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증참판정운문(참판으로 추증된 정운에게 올리는 제문)
어허, 인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삶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나니,
사람으로서 한번 죽는 것은 실로 아까울 것이 없건만은
그대의 죽음에 대해 특별히 가슴아픈 까닭은
나라가 불행하여 섬 오랑캐들 쳐들어오니
영남의 여러 성들이 바람 앞에 무너지고
몰아치는 그들 앞에 막아서는 자 하나 없고
우리 서울도 하루 저녁에 적의 소굴로 변했다오
천리 먼길 관서로 임금님의 수레 옮겨 가시니
북쪽하늘 바라보면 간과 쓸개가 산산히 찢기건만
슬프다 나의 둔한 재주 적을 칠길 없을 적에
그대 더불어 의논하니 구름 걷히고 밝은 해 나타나듯 하였다오.
작전을 세운 후 전투선들을 잇달아 출격시킬 때에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서서 쳐들어 나가더니
왜적들 수백 명이 한꺼번에 피 흘리며 쓰러졌고
검은 연기 하늘을 뒤덮었고 슬픈 구름 동쪽 하늘에 드리웠도다.
네 번이나 싸워 이겼으니 그 누구의 공이었던가
종묘사직 회복함도 기약할 만 하였더니
그어찌 뜻했으랴,
하늘이 돕지 않아 적탄에 맞을 줄을
저 푸른 하늘이시여, 당신의 뜻은 참으로 알기 어렵나이다.
배를 돌려 나올제 다시 쳐들어가 맹세코 원수를 갚자 맹약하였더니
날은 어둡고 바람조차 고르잖아 소원을 못 이루매
평생에 통분함이 이보다 더할 수는 없다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나도 살을 에듯 아프구나.
믿고 의지했던 것은 오직 그대였는데 앞으로는 어이하리
진중의 모든 장수들 원통해하기 그지없다오.
백발의 늙으신 그대 부모님은 장차 그 누가 모실는지
황천까지 뻗친 원한 언제 가서야 눈을 감을는지.
아, 슬프도다. 아, 슬프도다.
그 재주 다 못 펴고 덕은 높되 지위는 낮았으니
나라의 불행이고 군사들과 백성들의 복 없음이로다.
그대 같은 충의야말로 고금에 드물었으니
나라 위해 던진 그 몸 죽어도 오히려 살았도다.
아, 슬프다. 이 세상에 그 누가 이 내 마음 알아주랴.
슬픔 머금고 극진한 정성 담아 한잔 술 바치오니
어허, 슬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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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이배사 회원님들께 인사올리면서 우리 장군님이 친히 부장 정운(鄭運)의 갑작스런 전사에 애통해 하면서
직접 쓴 제문(이충무공전서 수록)에 대해 알아 볼까 합니다. 우선, 이순신은 백성들과 부장들, 병사들의 두터운
신망을 토대로 신출귀몰한 작전을 구사, 연전연승으로 나라를 구한 분이라는 점은 제삼 말씀드릴 필요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순신은 그중에서도 특히, 정운을 신임하고 그의 선봉장 역할을 크게 의지했으니 부산포해전
이라는 개전초기(1592년 9월)에 정운의 전사를 맞이하여 매우 큰 슬픔에 빠집니다. 이는 이순신이 한 개인의 죽음에
대해 별도의 장계(임진장초 13번째. 정운을 이대원 사당에 배향해 주시기를 청하는 장계)를 올리는 동시에 그 개인에
대해 별도의 제문까지 직접 지어 추모하는 경우는 유일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이 얼마나 절통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이 제문을 읽으면서 제 마음까지 아파올 정도로 감정이 전달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회원님들도 이 글을 여러번
접해 보셨을 것으로 믿지만 세세히 전체 문장을 정독해 보지 못한 분들도 있을것 같아서 전문을 올리니 열독바랍니다.
한편, 임진장초에 수록된 장계에서도 이순신은 정운에 대해 깊히 추모하고 애통해 하면서 건의문을 올렸습니다.
"신이 믿는 사람은 오직 정운 등 서너명이었는데 세번 승첩시에는 언제나 선봉에 섰고 이번 부산포해전에서도
몸을 던져 죽음을 잊고 먼저 적의 소굴에 돌격하였으며 하루종일 교전하면서도 어찌나 자주 힘을 다해 쏘았던지
적들이 감히 움직이지를 못하였는바 이는 정운의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돌아나올 무렵에 철환에 맞아 죽었사온바
그 늠름한 기운과 맑은 혼령이 쓸쓸이 아주 없어져서 뒷 세상에 아주 알려지지 못하올까 하여 지극히 가슴 아픕니다.
이대원의 사당이 아직도 그 포구에 있으므로 같은 제단에 초혼하여 함께 제사를 지내어 한편으로는 의로운 혼령을
위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애국심을 장려토록 하옵소서."
특히, 저는 이순신이 "인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으며 죽고 삶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다."(人生必有死 死生必有命)라고
이 제문의 첫 머리에 기록한 것을 주목해 보았습니다. 이는 이순신의 평소 사생관을 반영한 명 문장이라고 봅니다.
1597년초 이순신이 체포되어 생명이 경각에 달려있을때 면회온 부하들이 일단 살고봐야 하며 장군이 석방되어
살아야 나라도 구할수 있다고 장군을 설득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도, 이순신은 역시,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다. 죽게 되면 그저 죽는 것이다."(死生有命 死當死矣)라고 담담히 대답한 일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장군이 평소 사생관을 확고하게 정립, 죽음앞에서조차 초연한 분이었음을 잘 알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나
위인들이 사생관을 정립한 것을 듣거나 보게되면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게 내 문제로 닥쳐오면 나에게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또한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부분을 통해서도 이순신이 전략전술의 대가이고
애국심의 화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생관에 대해서도 일찌기 정립시켜둔 상태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피튀기는 전투
에도 평상심을 갖고 담담히 임한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한 분이셨기에 우리가 그 분을 그토록
존경하고 또한 이렇게 열심히 배우고 있는 것이겠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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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鄭運)의 약력에 대해서는 아래에 별도로 첨부합니다.>
정운(1543년~1592년 9월 1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창진(昌辰)이며, 시호는 충장(忠壯).
1543년 조선 중종 38년 전남 영암에서 훈련참군 정응정(應禎)의 아들로 태어났다.
1570년 선조 3년에 28세로 식년시에 병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봉사, 금갑도수군권관(金甲島水軍權管) 등을 거치고 함경도 거산찰방(居山察訪)을 거쳐 1583년 함경감사 정언신의 추천을 받아 승진하여 웅천현감 등을 지냈으나 성격이 강직하고 정의를 지켰기 때문에 미움을 받아 몇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1591년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상우수사 원균이 구원을 요청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에서 군관 송희립과 함께 결사적으로 출전할 것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적을 토벌하는 데, 우리 도(道)와 남의 도가 없다. 적의 예봉을 꺾어 놓아야 전라도 또한 보전할 수 있다.”
그 후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을 만나 옥포(玉浦)에서 왜선 30척을 격파하고, 노량진에서 적선 13척을 불살라 공을 세웠다.
당포(唐浦)·한산 등의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마침내 1592년 9월 부산포 해전에서 우부장(右部將)으로 선봉에서 싸우다가 절영도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정운의 사망으로 이순신은 오른팔을 잃은셈이 되어 목을 놓아 울었다고 한다.
정운 장군이 부산포에서 순절하자 고향 해남에서는 최산수, 최정한, 양예용이 함께 유림대표로 제문(祭文)을 지어 치제하였다. 선조는 1592년 대호군 정운을 북병사로 추증하였고, 1604년에 병조참판에, 1796년(정조 20)에 병조판서 겸 의금부훈련원사로 추증되었다. 1605년 선무원종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영암(현 해남 옥천면 대산리)의 충절사(忠節祠), 흥양의 쌍충사(雙忠祠)에 제향되었다. 숙종때 충절사라 사액하였으며, 정조 때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아래는 이순신이 정운의 영전에 올린 제문인 "제증참판정운문"(祭贈參判鄭運文) 원문이다.
첫댓글 좋은 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글들을 통해
장군님 마음과 교감하는 것은
언제나 의미가 크옵니다.
글 잘일고 다시 새겨보면서 애통함을 느낍니다
또 저는 이 제문으로 시조 창으로도 하지만 낭송도 해봤는데 일반과 학생들에게 알리는데도 좋은 자료 라 생각되어 해봤습니다
네. 시조창으로 하시는것 보았습니다.
여러모로 장군님 마음과 공감할수
있다면 의미가 크다고 보옵니다.
안녕하세요. 동래부사님.
정운장군에 대한 이순신 장군의 애틋한 마음이 절절이 묻어나는 제문
잘 봤습니다.
임란중 막하장수중으로는 처음(?) 전사한데다가 장군의 뜻을 지지하며 최선봉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다 돌아가셨으니
그 슬픔이야 ㅠㅠㅠ
장군님의 사생관과 관련된 일화는 동래부사님도 아시다시피 정유재란말고도 1587년 녹둔도의 둔전관 재임시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패전의 책임을 지고 죽을 위기에 처했을때 선거이가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는 뜻에서
술 한잔이라도 마시라고 하자,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인데 술은 마셔 무엇하오(死生有命, 飮酒何也)”라고 하셨다죠.
그래서 선거이가
그럼 술은 마시지않더라도 물이라도 마시라고 권하자 "목이 마르지 않은데 물은 무엇때문에 마시겠소" 라고 하셨다네요.ㅋ
저 같으면 천명이라 생각하기에 술 한잔 받았을텐데 말입니다.
물은 말할필요도 없고~~^^
감사합니다.
네.
장군님이 일찌기 정립하셨던 사생관은 저희들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
하하~~
댓글이 더 재밌습니다.
저는 술도 마시고..물도 마실 겁니다..ㅎ
@동자갑선 저는 💦 물만 마시겠습니다.
참 군인 정운 장군!
그러나
최후의 승리자는 살아 남는 자인데...
가슴 적시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몰운대 답사 시절이 그립습니다.
몰운대(沒雲臺)...
부산포해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도중에 정운장군이 부하에게
몰운대를 바라보면서 지명을 물었다
합니다. 부하가 "몰운대"라고 하자
"내가 죽을 자리"(沒질 몰, 雲구름 운, 臺자리 대)라고 하면서 더 치열하게
싸웠다 합니다. 참 멋진 분 이셨죠.
이순신이 진정 신뢰하고 아꼈던
맹장이었죠. 이순신 말씀처럼
참으로 알수없는 것이 하늘의 뜻
같습니다. 아무 소용없는 하잘것
없는 사람들은 천수를 누리게 하시고
꼭 필요한 사람은 일찍 데려가시고.ㅠ
함께 있는 오늘 만이 아니라 죽은 영혼까지도 사랑하셨던 지극한 부하 사랑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부하와 백성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꼈던 분이십니다.
임진장초 구석구석 절절한
그 분의 마음을 확인합니다.
부사님!, 잘 읽었습니다. 혹시 요즘에 부산 계시면 오늘 저녁 예정된 정기모임에 나오시면 좋겠네요.
그리고 제목에 <祭贈參判鄭運文>이라고 하였는데, 鄭運公이 1604년에 참판에 추증되었네요.
그렇다면 충무공 사후가 되는데, 이 제목은 아마도 全書 발간 당시에 작업자들이 임의로 부쳤을까요?
제문 내용에 참판으로 추증하여 두고두고 기리겠다는 표현은 없어서 조금 의문이 갑니다.
굳이 참판 추증시가 아니고, 제문 내용은 어쩌면 初 장례시, 아니면 사후 사당을 방문하고 올렸던 글 같습니다.
하지만 설혹 반드시 참판으로 추증에 임하여 올렸던 고유문이 아니다 할지라도,
정운장군을 잃고 난 뒤의 장군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구구절절히 표현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저도 궁금했던 부분입니다.
이순신이 정운 전사 직후에 지은
제문에 "증 참판"이라고 명명한
것이...정운의 추증계급(참판)에 대해
조정과 암묵적인 교감 또는 관례가
있었던 것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정운 장군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을 충분히 읽을수 있었습니다 역시 글 재주가 뛰어난 동래부사님 좋은글 많이 올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첨사님^^ 건강 회복하시고..
이렇게 댓글로 만나뵈어 너무 좋습니다.
늘 건강 하셔서
가덕도와 이배사 부산지회 지켜주세요^^
첫 문장을 읽으면서.
가슴에 돌을 얹어놓은 듯한 무거움이 느껴졌습니다.
한 번씩 상기할 수 있는 좋은 글..
고맙습니다.
잘 지내시고요!..❤
저는
"인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삶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다"
이 말씀을 접할때 마다
숙연함을 느낍니다.
어떤 철학자나 종교지도자도
제시하지 못하는 큰 메시지를 제게
던져 줍니다. 남은 인생을
더 초연하게 더 가치있게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올해 녹동 쌍충사 현장에서 고흥문화관광해설사님들과 제문을 돌아가면서 읽어봤습니다.
사당 앞에서 한 줄 한 줄 읽어 나갈 때 코끝이 찡한 울림은 너도 나도 우리 모두가 한마음이었습니다..
의미 있는 글 주셔서 감회가 새롭습니다.
늘 건승하십시요~
네^^ 열선루님 오랫만에 반갑습니다.
저도 일전에 제주 근무할때
제주~녹동항 선박편으로 쌍충사 참배
하였습니다. 이대원, 정운 두 장군은
이른바 "little 이순신"이라 해도
손색없는 멋진 삶을 살다간 분들
입니다. 위 제문은 읽을때 마다
코끝이 찡해옴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글 전반에 애정과 안타까움이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
이순신 장군님의 부하사랑이
진하게 느껴지는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