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장은 과연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였나
이정훈(연세대 박사과정)
요즘 우리는 농장이라는 단어를 보고, 서울사람들은 전원생활을 동경하여 근교에 있는 한두 평 규모의 땅을 빌려 주말에 배추나 오이와 같은 채소를 키우는 주말농장을 떠올리기 쉽다. 아니면 영화 ‘뿌리’에서처럼 흑인 노예들이 백인 감독원에게 매를 맞아가며 목화를 따는 목화농장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농장은 주말농장이나 목화농장이 아니라, 고려 귀족의 경제적 기반으로서 14세기 고려사회의 가장 큰 사회문제가 되었던 농장을 말하는 것이다. <고려사>를 보면 당시 농장은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고 한다. 그 정도의 농장이라면, 농장주에게 남들과 다른 특권이 있었을 것임을 연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이 가졌던 특권과 농장경영의 방식이 어떠하였기에 그런 표현이 남은 것일까?
귀족다운 삶의 권리, 농장
고려사회는 신분제사회이다. 세습되는 신분에 따라 사회적 역할이 달라지고, 권리와 의무도 차이가 있는 사회라는 것이다. 이점은 농장을 조성하고 경영하는 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농장은 원래 많은 토지와 노동력을 갖춘 대토지소유를 말한다. 토지가 없다면 농장이 아니다. 이 시기 농장을 파악하려면 이점이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개간에 전념하여 토지를 늘렸다고 하자.
이 경우 개간 자체에도 많은 노동력과 비용이 들지만, 개간 후 토지를 경작할 때에도 노동력 동원이 필수적이다. 신분제사회에서 이런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계층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고려시대 대부분의 농장주가 국왕이나 국왕의 집안, 귀족관료 및 사원이나 승려에 국한된 것은 당시 사회가 신분제사회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가는 이들이 신분적 특권을 활용하여 대토지소유자가 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주었다. 국가가 보장해 준 이 권리를 우리는 수조권이라고 하는데, 이는 고려귀족이 치자로서 국가에 봉사하는 대가로, 국가가 농토의 수확물 가운데 1/10을 거두는 토지세를 수조권자가 대신 걷을 수 있도록 위임해 준 권리를 말한다. 전시과나 녹과전, 과전법은 각각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모두 왕실이나 고급관료, 사원, 군인, 기인 등에게 수조권을 분급해 준 제도이다. 이 경우 수조권을 행사하는 사람을 전주라 하고, 대상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전객이라고 한다.
귀족이 관료 등이 되어 수조권을 분급 받으면, 가문의 경제력은 확실히 보장받게 된다. 만약 자신의 토지가 수조지가 되면, 소유지와 수조지가 일치되어 일종의 면조의 특권을 갖게 되고, 다른 사람의 토지에 수조지가 설정되면 그 사람의 토지에 영향력을 갖게 된다. 예를 들어 문종 때 바뀐 전시과의 지급 규정대로 문하시중이 되어 100결의 토지에 관한 수조권을 받게 되면, 수확량의 10,341을 획득할 수 있으므로 실제로는 10결의 토지를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왕에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던 농장주라면 수조권 행사를 통해 토지확보에 나설 수 있고, 토지가 없었던 사람이라도 이를 근거로 새로이 농장을 조성할 기반을 닦게 되는 것이다.
수조권은 토지를 늘이는 데에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자. 만약 내가 소유하는 토지에 국가가 아니라 특정 개인이 수조권을 행사한다고 하면 아무래도 나는 그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예속됨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수조권자가 마음을 고약하게 먹는다면, 내 토지는 졸지에 빼앗길 수도 있다. 수조권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려 국가가 수조권분급제를 시행했다는 것은 바로 국가의 토지, 농민지배력을 수조권자에게 나누어 주자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를 봉건 원리가 관철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농장이란 문무관료나 사원이 자신의 경제생활을 위해 신분적인 특권을 바탕으로 많은 토지를 모아서 피지배층의 노동력을 이용한 농업경영이라고 할 수 있다.
토지와 노동력의 확보
농장주들은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 상속이나 매입, 고리대, 기진, 개간, 모수사패, 탈점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다. 매입은 땅을 사서 확대하는 방법이었고, 또 주변 농민들에게 고리대로 곡식이나 포를 빌려 주고 갚지 못할 경우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기도 하였다. 최씨 집권자였던 최항은 젊었을 때 쌍봉사의 주지가 되어 50여 만석의 쌀로 고리대를 하면서 재물을 모았는데, 만일 갚지 않으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받아 냈기 때문에 농민들은 국가에 조세조차 납부하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기진은 토지를 다른 사람이나 기관에 기증하는 것인데, 왕실이나 귀족관인들은 신앙심이나 개인의 안녕을 위해 사원에 많은 토지를 기진하였다. 공민왕은 부인인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운암사에 토지 2,240결을 기진한 일이 있다. 그리고 간혹 하급관리가 높은 관직을 얻기 위하여 고위관리에게 뇌물로 토지를 바치기도 하였다.
황폐한 토지나 산을 개간하여 토지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몽고와의 전쟁으로 농토가 황폐해지면서 국가에서 수조권 지급이 어려워지자 수조권 대신에 황폐해진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그것을 개간하면 자신의 소유지가 된다. 그러면 개간자는 소유자이면서 수조권자가 되어 국가에 조세를 납부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러한 토지는 사패라는 증명서와 함께 지급되었는데, 국가에서는 황무지 개간을 장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규모면에서 제한을 받지 않았다.
일부 농장주는 이러한 점을 악용하여 문서를 위조하여 좋은 토지나 주인이 있는 토지인데도 불구하고 국가로부터 사패를 받았다고 속여 자신의 토지로 만들었다. 이것을 모수사패라고 하였다. 엄격하게 법을 집행해야 할 국왕마저도 사원이나 권세가처럼 앞을 다투어 모수사패로 토지를 확대하였고, 그 규모도 수백 결에서 큰 것은 수천 결에 이르는 것도 있었다. 그 밖에 농장주가 수조권을 행사하여 농민들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빼앗거나 문서를 위조하여 자신의 토지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국가에 조세를 부담하는 토지가 계속 줄어들게 된다. 이 때문에 고려 후기에 국가 재정이 궁핍하게 되었다.
농장주들은 토지를 확대하기 위해 앞의 여러 방법 중에서 어느 한 가지만 이용하기도 하였지만, 여러 가지 방법을 절충하기도 하였다. 매입. 개간으로 토지를 확대한 다음 수조권을 획득하거나, 사패를 받아 개간을 하여 자신의 소유로 만들기도 하였다. 또 자신의 소유지가 다른 관리의 수조지로 주어졌을 때 그들에게 일정정도 영향을 받기 마련이었으므로, 그 토지를 자신의 수조지로 지급받아 원래의 토지에 대하여 간섭을 받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농장주는 소유지에 수조권을 받은 방향으로 토지를 확대해 나갔고, 그 위에서 농장을 운영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이 농장주들에게는 더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농장에서 토지 확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노동력의 확보였다. 토지를 확보하였다고 하더라도 농사를 지을 노동력이 있어야만 농장은 제 기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비 농민은 부모로부터 상속을 받거나 새로 매입하기도 하였고, 기증을 받거나 불법적으로 관가의 노비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고리대를 이용하여 빚을 갚지 못하였다는 것을 구실로 양인 농민을 협박하여 노비로 만들거나, 권력을 이용하여 노비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것은 고려 후기에 토지탈점과 함께 국가적인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양인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농장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이들은 여러 종류의 조세를 부담해야 했는데, 그 부담이 매우 컸기 때문에 양인 농민들은 자신의 소유지를 팔거나 심한 경우에는 처자식을 노비로 팔아 조세를 납부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양인 농민들 중에서는 무거운 조세부담을 피하기 위해 권세가인 농장주의 농자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농장의 규모와 분포
농장은 소유 계층만큼 규모도 다양하였다. 얼마 이상의 토지이면 농장이 되고, 그 이하이면 농장이 아니라고 하는 기준을 정할 수 없기 때문에 농장의 규모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고려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농장이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였다거나 군현을 넘나들 정도로 컸다는 기록이 있다. 또 모수사패로 토지를 탈점한 것이 수백 결에서 수천 결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고, 앞서 말한 쌍봉사가 50만석의 쌀로 고리대를 행하였다는 것을 보면 쌍봉사에 농장의 규모도 대단히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농장에 대한 이러한 표현은 몇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나라의 지형을 보면, 국토의 반 이상이 산지로서 평야가 그렇게 많지 않으며, 호남평야나 나주평야를 제외하고 사방을 둘러보아 산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것은 드물다. 또한 고려시대의 행정단위가 지금의 군이나 읍, 면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책에 보이는 표현들은 과장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농장의 규모가 작은 경우는 농장주가 거주하는 지방에만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규모가 큰 경우에는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다. 수도인 개경을 중심으로 경기, 황해도 일대만이 아니라 경상도. 전라도 등 전국에 걸쳐 분포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통도사는 양산을 중심으로 경상도 일대에 농장을 가지고 있었고, 최충헌 집안도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에 농장이 있었다. 또한 장안사는 함열, 인의, 부녕, 행주, 백주, 평산, 안산 등 여러 지역에 농장을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고려 말 이색도 개경 인근, 면주, 이천, 여흥, 덕수, 장단, 광주, 광릉촌, 유포, 적제촌, 한산 등에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농장주는 자신의 토지와 다른 사람의 것을 구분하기 위해 사방 경계표시를 하였다. 한 예로 사원에서는 장생표를 세웠는데, 각 소유지의 중앙 혹은 눈에 잘 띄는 곳에 세워,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 사방이 사원의 소유지임을 나타냈다.
경상도 일대에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던 통도사는 일부 지역에 12개의 장생표를 세워 자신 소유의 토지임을 표시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소유지임을 입증 받았다.
농장의 관리와 경영
농장이 규모도 컸고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농장주가 직접 경영을 하거나 농장을 돌아다니면서 관리를 할 수 없었다. 특히 왕실이나 귀족관료들은 주로 수도인 개경에서 거주하면서 정치에 참여하고 있어 자신을 대신해서 조직적으로 농장을 감독하고 관리할 사람들이 필요하였다.
농장을 관리하는 곳을 농사나 장사라고 하였다. 농사와 장사는 여러 지역에 있었는데, 그 곳에는 농장 책임자와 함께 농장에서 일하는 농민이 살았고, 농장에서 나는 농산물을 저장하기도 하였다. 농장의 총책임자는 주로 장사의 업무를 담당하고 감독하였다는 의미에서 장주 또는 장두라 불렀다. 이들은 주로 농장주의 노비들로, 장사나 농사를 중심으로 농장 내 토지를 관리하고 농장민을 상대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농장주가 권세가인 경우 권력을 믿고 주변의 토지를 강탈하며 인근 농민들에게 강제로 농장 일을 하도록 하였으며 심지어는 쌀이나 포로 고리대를 행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염흥방의 노비인 이광은 주인의 권력을 믿고 전 밀직부사였던 조반의 땅을 빼앗아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또 이들 장주를 통괄하는 상급관리인이 있었는데, 그들은 토지와 노비문서를 관장하고 농장주가 거주하는 곳으로 곡식을 옮기는 일을 하였다. 귀족관료들은 가신, 가인이, 국왕의 경우에는 조신, 환관이, 그리고 권력기관의 경우는 전전, 상수 등이 이 일을 맡았다. 무인집정자 김준은 여러 곳에 농장을 설치하고 가신인 문성주를 전라도에, 지준을 경상도에 보내 관리하게 하였다. 또 충렬왕은 조신을 각도에 파견하여 공사의 좋은 토지를 선택하고 농민들을 모아 경작하도록 하였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보허의 예이다. 다음 기록을 살펴보자.
보허(보우)는 호가 태고인데,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중국 강남에 가서 석옥화상으로부터 의발을 전해 받았다고 한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미원장에 가서 친척들을 모아 살았다. 보허가 왕에게 말하여 미원을 현으로 승급시켜서 감무를 두었지만, 일체 지휘는 보허 자신이 하고 감무는 단지 드나들 따름이었다. 밭과 들을 넓게 차지하였으며, 온 들에 말을 놓아먹이면서 이것을 모두 내승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말들이 곡식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어도 사람들이 감히 쫓아내기 못하였다.
1356년(공민 5)국사인 보허는 양근국에 속해 있던 왕실 장처의 하나인 미원장 소설암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곳에서 밭과 들을 넓게 차지하여 집안사람들을 모아 살게 하였다. 그런데 그 곳은 인구수나 토지의 양이 현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부탁하여 미원장을 현으로 승격시켰다. 이에 국가에서는 당연히 감무를 파견하였는데, 그조차 보허의 눈치를 보느라고 지방수령으로서의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만큼 당시에는 권력과 농장경영은 밀착되어 있었다.
농장주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확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농장을 경영하였다. 노비들에게는 집안의 허드렛일과 함께 자기의 농장이 있는 곳에 가서 농사를 짓게 하기도 하였다. 노비를 동원한 농장경영은 노비를 자유롭게 부릴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리하였다. 농장주는 노비농민에게 수확의 반과 함께 노주로서의 권리인 노비 신공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토지를 노비농민만으로 경영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농장주는 몰락한 양인 농민들과 농장 주변의 농민들에게 토지를 빌려 주고 생산물의 50퍼센트에 해당하는 지대를 받기도 하고, 일정 면적의 토지를 경작한 대가로 자신의 소유토지 일부를 떼어 주기도 하였다. 또 일손이 많이 필요한 경우에는 품을 사서 농장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귀족의 본업과 별업
고려 귀족은 여러 경로를 통해 관료나 승려가 되어,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배우고 닦아 온 정치, 사회사상으로 개경과 지방사회를 이끌어 갔다. 정치, 사회 활동이야말로 이 시기 귀족들이 치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고, 자신의 본업이라 자부할 만한 것이었다. 당연히 귀족들은 이러한 활동을 할 수 있을 만한 경제력도 갖추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농장이라고 부르는 고려시대의 대토지 소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농장을 소유하고 경영하는 것을 본업에 대한 별업으로 간주하였다.
별업이라고는 하였지만, 실제로 농장 경영이 귀족다운 삶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제나 그제나 정치나 사회 활동을 원만하게 하려면,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일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다. 따라서 정치 활동과 농장 경영은 귀족들이 반드시 갖추어야만 하는 요건이었고, 동전의 양면과 같이 떼려고 해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