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미디어 겨울호 수필평 >
작품의 가치와 생명력
김 홍 은
작가는 글을 쓰면서 작품을 통하여 아름다운 삶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특히 수필문학은 과거와 현실의 체험을 통한 반성과 아쉬움을 미래의 아름다운 소망으로 승화시켜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글은 어디까지나 한 개인적 삶의 철학과 사색을 통한 감동을 담고 있는 언어의 율동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문장표현은 주관적이지만 예술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을 때 오랜 생명력을 유지 할 수 있다. 수필문학은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내용과 순수하면서 신선한 생각을 담아낼 때 작품의 가치를 더해 준다.
오래전의 이야기다. 대학에서 학교신문문학상 심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수상작품의 수필제목이 <요강단지가 있는 방안>으로 생각된다. 주제는 자취방 안에서 요강에다 용변을 보며 사는 이야기였다. 나는 당선작으로 뽑으면서 제목을 바꾸는 조건을 내세웠었다.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서 독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은 어느 잡지사에서 원고청탁이 와서 검은등 뻐꾸기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이 새는 <홀딱 벗고, 홀딱 벗고>라고 우는 새로 알려져 있다. 튀고 싶은 생각에 제목을 <홀딱 벗고>라고 붙였다. 그랬더니 잡지사로부터 제목을 바꾸지 않으면 게재를 못하겠다는 메일이 와서 바꾼 적이 있었다.
문학은 자신만의 작품이 아니다. 가족과 독자가 함께 읽는 예술이다. 문장 표현은 아무리 주관적이라고 하지만, 이왕이면 독자도 생각하고 자신의 작품을 위해서도 먼 훗날까지 떳떳하려면 심사숙고한 작품소재로 고려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김학래의 <부채> 작품은,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점점 잊혀져가고 있는 생활의 물건을 가지고, 잘 묘사하여 놓았다.
여름이면 하나의 필수품이나 다름없던 부채다. 지금은 과학문명으로부터 밀려나 하나의 민속품이나 다름없이 전락해 버린 부채에 대한, 생활문화를 감칠맛 나게 이끌어내었다.
원래 부채란 무더운 여름날 땀을 식히고 더위를 나리는 도구인데, 부채의 기능은 다양화 되었다. 모시로 만든 바지저고리를 입고 모시 두루마기까지 입은 한량이 부채질을 하면서 길을 가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이게 부채질의 원형일 뿐 아니라 아주 멋있는 한량 폼이 아니겠는가?
소리꾼이 판소리를 열창할 때의 필수품은 바로 합죽선이다. 합죽선 부채를 쭉 펴면서 통쾌한 고음은 내놓을 때 청중은 박수를 보낼 것이다. 맨 손을 내저으면서 소리를 할 때와는 효과도 다르고 분위기도 차이가 있고 멋도 많이 다를 것이다.
문헌<삼국사기〉에 의하면 우리의 부채에 대한 기원은 고려시대 초기에 이미 부채를 사용하여 왔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단오 날에 공조(工曹)에서 단오선을 만들어 진상하면 왕은 이것을 각 궁의 재신(宰臣)과 시종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이때의 부채는 호남, 영남의 방백(方伯)과 절도사(節度使)의 외관 혹은 내관이 그 지방의 특산품으로 궁중에 진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단오 때는 부채를 만들어 친지에게 선사하는 풍속도 있었으며, 부채에는 산수화나 복사꽃,연꽃, 나비 같은 그림과 글씨의 문양으로 아름답게 장식을 했다. 이런 부채들은 더위를 쫓는데 사용하는 필수품이나 다름이 없다.
화자는 부채의 기능으로 부채질을 하며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 그려놓았다. 그뿐 아니라 판소리꾼이 합죽선을 들고 소리를 할 때 보다 자연스럽고 멋을 나타내기 위해 부채인 합죽선을 폈다 접었다하는 효과적인 분위기도 묘사했다. 이런 풍속들이 점점 잊혀져가고 있는 부채를 사용하던 멋을, 화자는 재치 있게 들려줌이 신선하다.
부채질을 하는 양상을 보면 어떤 사태를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시장 터를 지나가는데 어떤 가게의 마나님은 신경질적인 부채질을 하는 것이었다. 좀 지나가다가 또 다른 가게를 살펴보았다. 차분하고 한가롭고 여유 있는 부채질을 하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전자의 가게는 이날 장사가 잘 안되고 후자의 가게는 물건이 잘 팔리는 것으로 여겨졌다.
부채의 사용은 생활의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고 하겠다. 부채의 용도는 다양하게 쓰였다. 일반적으로 부채는 더위를 잊게 하기위한 바람을 일으키는데 주로 쓰이지만, 더러는 길을 걸을 때는 해를 가리는 양산대용이 되기도 하고, 아기의 잠자리에 시원한 바람을 일으켜 잠들게도 하지만, 때로는 파리나 모기를 쫓는데도 이용한다.
그러나 화자는 가게의 주인이 부채질을 하는 모습을 통한 심리적인 관찰로, 사람의 마음까지 묘사하여 놓았음이 독자들에게 동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래도 부채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소리꾼의 멋진 부채, 줄 타는 이의 신명 넘치는 부채, 무용수들의 아름다운 부채는 그 기능과 위력을 향하여 계속 새로워질 것이다. 그리고 꼭 필요한 부채가 나와야 될 것 같다.
요즘 정치권의 행태가 국민들의 삼복더위 이상으로 짜증나게 하고 무덥게 하는데, 이들 정치권 폭서를 한방에 아주 시원하게 날려버릴 웰빙 부채라도 나온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화자는 우리생활에서 멀어져가는 부채에 대한 아쉬움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의 생활에서는 잊혀져갈지는 모르지만 민속과 예술이 존재하는 한, 부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전통가락인 민요는 멋스럽고 굴곡이 많아 흥이 나고, 부채춤이나 무당춤 역시 민족의 전통을 담아내고 있다.
민속 문화가 유지되고 있음으로, 부채의 멋을 담아낸 맥은 아마도 끊기 지는 않을 게다. 선조들은 단오에 부채를 만들어 선물하는 풍속은 신선의 멋도 있었지만, 이 기구를 사용하여 악귀나 재앙을 물리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듯 부채가 바람을 일으키는 것처럼 재앙이나 병을 몰고 오는 악귀를 물리치는데 사용하고 기원했듯이, “요즘 정치권의 행태가 국민들의 삼복더위 이상으로 짜증나게 하고 무덥게 하는데, 이들 정치권 폭서를 한방에 시원하게 날려버릴 웰빙 부채라도 나온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라는 재치가 넘쳐 난다.
부채는 예로부터 여덟 가지의 덕을 지녔다하여 팔덕선(八德扇)이라고 불렀는데, 이제부터는 구덕선(九德扇)의 의미를 지니길 바라고 싶은 마음을 들려줌이 한껏 수필의 맛을 새롭게 하였고 잊혀져가는 우리문화를 일깨워 주고 있음이 수필의 멋을 자아내었다.
최원현의 <하늘 자전거> 작품은, 경북 팔경 중의 으뜸으로 알려진 강변을 따라 하늘로 치솟은 기암괴석과 층암절벽이 이어지는 절경을 감상하며, 진남역 철로자전거여행의 즐거움을 그려낸 글이다.
원래 진남역은 가은선 기찻길로 석탄을 나르던 곳으로 은성탄광이 폐광되면서 철로도 폐선된 것을, 한 시민의 아이디어로 철로자전거를 탄생시켜 관광지로 개발하게 되었단다. 하늘자전거란 이름을 붙여놓은 자전거를 타면서 주변의 경치와 여행의 멋과 맛을 잔잔하게 들려주었다.
철늦은 코스모스 몇 송이가 손을 흔들고 있다. 찾아와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 같다. 주먹탄을 배급받아 교실의 난로에 불을 피우던 어린 날, 그 사이에도 세월이 흘러 구공탄으로 바뀌었고 서투른 솜씨로 불을 갈다보면 손이며 얼굴이며 껌뎅이가 묻던 그 어린 날이 코스모스 하늘거림의 반김 속에 주마등처럼 살아난다. 그러나 변한다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하면 늙었다는 것이란다.
하늘 자전거를 타고 푸른 가을 하늘아래 코스모스가 드문드문 피어 바람에 하늘대는 가냘픈 모습을 손 흔듦으로 의인화 하며,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는 상상으로 표현 하였다. 그런가하면 세월의 흐름과 학창시절의 연탄 사용변화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고 있다. 서투른 솜씨로 연탄불을 갈다보면 검은 탄가루가 손과 얼굴에도 묻고 하던 아련한 그리움이 영상처럼 스쳐 지나감도 그려내었다.
연탄은 산림녹화의 대비책으로 만들어진 난방용 생산품으로 일상생활의 중요한 필수품이었다. 그러나 연탄은 가난한 시절의 삶에 많은 애환을 담고도 있다. 때로는 연탄가스의 유해로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슬픔을 맞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가난의 죄라고 연탄을 멀리할 수 가 없었던 지난날도 있었다.
화자는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게 어디 있으랴만 이런 변화 속에서 사람은 또 어떻게 변해야 할지 짐짓 두려워 진다. 변하는 것이 다 좋을 수는 없으련만, 그런데도 그 변화를 수용하고 적응하며 살아하는 것이 우리 삶이 아니던가.’하였다. 그렇다. 인생의 삶이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의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안도현 시인의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를 떠 올리게도 한다. 연탄재 발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자신의 몸뚱아리를 다 태우며 뜨끈뜨끈한 아랫목을 만들었던/ 저 연탄재를 누가 발로 함부로 찰 수 있는가?/ 자신의 목숨을 다 버리고 이제 하얀 껍데기만 남아 있는/ 저 연탄재를 누가 함부로 발길질 할 수 있는가?/ 나는 누구에게 진실로 뜨거운 사람이었던가?
하늘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며 나는 어떤 변화에 어찌 대처하고 있는가 곰곰이 생각게 된다. 용도 폐기 된 철로가 다른 용도로 이만큼 사용되는 것은 축복이다. 하지만 사람도 그럴 수 있을까. 조기 퇴직에 수명은 길어지니 사람들은 큰 걱정을 안는다. 또 다른 적응법을 찾아야 하리라. 그렇지만 오늘은 이런 저런 생각 않고 그저 파란 하늘만 바라보며 내 가슴도 늘 저리 맑았음 싶다는 바람만 가득 담아본다. 그러다보니 하늘자전거로 하늘을 나는 영화속 한 장면처럼 내 마음도 열리는 것 같다. 어쩌면 내 잠재의식 속에서도 땅이 아닌 하늘을 맘껏 나는 자전거를 소망하고 있었음일까.
하늘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다 함은, 사회의 변화 속에 자신을 어떻게 생활에 적응하며 살아가야 하는가의 고민일 것이다. 인간이 주어진 현실을, 평탄하고 순조롭게 헤쳐 나가면서 힘겹지 않게 살아갈까 함은 누구나가 지닌 오늘의 삶이다. 이를 벗어나려면 사회로부터 경험하고 계획하고 심사숙고하게 처리하는 능력이 요구되고 있다.
우리 사회는 누구나 한 번쯤은 삶의 조직체로부터 물러나게 될 때, 이를 극복해 나가는 정신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화자는 조기퇴직을 해도 수명이 길다보니 크게 걱정을 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지만, 이는 모두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나 여유를 부리고 있다. 겉으로는 편안하듯 하지만,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가슴도 늘 저리 맑았으면 싶다함은, 아직도 내면적으로는 바라고 있는 꿈을 저버리지 않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지 않나 싶다.
인간의 삶은 난감한 일이 생기게 될 때, 정신적으로 여러 가지의 관점으로 본다면 사고와 지식을 함께 하면서 인간의 욕구를 줄이고자하는 의식적인 좌절감에 빠져 들게 된다. 그러나 자신감과 용기는 또 다른 삶의 적응방법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인간이 직면하는 공통적인 고통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 듯하지만, 남다른 삶에 대한 용기와 의식이 남아 있음을 하늘자전거를 통하여 느낄 수 있게 하고 있다. 어쩌면 이는 모든 이들에게도 소망을 버리지 말고, 용기를 일깨우는 의미를 전해주고 있지 않나 싶다.
구자인혜의 <만 배 기도> 작품은, 살고 있는 집 가까이에 정발산이 있단다. 그 산은 아마도 솥뚜껑을 엎어놓은 듯한, 평탄한 모양이라 정발이란 이름이 붙여졌으며 모든 것의 가운데가 되라는 뜻으로 임금자리 정(鼎)자를 썼다고 했다. 높지 않은 모습이 중용(中庸)을 실현하고 있는 듯, 의젓한 풍모와 넉넉하게 사람을 맞아들이는 품새라며, 그 산자락에 여래사가 있단다.
유교의 국풍을 피해 깊은 산속에 숨어 있던 절이 이제는 도시 한가운데 자라를 하고 있어 찾아가기가 편하다고 하였다. 가족들은 휴일이라도 자기의 할 일로 더 바쁘기에, 화자는 일요법회를 가서 만 배 기도를 하게 된 마음과 이에 대한 경험을 들려준 글이다.
소원 성취가 기도의 목적으로 하루에 천배씩 열흘을 한다함에 욕심이 났다며 ‘기도 첫날, 법당 안은 신도들로 가득하다. 모두 원(願)을 이루기 위해 기도할 것이다. 다른 절에서도 소원을 빌 것이고, 다른 종교에서도 원하는 것을 기도할 것이다. 세상을 살며 이루어야 할 것은 너무 많다. 모두 이루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기도만으로 정말 소원이 이루어질까. 어둡고 불행한 시기의 사람들은 기도를 하지 않아서 그렇게 사는 것일까.’라며 화자는 절을 할 때마다 부처님의 이름을 불러가며, 세 가지 소원으로 아들의 학업성취, 남편의 사업번창, 자신의 글 솜씨의 문운을 기원한다.
마음속으로 별별 생각이 다 스쳐지나간다. 마음을 모아 다시 법당의 마룻바닥에 머리를 수없이 조아리며 온몸이 땀에 젖고, 무릎관절이 땅기고 허리가 뻐근해져 근육통 파스를 붙이며 마음을 다잡는다.
‘처음에는 절을 하면서도 이런다고 소원이 이루어질까, 에서 삼천 배, 사천 배를 하니까 해낼 수 있을까.’ 의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 오천 배, 육천 배를 하니까, 꼭 해 내야지하는 마음으로 바뀌고, 이상하게도 칠천 배, 팔천 배 절을 할수록 소원을 비는 간절함의 기도가 점점 엷어졌다고 하였다. 마지막 천배를 하는 날에는 몸이 가쁜 하고 마음도 편안하더라는 기도 하는 마음과,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정신을 통한 마음이 열리고 있었음을 스스로 닦은 체험을 들려주었다.
이 글은 독자들에게 기도를 통한 염원은 자신과의 싸움임이라는 것을, 인내와 끊기로 성취감을 들려줌이 값지게 느껴 온다.
김상분의 <어느 베짱이의 고뇌> 작품은, 농사의 경험도 없는 서울아줌마가 한 해 동안 배추, 고추, 벼농사농사를 지으면서 손바닥만한 밭에다 지하수도 파고, 묘목도 제대로 키우지도 못하면서 잡풀도 야생화라고 김도 제대로 매지 않아 풀씨만 영글게 해서 퍼트리었다. 쇠뜨기보다 더 왕성하게 자라는 토끼풀을 놔두고 그 속에서 네 잎 크로버의 행운을 찾는 철없는 짓이 몇 해 이던가.
농지를 이웃한 촌로(村老)로는 교육은 부족하지만, 농사를 통한 삶의 철학은 화자의 어줍 잖은 이론과 설익은 신기술의 주장을 무색하게 만들곤 했다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엮어 놓은 글이다.
이른 봄의 논갈이를 시작으로 물대고 모를 내고 숨을 돌리기가 무섭게 후끈 달아오르는 무더위는 기승을 부린다. 벼가 튼실하게 자라고 이삭이 패기 시작하면 어느새 잡초도 온갖 해충도 덩달아 왕성해져서 상생을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에 어긋나지 않기란 쉽지가 않단다. 이웃 밭 아저씨는 남들처럼 마구 제초제를 뿌리고 맹독성의 살충제를 뿜어대면 농사가 훨씬 수월해지겠지만, 말없이 논두렁의 풀을 틈틈이 낫으로 깎는다. 그러기에 풀뿌리가 엉키고 다져진 논두렁은 폭우에도 무너지지 않고, 그곳에다 드문드문 콩을 심는 농사법의 지혜를 터득하고 있었다.
화자는 자연과 함께 살고픈 마음에서 개미의 흉내를 열심히 낸듯했는데 자꾸 베짱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였다. 자신은 노래하며 놀아보지도 못했지만 농사꾼 눈에는 베짱이 같이 보였을지 모른다며 끝을 맺었다.
이 수필은 여러 갈래의 줄거리를 이끌면서 주제에 대한 욕심을 내다보니 독자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내용이 선명하게 전달되어 지지가 않음이 아쉽다.
수필은 쓰기도 어렵지만 남의 글을 좋은 글인가 아닌가를 평하기는 더 어렵다. 이런 점에서 고심을 할 때가 많다. 더러는 꼭 꼬집어 주고도 싶은 작품도 있지만 망설이다가 마는 경우도 있다.
문학이란 자신의 인격을 문자로 표현해놓는 언어예술이다. 말은 할 때는 기억할 뿐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문자는 책으로 엮어져 오래 보관이 됨에 작가의 이름이 늘 따라다닌다. 이런 점으로 생각할 때, 특히 수필문학의 문장은 진솔해야 한다. 수필은 소설이나, 콩트와는 다르다는 점을 명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