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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GU]국내가요 스크랩 남도의 판소리
익명 추천 0 조회 38 08.08.08 18:1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서민문화로 꽃피운 남도 판소리//

 

 

섬진강을 거슬러 피워 오른 남도 판소리"
섬진강은 지리산과 짝하면서 때론 애처롭게, 때론 세차게 흐른다.

그 물줄기를 닮아 구성지게 엮어내는 판소리로 언제나 남도의 기개와 정감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남도 판소리는 섬진강을 따라 동편제와 서편제의 특색을 드러내면서

한국 판소리의 중심을 차지한다.

구례의 동편제는 송흥록의 가락을 이어받으면서 더욱 웅건 하고도 청담(淸淡)하다.

광주와 나주․보성․강진․해남의 서편제는 명창 박유전을 닮아 부드러우면서도

더욱 애절하기만 하다.

이러한 유파는 사실상 그 의미가 약하지만 그 소리의 연원을 이루는 보성에는

박유전과 정응민의 예적비가 있고,

광주 송정공원에는 한국 최고의 소리꾼으로 칭송되는 임방울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판소리로 흥겹게 불려진 쑥대머리 <춘향전>
판소리는 조선후기 서민문화의 힘찬 태동 속에서 확립된 것이었다.

이 시기의 예술분야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풍속화와 한글소설의 대두였다.

이는 새로운 사상조류인 실학이 발생하고,

중인과 서민계층의 의식이 크게 성장한데 따른 현상이었다.

이 시기에는 종래 남송화풍에서 벗어나

운치와 서정을 중시하고,

단순한 중국 모사(模寫)에서 벗어나

한국 고유의 것을 소재로 한

문인화풍(文人畵風)이 주류를 이루었다.

영조 때의 정선은 한국의 정취가 넘치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독자성을 개척하여

<금강전도(金剛全圖)> 등을 남겼다.

이러한 자아 추구의 경향은

서민의 애환과 구체적 생활상을 화폭에 담은

풍속화에서 달성되었다.

대표적인 화가인 김홍도는 밭가는 광경, 추수하는 모양,

대장간의 광경, 무악(舞樂), 씨름 등 주로 농촌과

시정(市井)의 소박하고도 구수한 서민생활 속에 담긴

흥겨움과 해학의 멋을 즐겨 그렸다.

(사진/윤두서/나물 캐는 두 여인)

이에 비하여 신윤복은 <물놀이의 여인들> <밀회> 등을 통해

서민 남녀들이 보여주는 본능적인 인간성이나 서정적인 여인의 멋과 미를 맘껏 화폭에 담았다.

이같은 그림들은 당시 ‘속화(俗畵)’로 낮추어 부르기도 했으나

서민의식의 향상과 자아 발견을 배경으로

인간의 내면적 욕구와 일상생활을 솔직하고도 자유롭게 표현한 인간주의의 반영이었다.

이와 더불어 조선후기에는 한글의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한국인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게 됨으로써 그 작품 형식도 크게 변화되었다.

물론 조선중기 정철의 가사(歌辭)나 윤선도의 단가(短歌)는 한글체 작품이었으나

유교적 충군사상이나 고고한 선비들의 정취가 흐르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북학파 박지원의 ≪허생전≫≪양반전≫ 등을 통해 극복되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한문학의 형태를 띠었으나

종래의 문체에서 벗어나 양반 유생들의 허위의식을 비판한 풍자소설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홍길동전≫≪심청전≫ 등의 한글소설이 유행하고,

≪구운몽≫≪춘향전≫과 같은 애정소설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이들 소설은 여전히 권선징악(勸善懲惡)의 가치관에 얽매이고 있었으나

대체로 서민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해학(諧謔)과 풍자(諷刺)의 묘미를 살린 것이었다.

더구나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춘향전≫은

인간의 동등성이 반영된 소설로서 서민들이 즐겨 읽고, 판소리로 불려져게 되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판소리 문화유산
그런데 조선후기 예술분야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사실은 광대(廣大)가 부상하고,

판소리가 널리 불리워진 점에 있다.

이러한 판소리는 세계적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에 속한다.

이는 남을 위해 들려주는 노래이자

판을 필요로 하는 소리이며, 몸짓이다.

더구나 소리꾼과 고수(鼓手)로 구성되는

단촐한 판소리 공연은

굿판을 쉽게 이끌어낼 뿐만 아니라

뛰어난 문학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틀에 박힌 일정한 형식을 거부하면서

더욱 구성지고,

악보가 없으면서도 청중의 추임새로

더욱 흥겨운 굿판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와 함께 청중을 울리고 웃기는 사실성,

이완과 긴장으로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장단 등에 판소리의 멋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판소리는 조선후기 서민문화의

성숙 속에서 호남 명창들에 의해

민족․국민음악으로 승화된 것이었다.

(사진/보성 판소리)

 

판소리의 유래
판소리는 광대가 일편의 내용을 노래와

이야기(아니리)로 연창하는 소리를 말한다.

본래 판소리 광대는 산주(山主,사님)라고

지칭되었으며, 관아에 속한 악공(樂工)으로

각종 연예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음악에 기량이 없는 재인(才人)은

줄타기 등을 하고, 무당이 굿을 행할 때

장고(長鼓)나 북을 쳐주었다.

이들 중에서 판소리를 부르는 자를 가객(歌客)이라고 했으며,

향반과 서민 출신을 비갑(非甲)으로 호칭하고,

명창들은 선달(先達)․동지(同知)로 불리우는 대우를 받았다.

이러한 판소리의 시창자는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소리는 예로부터 있어 왔으며,

민속연예로 대두하기는 18세기초의 일이었다.

조선초기에는 대들이 봉상악공(捧上樂工,밧자아공)으로 서울에 올라와 연예에 동원되었다.

이들은 병자호란 이후에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기 위하여

산대(山臺)에서 도감극(都監劇)이나 잡희(雜戱)를 베풀고,

궁중에서 나례(儺禮)를 행하여 나례산주(儺禮山主)로 불리워졌다.

이 때부터 각종 연예가 광대들의 독무대가 되고,

이들이 서울에 모여 기예를 연마하고,

각 민속재능을 선보임에 따라 판소리 같은 창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신재효에 의해 기록문학으로 전환한 판소리
이러한 판소리의 내용은 당시 유행하고 있었던 야담에

민속적인 이야기를 부연하고 확대하여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판소리는 그 종류가 다양했으나 한 편의 판소리를 창하는데

장시간이 걸리는 장편물이 나오게 되어 열두마당을 형성하게 되었다.

특히 판소리는 다른 민속연예와는 달리 신재효에 의해 기록문학으로 자기 전환하게 되었다.

신재효는 본래 중인 출신으로 60세 무렵에 고창 아전을 그만두고

국악인들에게 판소리를 지도하였다.

그는 자신이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소리꾼이 아니었으나

스스로 목소리를 작중세계에 이입시킨 인물이었다.

그는 소리꾼이 갖추어야할 조건으로 빼어난 얼굴에

좋은 목소리로 장단과 가락을 자유롭게 구사하고,

분명하고 정확한 사설(辭說) 발음으로 노래나 이야기를 엮어가며,

구성지고 맵시있는 표정이나 몸짓으로 청중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의 문하에는 당시 명창으로 이름난 이날치․박만순을 비롯하여

최초의 여류 명창인 진채선․허금파도 넘나들었다.

그는 판소리 열두 마당 중에서 여섯 마당인

춘향가․심청가․흥보가․토끼타령․적벽가․변강쇠타령을 기록 정리하였다.

그러나 수많은 판소리 문학이 열두마당으로 한정되고,

그것도 사설을 잃어버리는 가운데 신재효 이후에는 다섯마당이 전해지게 되었다.

이처럼 그의 업적은 판소리 정리와 이를 다듬어 세련성을 갖춘 사실에 있었으나

서민적인 발랄성이 반감된 한계를 지닌다.

 

명창들의 대두와 판소리 유파
이같은 배경 속에서 순조 무렵에 이르러서는

권삼득․황해천․송흥록․방만춘 등을 비롯한 8명창이 전성을 이루었다.

이 중에서 제1인자로 칭송되었던 권삼득은 가마를 모는 가마꾼의 소리를 판소리화하여

보다 경쾌하고, 호탕한 느낌을 주는 설렁제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이어 판소리의 전성기인 철종․고종 때에는

당시 세도가였던 안동김씨 김병기와 대원군의 국창(國唱) 대우를 받으면서

박유전․박만순․이날치․김세종․정창업 등의 후기 8명창시대가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는 판소리를 더욱 치밀하고,

정교한 음악으로 발전되면서 여러 유파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판소리 유파는 그 전승 계보에 따른 음악적 특성을

유형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구분한 것으로 보통 ‘제(制)’라고 불렀다.

이들 유파에는 동편제(東便制)․서편제․중고제(中高制)가 있었다.

동편제는 당대 명창이자 판소리의 중시조로 칭송된

남원출신 송흥록(宋興錄)의 법통을 이어받은 유파로서

그는 명창 김성옥과 함께 진양조를 처음으로 개발하고,

경상도의 향토적 선율을 판소리화한 산유화조를 개발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개 동편제는 창법이 웅건․청담하고, 발성초(發聲初)가 신중하며,

구절의 끝마침이 명확하면서 판소리조 중에서도 우조(羽調)에서 묘미를 발휘한다.

그러므로 동편제는 <적벽가> <춘향가>가 잘 어울리는 호령 호걸스런 창법이 특색인데,

서편제가 ‘보여주는 판소리’라고 한다면 ‘들려주는 판소리’로 정평이 나있다.

이들 명창으로는 송흥록을 비롯하여

박만순․김세종․정춘풍․김창록․박기홍․김찬업 등이 유명하였다.

이에 비하여 서편제는 박유전(朴裕全)을 이은 계통으로 부드러우면서도 애절하며,

소리의 끝이 길게 이어지면서 계면조의 가락이 많은 점이 특징이다.

이 서편제에 어울리는 노래로는 <심청가>를 손꼽고 있으며,

이들 명창으로는 박유전을 비롯하여

이날치․김채만․정창업․김창환․정정렬 등을 거쳐 김소희․김여란 등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남도 판소리는 섬진강을 동서로 구분하여

구례․운봉․순창의 동편제와 광주․나주․보성․고창의 서편제로 형성되어

판소리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리적 구분은 후대에 이르러 가객들이 서로 이동함으로써 그 의미가 약화되었다. 이와 함께 경기 남부와 충청지역에는 김성옥으로부터 비롯되는 중고제가 전승되었으나

그 창법은 동편제와 서편제의 절충형을 이루지만

소리의 끝은 동편제와 같이 매우 드높은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한국 판소리는 근대시기에

명창 박기홍․김창환․김채만․송만갑․이동백 등이 크게 활약했으나

당시 창극이 유행하는 형편에서 유파적 특색도 약화되는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현재 최고의 소리꾼으로 칭송되는 임방울 이후에

많은 국악인들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1968년에는 박동진이 처음으로 완창 발표회를 가져 판소리의 새로운 부흥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보성의 판소리 강산제와 박유전
따라서 남도 곳곳은 그 고향답게 창(唱)과 판소리로 남도의 정서를 우려낸다.

현재 남도 판소리․서편제․창동편제․강산제 심청가․동편제 춘향가․춘향가 동초제와 함께

고수(鼓手)가 북으로 장단을 맞춰주는 판소리 고법(鼓法)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처럼 광주․순천․구례․보성 등지의 남도에는

판소리 명창가를 비롯하여

시조를 가사로 하는 단가를 노래 부르는 완제시조창도 널리 알려져 있다.
보성은 판소리 서편제(西便制)의 원류가 거대한 물줄기를 이르고,

이를 잘 가다듬은 강산제(江山制)가 고요하게 흐르는 향토이다.

 

보성 강산마을은 박유전이 만년에 여생을 보낸 곳이다.

그래서 보성은 서편제가 박유전(1835~1906)으로부터 연원한다고

전해질만큼 판소리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는 당대 명창으로 본래 목청이 뛰어나고 고왔으며,

대원군에게 ‘제일강산’으로 칭송되어

강산이란 호를 받았다.

그는 서편제의 애절한 것을 지양하고,

판소리 선율을 정연하면서도

변화있는 기교를 가했으며,

삼강오륜에 어긋나는 대목은 삭제 수정하여

새로운 양식인 강산제를 개발하였다.

 

제자로는 <춘향가>와 <심청가>를 잘했던

이날치 등이 있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그의 강산제가

정재근․정응민 등을 거쳐

현재 조상현과 성우향․성창순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또한 고수로는 정응민으로부터 배워

보성소리를 잘 알았던

인간문화재 김명환이 유명하였다.

그래서 강산마을에는 그의 노래비와 함께 그를 기념한 정자가 세워져 있다.

또한 도강마을에는 정응민예적비(사진)가 세워져 있다.

 

특히 광주 광산 출신인

임방울(1904~1961)은

박재현․유성준․송만갑 등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워 명창이 되었는데,

25살 때 부른

<춘향가>의 ‘쑥대머리’는 큰 인기를 끌었으며,

지금껏 한국 최고의 소리꾼으로 칭송된다.

이와 함께 그가 부른 <수궁가>의

‘토끼와 자라’ 대목도 손꼽혀

서편제 판소리 맥을 되살린 명창으로 일컬어지며,

송정공원에 임방울노래비를 세워

이를 기념한다.  
 
어느덧 민족음악이 된 판소리
이처럼 조선후기에 서민문화가 대두한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이를 근대사조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양반문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근대지향의 토대이자 모든 구성원이 일체화되는 민족문화의 모태가 되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 상품화폐경제의 수준이 한국인의 생활과 의식을 일반적으로 변혁시킬 만큼

발달하지 못하여 일시적인 유행으로 끝난 것도 많았다.

그래서 서민들의 자유분방한 사연을 나타낸 사설시조는 김수장 이후에 쇠퇴하고,

김홍도의 풍속화도 계승자를 만나지 못했으며,

문학도 한시 쪽으로 기울어져 서민의 애환을 대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서민들을 주체로 한 예술 형태는 달랐다.

오늘날 민요와 민담, 가면극(탈춤)․인형극․판소리로 호칭되는 것들은

대개 서민들의 노동과 휴식시간에 행해진 것으로

광대와 무당, 사당패들이 벌이는 굿과 놀이에 노랫가락 이야기조로 전해 내려온 것들이었다.

이들은 선박이 닿고 사람들이 붐비는 도회처에서 한 마당을 펼쳤다.

바로 19세기는 판소리의 전성기였다.

판소리 광대는 사당패와는 달리 안정된 생활 근거를 가지고 있었고,

독립된 연예인으로서 고수 1인을 대동하여 2인 1개조로 자유롭게 흥행을 벌였다.

또한 판소리가 유행하면서 양반 출신의 명창도 대두하고,

중앙에 진출하여 안동 김씨나 대원군의 애호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판소리가 양반 세도가들을 청중으로 흡수한 것은

귀족층을 서민적인 예술 취향의 세계로 끌어들인 서민예술의 역사적 승리이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판소리는 어느덧 지역성을 뛰어넘어 전계층이 향유하는 국민적 예술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는 직업적인 연예인으로서 자기 성장을 꾸준히 실현해온

역대 명창과 광대들의 창조적 역량의 결실이었다.

 

[참고 문헌 및 사진] 보성(보성군청, 2004)/임형택, <조선후기 민중문화의 형성과 그 사상> 한국의 사회사상(한길사, 1987)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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