βίος가 아니요 ζωή이다.
성경에는 살아있음을 두 가지로 표현한다.
마태복음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βίος)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ζωή)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성경에서 산다는 단어는 두 가지로 구분한다. ζωή와 βίος다 .
이 땅의 모든 동식물은 생물학적 생명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 "살아 있다" (βίος)라고 표현한다. 그 중 사람이 특별한 이유는 동식물과 같이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사랑하며 생각하고 의식하고 산다는 것이다. 그것을 개념이라고 하는데 지구상에 생명들 중 오직 사람만 개념적이다.
그래서 지구의 모든 생물학적 생명 중 인간에 이르러서야 최고의 가치를 가진다고 인정한다.
그럼에도 인간이 자연적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성령이 주신 생명 즉 하나님 안에서 주시는 생명으로서 생물학적 생명 위에 있는 보다 더 다른 성령의 생명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ζωή적인 생명이라고 한다.
늘 소모되고 쇠퇴하는 성질이 있어서 공기나 몸이나 음식물을 통해 끝임 없이 자연을 획득함으로 유지되는 육체적 생명은 바로 βίος적인 생명이다. 이에 비해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안에 있는 영적인 생명 즉 우주세계 전체를 만들어낸 생명은 ζωή 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완전한 형태의 것으로 만들어졌지만 불행히도 인간은 죄를 지어 더 이상 ζωή로 살 수 없다.
산다는 개념을 을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성경 용어 중, "만든 것"과 "낳는 것"의 차이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 만든 것" 과 "낳는 것"은 정말로 커다란 차이가 있다. 낳는 다는 것은 아버지가 된다는 뜻이고, 창조했다는 것은 만든다는 뜻이다. 두 단어의 차이는 이렇다. 낳는다는 것은 같은 종류에 속한다는 의미다. 사람은 사람을 낳고 새는 알을 낳고 비버는 비버를 낳는다. 그래서 낳아 놓은 사람은 사람에 속하고 낳아 놓은 달걀은 새에 속하고 비버의 새끼는 비버에 속한다.
하지만 우리가 만드는 것은 다른 종류에 속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동차를 만들고, 새는 둥지를 만들고, 비버는 댐을 만든다.
자동차는 사람과 다르며 둥지는 새와 다르며 댐은 비버와 다르다.
실력 있는 조각가는 사람과 흡사한 조각물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조각상이 진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조각상은 숨을 쉬거나 생각할 수 없다. 조각상은 사람과 유사할 뿐 그것은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닌 다른 종류다.
우리가 알아야 할 절대 진리는 하나님은 하나님을 낳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낳듯이 말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들 수 없듯이. 하나님은 하나님을 창조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낳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낳으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절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분명 사람은 하나님을 닮았지만 만드신 하나님과 만들어진 인간은 같은 종류에 속한 존재일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의 조각상이나 초상화에 가깝다. 그래서 하나님과 다른 인간은 생물학적 생명 즉 βίος 만을 가졌다.
그러므로 사람이 ζωή 즉 영적인 생명을 갖는다는 것은, 석상이 진짜 사람이 되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이 발생하여 정말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논리적이지 않게도, 기독교의 위대한 주제 가운데 가장 말도 안 되는 충격적인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붙어 있기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진리다 .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ζωή )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βίος)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ζωή) 것이라 "(갈 2;20)라고 하셨다.
정말 은혜로운 점은 우리가 주 예수를 믿고 성령에 인도 하에 그리스도를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일 때 βίος가 아닌 ζωή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하나님이 만들었지만, 하나님이 아들로 삼아서 하나님의 아들이 삼은 것은 정말로 뭔가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음에 틀림없다. 기독교 신조 중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낳으셨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모든 세계가 창조되기도 훨씬 전에 그리스도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낳으신 사랑하시는 아들 그리스도는 ... 천사들이 창조되기 훨씬 전부터 ... 당신과 동등하도록 규정하셨으므로
아들이 계신 곳은 어디든지 아버지께서 계신 것과 같다는 것을 선포하셨다" 살아남은 이들 15
그래서 우리가 생명( ζωή )을 얻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나신 바 된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것이다. 끈질기게 붙어서 있을 때 그 안에 그리스도를 대신하신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과 결심을 지켜주실 것이다.
살기( ζωή)위해서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셔야 한다. 이 말씀을 사도바울은 이렇게 강조해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고후 13:5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심을 우리는 스스로 자각하는가?
같은 혼란을 예수의 제자도 겪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아직 육체를 가지신 예수님을 부활 후에 처음 본 제자들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 부활 전에 땅 위에 계셨을 적에 하셨던 똑같은 목소리와, 예수님만이 지녔던 특유의 몸짓으로 제자들 앞에 나타나 같이 있는데도, 제자들은 두렵고 떨었다.
귀신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던 제자들에게 재차 이렇게 강조하셨다. 아직도 육체를 입고 땅 위에 함께 계신 예수님을, 공간 안에 직접 만난 제자들에게, 자신이 승천한 후에도 예수님 없이도 예수님 안에 살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승천 후에는 내가 없는 이 땅에서 나와 함께 사는 방법은 이러하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20장 22-23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자 이 구절에서 "숨을 내쉬며"를 빼면 의미가 달라지는가?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여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같은 의미인가? 다른 의미인가? 행간의 의미에 유의하자.
성경에 보면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 말씀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형태를 빚으시고 성령을 불어 넣어 우리는 살아 있는 (ζωή ) 존재가 되었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 ζωή )이 된지라"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 2:7 여기서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를 빼 보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언어의 구성으로는 모자람이 없지만 분명 어떤 의미가 빠진 듯하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는 구절을 더 확실하게 다시 강조한다. " 내가 생기로 너희 안에 들어가 살게( ζωή)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그렇다 성령은 태초부터 우리를 "살게( ζωή )"하는 분이셨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 성령께서 직접 움직이시고 생기를 불어넣는 행위를 하심으로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 성령이 우리 삶에 개입하심으로 우리는 그냥 생명을 가지는( βίος) 것에서 진짜로 살게( ζωή ) 되었다.
성경에 보면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 말씀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형태를 빚으시고 성령을 불어 넣어 우리는 살아 있는 (ζωή ) 존재가 되었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 ζωή )이 된지라" 창 2:7
새번역 성경에서는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는 구절을 더 확실하게 다시 강조한다 " 내가 생기로 너희 안에 들어가 살게( ζωή )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 ζωή)". 그렇다 성령은 태초부터 우리를 "살게"하는 분이셨다. 사람을 창조하실때 성령께서 직접 움직이시고 생기를 불어넣는 행위를 하심으로 우리는 살아 있는( ζωή ) 존재가 되었다.
다시 예수님의 말씀의 행위로 돌아가 보자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숨을 내쉬사"는 "성령이 너희 안에 들어가 살게 ( ζωή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함에 틀림없다.
확실해진다. 육신이신 예수님이 승천함으로 더 이상 그와 함께 물리적으로 함께 하실 수 없을 때 이제 물리적인 삶 대신에 성령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의 사역을 대신하신 것이다.
사도행전에는 이렇게 다시 강조한다."우리가 그를 힘입어 기동(起動)하며 있느니라." 행 17:28
사도바울은 한 번 더 확실하게 쐐기를 박는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고전 6:17
“성령은 영혼들 속에 있는 영적 생명의 숨( ζωή) 이다. 성령을 나누어 주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어 주신다는 의미다. 성령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속성으로 물들여지게 된다.” 시대의 소망 하 (보급판) 350
이제 우리는 그저 육체적인 생명 (βίος)에서 영적인 살아 있는 생명( ζωή)으로 가기까지 내 안에 성령의 임재하심이 필요함을 알았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성령 안에 진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성령은 하나님을 향한 굶주림이 있는 자에만 임하신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행 5:2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진정한 삶이 없는 그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 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 ζωή)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βίος)로 마치겠느냐” 갈 3:2.3
자기가 성령에 충만한지 아닌지를 알지 못하면서도 자가가 성령에 충만하다고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이 교회 안에 많다, 성령을 충만 받기를 원한다면 의식적으로 구해야한다.
잠언 8:17절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의식적으로)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성령을 충만 받기를 원한다면 의식적으로 구해야한다.
“천부께서 구하는 자마다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11:15
인간의 의지와 의식에 대해서 알아보자.
의식이란 나랑 나와 다른 것을 아는 것이다. 나를 알면 대상을 알게되어 두 대상이 서로 연결하는 접점을 찾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의싱를 하면 쓰지 않던 시냅스의 뇌파가 자극을 받아 왕성한 활동을 시작한다.
무엇을 상상하면 두뇌에서 화학물질이 일어나 특정신경회로를 자극하고 정신경회로는 특정 시퀀스와 패턴을 만들며 화학물질을 분비하는 두뇌를 자극하여, 그 시퀀스와 패턴은 특정 마인드 화학물질을 분비하는 두뇌를 자극한다. 그 화학물질은 그의 생각과 감정을 느끼게 한다. 생각을 감정으로 느끼는 순간 두뇌와 몸은 한 몸이기에 느끼는 대로 다시 생각하게 되고 분비된 화학물질은 또 생각대로 느끼고 느끼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하는 대로 느끼고 이 반복이 순환되는데 어떤 사람은 이 반복을 수십 년 동안 하고 있다.
의식하면 신경 쓰인다. 개구쟁이였던 필자는 학창시절에 학우를 괴롭히다가 호되게 당한 적이 있다 쉬는 시간에 깜박 잠들었는데 나에게 이상한 짓을 당한 친구가 내 교복등 뒤에 "나는 바보다"라고 쓴 메모지를 붙인 것도 모르고 한참을 돌아 다녔다. 그런데 주위의 동료나 후배들 심지어 선생님까지 나를 힐끗 보고는 모두 수근 거리거나 웃는 것이 아닌가? 영문을 모르던 필자는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었다.
의식하면 신경 쓰인다. 성령을 의식하면 새 삶이 온다. 적극적인 행동이 시작 된다. 그 분의 임재를 원하면 임재를 적극적으로 원하고 의식하라. 그러면 방법이 생기고 길이 열린다.
영감의 글에 “신앙은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의지(의식)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 즉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고 애정을 하나님께 두는 그것이다” (의식적으로 행한) “신앙은 사랑으로 행하고 심령을 성결하게 만든다.” 정로의 계단 154
신앙의 발전이 없고, 믿음의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의지란 생각과 마음의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생각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하나님께 깊게 나아갈 수가 없다. 생각과 마음의 바꿈은 오늘을 바꿈에서 시작된다.
만약 오늘이 또 왔다고 가정하자. 그래서 오늘을 바꾸고 싶다. 생각이 미래를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해도 하루를 이상하게 보내면 아무 소용없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생각을 바꾸려고 결심하는데 방해하는 첫 번째 장애물은 주위환경이다. 주위의 환경이 나의 생각을 통제할까? 아니면 생각이 주위 환경을 통제할까?
보통은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교회에 오기 위해서 똑같은 자세로 눈을 뜨고. 똑같은 손가락으로 알람을 끄고 매일 가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같은 식탁에서 아침을 먹고. 같은 차에 시동을 켜고 같은 길로 가서 매주 보는 사람과 인사하고 안식일학교 교과공부 설교예배 식사. 그리고 같은 길로 집에 가서 매일 보는 사람과 같은 메뉴의 저녁을 먹고 잔다. 우리는 보통 어제와 같은 직장 동료들과 같은 일을 하고 퇴근해서 잠을 잔다. 익숙한 루틴에 익숙한 자신을 본다.
환경에 의해서 두뇌회로가 적응을 하여 생각하게 된다. 똑같은 사람을 보며 같은 장소에 가며 같은 생각을 같은 시에 한다면 외부 환경에 의하여 자극이 없어 이미 알고 있는 똑같은 생각만 한다.
이렇게 똑같은 오늘을 반복하면 어떤 내일 만들어질까? 그러면 오해할 것도 없이 어제와 같은 인생이다.
그래서 신앙을 바꾸기 위해서는 주위 환경보다 더 크고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어떤 순간이라도 그 순간에 적용되는 말씀을 항상 떠올리면 된다. 환경이 어떠해도 영적인 갈급함이 있어야 한다. 믿음의 노독들이 그랬다 노아도 모세도 요셉도 에녹도 엘리야도 사도바울도 예수님도. 그들의 머릿속에는 항상 먼저 영적인 갈급함이 있었다. 현실에서 똑같은 일이 반복되어도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에 의지만 세밀한 점검이 있었다. 말씀이 일상에 계속되어 반복되면 두뇌는 서서히 바뀌면서 신앙의 상상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느낀다. 뇌 과학에 따르면 신앙의 의지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고 알려져 있다.
1. 신앙의 주제에 대한 생각
2. 조그만 행동으로 실천하여 습관화
3. 현실에 각인(刻印)된 몸과 마음의 변화이다.
“그는 자기에게 익숙한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 그리하여 행동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은 품성을 이루게 되어 그 품성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현세적인 또는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실물교훈 325)
두뇌를 사용하는 것이 마음이라 한다. 즉 마음은 두뇌의 행동을 뜻한다. 매일 자신에게 원하는 자신을 상기시키면 반응이 일어나 자신을 바꾸게 된다. 자극패턴을 반복되면 무한 패턴으로 변해서 의지가 바뀌게 된다.
생각은 두뇌의 언어이고 감정은 몸의 언어이다. 이 함정에 빠져서 생각하는 대로 느끼고 느끼는 대로 생각하고를 무한 반복하고 있다. 이것이 반복되면 특정 감정이 몸에 각인되고 생각이 무의식에 각인되는 것이다. 사람이 35세 전후에는 우리의 몸과 무의식의 95%는 각인된 감정에 무의식에 의해 통제된다. 그래서 모든 김정과 생각이 프로그래밍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남아있는 5%의 의식이 프로그래밍 된 95%의 무의식과 싸우는 것이다. 이것을 바꾸는 행의가 의지력이다.
어떤 이는 의지력이 무력화 되어 아무리 바꾸려 해도 95%의 프로그래밍된 생각이 무의식과 통제에 의해 마음과 몸이 따로 노는 것이다. 그래서 연습으로 동시 프로그래밍을 해야 한다. 생각만 해도 안 되고 감정만 느껴도 안 된다. 김정과 생각의 조화가 필요하다. 의지를 하나님께 의식적으로 향하라 그게 다다.
의식하면 신경 쓰인다. 성령을 의식하면 새 삶이 온다. 적극적인 행동이 시작 된다. 그 분의 임재를 원하면 임재를 적극적으로 원하고 의식하라. 그러면 방법이 생기고 길이 열린다.
성령 충만은 성령님이 오서서 나의 몸과 마음과 생명과 존재를 완전히 소유하고 우리의 온 인격체를 성령의 통제에 맡기는 것이다. 성령이 통제하실 때 우리 몸은 성령의 거처가 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8:9
성령님은 살아계신 분이시다. 그분은 또한 인격체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분을 한 번 만 만나는 것으로 그분의 전체를 절대로 다 알 수 없다. 그래서 성령님과 만남은 평생 동안 이루어지면서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그분은 살아서 우리 곁에 계시는 인격체이시기에 교제를 통해 그 분의 깊이를 알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그 분께 조용한 말로 속삭이면 우리가 알고 있거나 사랑하고 아끼고 암송했던 성경구절이나 찬미가를 통해 다시 우리에게 속삭이신다. 이일이 반복되면 그런 습관이 길러진다.
성령 충만의 최종 목표는 순결 즉 생각의 순결 의식의 순결이다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진 새 생명(ζωή)이다. 세 생명과 같은 거룩한 생각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성소의 내부를 단장한 장식과 같다.
고전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지금의 세상은 성령님의 세상이다. 그분의 임재에 숨을 곳이 없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陰府)에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나이다." 시 139:8-10
피할 수 없는 성령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일어나서 먼저 스마트폰을 열지 말고 하나님을 생각하라 성령님과 사귀는 노력은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할 일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땅한 의무지만 즐거운 의무이다. 그러면 나의 생각과 삶과 행동이 놀랍게 변함을 기적적으로 체험할 것이다. 나도 이런 사람임을 알고 자녀들도 아내도 남편도 심지어 모든 교인들도 분명히 우리의 생각이 외부로 거룩하게 보여짐에 놀랄 것이다.
사람이 되는 것은 단순한 개선이 아니라 변형이다(Transformation). 변형이란 잘 깨닫지 못하고 나이 들어 깜박거리는 머리가 날렵하고 기억력 좋은 머리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변화 하나님의 피조물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바뀌는 변화이다. 성령에 의해 생명(ζωή)을 얻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