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먼저 말미의 편찬자 범엽(范曄, 398〜445)의 논평과 찬양하는 글을 읽어보면 전체적인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동이전의 구성을 보면 서론에서 요순시대부터 하‧은‧주 삼대를 지나 진(秦)‧한(漢) 그리고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한중관계에서 특기할만한 사실을 서술하고, 다시 세부적으로 부여(夫餘) 읍루(挹婁) 고구려 동옥저 예(濊) 한(韓)에 이어 말미에 편찬자의 논평으로 마무리 된다. 중국 정사 중에 한국사를 수록한 문헌의 제목을 보면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서는 위만조선의 사료만을 선별하여 수록하였기 때문에 조선전(朝鮮傳)이라 하였고, 후한서를 중심으로 나머지는 대부분 시대구분 없이 서술하였기 때문에 동이전(東夷傳)이라 하고 있다. 동이(東夷)의 의미에 관해서는, 서두에 ‘동방(東方)을 이(夷)라고 한다.’ 고 하여 동방과 동이는 지명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고, 말미에 찬양하는 글에서 ‘해 돋는 우이(嵎夷)에 궁전을 짓고 살며 다스리니 곧 양곡(暘谷)이라 한다.’고 하여 한민족은 시대와 왕조를 초월하여 상고시대부터 단군조선 기자조선 그리고 신라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으로『상서』요전에 나오는 우이(嵎夷)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동이는 중국 동쪽의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 동이 구이 우이 양곡 조선 등과 같이 해 뜨는 신성구역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동방(東方)을 이(夷)라고 한다.” 하였다. 이(夷)라는 것은 근본이다. 어질고 생육(生育)하기를 좋아하며 만물이 이 땅을 저촉(觝觸)해서 산출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천성이 유순하고 도리로 다스리기가 쉬우니, 군자국(君子國)과 불사국(不死國)이 있기까지 하다. 【『산해경(山海經)』에, ‘군자국이 그 북쪽에 있는데 의관에 검을 차고, 짐승을 잡아먹으며, 두 가지 줄무늬가 있는 호랑이를 곁에 두고 부린다. 그 사람들은 사양하기를 좋아하여 다투지 않는다.’ 또 죽지 않는 사람들이 교경국(交脛國)의 동쪽에 있다. 그 사람들은 검은빛이고 수명이 죽지 않는다. 나란히 東方에 있다.’ 하였다.】 동이(東夷)는 아홉 부족이 있으니, 견이(畎夷) · 우이(于夷) · 방이(方夷) · 황이(黃夷) · 백이(白夷) · 적이(赤夷) · 현이(玄夷) · 풍이(風夷) · 양이(陽夷) 등이다. 그러므로 공자도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 싶어 하였다. 옛날 요임금이 희중(羲仲)에게 명하여 우이(嵎夷)에 살게 하였다. 이곳을 양곡(暘谷)이라고도 하니 대개 해가 뜨는 곳이다. … 찬양한다. 우이(嵎夷)에 궁전을 짓고 살며 나라를 다스리니 곧 양곡(暘谷)이라 한다. 산과 바다에 읍락을 이루고 사는 것을 구이(九夷)로 구분하였다. [해설] 이 문장에서 주어는 우이(嵎夷)가 된다. 『상서(尙書)』에서 말하였다. 요임금은희중(羲仲)에게 나누어 명하여 우이(嵎夷)에 살게 하니, 이곳을 양곡(暘谷)이라고도 한다. [택(宅)은 거주하는 것이다. 동표(東表)의 땅을 우이(嵎夷)라고 칭한다. 양(暘)은 명(明)인데, 태양이 양곡에서 떠오르면 천하가 밝아지므로 양곡(暘谷)이라고 칭한다. 양곡(暘谷)과 우이(嵎夷)는 동일하다. 희중(羲仲)은 우이에 살면서 동방(東方, 조선)을 다스리는 관직이다.] 떠오르는 해를 경건히 맞이하여 봄 농사를 고르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인(寅)은 공경(敬)이고 빈(賓)은 인도하는 질서이다. 한 해가 동방에서 시작되면 비로소 들로 나아가서 경작하는 것을 동작(東作)이라고 한다. 동방의 관직인 희중(羲仲)은 떠오르는 태양을 경건히 인도하고 절기에 따라 봄 농사일을 고르게 다스려 농사일에 힘쓰도록 하는 것이다.] 乃命羲和 欽若昊天[重黎之後 羲氏和氏 世掌天地四時之官 故堯命之 使敬順昊天] 歷象日月星辰 敬授人時. 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宅居也 東表之地 稱嵎夷 暘明也 日出於谷而天下明 故稱暘谷 暘谷嵎夷一也 羲仲居治東方之官] 寅賓出日 平秩東作[寅敬 賓導 秩序也 歲起於東 而始就耕 謂之東作 東方之官 敬導出日 平均次序 東作之事 以務農也] -『상서』 요전(堯典) 동해와 태산(泰山) 사이가 청주(靑州)이다. [동북으로 바다를 점거하고 서남으로는 태산(泰山)에 이른다.] 우이(嵎夷)의 치수가 다스려지고 나니 [우이(嵎夷)는 지명이다. 쓰인 공력이 적었으므로 략(略)이라 한다.] 이에 유수(濰水)와 치수(淄水)의 옛 물길로 인도하였다. [유수(濰水)와 치수(淄水)의 그 옛 물길을 복구하였다.] 海岱惟靑州 [東北據海 西南距岱] 嵎夷旣略 [嵎夷地名 用功少曰略] 濰淄其道 [濰淄二水 復其故道] -『상서』우공(禹貢) * 괄호 안은 공안국의 전(傳) 우이(嵎夷)는 지금의 조선 땅이다. 공안국의 전(傳)에 동표(東表)의 땅을 우이(嵎夷)라고 칭한다고 했다. 『사기정의』 에 청주(靑州)는 동방 경계의 밖, 별유천지에 있으므로 표(表)라고 하여 동표(東表)의 땅이라고 한다.『 우공추지(禹貢錐指』)에는 『후한서』 동이전에 의거하여 우이(嵎夷)를 조선 땅이라고 하였다. 대개 조선은 옛날 청주(靑州)에 속하였으며, 산동성 등주부(登州府)와 더불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대하고 있으니, 공안국의 전(傳)에 동표(東表)의 땅이라는 말과 정확히 부합된다. 嵎夷 今朝鮮地 按孔安國傳 東表之地稱嵎夷 正義曰 青州在東界外之畔為表 故云 東表之地 禹貢錐指 援据後漢書 以嵎夷為朝鮮地 蓋朝鮮古屬青州 與今山東登州府 隔海相對 正合孔傳 東表之語 -『상서지리금석(尙書地理今釋)』 또『상서정의(尙書正義)』와 『상서지리금석』에서도 우이(嵎夷)는 지금의 조선 땅이며 하우씨가 홍수를 다스릴 때 천하를 九州로 나누었는데 구주 중의 하나인 靑州는 단군조선의 강역이라고 하였다. 朝鮮이라는 국호에 관해, ‘동표(東表)의 해 뜨는 땅에 임금이 살기 때문에 조선이라 이름 하였다. [朝鮮 : 居東表 日出之地 故名朝鮮]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1권 평양부 郡名.’ 고 하였다. 이는 공안국의 전(傳)에, '동표(東表)의 땅을 우이(嵎夷)라고 칭한다. 희중(羲仲)은 우이에 살면서 동방(東方, 조선)을 다스리는 관직이다.' 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요임금이 희중을 살게했던 우이(嵎夷)가 단군의 도읍지 아사달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조선은 본래 도읍지의 지명인데, 이곳이 나라의 신성구역이기 때문에 국호로도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 경전인『상서』에 의거하여, 요임금이 희중에게 살게 했던 해 뜨는 곳, 우이가 바로 단군조선의 도읍지 아사달이며, 희중은 동방을 25년간 다스리다가 단군이 이곳에 도읍하고 건국하였던 것이다. 또한 우공(禹貢)편의 기록은 단군조선의 강역에 관한 것으로, 한반도 동쪽의 동해로부터 지금 중국 산동성에 있는 태산(泰山)에 이르기까지가 청주 (靑州)이고, 이곳이 바로 단군조선의 강역이라고 하였다. 『한서』지리지의 첫머리에, 옛날 황제 헌원씨가 천하를 九州로 나누어 구획하였는데, 각 州마다 사방 1만리 단위로 나누었으며 이 제도가 하우씨가 홍수를 다스릴 때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렇다면 『상서』요전은 요순시대 단군조선 도읍지에 관한 기록이고, 우공 편의 청주 (靑州) 는 고조선 강역과 도읍지를 밝힌 것이다. 따라서 단군조선 강역은 동북으로 바다를 점거하고 서남으로는 태산(泰山)에 이르는 사방 1만 2천리의 광대한 영토였다. 그리하여『상서』요전은 중국의 대표적인 정사인 『사기』오제본기에도 수록되어 있고, 우공 편은 요순시대의 지리지이기 때문에, 『사기』하본기와『한서』지리지에도 수록되어 있어 저명한 주석가들의 자세한 해설이 덧붙여져 있다. 중국의『사기』 와『한서』등 대표적인 역사서에서 한결같이 주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다고 하였다. 혹자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만 했지, 기자조선 도읍지에 관해서는 밝히고 있지 않다고 의혹을 제기한다. 이는 조선이 국호인줄만 알았지 朝鮮이 본래 동이 구이 우이 양곡과 같이 해 뜨는 구역의 지명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신라 김알지가 출현한 곳을 계림(鷄林)이라고 하는데, 이곳이 나라의 신성구역이기 때문에 계림이 도읍지의 지명으로도 쓰이고, 국호로 쓰이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도읍지는 같은 곳으로, 요임금이 희중에게 동방을 다스리며 살게 했던 우이 지역이며 구주 중에 청주는 단군조선의 강역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렇다고 해서 요임금이 보냈던 희중이 단군이라는 말은 아니다. 요임금은 갑진년(甲辰年, B.C 2357)에 즉위하여 맨 처음 희중(羲仲)에게 명하여 우이(嵎夷)에 살게 하고, 이어서 희숙(羲叔)‧화중(和仲)‧화숙(和叔) 등에게 각각 명하여 사계절의 농사일을 고르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로부터 25년 후인 무진년(B.C 2333)에 환웅천왕의 아들 왕검(王儉)이 희중을 살게 했던 우이(嵎夷,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을 건국하여 희중의 관직을 계승하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3천 2백여 년이 지나 신라 진성여왕이 당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양위표(讓位表)에서 ‘우이(嵎夷)에 살면서 희중(羲仲)의 벼슬에 있는 것이 신의 본분이 아니고…’ 라고 하였다. 신라도읍지 역시 우이(嵎夷)에 있고, 역대 신라왕은 희중의 관직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를 동이라고 하는 것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그리고 신라 천년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초월하여 역대로 우이(嵎夷)에 임금이 사는 궁궐이 있어 그렇게 부른 것이고, 공자가 뗏목을 타고 가서 살고 싶어 했던 곳도, 바로 우이를 가리킨다는 말이다. 신라 성덕대왕신종에 새겨진 종명(鍾銘)에, “동해 위의 三神山은 선인들이 사는 곳, 땅은 선도산(仙桃山)에 있고 경계는 부상(扶桑)에 접하였다. 여기에 우리나라가 있어 (천하를) 통합하여 한 고향이 되었다.” 하였다. [東海之上 衆仙所藏 地居桃壑 界接扶桑 爰有我國 合爲一鄕] 여기에 부상(扶桑)은 열 개의 태양이 대기하는 신목(神木)으로 이곳이 바로 우이(嵎夷)라는 말이다. 지금부터 4천 3백여 년 전인 중국의 요순(堯舜)시대에 간행되어 동양 최고(最古)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산해경(山海經)』에는 고조선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朝鮮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천독(天毒, 천축국)이다. 그 사람들은 삼신산(三神山)에 살며 남을 친근히 하고 사랑한다. [조선은 지금의 낙랑군(樂浪郡)이다. 천독(天毒)은 곧 천축국(天竺國)을 말한다. 도덕(道德)을 귀하게 여기고 문자․서책․금․은․동전․화폐가 있었다. 부도(浮屠, 불교)는 이 나라에서 나온 것이다.]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 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朝鮮 今樂浪郡也. 天毒卽天竺國 貴道德 有文書金銀錢貨 浮屠出此國中也] -『산해경』 제18 해내경. 조선은 열양(列陽)에 있는데, 동해의 북쪽 열고야산의 남쪽이다. 열양(列陽)은 연(燕)에 속한다.〔조선은 지금의 낙랑군의 현(縣)으로 기자(箕子)가 봉해진 곳이다. 열(列) 또한 강 이름으로 지금의 남대방군(南帶方郡)에 있으며 남대방군에 열구현(列口縣)이 있다.〕 朝鮮在列陽 東海北山南 列陽屬燕〔朝鮮 今樂浪縣 箕子所封也. 列亦水名也 今在帶方 帶方在列口縣〕 -『산해경』제12 海內北經. * 괄호 안은 곽박(郭璞)의 주(注) 중국 정사인『한서』지리지(地理志)에 고조선 도읍지에 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낙랑군: 한 무제 원봉 3년(B.C. 108)에 개설하였다. [응소는, 옛 조선의 도읍지라고 했다.] 25개 현이 있다. 조선현(朝鮮縣),[응소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현에 봉했다고 하였다.] 樂浪郡: 武帝元封三年開 [應劭曰 故朝鮮國也] 縣二十五:朝鮮[應劭曰 武王封箕子於朝鮮] . -『한서』지리지 후한시대의 석학인 응소(應劭)는 낙랑군이 고조선 (故朝鮮)의 도읍지라고 하였는데, 이는 낙랑군의 25개 현( 縣)을 관장하는 치소가 있는 조선현이 단군조선의 도읍지라는 뜻이고, 거듭하여 낙랑군 조선현(朝鮮縣)은 기자의 도읍지라고 하여 조선현이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도읍지를 별도로 구분하여 실제로는 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또『산해경』에 조선에 관한 기록이 두 번 나오는데, 곽박의 전(傳)에, 해내경에는 조선의 도읍지가 낙랑군(樂浪郡)이라고 하였고, 해내북경에서는 낙랑군 조선현은 기자가 봉해진 도읍지라고 하였다. 이는 응소의 주석과 같은 말이다. 낙랑군의 25개 현을 관할하는 치소가 있는 조선현은 바로 요임금이 희중에게 명하여 살게했던 우이(嵎夷)와 같은 곳으로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박혁거세를 시조로 추대하여 신라를 건국하였다. 하후씨(夏后氏)의 태강(太康)이 덕을 잃자, 동이 사람들이 처음으로 배반하기 시작하였다. 【태강은 계(啓)의 아들이다. 사냥터에 백일동안이나 머무르면서 백성들을 구휼하지 않으니 동이족인 예(羿)가 축출하였다.】 소강(少康) 이후부터는 대대로 왕실의 교화에 감복되어 왕실에 조회하고 그들의 음악과 춤을 바치게 되었다. 걸(桀)이 포악해지니 동이족이 침입하여 왔는데, 은(殷)의 탕(湯)이 혁명하고 이들을 정벌하여 평정하였다. 중정(仲丁) 때에 이르러 남이(藍夷)가 침범하였다. 이로부터 혹은 복종하고 혹은 배반하기를 3백 여 년 간 계속하였다. 무을(武乙)에 이르러 [은이] 쇠약해지자, 동이(東夷)가 점차 강성해져서 드디어 회수(淮水)와 대산(岱山, 태산)으로 나뉘어 옮겨오더니 점차 중국 영토의 중심에까지 뻗어와 살게 되었다. 주 무왕이 [은의] 주(紂)를 멸망시킴에 이르러 숙신(肅愼)이 와서 석노(石砮)와 고시(楛矢)를 바쳤다.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주나라를 배반하고 이적(夷狄)을 불러서 권유하였는데, 주공(周公)이 이들을 정벌함으로서 동이가 드디어 평정되었다. 강왕(康王) 때에 숙신(肅愼)이 다시 왔다. 그 후에 서이(徐夷)가 참람되이 왕이라 칭하며 구이(九夷)를 거느리고 종주(宗周)를 쳐서 서쪽으로 황하의 상류에까지 이르렀다. 목왕(穆王)은 그 세력이 한창 떨침을 두려워하여 동방의 제후를 분리시켜 서언왕(徐偃王)에게 명하여 주재하게 하였다. 언왕(偃王)은 황지(潢池)의 동쪽에 거처하였으며 지방이 5백리였다. 인의(仁義)를 행하니 육지로 조회하는 나라가 36국(國)이나 되었다. 목왕이 후에 적기(赤驥)·녹이(騄耳) 등의 천리마를 얻어서 타고 【『사기(史記)』에, ‘조보(造父)가 말을 잘 몰아 주 목왕이 적기(赤驥)·도려(盜驪)·화류(驊騮)·녹이(騄耳) 등 네 필의 천리마가 끄는 수레를 타고 서쪽으로 순수하여 (곤륜산의 서왕모를 만나) 즐거움에 돌아올 것을 잊었다.’ 고 하였다.】 이에 조보(造父)로 하여금 그 말을 몰고 초(楚)나라에 알려서 서언왕을 치게 하니, [조보는] 하루만에 (초나라에) 도착하였다. 이에 초 문왕(楚文王)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그들을 멸하였다. 언왕(偃王)이 어질기만 하고 권도(權道)가 없어서 차마 그 백성을 데리고 싸우지 못하였으므로 패망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리하여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났는데, 따라간 백성이 만여 명이나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다. 【『박물지(博物志)』에, 서(徐)나라 임금의 궁녀가 임신을 해서 알을 낳자 상서롭지 못한 것이라고 여겨 빈주(濱洲)의 물가에 버렸다. 그런데 홀로 외로이 사는 한 노파에게 곡창(鵠蒼)이라는 개가 있었는데 버려진 알을 물고 들어오므로 따뜻하게 덮어놓으니 작은 아기가 태어났다. 태어날 때 바르게 누워 있었으므로 언(偃)으로 이름을 삼았다. 궁녀가 다시 거두어 기르니 성장하자 어질고 지혜로워 세습하여 서군(徐君)이 되었다. 후에 곡창은 죽을 때에 뿔이 나고 꼬리가 아홉이나 되더니 변화하여 황룡(黃龍)이 되었다. 곡창을 혹은 후창(后蒼)이라고도 한다. 『하후지(夏侯志)』에, 옹주(翁洲) 위에 서언왕의 성이 있는데, 전(傳)에 이르기를, 옛날 주 목왕이 순수할 때에 제후가 함께 언왕을 거룩하게 섬기자 목왕이 듣고서 조보가 모는 준마가 끄는 수레를 타고 하루에 천리를 달려 스스로 돌아와 정벌하였다고 한다. 혹은 초왕에게 명하여 장수가 되어 정벌했다고 한다. 언왕은 이에 이곳에 성을 쌓고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언왕은 인자하여 차마 싸움을 벌여서 백성을 해치는 짓을 하지 못했다. 때문에 그 백성은 결과적으로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 무원현 동산 아래로 도주했으니 백성들 중 언왕을 따르는 자가 1만여 호를 헤아렸다. 그 후에 마침내 이 산을 서산이라 했다. 산 위에 석실을 세웠는데 그 안에 신령이 있어 주민들이 기도를 한다. 오늘날까지 이런 것들이 다 남아 있다. 『죽서기년(竹書紀年)』에, ‘목왕 6년 봄에 서자(徐子, 서언왕) 탄(誕)이 와서 조회하니 서백(徐伯)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여왕(厲王)이 무도하자, 회이(淮夷)가 쳐들어 왔다. 왕이 괵중(虢仲)에게 명하여 정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선왕(宣王)이 다시 소공(召公)에게 정벌하도록 명하여 그들을 평정하였다. 유왕(幽王) 시대에 이르러 음란해지자 사이(四夷)가 번갈아 침범하여 왔는데, 제(齊) 환공(桓公)이 패업을 닦고서 물리쳤다. 초 영왕(靈王)이 신(申)에서 회맹(會盟)할 적에는 그들도 회맹에 참여하였다. 그 뒤 월(越)이 낭사(琅邪)로 옮기고 나서 동이족과 함께 전쟁을 일으켜, 마침내 중화의 여러 나라들을 능멸하고 작은 나라들을 침략하여 멸망시켰다. [해설] 당나라 대문호인 한유(韓愈, 768〜824)가 지은‘구주 서언왕 묘비(衢州徐偃王廟碑)에서 말하였다. "진(秦)나라가 호랑이처럼 여러 나라를 병탄하였으나, 서(徐)나라는 황지(潢池)의 동쪽에 거처하며 문덕(文德)으로 다스렸다. 언왕 탄(偃王誕)이 나라를 다스리고부터 형벌과 전쟁을 일삼는 말단적인 풍조를 제거하기에 더욱 힘쓰고, 임금의 책무와 백성을 돌보고 사방을 대하는 일을 한 결 같이 인의(仁義)로 행하였다." 이때에 주나라 천자 목왕(穆王)이 무도하여 천하를 다스림에 마음을 쓰지 않고 도사(道士)들의 말을 좋아하여 여덟 필의 용마(龍馬)를 얻어 타고서 서쪽으로 유람을 가서 서왕모(西王母)와 함께 곤륜산의 요지(瑤池) 가에서 연회를 베풀고 시가(詩歌)를 읊조리며 돌아가기를 잊었다. 사방에서 서로 다투는 제후들이 묻거나 따질 곳이 없어서 모두 서(徐)나라를 받들어 옥백(玉帛)이며 짐승을 서나라 조정에 폐백으로 바친 나라가 36국에 이르렀다. 언왕이 붉은빛의 활과 화살을 얻는 상서가 있자, 목왕이 이를 듣고 두려워하여 드디어 하늘의 명을 받았다고 하면서 조보(造父)에게 수레를 몰도록 명하여 먼 길을 달려 돌아와 초나라와 연합하여 서나라를 정벌하였다. 서나라 언왕은 차마 자기 백성들을 싸움터로 내보낼 수 없어서 북쪽으로 팽성(彭城)의 무원산(武源山) 아래로 도망가니, 그를 따라온 백성이 일만여 가구였다. 언왕(偃王)이 죽자 백성들은 그 산을 서산(徐山)으로 부르고 바위를 파서 석실을 만들어 언왕을 제사 지내고, 그의 아들을 추대하여 과거처럼 임금으로 삼으니, 구왕(駒王), 장우(章禹) 등 할아버지와 손자가 서로 이었다. 『산해경』에 조선은 천축국이요, 군자국이라고 하였다. 요임금에 이어 천자의 지위에 오른 순(舜)이 동이족이라는 사실은 맹자가 밝혔고, 하(夏)나라의 태강(太康)이 덕을 잃자 예(羿)가 축출하였다. 하(夏)나라 말기에 걸(桀) 임금이 폭정을 일삼으니 탕(湯)을 도와 은(殷)나라를 일으킨 재상 이윤(伊尹)은 공상(空桑, 동방)에서 출현하였다. 공상(空桑)이란 해 돋는 구역에 자라는 신령한 뽕나무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을 부상(扶桑) 또는 궁상(窮桑)이라고도 하며 해 뜨는 동방을 뜻하는 대명사로 쓰인다. 은(殷)나라 말기에 주(紂) 임금이 무도하자 문왕과 무왕을 보좌하여 폭군 주(紂)를 멸하고 주(周)나라를 일으킨 태공망(太公望, 여상) 역시 동이(東夷)의 선비라고 하였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태공망은 동이(東夷)의 선비이다. 한 시대를 평정하고자 하였으나 그 군주가 없어 문왕(文王)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위수(渭水)에서 낚시하며 관망(觀望)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주 목왕이 8준마가 끄는 수레를 타고 곤륜산에 가서 서왕모와 요지(瑤池)의 못가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는데, 서왕모가 산다는 곤륜산은 신라도읍지의 선도산(仙桃山)을 가리킨다. 요순 이래로 천하를 안정시켜야 할 중국이 폭정을 일삼으면 어김없이 동이족이 응징하여 바로잡는다. 이리하여 중국이 예(禮)를 잃으면 사이(四夷, 동이)에서 구한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이 불교에서도 전하고 있는데, 신라 낭혜화상(朗慧和尙) 비문에, 훗날 중국이 선(禪)을 잃으면 장차 동이(東夷)에서 묻는다.[他日中國失禪 將問之東夷耶] 고 하였으니 신라를 동이라고 한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리하여 신라 진성여왕이 왕위를 사양하는 표문에서 ‘해 돋는 우이(嵎夷)에 살면서 희중(羲仲)의 관직에 있는 것은 신의 본분이 아니고[日邊居羲仲之官 非臣素分]’ 라고 한 것이다. 진(秦)나라가 6국을 합병한 후 회수(淮水)와 사수(泗水) 지방의 동이족을 모두 분산시켜 진(秦)의 백성으로 만들었다. 진섭(陳涉)이 군대를 일으켜 진(秦)의 천하가 허물어지자,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조선으로 피난하여【『한서(漢書)』에, 조선왕 위만(衛滿)은 연(燕)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가 전성기였던 때에 일찍이 진번 조선(眞番朝鮮)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기 위하여 성을 쌓았다. 한(漢)나라가 일어나 복속되자 연왕 노관(盧綰)은 배반하여 흉노로 들어가니, 위만은 동쪽으로 달아나 망명하여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빈 터인 상하장(上下障)에 살았다. 점차 조선과 만이(蠻夷) 및 옛 연(燕)·제(齊)의 유민들을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을 정하였다.】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백년 쯤 지나서 한 무제가 그를 멸망시키니, 이에 동이(東夷)가 비로소 상경(上京)에 통하게 되었다. 왕망(王莽)이 왕위를 찬탈하자, 맥인(貊人)이 변경에 쳐들어와서 노략질하였다. 건무(建武, 25〜55) 초에는 다시 와서 조공하였다. 이때 요동태수 제융(祭肜)의 위세가 북방을 떨게 하고 명성이 해외에까지 진동하니, 이에 예(濊)·맥(貊)·왜(倭)·한(韓) 등이 만 리 밖에서 조공하였다. 그리하여 장제(章帝)·화제(和帝) 시대 이후로 사절이 왕래하다가 영초(永初) 연간(107〜113)에 재난이 많아지게 되자, 비로소 후한(後漢)을 침입하여 노략질하였으며, 환제(桓帝)·영제(靈帝)가 잘못된 정치를 하여 어지럽게 되자 이런 일이 점점 증가하고 만연하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중흥한 뒤로부터 사이(四夷)의 빈공(賓貢)이 비록 때에 따라 어기거나 배반함은 있었으나, 사신과 역로(驛路)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풍속과 풍토를 대략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동이(東夷)는 거의 모두 토착민으로서,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기를 좋아하고, 관(冠)으로는 고깔(弁)을 쓰고 비단옷을 입으며, 그릇은 조두(俎豆)를 사용하였으니, 이른바 중국이 예(禮)를 잃으면 사이(四夷)에서 구했던 것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노나라 소공(昭公) 17년에, 담자(郯子)가 내조(來朝)하였는데, 소호씨(少皞氏)가 새 이름으로 관직명을 쓰는 이유에 대해 소자(昭子)가 묻자, 담자는 소호씨는 자신의 조상이며 즉위하자 마침 봉황이 궁정에 날아드는 상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공자가 담자에게서 배우고 나서 사람들에게 “나는 들으니, 천자의 지위에 있으면서 그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사이(四夷, 동이)에 가서 배운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참으로 옳은 말이다.” 하였다.】 무릇 만(蠻)·이(夷)·융(戎)·적(狄)을 통틀어 사이(四夷)라고 부르는 것은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을 모두 제후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논평한다. 옛날 기자(箕子)가 쇠망하는 은(殷)나라의 운수를 피하여 조선 땅에 피난하였다. 처음엔 그 나라의 풍속이 알려진 바 없었으나, 범하는 것을 금지하는 8조(八條)의 규약을 시행하여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알게 하니, 마침내 그 읍락에 음란한 행동과 도둑이 없어져서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았으며, 완고하고 야박한 풍습을 바꾸고 너그럽고 간략한 법을 이루어 수 백 천 년 동안 행하여졌다. 그러므로 동이(東夷)의 전체가 유순하고 삼가는 풍속이 되어 삼방(三方, 남만 서융 북적)의 풍속과는 다르게 되었으니, 진실로 정교가 창달되면 도의가 있게 마련인 것이다. 중니(仲尼, 공자)가 분연히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자 하였더니 어떤 이가 그곳은 누추한 곳이 아닌가 하므로, 공자가 ‘군자가 살고 있으니 어찌 그곳이 누추하겠는가.’ 한 것도 그런 까닭이 있어서 일 것이다. 그 뒤 드디어 통상을 하게 되고 점차 상국(上國)과 교역하더니,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그들의 풍속과 섞이어 어지럽히자, 이에 따라서 경박하게 달라졌다. 노자(老子)는 ‘법령이 불어날수록 도적이 많아진다.’고 하였다. 기자(箕子)가 법조문을 간략하게 하고 신의로 다스린 따위는 성현의 법을 만든 근본취지를 얻었다 하겠다. 찬양한다. 우이(嵎夷)에 궁전을 짓고 살면서 동방을 다스리니 곧 양곡(暘谷)이라 한다. 산과 바다에 사는 것을 아홉 부족으로 구분하였다. 진(秦)나라 말년에 정치가 혼란해지자 연(燕)나라 사람이 피난하여【위만(衛滿)을 말한다.】 중화의 풍속과 섞이고 (조선의) 풍속까지 경박하게 하였다.【위만이 조선에 들어가니 이미 중화의 풍속과 섞이고 또 그들 본래 교화까지 경박하게 되었다가 마침내 한(漢)나라와 통하게 되었다.】 아득하고 멀리서 통역하자니 혹은 따르고 혹은 배반도 하는구나. [해설] 기자(箕子)의 교화는 칭송하면서 반면에 위만(衛滿)은 순후한 조선의 풍속을 어지럽힌 무도한 왕조라고 비판하고 있다. 단군 왕검(王儉)은 우이(嵎夷,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1,048년을 다스리다가 은나라 말기에 장당경(藏唐京)에 은거하다가 아사달산에 돌아와 신이 되었다. 그 후 은나라가 멸망하자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단군을 계승하여 다시 우이(嵎夷)에 도읍을 정하고 기자조선을 건국하여 자손이 대를 이어 928년을 다스리다가 41대 준왕(準王)에 이르러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하하여 마한 왕이 되었다. 위만조선은 왕험(王險)에 도읍을 정하고 88년간 존속하다가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 때에 한 무제가 정벌하였다. 위만조선 도읍지 왕험(王險)의 위치에 관해 『사기』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사기 집해】서광(徐廣)은 창려(昌黎)는 험독현(險瀆縣)에 있다고 하였다. 【사기 색은】서광(徐廣)은 창려(昌黎)는 험독현(險瀆縣)에 있다고 하였다. 응소(應劭)의 주(注)에,『한서』지리지에, 요동군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지라고 하였다. 신찬(臣瓚)은,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으며 [이로부터 이곳을 험독(險瀆)이라고 한다.] 고 하였다. 集解 徐廣曰 昌黎有險瀆縣也 索隱 徐廣曰 昌黎有險瀆縣 應劭注 地理志 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 [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臣瓚云 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也[此自是險瀆也] 위만조선의 도읍지 왕험성(王險城)의 위치에 관해, 주(注)에서 응소(應劭)는 요동군 험독현(險瀆縣)이라고 하였고, 서광(徐廣)도 역시 요동군에 속한 험독현의 창려(昌黎)라고 하였다. 『한서』지리지 신찬(臣瓚)의 주(注)에,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으며, 이로부터 이곳을 험독(險瀆)이라고 한다.’ 라고 하여 역시 험독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기 색은】신찬(臣瓚)의 주(注)에서 문장의 주어가 되는 ‘이로부터 이곳을 험독(險瀆)이라고 한다.(此自是險瀆也)’ 라는 구절을 생략하고 인용하여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은 2천 여 년을 우이(嵎夷)에 도읍하였으니 신라도읍지와 같는 곳이고, 위만은 요동군 왕험에 도읍하였으므로 서로 다른 곳이다. 이와 같이 오히려 중국 정사와 경전에서 고조선에 관해 자세하게 밝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씨조선 건국 직후부터 사대주의와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역사서 개간을 통하여 단군 기자 위만으로 이어지는 3조선의 도읍지는 평양이고, 한나라와의 국경선을 이루는 패수(浿水)는 평양의 대동강이라고 날조하여 찬란했던 한국사를 초토화 시켜버렸다. 이씨조선이 멸망한지 어언 1백여년, 현재까지도 정부에서는 매년 천문학적인 국민의 혈세를 탕진하면서도 이런 망국적인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역사 바로세우기 블로그: http://www.jirisan21.net/ 에서 後漢書 東夷傳 [原文] 王制云 東方曰夷 夷者柢也 言仁而好生 萬物柢地而出 【事見風俗通. 集解, 惠棟曰, 風俗通作觝 又風俗通云, 萬物觝觸地而出】 故天性柔順 易以道御 至有君子·不死之國焉 【山海經曰 君子國衣冠帶劒 食獸 使二文虎在旁 外國圖曰 去琅邪三萬里 山海經又曰 不死人在交脛東 其爲人黑色, 壽不死 並在東方也. 集解, 惠棟曰, 括地圖云, 君子民好讓 古爲君子國 說文云, 東夷從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夷有九種【竹書紀年曰 后芬發 卽位三年 九夷來御也.】曰畎夷 于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竹書紀年曰 后泄二十一年 命畎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 后相卽位二年 征黃夷 七年 于夷來賓 後少康卽位 方夷來賓也】故孔子欲居九夷也.【集解, 惠棟曰 論語疏云 九夷 一曰 元莬 樂浪 高麗 滿飾 鳧臾 索家 東屠 倭人 天鄙】 昔堯命羲仲宅嵎夷 曰暘谷 蓋日之所出也.【孔安國 尙書注曰 東方之地曰嵎夷 暘谷 日之所出也】 夏后氏 太康失德 夷人始畔【太康 啓之子也 槃于游田 十旬不反 不恤人事 爲羿所逐也】 自少康已後世服王化 遂賓於王門 獻其樂舞. 【少康, 帝仲康之孫, 帝相子也. 竹書紀年曰 后發卽位元年 諸夷賓于王門 諸夷入舞】 桀爲暴虐 諸夷內侵 殷湯革命 伐而定之 至于仲丁 藍夷作寇 【仲丁 殷太戊之子也 竹書紀年曰 仲丁卽位 征于藍夷也】 自是或服或畔 三百餘年. 武乙衰敝 東夷寖盛 遂分遷淮·岱 漸居中土. 【武乙 帝庚丁之子 無道 爲革囊盛血 仰而射之 命曰 射天也.】 及武王滅紂 肅愼來獻石砮楛矢 管·蔡畔周 乃招誘夷狄 周公征之 遂定東夷 【尙書 武王崩 三監及淮夷畔 周公征之 作大誥 又曰 成王旣伐管叔·蔡叔 滅淮夷】 康王之時 肅愼復至 後徐夷僭號 乃率九夷以伐宗周 西至河上 【集解, 沈欽韓曰 禮檀弓 徐容居曰, 昔, 我先君駒王, 西討濟於河, 卽此.】 穆王畏其方熾 乃分東方諸侯, 命徐偃王主之. 【】博物志曰 徐君宮人娠而生卵, 以爲不祥, 棄於水濱. 孤獨母有犬名鵠倉 持所棄卵 銜以歸母 母覆煖之 遂成小兒 生而偃 故以爲名 宮人聞之 乃更錄取 長襲爲徐君 尸子曰 偃王有筋而無骨 故曰偃也【集解】惠棟曰, 竹書紀年云 穆王六年春 徐子誕來朝 錫命爲伯 偃王處潢池東 地方五百里 【水經注曰 黃水一名汪水 與泡水合 至沛入泗 自山陽以東 海陵以北 其地當之也.】行仁義 陸地而朝者三十有六國 穆王後得驥騄之乘【史記曰 造父以善御幸於周繆王 得赤驥·盜驪·驊騮·騄耳之駟 西巡狩 樂而忘歸】 乃使造父御以告楚 令伐徐 一日而至 【造父, 解見蔡邕傳.】於是楚文王大擧兵而滅之 偃王仁而無權 不忍鬪其人 故致於敗 乃北走彭城 【武原縣 東山下 百姓隨之者以萬數 因名其山爲徐山. 武原縣 故城在今泗州 下邳縣北 徐山在其東 博物志曰 徐王妖異不常 武原縣東十里 見有徐山石室祠處 偃王溝通陳·蔡之閒, 得朱弓朱矢 以己得天瑞 自稱偃王 穆王聞之 遣使乘駟, 一日 至楚 伐之 偃王仁 不忍鬪 爲楚所敗 北走此山也.】厲王無道 淮夷入寇 王命虢仲征之 不克 宣王復命召公伐而平之. 【毛詩序曰 江漢, 尹吉甫美宣王也 能興衰撥亂 命召公平淮夷 其詩曰 江·漢浮浮 武夫滔滔 匪安匪游 淮夷來求 王命召虎 式辟四方 徹我土疆】及幽王淫亂 四夷交侵 至齊桓修覇 攘而卻焉.及楚靈會申 亦來豫盟 【左傳 楚靈王·蔡侯·陳侯·鄭伯·許男·淮夷會于申】 後越遷琅邪 與共征戰 遂陵暴諸夏 侵滅小邦 秦幷六國 其淮·泗夷皆散爲民戶 陳涉起兵 天下崩潰 燕人衛滿避地朝鮮 【前書曰 朝鮮王滿燕人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築障. 漢興屬 燕王 盧綰反入匈奴 滿亡命東走 渡浿水 居秦故空地, 稍役屬朝鮮蠻夷 及故燕齊亡在者 王之 都王險也】 因王其國 百有餘歲 武帝滅之 於是東夷始通上京 王莽簒位 貊人寇邊 【前書 莽發高句麗兵當伐胡 不欲行 郡縣彊迫之 皆亡出塞 因犯 [法] 爲寇 州郡歸咎於高句麗侯 騶 嚴尤奏言貉人犯法 不從騶起 宜慰安之】 建武之初 復來朝貢 時遼東太守祭肜 威讋北方 聲行海表 於是濊·貊·倭·韓萬里朝獻 故章·和已後 使聘流通 逮永初多難 始入寇鈔 桓·靈失政 漸滋曼焉. 自中興之後 四夷來賓 雖時有乖畔 而使驛不絶 【集解, 劉攽曰 使驛不絶 䅁 郵驛中國可有之 不可通於四夷 自前書 皆言使譯 使卽使者 譯則譯人 故合作使譯 此書內有自作使驛處 明是後人不曉 妄改之 何焯曰 䅁西域傳論云 列郵置於要害之路 馳命走驛 不絶於時月 則西域都護所領者 亦有郵驛 但不何以該四夷使驛 當如前書從譯耳】 故國俗風土 可得略記 東夷率皆土著 憙飮酒歌舞 或冠弁衣錦 器用俎豆 所謂中國失禮 求之四夷者也. 【左傳曰 仲尼學 鳥名 [官] 於郯子 旣而告人曰 吾聞之, 天子失官 學在四夷 其信也】凡蠻·夷·戎·狄總名四夷者 猶公·侯·伯·子·男皆號諸侯云. 論曰, 昔箕子違衰殷之運 避地朝鮮 始其國俗未有聞也 及施八條之約 使人知禁 遂乃邑無淫盜 門不夜扃 回頑薄之俗 就寬略之法 行數百千年 故東夷通以柔謹爲風 異乎三方者也. 苟政之所暢 則道義存焉 仲尼懷憤 以爲九夷可居 或疑其陋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亦徒有以焉爾 其後遂通接商賈 漸交上國 而燕人衛滿 擾雜其風. 於是從而澆異焉 老子曰 法令滋章 盜賊多有 若箕子之省簡文條而用信義 其得聖賢作法之原矣 贊曰, 宅是嵎夷 曰乃暘谷 巢山潛海 厥區九族 嬴末紛亂 燕人違難謂衛滿也雜華澆本 遂通有漢. 【衛滿入朝鮮 旣雜華夏之風 又澆薄其本化 以至通於漢也.】 眇眇偏譯 或從或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