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윤용순의 시 세계
자아 회복과 서정성의 시적 진실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 ‘삶의 인기척’과 궤적(軌跡)의 진실
현대시의 경향은 ‘나’라는 자아(自我)를 배제한 발상이나 주제의 투영(投影)은 있을 수 없다는 시적 신뢰를 획득하고 있다. 이는 그 시인의 연륜과 삶의 방식 또는 생장지 등 현실적인 여건이 바로 우리들의 정(情)으로 분화(分化)하고 그 정이 원류가 되어 시적 이미지나 상징 그리고 표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자타(自他)가 이미 공인(共認)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여기 윤용순이 상재하는 시집 『신주말에, 고려청자에게 바치는 노래』를 음미(吟味)해보면 이와 같이 ‘나’라는 화자(話者)를 적극 활용하여 시적 주체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看過)하지 못한다.
윤용순 시인은 우리 시단에서 원로시인이다. 그는 1960년『自由文學』 11월호에 작품「新週末에」가 양주동 박사의 심사로 당선하여 지금까지 작품활동을 해온 원로이다. 그는 ‘<新週末에>(尹容舜). 尹君의 詩는 四.五編中에서 어느 編을 뽑아도 한 체(體)를 계속(繼續)해서 이루고 있다. 난색(難色)한 바도 없지 않으나 온몸으로 感覺하는 듯 그리고 淸新하며 이메이지가 번져나가는 것이 爽快하다. 異彩를 維持하며 發展시키는 깊이가 要望된다.’는 양주동 박사의 ‘選感(132쪽에서부터 133쪽까지)’에서와 같이 그의 시적 소양과 능력은 이미 상당한 지향점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는 그의 ‘시인의 말’에서 ‘양주동 선생님의 <선감>을 다시 읽어보게 된 것이 50년이 지나서-중략-남은 나이로 시집 한 권 엮어본다’는 말과 같이 그는 공직생활과 정당활동 등 약 40여년간 문학외의 길로 걸어왔다. 그 이유는 ‘먹고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라는 간단한 변명으로 봐서 어쩔 수없이 문학의 본령(本領)을 떠났다가 이제사 시집 한 권을 상재하고 있다.
다시
新週末에 掌狀單葉은
새로 鐘路를 향한 푸른 눈동자
나는 그 푸름의 密度를 갖는다.
나의 軍用<트럭>이며 戰友가 지나가고,
自轉은 南大門에다 두 번째 아침을 賦與한다.
薔薇의 實感과 함께
그것은
鐘路의 街路樹 葉綠素가
묻어온 손바닥을 당신이 주는 잠시간
體溫이 스미는 友情이며
友情속에 포함된 비싼 葉綠素가
染色되어 다시 鐘路에
日曜日이 오는 證明을....... .
--「新週末에」중에서
이 작품은 단기 4293년 11월 1일자 발행된『自由文學』지 11월호(통권 44호)에 실린 당선작품(189쪽에서부터 182쪽까지)의 일부이다. 상당히 시대적인 감응(感應)이 약간 생소한 어법(語法)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당시의 시적 경향이나 어휘(語彙)의 현현(顯現)이 요즘과는 상당한 괴리(乖離)를 맛볼 수도 있지만, 시어(詩語)의 배치라든지 시적 구도를 장식하는 대상물 등이 다채롭다.
그는 ‘나는 그 푸름의 密度를 갖는다.’거나 ‘友情속에 포함된 비싼 葉綠素’ 등의 이미지는 50년 전의 상상력이 현재의 우리 후배들의 지각(知覺) 능력을 상회(上廻)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살아있는 것에는
인기척이 있다.
꽃의 인기척은 향기다.
--중략--
인기척은
서로를 알리는
아름다운 메시지이다
그 누군가가
오늘의
내 영혼을 깨우는
삶의 인기척인 것이다.
--「삶의 인기척」중에서
윤용순 시인의 이 작품에서는 ‘신주말에’와 같은 탁월한 상상력에서 파생(派生)한 현실적인 감응(感應)이 ‘삶’이라는 당면성(當面性)에서 이상세계를 탐색하고 있다. 그것이 ‘내 영혼을 깨우는 / 삶의 인기척’이다.
이러한 ‘인기척’은 ‘살아있는’ 만유(萬有)의 생물에서 감지할 수 있으며 그것은 ‘서로를 알리는 / 아름다운 메시지’로 형상화하는 그의 지적 혜안(慧眼)의 결론이지만 그가 추구하고 탐구하는 ‘영혼’에의 갈망이며 기원의 의식으로 승화(昇華)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게 된다.
그는 ‘친구야 / 그 많은 아픔은 /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다 / 그래서 / 나는 바람에도 아픈 것이다(「바람에도 아픈」중에서)’라거나 ‘사람들은 / 하루하루의 존재가치가 / 인건(人件)에서 / 물건(物件)으로 옮겨가는 / 그 고리가 되어 오늘을 산다(「무정물존칭(無情物尊稱)의 시대」중에서)’라는 어조(語調)와 같이 그의 단정적인 결론이 삶의 궤적이나 연륜에서 획득한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나를 색칠하기’ 위한 서곡
윤용순 시인은 다시 ‘삶의 인기척’에서 탐색한 ‘나’라는 화자가 바로 자신의 화신(化身)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나를 색칠하기’ 위한 서곡에 해당한다. ‘나’는 우리 실생활(real life)에서거나, 궤적에서 도출(導出)된 상상력에서 생성한 이상세계이거나 간에 ‘어린 시절의 기억을 / 되살려가면서 곱게 색칠을 한다-중략-나의 / 거기까지를 / 아름답게 칠하기 위해서다’라는 자아에 관한 인식의 범주(範疇)를 정착시키고 있다.
나를 따라온 세월이
아직도 남아서
어느 모퉁이
좁은 길을 돌아가고 있는가
모퉁이 길을 돌아서
내랴가는
나의 뒷모습을
방범등 불빛이 비춰온다
낯익은
얼굴들은 보이지가 않고
녹이 슨 교통안전 표지판
화살표만이
비탈진 내리막길의
내 나이를 가리키고 있다.
--「세월의 표지판」전문
여기에서 ‘나’라는 주체가 ‘세월’과의 상관성에서 윤용순 시인은 ‘내 나이’로 귀결(歸結)시키고 있다. 이러한 ‘나’에 관한 이미지나 시적 비유는 실재(實在)하는 자신의 자화상과 동일한 메시지를 정립하고 있어서 우선 독자들에게 흡인력(吸引力)을 제공하는 시적 구도에 유념하게 한다.
그는 ‘나를 따라온 세월’과 ‘나의 뒷모습’과 같은 실상(實相)의 시법을 구현함으로써 그가 천착(穿鑿)하는 현재의 적나라(赤裸裸)한 그의 모습을 감성적으로 접근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그의 시적 진실을 이해하는 첩경(捷徑)이 되고 있다.
새로 심은 과일나무에서
새 가지가 나고
그 가지를 따라온
햇빛과
나는 정분이 두터운 관계다.
우리집 창가
유인(誘引)되어온 과일나무
그와 유관(有關)한 것은
내가 시(詩)를 쓰는 직업이다.
금년에는
시(詩)의 창가에서 향기나는
과일이 주렁주렁 열릴 것이다.
--「시(詩)의 창가에서」전문
그는 다시 ‘시(詩)의 창가에서 향기나는 / 과일이 주렁주렁 열릴 것이다.’라는 어조와 같이 그의 지향점은 ‘시’라는 정점(頂點)을 향한 진솔한 시적 전개를 엿보게 하는데 그의 시정신(poetry)이나 윤용순 시학의 본령이 바로 향기나는 과일처럼 시창(詩窓)에 충만(充滿)할 것을 예감하게 하고 있다.
윤용순 시인의 시법에는 ‘과일나무’와 ‘유관(有關)한 것은 / 내가 쓰는 시(詩)’라는 대칭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은유적(隱喩的)인 기교가 특징으로 현현되고 있다. 이는 한 사물 이미지가 고차원의 관념 이미지로 전환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創出)하는 고도(高度)의 수사학(修辭學-rhetoric)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다시 ‘삼각산 바람이 무악재를 넘어 오는가 / 팔월이 되면 / 지금도 / 내 마음 속 자하문 밖에는 / 어렸을 때의 설렘으로 능금이 붉게 익는다(「자하문 밖 능금이 익는다」중에서)’는 정경(情景)이 포괄하는 시적상황도 사물적인 응시(凝視)가 바로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절묘한 시법을 공감하게 한다.
또한 그는 작품 「무제 1」중에서 ‘죽음과 마취는 무촌이’며 ‘최면과 속임수는 / 이웃사촌이’고 ‘유혹과 범죄는 사촌지간이’며 ‘결국 범죄와 / 인간은 형제자매지간’이라는 단정과 함께 ‘촌수가 없는 죽음과는 / 모두가 필연적 관계다.’라는 수긍(首肯)할만한 논리를 전개하여 새로운 진실을 시화(詩化)하는 묘미도 읽을 수 있다.
3. ‘고려청자’와 모성(母性)과의 교감
윤용순 시인은 언제부터인가 고려청자에 매료(魅了)되어 ‘고려청자에게 바치는 노래’를 4편의 연작시로 완성했다. 그가 이 고려청자와 어떻게 연(緣)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가 상당한 관심으로 조감(照鑑)하면서 시적(詩的)으로 현현하려는 욕구가 넘치고 있음은 보편성을 초월하는 시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한국민속문화대사전』(도서출판 창솔 발행)에서 ‘고려자기’항을 살펴보면 대체로 고려때 제조된 청자로서 국화, 운학 등의 그림을 새기고 그 속에 색토를 넣는 상감기술은 중국에도 없는 고려인의 독창적인 것으로 그 다양하고 정교한 형태와 푸른 빛깔의 신비로운 비취색과 깊이 있는 아름다움을 보이는 문양이 조화되어 세련된 불교적인 미를 나타내고 있어서 정적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동경이 서려있다고 설명한다.
고려청자상감문병이
나에게까지
지탱이 되어 온 것은
청자의 상감문(象嵌紋)이 아니다
아랫배로 부터다
여자들만이 갖는
그 힘 때문이다.
--「고려청자에게 바치는 노래-1.석 삼년」중에서
상감(象嵌)된 자기(自己)여
고려청자상감운학문병에는
모계형통의 한 민족이 살아서
깊은 숨을 쉰다.
--「고려청자에게 바치는 노래-2.학(鶴)」중에서
운학 한 쌍이 고려의 하늘로
비상의 날개를 펴고
긴 다리를 뻗어
뭉게구름 속으로
청자(靑瓷)의 몸을 이룬 것이다.
--「고려청자에게 바치는 노래-3.두루미」중에서
흙에서의
성별(性別)까지
구분할 줄 알았던
고려인들은
흙과 혼연일체가 되어
청자기(靑瓷器)를 빚었던 것이다.
--「고려청자에게 바치는 노래-4.성별(性別)」중에서
보라. 윤용순 시인은 고려청자에 대한 다채로운 형상화를 통해서 고색찬연한 청자의 미를 시적으로 적시(摘示)하고 있어서 우리들의 상상력을 증폭시키면서 공감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거기에는 ‘귀막고 삼년을 / 눈감고 삼년을 / 그리고 벙어리 삼년을 사는 / 인고의 석 삼년을 지탱’해 온 것은 오로지 ‘여자들만이 갖는 / 그 힘’이라는 역설적인 어조로 상감청자에 대한 정적(혹은 동적이거나 역학)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혼재(混在)되어 있다.
또한 그는 ‘모계의 혈통’이나 ‘운학 한 쌍이 고려 하늘로 /비상’하는 것은 ‘나는 욕된 숨을 죽이고 / 남은 세월을 산다’는 자성(自省)의 염원이 있는가 하면 ‘고려인들은 / 흙과 혼연일체’로 ‘생명력’과 ‘우리들의 혼(魂)’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처럼 ‘모계’를 축으로 한 ‘어머니’에 대한 이미지가 모성과 모정(母情)으로 발현되고 있는데 ‘벌거숭이 올챙이배에 /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들고 / 종종 걸음으로 크던 / 그 때만 해도 / 우리 어머니는 호박꽃을 닮았었다 / 애호박이 줄줄이 열리는 것도 / 우리 집의 내력이다.(「호박꽃 순정」중에서)’라거나 ‘사십년 세월을 / 푸념으로 달래시던 / 어머니의 / 뒤가 보이기 시작하는 / 그 나이가 되면서 / 비로소 / 나는 어머니의 어깨 너머로 / 숨죽여 흐르던 / 눈물의 강을 보았다.(「어머니의 강-Ⅰ.어머니의 어깨 너머」중에서)’, 또는 ‘마음에도 없는 / 그 푸념이 강이 되어 / 흐르던 어머니의 강이여(「어머니의 강-Ⅱ.어머니의 강」중에서)’라는 화자의 절규(絶叫)와 같은 순정적인 언어가 공감을 유로하고 있다.
4. ‘바람의 노래’와 서정적 시혼
윤용순 시인의 특성은 ‘바람’이라는 자연 현상에 민감(敏感)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대체로 바람에 대한 이미지는 능동적이면서도 격렬한 상태의 공기로 창조적 숨결이거나 발산(發散)이라는 점에서 우주를 지배하는 일차적인 요소가 된다.
갈대는
바람을 낳고
난산(難産)으로 속이 비었는가
빈속을 마디마디 메고
날들로
담아 쌓이어 가면
그게 천수(天壽)가 되어
갈대는
뿌리로 돌아가고
빈 강가에 남아서
홀로 부는 바람만이
풍(風)이 드는 나와 산다
--「바람의 노래-1.바람」전문
여기에서 바람은 갈대가 주도하지만 그 갈대는 난산으로 속이 비어 있는 형상이다. 그 빈속은 천수가 되어 결국 뿌리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나 고독한 바람만이 ‘풍이 드는 나와 산다’는 바람 예찬에 몰입하고 있다.
이 ‘바람의 노래’는 ‘돌개바람’, ‘소슬바람’ 그리고 ‘바람도 길을 잃는가’라는 연작으로 4편을 보여주고 있는데 ‘홀로 남은 / 돌개바람만이 / 낯선 보육원의 뒤뜰에서 / 혼자 큰다(돌개바람)’거나 ‘하루에도 / 몇 번씩 경련을 일으키는 / 소슬바람 때문에 / 가을이 / 더욱 쓸쓸해지고 으스스해 잔다(소슬바람)’, ‘바람도 / 길을 잃었는가 // 때로 길 잃은 / 바람들이 모여서 사는 / 산모퉁이가 있다(바람도 길을 잃었는가)’라는 어조와 같이 그의 ‘바람’은 고독하다.
우리 시학에서 바람의 이미지는 그 근본은 무형(無形)이라서 보편적인 정서 이외에는 특별한 감지가 쉽지 않으나 바람이 돌변해서 유형(有形)으로 전환할 때에는 이 지구를 흔들 수 있는 위력을 가진다. 태풍이나 폭풍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윤용순의 ‘바람의 노래’는 어쩐지 조용한 정적인 현상에서 혼자 어떤 위무(慰撫)의 의식(consciousness)으로 전환하고 있다.
일찍이 박목월 시인은 그의 작품「소곡」에서 ‘불이 켜질 무렵 / 잠드는 바람 / 바람 같은 목마름 / 진실로 겨울의 해질 무렵 / 잠드는 바람 같은 적막한 명목’이라고 바람을 노래했는데 이는 바람이 ‘목마름’이거나 ‘적막한 명목’이라는 언술로 그 갈증과 고독의 의미를 극대화하고 있다.
바람에
울 아부지가
그 억새였던 것은
억새꽃처럼
일렁이는 은빛 물결이
나의 귀밑머리까지 찾아오면서다
--「울 아부지와 억새꽃」중에서
박용순 시인이 구가(謳歌) ‘바람’은 그간 심성내면에서 숙성된 서정성으로 전이(轉移)되고 있다. ‘바람’은 ‘억새꽃’과 ‘울 아부지’와 삼각관계를 형성하면서 자연 서정의 진수(眞髓)를 제시하여 우리들의 상념(想念)과 시적 상황을 흡인하는 묘미를 감득(感得)할 수 있게 한다.
그는 작품「민들레 일가」에서도 ‘민들레 홀씨들은 / 바람에 멀리 날리어 가도 / 그 곳에 / 다시 자리를 잡고 / 가문의 질긴 뿌리를 내린다’는 그의 의식과 같이 한 사물에서 취택하는 영감적(靈感的)인 어휘가 바람과 동일하게 서정성과 융합(融合)하는 현상을 이해하게 된다.
섬진강이
구수한 사투리로 흐르면
봄이
강물 따라 오기 시작한다.
강변의 이정표까지
행세를 하는
그게 바로 섬진강의 봄맞이다
섬진강의 봄맞이는 오백리 길이다
--「섬진강 봄맞이」중에서
이러한 서정적인 의식으로 사물을 응시하는 것은 윤용순 시인이 천성적으로 서정성을 배제하지 않고 그 삶에서도 순응하는 서정시인이라는 점이 작품 속에서 은연중(隱然中)에 적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처럼 자연 현상과 동화(同化-assimilatio)는 그가 평소에 친자연이라는 삶의 방식이 작품에 투영하여 궁극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동질성을 탐색하는 시법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윤용순의 시집 『신주말에, 고려청자에게 바치는 노래』에서 살펴본 것은 그가 그의 삶의 궤적에서 회상(recolletion)된 존재의 문제를 인식하면서 ‘나’를 탐색하는 진정한 ‘나’는 어디 있는가(혹은 나는 무엇인가)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확인하는 시법을 정립하고 있다.
또한 그는 그가 소중하게 조감하는 ‘고려청자’의 대한 순수정감을 통해서 모성을 다시 확인하는 작업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망각성(忘却性)을 일깨우는 덕목(德目)으로 메시지를 띄우고 있다.
그리고 그는 ‘바람’이라는 실체가 우리 인간들과의 교감이 자연 현상과 불가분의 상관성을 유지하는 서정시를 갈구(渴求)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끝내 죽은 넋으로까지 녹아 든 / 새가 되어 / 우리네 선산에서는 / 지금도 뻐꾸기가 운다(「새 울음에 까지도」중에서)’ 는 화자의 어조가 사뭇 고조(高調)된 음율(音律)로 공감 영역을 확충시키고 있다.
일찍이 김준오 교수는 그의『詩論』에서 자기 삶의 궤적에 대한 회상은 바로 자기 회복을 위한 필요성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는 우리 인간들의 생애중에서 가장 친밀하고 특별한 사건들을 개인적 인식의 단위로 단순화하고 구성하는 비공유성(非共有性-unshareablity)을 그 본질로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자기 회복은 바로 ‘나’에 대한 자기 중심적이기는 하지만, 나에 대한 정화(淨化)와 도취(陶醉)라는 시의 기능이 함축되어 있어서 과거와 현재, 혹은 미래까지도 확대 연결하는 개인적인 의미로 ‘나-다움9me-ness)'에 관한 의식의 심연에서 서정시의 원류를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시는 모든 지식의 숨결이자 정수(精髓)’라고 말한 W.워즈워스의 말이 새롭게 각인되는 것도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나-다움’이거나 인간회복의 지향점을 탐구하는 영원한 숙명으로 그 해법 찾기에 오늘도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시집 출간을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