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강회장님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었답니다” 병오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산사태가 난 후 고향을 등지고 객지로 떠난 아버지가 1년 후에 돌아와 산사태가 난 사실조차 몰랐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였던 것이다. 병오가 말했다. “난 지금 마정재씨 이야기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산사태로 부모를 잃고 고향을 등진 분이 어떻게 1년 후에 돌아왔을 때는 산사태가 있었던 사실조차 모르고 있단 말이요?” 마정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술잔을 들어 입에다 기울이고 나서 시선을 클럽의 천장 조명에 던지고 있었다. “자, 얘기 해봐요. 그건 마정재씨가 만났다는 함영감님 얘긴가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무슨 문제입니까?” “110번지의 산사태 현장을 찾아온 분은 1년 전에 부모님의 시신이나마 수습하려고 계곡을 한달씩이나 찾아 헤맸던 그 분이 아니었습니다.” “뭐라고요? 그럼 누구란 말입니까?” 마정재는 숨을 돌렸다. 심호흡을 하고 나서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천천히 병오의 낯빛을 살피면서 말했다. “사장님도 지금까지 회장님에게 형제가 계셨다는 사실은 모르고 계셨지요?” “우리 아버지에게 형제가 계셨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사람 안된다고 하더군요. 그럴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형제분은 쌍둥이었으니까요.” 병오는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술이 넘쳐나도록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갑자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고개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병오가 알고 있기로는 아버지 강회장에게는 형제가 없는 것으로 돼 있었다. 비교적 아버지를 가까이서 모셔온 혜산댁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 아버지도 형제가 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 형제가 쌍둥이었다니 아버지가 그 얘기를 숨겨온 데는 무슨 말 못할 곡절이 있을 것만 같았다. 병오는 술잔을 들었다. 아버지가 왜 쌍둥이라는 사실을 숨겨야만 했을까. “지금 그 쌍둥이 얘기도 함영감님한테서 나온 거지요?” 병오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함영감님은 집안으로 조부님과 먼 인척뻘이 되어 비교적 집안 사정을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아버지와 그 분 중에 누가 형입니까? 또 쌍둥이 형제라면서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셨기에 산사태가 난 사실도 모르고 있다가 1년이 지난 후에야 돌아오신 겁니까?” “저도 그 점이 궁금해 함영감님에게 물었습니다. 영감님이 그 내력을 잘 알고 계시더군요. 조부모님께서는 그 무렵 산 일을 하고 계셨기 때문에 쌍둥이를 키우시기가 버거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입양을 원하는 사람이 있어 줄을 대보니 해안에 사는 유씨라는 분이 괜찮을 것 같았다는 겁니다. 둘씩이나 어렵게 키우느니 밥이라도 제대로 먹는 집에 가서 자라면 그것이 아이를 위해서 더 낫지 않겠느냐 싶어 입양을 시켰는데 입양 후에는 연이 끊어져 버렸다고 하더군요. 함영감님 말이, 쌍둥이라 차라리 그렇게 연을 끊어버리는 게 좋지 않겠느냐 그거예요.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요. 그 후로 뒤늦게 출생신고를 했는데 승대라고 부르던 회장님 이름을 동생의 이름으로 바꿔 강승소라고 호적에 올렸다는 것입니다.”
회장님의 쌍둥이 동생은 피난길에 행방불명 됐답니다” 병오는 잠자코 마정재의 얘기를 들었다. 산일을 하는 가난한 집안에 쌍둥이가 태어났으면 입에 풀칠하기가 어렵던 그 시절엔 둘 중 하나를 남의 양자로 줄 수도 있는 일이다. 거기에는 의문을 품을 수 없었다. 아버지 강회장의 이름이 호적에 승소로 오른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그 후로 우리 아버지와 쌍둥이 숙부님 사이는 완전히 연이 끊어져버렸나요?” “함영감님 말로는, 혈육이란 연이 끊어져도 아주 남이 될 수는 없다는 겁니다. 회장님과 그 숙부 되시는 분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6.25를 만났는데 숙부님은 피난길에 행방불명이 되셨다더군요.” “돌아가신 겁니까?” “함영감님은 거기까지 밖에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소문에는 피난을 가다가 붙들려 의용군으로 끌려갔다는 말도 있었고 남쪽으로 가다가 미군 폭격에 맞아 사망했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어느 것도 자기 눈으로 보지 못한 일이라 모른다는 겁니다.” 병오는 술잔을 들었다. 기분이 언짢았다. 아버지 강회장도 동생이 의용군으로 끌려 갔네, 폭격에 맞아 죽었네 하는 소문을 못들었을 리 없다. 그래서 아버지는 쌍둥이 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 구태여 2세들에게까지 알려야 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 얘기를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자, 술 들어요. 아무튼 모르고 넘어갈 뻔 했는데 상당히 자세한 얘기를 듣고 왔군요.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요.” “한가지 알고 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쌍둥이 숙부님은 입양을 하면서 양부의 성을 따라 유씨 성으로 바꾸었다는 겁니다.” “아니, 우리나라에선 성씨를 바꾸지는 못할 텐데요.” “입양 당시는 출생신고가 안돼 있었답니다. 그래서 양부 되시는 분이 출생신고를 했는데 그때 쌍둥이 숙부님을 친자로 신고했다는 겁니다.” “그럼 이름도 바꿨겠군요.” “함영감님도 그건 모르고 있더군요. 하지만 갓난애 때 데려갔는데 친자식으로 출생 신고를 하면서 이름을 바꾸지 않을 리 없지요.” 병오는 마정재에게 술을 권하고 화장실에 다녀오기 위해 박스에서 일어나 통로로 나왔다. 블루스 음악에 맞춰 앞 무대에서는 몸을 밀착시킨 남녀 몇쌍이 춤을 추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와 박스로 돌아오는데 때마침 왕석이 들어왔다. “자네가 여기 와 있는 줄은 몰랐군. 왠일인가?” “직원하고 같이 왔습니다.” “역시 강병오다웁군. 오는 길에 휴게실 들려 초이인가 하는 그 여직원을 만났는데 팜플렛 하나를 주더군. 어떤가, 무술대회 진행은 잘 되어 가고 있나?”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시범경기에 참가할 외국팀들도 차질없구요.” “그래? 자넨 일하는 품이 회장님 닮아서 성공할 거야.” “아닙니다. 직원들이 열심히 뛰었어요.” “아무튼 잘 되어 간다니 좋군. 어때, 직원 데리고 업무 얘기 하는 거 아니면 나랑 한 잔 같이 할까?” “좋습니다.” “단 오늘은 저번에 자네하고 함께 나갔던 그 채희란 년이 없네. 도망쳐버렸거든.”
“도망치다니요? 누굴 말하는 겁니까?”
병오는 도망쳤다는 채희가 누군지 생각이 나지않아 왕석에게 물었다.
“요전에 술 시중 들던 애 생각 안 나?”
“이 클럽에서 말이죠?”
“그래. 생각나지?”
“아, 맞아요. 그 왜 노래를 잘한다는 아가씨 말이죠. 생각나요. 그 아가씨가 채희입니까?”
“그 애가 채희야. 몸집은 조그마하지만 술자리에 앉으면 인기지. 그런데 걔가 자넬 바래다주러 간 후 종적을 감춰버렸어….”
왕석이 앞장서서 빈 박스를 찾으며 채희 얘기를 계속했다.
“빈 박스 찾을 게 아니라 우리 자리로 가서 합석하면 어때요? 함께 온 직원도 낯익을 겁니다. 마정재예요.”
“마정재? 그 왜 흥신소 있다 극장으로 온 친구 말이지?”
“네. 그 친구예요. 집안 일로 시골에 좀 보냈더니 오늘 돌아왔어요.”
왕석이 마정재가 혼자 앉아 있는 박스에 고개를 내밀었다.
병오가 화장실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자작으로 마시고 있던 마정재는 왕석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조금 숙이고 인사를 했다.
“앉게. 사장님 술 대접을 받는 직원은 유능한 직원이지. 오늘 술맛 나겠군.”
왕석은 마정재에게 앉으라고 손짓을 해보이고 자기는 건너편의 빈 박스로 들어가 앉았다. 마정재에게 잠시 앉아 있으라 말하고 병오는 양주를 왕석의 잔에다 따라주고 종적을 감췄다는 채희 얘기를 물었다.
“도망갔다는 그 아가씨가 채희라고 했지요? 하필이면 나하고 나간 후 종적을 감췄다니 내 입장이 곤란해지는군요. 난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곤란할 것 없어. 자네에게 혐의를 두고 있는 것 아니니까.”
“그래도 그런 얘기 듣고 보니 마치 내가 빼돌린 것 같군요. 난 정말 술이 너무 취해 내가 어디서 잤는지도 몰랐어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보니까 여관이더군요.”
“그런 줄 알고 있어. 벌써 어떤 경위로 그 계집애가 도망을 쳤는지도 밝혀냈고. 자네가 관계 없다는 것은 자네보다도 내가 더 잘 알고 있지. 문제가 하나 있긴 있지만 말야.”
“그게 뭡니까?”
왕석은 웨이터가 가져온 새 위스키를 병오에게 부어주고 말을 이었다.
“채희의 일에는 어니가 관련이 돼 있어. 자네와 나간 그날 밤 행적을 조사해봤더니 채희가 자네를 데리고 먼저 간 곳이 어니의 아파트였어. 아니, 그랬을 거라는 짐작이지. 왜냐하면 채희가 그후로 자넬 마니등 집으로 데리고 가지 않고 청수장으로 데리고 간 사실이 그걸 증명해.”
“그런데 어떻게 거기서 어니의 아파트 얘기가 나옵니까?”
“채희가 청수장에 함께 간 사람이 있는데 그게 바로 어니였기 때문이야. 어니와 함께 간 사실을 기억 못하나?”
병오는 머리를 저었다.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날 밤 술을 마신 곳이 왕석의 클럽이었다는 것 뿐이었다. 그 후의 일은 기억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어렴풋이 어니를 그날 밤 본 것 같기는 했으나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에 없었다.
“이거 내가 일부러 거짓말하는 것처럼 돼버리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