 자아는 세계와 균열되거나 모순의 그것으로 하여 그의 언어는 절제된 뼈대로 남는다. ‘나만의 영토(領土)’(「위치(位置)」)에서 자유와 방랑을 거듭했던 시인은 ‘사람이 그리워서/ 차라리 사람을 / 나는 피해 가게’(「날이 갈수록」) 되고 떠난 친구의 영혼을 위하여 ‘독주(毒酒)’(「실체實體」)에 취해야했던 것이다. ‘서러운’ 시인 박훈산은 산업화시대의 문단에서 모순적인 현실을 초월하고자 온몸으로 저항하고 또 포용한 시인이다. 이후 2017년부터 청도문협에서는 박훈산 백일장을 열어 그의 시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10. 시인 박종우(朴鐘禹,1925-1976)
1977년 5월에 세운 고무신 박종우 시비의 「종⸱1」에는 “아직은 아직은 /건드리지 말라 /도사린 설움 /설움을 터뜨리지 말라” 며 스스로 종이 울릴 때 까지 건드리지 말라고 유예를 당부한다. 그의 호는 고무신(古無新)이다. 실제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는 시인의 기행은 부조리한 시대를 냉소했던 몸짓이던가. 박종우 시인은 경남 울주군 상북면 태생이다. 상북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니혼대학 문과에서 공부했으나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징병을 당해 만주로 가게 된다. 시 「기도」에는 “내 어릴 적 대륙에 용병(傭兵)으로 끌려가던 날”을 회고하며 ‘전쟁 없는 시대’를 희원한다. 1950년대 초 안동고 교사로 발령을 받는다. 그는 국어수업 시간 교과서에 의존하지 않은 자유분방한 교사였고 신세훈 전 문협이사장, 김용진,이두형 등 시인을 배출한 안동문학을 태동시킨 장본인이다. 이후 경주지역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동아대학 출강과 경주문협에서 또는 유치환, 김동리 등과 ‘청맥동인회’를 결성하고 동인지 ⟪청맥⟫을 발간한다. 애주가였던 고무신 시인은 많은 일화를 낳았지만 시문학사에서는 모금을 하여 경주에 시비를 세우게 되고 그것은 경주와의 깊은 인연 때문이다. 이후 상경하여 만혼으로 결혼을 하고 ⟪자유공론⟫, ⟪젊은 세대⟫등의 편집국장과 재향군인회 공보실장을, 한국시인협회, 100인 문학회 등에서 활동한다. 서울에서의 “노란 꿈이 /오늘은 검은 그림자 /도무지 현황(玄黃)을 걷잡을 길이 없다”(「눈」)더니 어느 날 병원으로 옮겨져 약물과다 복용으로 심장마비를 일으켜 51 세로 사망한다. 박종우 시인은 “나처럼 너무 슬픈 짐승”(「소」)을 주목하였고 “풍선 같은 지난 날”(「休日」)의 그의 기행(奇行)은 차라리 인간을 깊이 사랑한 휴머니즘이었다. 자신을 해체하고 세상을 희화했던 고무신 시인은 시집으로 『조국의 노래』(1951), 『습지』(1961), 『양지』, 『한 알의 씨앗을 위하여』(1971), 『다시 가을에』(1975), 수필집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서』 등을 남기고 있다. (최경호 :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