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 속에 숨어 있는 역사의 비밀(근, 현대편)
1.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디로 수학여행을 갔나
누드 결혼식
1700년대 영국과 미국 일부 지방에서는 신부가 속옷이나 누드 차림으로 결혼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주로 재혼하는 신부들 사이에 이런 유행이 있었는데, 신부가 결혼하면서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을 경우 빚쟁이들이 채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관습에 근거한 것이었다. 어떤 신부들은 이러한 관습에 극단적으로 충실하여 벌거벗은 채 결혼식을 올린 경우도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묘한 불문율 때문에 비롯된 유행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결혼 전 아내가 진 빚에 대해서 남편이 책임질 의무가 없다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었다. 결혼은 새로운 탄생에 버금가는 신성한 일이므로 결혼을 계기로 이전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해석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빚을 많이 진 여성이라 하더라도 맨몸으로 시집을 가게 되면 그 날로부터 '자유의 몸'이 되어 채권자들에게서 해방 될 수 있었다.
특히 남편에게 채권을 이행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는 입장에서 정작 본인이 속옷 하나만 달랑 입고 시집갈 정도로 가진 게 없다고 버틸 때, 대다수 빚쟁이들은 입맛만 다시며 포기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당시 빚쟁이들은 채무자가 결혼하게 되는 것을 가장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종종 식장에 나타나 빚을 진 신부가 실제 '속옷 결혼'을 하는지 안 하는지 지켜보기도 했다.
물론 마을 사람들에게는 좋은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았지만 채권자인 빚쟁이나 채무자인 신부에게는 똑같이 그 상황이 끔찍스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빚진 신부들은 채무 해결을 위하여 용감하게 속옷 바람으로 결혼식장에 등장했다. 하지만 일부 빚쟁이들은 만만치 않게 대응했다. 최후의 순간 방심한 틈을 노리고 있다가, 신랑이 신부에게 사랑의 언약으로 끼워 주는 결혼반지를 즉석에서 탈취해 가기도 했던 것이다.
없이 사는 티를 있는 대로 내야 했던 당시 신부들의 '웨딩드레스'도 천태만상이었다. 속옷 몇 개만 걸친 신부에서부터 침대 시트를 둘둘 말고 나온 신부,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뜻으로 과감히 누드 결혼을 감행하는 용감한 신부 등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신대륙의 경제적 형편이 좋지 못했던 시절이었으므로 발가벗고 등장한 신부도 의외로 많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대부분 남편들은 결혼 당일 첫 선물로 아내의 옷가지들을 마련해야 했으며 나중에 이것이 예식 풍습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결혼식장에 결혼 당사자와 아무 관계도 없는 남자들이 구경삼아 난리를 치고 모여드는 것이 유행이었음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속옷 결혼은 '슈미즈'라는 말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 희한한 결혼 풍속을 '스목 결혼'이라 불렀는데, '스목'이란 '머리 구멍 뚫린 의복'을 의미하는 말로 허름한 옷차림에 대한 비아냥이 섞인 조롱이었다.
즉 신부가 걸치고 나오는 속옷을 의미했던 스목이 슈미즈라는 말로 변화하면서 여자의 양장 속옷을 의미했던 스목이 슈미즈라는 말로 변화하면서 여자의 양장 속옷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일단 결혼식이 끝나면, 신부는 화려하게 꾸민 결혼 예복을 입고 당당히 교회 문을 나서며 변제 능력이 있는 여인으로 바뀌었으니, 그저 빚쟁이만 서러울 뿐이었다.
해적선과 해골 마크 깃발
멕시코시티 북방 80km의 툴라에 톨텍족의 도시가 세워진 것은 950년경의 일이다. 톨텍족은 일찍이 마야인들이 고도 문명을 이룩하고 있던 유카탄 반도에 침입하자마자 마야의 도시 치첸이짜를 점령하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호전적이었던 톨텍족은 마야의 자비롭고 온건한 신들을 내쫓고 피에 굶주린 신을 섬겼다. 마야의 장인들에게는 무서운 형상을 조각하도록 명령했다. 그들의 왕이며 또한 신으로 추앙받은 케살코아틀은 톨텍족의 상징과 같은 존재로 군림했는데, 무서운 방울뱀의 모습을 하고 있다.
11세기가 되자 마야와 톨텍의 문화는 차츰 혼합되었으나, 톨텍의 잔인한 경향만은 그대로 남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X자 모양으로 교차된 뼈다귀와 해골 무늬였다. 톨텍족은 신전 내부를 불길한 무늬로 장식했는데, 해골은 공포 분위기 조성을 위해 자주 사용되던 소재였다. 훗날 카리브 해에 출몰한 해적은 이 신전 장식에서 힌트를 얻어 인골 두 개가 X자 모양으로 교차된 위에 해골을 얹은 무늬를 깃발에 그려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해적선에 해골 무늬 깃발을 내거는 것이 유행했을까?
해적은 고대부터 있었다. 기원전 600년경 그리스 사모스 섬의 왕 포로크라테스는 수십 척의 갤리선을 거느리고 해적질로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기원전 81년 로마의 카이사르는 에게 해에서 해적에게 잡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후 즉시 토벌꾼을 이끌고 역습하여 이들을 일망타진했다. 8∼10세기경 바이킹은 영국 해협과 유럽 각지를 휩쓸었고, 12세기에는 슬라브족의 해적이 발트 해를 석권했다.
이처럼 무자비하기만 하던 해적이 국가의 인정을 받은 적도 있었다. 16세기 말에 영국과 스페인의 식민지 확보 경쟁에서는 교전 상대국의 배를 약탈해도 좋다는 국왕의 사략 특허장을 무기로 사선에 의한 해적 행위가 공공연히 행해졌다. 해적은 두 나라의 제해권 쟁탈전에서 큰 역할을 했는데, 1588년에 영국 함대의 일원으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퇴한 것도 사략선 출신의 지휘관들이었다.
17세기 초 유럽 국가 간에 평화가 찾아오자, 해적들은 유럽의 국제법이 적용되지 않는 아메리카 수역으로 이동했다. 이 무렵 카리브 해에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해적 외에도 또 다른 해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로 '버커니어'였다. 본래 버커니어는 짐승을 잡아 그 고기를 훈제하여 생계를 꾸리는 인디오들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스페인에게 박해를 받던 인디오들이 해적화 되자 해적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이들과 유럽계 해적들이 다투어 해적질을 함에 따라 종종 해적 간에도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카리브 해 일대에는 스페인의 영토가 많았으므로 스페인 선박들이 주된 약탈 대상이 되었다. 스페인 선박은 기동력 빠른 해적선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돛대를 눕혀 난파선으로 가장하거나 초라한 어선으로 꾸며 스페인 상선에 접근한 다음 상대의 허를 찔러 습격하는 것이 버커니어의 상투적인 전술이었다. 17∼18세기 무렵 해적들의 약탈은 극에 달했으며, 18세기 초에는 공포 분위기 조성을 위해 해골이 그려진 해적 깃발을 내걸기에 이르렀다.
인디오 출신으로 추정되는 해적이 톨텍족 신전 무늬에서 힌트를 얻어 불길한 느낌을 주는 깃발을 만들었던 것이다. 해골 깃발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나타냈다. 이미 해적에 진저리를 치고 있던 상황에서 불길한 해적 깃발을 본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고 우왕좌왕하였기 때문에 해적은 손쉽게 약탈 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해적선마다 다투어 깃발을 내걸게 되었으며, 뒷날 해적을 묘사한 소설이나 영화에서 해골 깃발을 단골로 쓰게 되었다.
신문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
뉴스의 집합체인 신문은 고대 로마에서 시작되었고, 최초의 신문은 손으로 써서 사람들 사이에 오갔던 소식지나 보고서였다. 기원전 59년 로마에서 일간 형태의 아크타 디우르나가 발간되었는데, 필사본인 이 초기 신문은 로마의 주요 지역으로 보내어져 지역 주민들에게 행정 방침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선언문, 포고문, 원로원의 정치적 결정 사항 등은 별도로 제작되는 아크타 세나투스를 통해 보도되었다.
아크타 디우르나는 내용 면에서 근대적 신문의 형태를 취했지만, 관보의 일종이어서 권력자들이 자의로 뉴스를 취사선택했다. 아크타 디우르나에는 검투 경기, 점성술, 저명인사의 사망, 공직 인사, 재판 등의 소식이 게재됐으며 국민 투표 결과 등도 보도되어 오늘날 신문의 운세, 사망란, 스포츠란의 기원이 되었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형태, 즉 독자를 위하여 다양한 특정 정보를 제공하는 일간지는 17세기에 '뉴스 레터'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뒤 18세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17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발행되던 코란토는 뉴스 레터의 기원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외국 잡지에서 뉴스거리를 뽑아 1면으로 발행했다.
1704년 미국 최초의 신문으로 알려진 보스턴 뉴스 레터가 영국령 미국 식민지 주에서 처음으로 발행되었다. 신문은 18세기 초 특히 영국에서 성숙기를 맞이했다. 1702년 최초의 일간 신문인 데일리 쿠란트가 창간되었고, 1704년에는 다니엘 디포에 의해 리뷰가 창간되어 3주마다 발행되었다. 디포는 정치 현안에 대한 편집자의 의견을 게재하는 한편 '사설'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신문에 도입했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신문 발행이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 유행처럼 번졌다. 특히 1765년의 인지 조례는 신문 유행의 계기가 되었다. '인지 조례'란 식민지 아메리카에서 발행되는 각종 법무서, 상업 서류, 증권, 주류 판매 허가증, 팸플릿, 신문, 광고지 등에 50실링 이상의 인지를 붙이게 한 조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영국 정부의 이런 조치는 식민지들을 분노케 했고, 뜻 있는 독립론자들이 그에 항의하기 위해 다투어 신문을 발행하였다. 하지만 영국 정부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지지 않고 신문 발행으로 맞대응 하였으니 독립 전야인 1775년, 13개 식민지에서 발간된 신문 종수는 무려 37종에 달할 정도였다.
이후 신문은 대중의 힘을 끌어내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해냈는데, 신문마다 나름의 특색이 있었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기록의 신문'으로, 독일의 알게마이네는 '의견의 신문'으로, 프랑스의 르몽드지는 사진을 싣지 않는 전통으로 유명하다. 신문 발행이 홍수를 이루면서 갖가지 제호가 지어졌다. 가장 흔한 것이 런던 타임스, 뉴욕 타임스와 같은 '지역명+타임스' 형태였다. '신의 전달자'를 뜻하는 '머큐리'도 인기 있는 제호 중 하나였다. 신문의 속보성이나 뉴스의 신선함을 의미하는 '머큐리', '헤럴드', '익스프레스' 같은 신문의 제호는 이후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신문은 순식간에 대중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는데, 이것은 정부의 일방적 보도 지침이 아니라 독자의 입장에서 독자가 원하는 정보를 제공했던 데 이유가 있었다. 다시 말해 독자에게 관심을 끌지 못하는 기획물이나 기사는 금방 사라지고 인기 높은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던 바, 이것이 신문의 시장 원리였다. 또한 지하철 운행은 신문 보급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버스에 비해 한결 쾌적한 지하철 환경이 사람들로 하여금 신문을 읽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19세기 말에, 미국에서는 20세기 초에, 일본에서는 20세기 중엽에,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들어 지하철 개통과 함께 가판 시장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한편 '뉴스'란 어떤 변화의 소식으로, 그 속성은 긍정적이기 보다 부정적일 경우가 많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속담은 그런 뉴스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이며, 신문, 방송에 보도되는 뉴스들이 밝은 소식보다는 어두운 소식 일색인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