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종대왕의 리더십 2.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 3.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의 리더십 4. 삼성 초대 CEO 이병철 회장의 리더십 5. 현대 전 CEO 정주영회장의 리더십 6. 장보고의 리더십 7. 삼성 CEO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 8. 알렉산더의 리더십 9.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 10. 잭 웰치의 리더십 11. 히딩크의 리더십 12. 역사상 가장 큰 부자, 존 록펠러의 리더십 13. 조선조 정조의 리더십 14.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리더십 15. 칭기즈칸의 리더십 16. 강철왕 카네기의 리더십 17. 롯데 신격호 회장의 리더십 18. 아리스토텔레스의 리더십 19. 중국 청조 강희제의 리더십 20. 벤자민 프랭클린의 리더십 21. LG 구자경 명예회장의 리더십 22. 정보시대의 리더십 23. 리더십의 여덟가지 일반적인 법칙 24. 성공하는 서비스 리더의 덕목 25. 원칙중심의 리더십 26. 리더십 자질을 갖추는 요령 27. 한국형 리더십 28. 흥하게 하는 리더십, 망하게 하는 리더십 29. 역동적인 리더의 특징 30. CEO의 리더십 스타일 31. 유명 CEO의 좌우명(無順) 32. 리더십 전문가 존 맥스웰 박사의 강연회 33. 스티븐 코비의 상생 리더십 ************************************** 1. 세종대왕의 리더십 세종대왕이 어떤 식견을 가지고 어떻게 조직에 생기를 불어넣었으며, 무슨 고민을 했고 어떤 노력들을 기울였는가를 알아봄으로써, 우리는 젝 웰치나 빌 게이츠 같은 서양의 경영자가 아닌 ‘한국인으로서 한국인을 가장 잘 경영했던 인물’에 대한 모범적 사례를 발견하게 된다. 시대의 변혁을 꾀한 리더 세종대왕 위대한 인물들은 누구나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불멸하는 추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저자는 세종대왕이 가슴속에 품었던 의지를 ‘긍정적인(포지티브한) 허무’라고 얘기한다. 그것은 그가 국초 국말의 권력쟁투와 무너져가는 인간사의 허무에서 발견한 것이 다름 아닌 인간 존재에 대한 측은지심이었고, 그것이 다시금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되었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세종은 국초에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그의 아버지 태종에 의해 수많은 목숨을 희생되는 것을 보았다. 이로 인해 세종의 심중에는 ‘적극적인 역사 개척보다는 허무에 기반을 둔 인간사와 인생에 대한 연민’이 자리잡게 되었으며, 바로 그것이 그가 역사를 이끌어간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세종의 두 형들은 골치 아픈 왕의 자리에서 도망쳤다. 첫째 형은 미친 척했고, 둘째 형은 중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세종이 선택한 길은 노자의 도(道)인 ‘대은(大隱)은 어시은(於市隱) : 깊게 은둔하는 것은 시끌벅적한 시장 속에서 세상사람과 동고동락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이었다. 세종이 평생 실천한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와 무실역행(務實力行: 참되고 실속 있도록 힘써 실행함)은 또 다른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었으며, 말년에 지은 「월인천강지곡」에는 이러한 세종의 이상이 잘 녹아 있다. 세종은 무엇보다 시대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면밀히 탐색했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 뒤 인재 부족으로 인한 국정 공백을 해결하기 위한 인재수급과, 백성들의 새 왕조에 대한 기대에 부응해 민생고를 해결해 주어야만 했다. 세종은 태종의 죽음을 앞두고 이런 시대적 요구사항을 고민하며 준비해 나갔다. “세종은 그 자신의 영달 때문에 권력을 탐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사하기 위해서였다. 그것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그에게는 있었다. 피로 얼룩진 시대를 넘어 태평성대와 최고의 나라를 건설할 자신이 젊은 세종에게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형님인 효령이 출가하면서 세종에게 남긴 “현세의 미륵이 되어라”는 당부와도 무관하지 않다. 세종은 그러한 시대적 안목과 대의가 있었기에 뜻있는 선비들을 규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1. 다스림의 요체는 마음을 닦는 것 백성과 신하를 다스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마음을 닦는 일이었다. 과연 그는 어떠한 심법으로 국가를 경영했는가. ‘총명(聰明)하다’는 말에서 총은 ‘귀 밝은 총’ 자이다. 즉 똑똑하고 현명하다는 것은 자신의 말과 의견을 내세우기 이전에, 남의 얘기를 잘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세종의 강점을 이렇게 적고 있다. “군주로서 세종의 생활은 온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기 위해서는 심성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노하지 않아야 하고 끈기가 있어야 한다. 또한 지식과 지혜의 우위가 전제되어야 한다. 진정한 강자만이 약자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세종이 황희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렇게 물었다. “두문동에 머물러 있지 뭣 하러 세상에 다시 나왔는가?” 황희는 이렇게 대답한다. “일찍이 진리탐구에 열중할 뿐 과거에 응할 생각조차 하지 않다가, 백성을 위하여 멸사봉공하는 것 또한 군자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 일러주신 부친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애초에 황희는 태종의 사람이었고 양녕대군을 옹위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황희의 청렴성에도 불구하고 항상 감시자를 붙여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러나 또 한편, 이 총명한 임금과 충직한 신하가 서로의 마음을 얼마나 잘 알고 서로를 믿었으면, 세종이 황희를 6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케 하고 20여 년을 정승의 자리에 앉힐 수 있었겠는가. 황희는 평생 세종의 정치적인 조력자이자 선생으로 묵묵히 세종을 보필한 신하로 남았다. 또한 세종은 신하들과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할 경우 스스로가 누리는 왕위도 사상누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 국가가 안정하게 존속하려면, 충분한 군사력[足兵], 충분한 먹을거리[足食], 그리고 백성의 신임과 마음[民信]을 모두 얻어야 한다고 보았다. 만약 부득이 하게 이들 중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먼저 군사를 버려야 하고, 다음은 먹는 것을 버리라고 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백성의 신임과 마음임을 강조한다. 세종은 백성들과의 마음의 화합이 더 본질적이요 더 우선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고려조가 망한 원인에 대해 세종은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했기 때문이 아니라, 고려의 왕조가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무너진 것이라 보았다. 그래서 세종은 백성들이 자기 곁으로 다가오길 기다리지 않고 그들 곁으로 먼저 다가가고자 노력하는 임금이 되었다.
2. 인재 발굴만이 개혁의 힘이다 세종이 인재를 선출하고 키우는 과정에는 유난히 배울 점이 많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세워도 재능있는 부하에게 관대하였고 왕이라고 해서 일을 일방적으로 추진한 것이 아니라 토론을 통해 결정을 내렸다. 세종이 처음으로 자신보다 어린 신하를 뽑는 과거에서 성삼문이 장원을 해서 임금 앞에 나섰다. 세종이 자기 소개를 해보라고 하자, 성삼문은 “어떤 배경인지만 하문하시니 적잖게 실망했습니다.”라며 직언을 올린다. 이때 대전 내시가 “쉬이∼”하며 주의를 주자, 오히려 성삼문은 “대전 내시 주제에 감히 신하가 임금에게 바른 말을 고하는데 중간에 ‘쉬이∼’하고 나서다니”하며 호통을 쳤으며, 이에 세종은 “앞으로 과인에게 직언으로 대하고 많이 도와달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성삼문은 이 일을 통해 ‘이러한 군왕이라면 죽음을 각오하고 충성하겠노라.’고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고 전한다. 세종은 장영실을 등용하는 과정에서도 고리타분한 신분론에 대해 일일이 반박해 신하들을 설복시켰고, 훈민정음을 반포할 때도 신하들의 반대 상소를 일일이 다 읽어가면서 논박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어렸을 때부터 풍부한 독서량을 자랑했다. 왕의 신분에서 동서고금의 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기에 당시 세종의 학식을 따를만한 신하가 없었던 것이다. 참고로 태종은 즉위 기간 동안 총 학술 경연이 4회였던 데 반해, 세종은 총 1800회 정도였다고 한다. 사람에 대해 편견을 갖지 않았던 세종은 작은 재능이라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 등 그 사람의 장점을 취하여 포용하면서도, 엄격한 기준으로 혹독하게 신하를 훈련시킨 강유(强柔)를 겸비한 임금이었다.
3. 훌륭한 리더는 훌륭한 인재를 경영할 뿐 세종이 인재를 발탁하는 요령은, 최종적으로 발탁할 때까지 비밀에 부치고 인재들 간에 경쟁심과 긴장감을 유발시켜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이는 신하들의 자발적인 열의를 이끌어내는 훌륭한 방법이었다. 그러면서도 노신(老臣)들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서 장단기적인 목표를 세워 두고 노장청(老長靑)의 조화를 잘 이끌어내었다. 이러한 세종은 인재관리법이 한국인의 특색에 적합한 방식이라 평한다. 또한 세종은 일회적인 목표 제시로 끝내지 않고, 끊임없는 사후점검을 통해 아랫사람들을 독려하였다. 그는 상급 관청과 하급 관청에서 점검과 잔소리에 지쳐서라도 일을 이행하게 만드는 임금이었으며, 부하들의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 내부 보고자들의 은밀한 비공식 보고에도 귀를 기울였다. 새벽경연은 신하들에게 늘 바늘방석이었다. 아침마다 인상을 찌푸리며 대신들에게 공부를 안 한다는 잔소리를 해대고 닦달하였으며, 지각을 하는 신하에게는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호통을 쳤다. 세종은 부국강병을 위해 적재적소에 인재를 투입하고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고양시키기 위해 늘 고민했다. 또한 왕실의 종친이라도 사사로이 특혜를 주는 경우가 없이 늘 공변되게 인재를 관리하였다.
4. 역사가 요구하는 진정한 리더의 모습은 “천하사를 하는 자는 항상 생각이 멀고 깊어야 하고, 불시의 일에 대비하여야 하며, 경계함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조선의 임금인 세종은 백성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문제를 먼저 자각하고 모든 사안에 대해서 파수꾼처럼 늘 깨어있는 임금이었다. 논쟁에 있어서도 모르는 것이 없어야 했고 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임금은 또 아파서도 안되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독서와 늦은 밤 호흡을 가다듬고 깊은 명상에 잠기는 정신수양을 통해서 임금의 사명을 다하는 데 필요한 모든 지혜와 힘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안위를 살피지 않고 일생을 백성을 위해 기꺼이 헌신했던 훌륭한 임금이었고, 또한 국방에 임해서는 결코 물러섬이 없는 사령관이자 혹독한 훈련을 시키는 엄격한 지휘관이었고, 신하들에게는 꺼지지 않는 열정과 깊은 겸손의 덕으로 한없는 본보기가 된 국가의 최고 경영자였다. 무엇보다 세종은 시대정신을 읽을 줄 아는 임금이었다. 국초 국말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도 않은 시대를 다스려야하는 군주에게 어떠한 형극의 길이 펼쳐질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지만, 그는 시대의 요구를 결코 회피하지 않은 천명에 눈뜬 임금이었던 것이다.
Those who beg for life will bleed. And those who face the death will survive! 必生卽死 必死卽生 Chase the life will bleed, face the death will survive!
경영자와 비지니스맨들을 중심으로 이순신 리더십 배우기 열풍이 거세다. 이순신은 포털 사이트 다음, 네이버 역사인물 검색 순위 1위, 교보문고와 예스24등 인터넷 서점 키워드 검색1위를 기록하고 잇다. 뛰어난장군에서 최고의 전략 경영자로 다시 조망 받고 있는 이순신. 그의 리더십 배우기 열풍은 쉽게 잠들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압도적 카리스마와 치밀한 전략 러일전쟁에서 러시아 발틱 함대를 전멸시킨 일본의 군신 도고 헤이하치로는 자기를 이순신 장군에 비할 수 없다면서 " 이순신 장군에 비하면 나는 일개 하사관에 불과하다.만일 이순신 장군이 나의 함대를 가졌다면 세계의 바다를 제패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KBS 대하 사극 < 불멸의 이순신 >의 작가이며 < 불패의 리더 이순신,그는 어떻게 이겼을까 >의 저자인 윤영수는 이순신 승리의 비결을 "신뢰와 권위를 바탕으로 한 압도적 카리스마와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치밀한 전략에서 찾을 수 있다.
“이순신 장군에 비하면 나는 일개 하사관에 불과하다. 만일 이순신 장군이 나의 함대를 가졌다면 세계의 바다를 제패했을 것이다 " - 도고 헤이하치로 - ( 일본 해군 제독 )
경영 전략과 역사서의 재미가 하나로 된 에듀테이먼트 경영서 < 불패의 리더 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 >는 이순신 23전 23승의 불패의 신화를 ‘경영 전략 ' 과 ' 리더십'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어 최근 출간된 여러 경영서 중에서 눈에띈다. 특히 이순신이 리더로서 갖추었던 생각이 무었이었을까를 중심으로 역사 드라마처럼 임진왜란 당시의 전투 전개와 이순신의 마인드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은 새로운 개념의 경영 전략서이며 대하사극 마니아들에게 재미와 교양을 동시에 주는 에듀테이터먼트 경영서이기도 하다.
경제 전쟁의 시대, 비지니스맨들을 위한 리더십과 용병술 또한 이 책에서 저자는 ' 성공과 승리의 경험이 없는 조직은 매번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이겨본 자가 이긴다 '. '첫 성공의 여세를 이어 나가는 법 ', '전면전의 시기와 결단 ', ' 최1선 방어의 원칙 ' , ' 누구보다 스스로를 믿어라 ' ,등 이순신 장군에게 얻은 경영 마인드와 삶의 지혜를 소개하고 있어 험난한 경제 전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비지니스맨들에게 절실한 리더십의 비밀과 경영 비법을 전해준다.
23전 23승 전략 원칙 5가지 1. 이겨본 자만이 이긴다 이겨본 싸움을 해본적이 없는 조직은 절대 승리할 수 없다. 2. 여세를 몰아라 마지막 까지 밀어 붙이는 강력한 추진력만이 완전한 승리를 보장한다. 3. 적의 핵심부를 타격하라 가장 견고한 곳이 가장 약한 곳이다. 예기치 못한 대담성으로 적의 핵심부를 칠 때 승리 를 앞당길 수 있다. 4. 전면전을 피하지 말라 승부는 전면전에서 결정 난다.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전면전을 회피해서는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없다. 5. 제1선에서 지켜라 지키는 것도 이기는 것이다. 지켜야 한다면 제1선에서 지켜라. 한번 밀리면 끝까지 밀린다.
<이순신 장군에게 배우는 승리의 기술 > 1. 이겨본 자만이 이긴다. 성공과 승리의 경험은 무엇보다 값진 자산이다. 패배감에 물든 군대는, 이기는 싸움을 해본 적이 없는 군대는 절대 승리할 수 없다. 2. 여세를 몰아라.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작은 성취에 만족하는 순간 위기는 찾아온다. 마지막까지 밀어 붙이는 강력한 추진력, 그것만이 완전한 승리를 보장한다. 3. 그 누구보다 자신을 믿어라. 자신의 선택을 믿어라. 스스로 믿을 수 있을 때까지 준비하라.주먹은 결국 자신이 쥐는 것, 자신을 신뢰할 때 적을 공격할 수 있다. 4. 전면전을 피하지 마라. 결국 승부는 전면전에서 결정난다.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전면전, 전면전을 회피해서는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없다. 5. 제1선에서 지켜라. 지키는 것도 이기는 것이다. 지켜야 한다면 제1선에서 지켜라. 한번 밀리면 끝까지밀린다. 6. 적은 더 빨리 강해진다. 적은 항상 나를 주시한다. 적은 나를 이기기 위해 무슨 수단이든 동원할 것이다. 나보다 빨리 강해지는 적, 그 적을 이기려면 한걸음 먼저 나아가야 한다.
CEO, 이순신에게서 배워라 .
역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조명하고 미래를 투시하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순신을 통해 장수와 전략가가 이룩한 탁월한 전공만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쟁을 미리 예측하고 이를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정신과, 관습을 과감히 돌파는 개혁의 의지, 휘하 장수들과 함께 합의와 토론을 통해 의견을 창출하는 과정 등에서 CEO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이순신은 전략의 원칙을 중시했다. 군사전략과 경영전략의 원리는 같다. 현대의 경영인 혹은 지휘관들이 춘추전국시대에 쓰인《손자병법》을 리더십의 지침으로 삼았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이순신은 바다에서 적을 대함에 있어 철저한 분석과 정보를 근거로, 승리를 확정한 상황에서만 전투를 벌였다. 그는 남해안의 복잡한 지형과 조류(潮流)를 완전히 파악했다. 전라좌수영의 관할해역과 더불어 대부분의 해전이 벌어진 경상도 해안까지 현장답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피난민과 포로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고 정보원과 정탐선을 투입해 적진의 형세와 이동경로 등을 면밀히 관찰했다. 이를 반영하여 이순신은 해전에서 기습과 같은 공격으로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지만, 아군이 기습에 노출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경영에서도 경쟁기업을 이기기 위해서는 주어진 환경을 최대환 활용하고, 피아의 장·단점을 정확히 분석하여 상대의 약점을 공략해야 한다.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패하여 삼도수군의 기반이 완전히 무너진 후, 조정은 백의종군에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명했다. 그러나 이미 통제사 이순신에게 남아있는 전력은 아무것도 없었다. 칠천해전 당시 도주한 경상우수사 배설의 전선 12척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군비가 전무(全無)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순신은 육로로의 남행을 단행한다. 전날 조정에서의 모진 고문으로 인해 심신이 쇠약해진 이순신에게 육로를 이용한 남행은 고된 강행군이었다. 또한 그의 행로가 왜군이 진군하는 길과 일치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위치에 놓여있었다. 적의 보급병이나 정찰병과 언제든지 조우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의 허를 찌르는 과감한 행동을 취했다. 그는 적의 동향을 살피며 이동했다. 적들은 이순신이 바로 자신들의 곁에 붙어 진격로를 따르며 동향을 살필 줄은 미처 몰랐다. 위험을 무릅쓰고 적을 허점을 찌르는 대담함이 돋보이는 지휘관의 면모이다.
이순신은 이 남행길에서 민심을 수습했다. 삼도수군의 궤멸로 백성들은 불안을 느꼈고 피난행렬이 늘어났다. 그러나 이순신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남부지방 장정에 나서자 피난민이 줄고 백성들은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이순신이 초계를 출발할 당시에는 휘하 군관이 9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각 고을을 지나며 흩어졌던 군사들이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또한 이순신의 복권이 알려지자 의병장들도 늘어났으며 일부 승려들은 의병 사령장을 써달라고 했다.
또한 이순신은 대장정 도중 각 고을 현감들과 만나며 그들이 가졌던 불안감을 해소시켰다. 진주목사, 남해현감, 고산현감 등이 이순신과 뜻을 함께 하며 자신감과 행정력을 복원해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더불어 군사들이 사용할 무기를 수습했다.
모든 기반이 무너진 상태에서 이순신은 빈손으로 빠른 기간 안에 군사와 물자를 확보했다. 이를 바탕으로 군선 13척과 왜적선 133척의 대결이라는 미증유의 위기, 명량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이러한 변환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순신이 부하장수들과 더불어 백성들에게 보여준 신뢰에 있다. 하급관리 시절부터 실천했던 청렴성과 공사(公私)의 엄격한 구분이 일부 상관들에게는 미움을 사는 요인이 되기도 했으나, 부하들에게는 신뢰를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도덕성의 영향을 받아 부하들도 역시 높은 도덕성을 견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 부하들로 하여금 깊은 신뢰감과 충성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순신은 국가존망의 위기 속에 사기가 크게 떨어진 패잔병들을 수습해 기적과 같은 명량대첩을 성취했다. 이러한 위기극복의 리더십은 어려움에 처해 있는 기업의 경영자에게 좋은 귀감이 될 수 있다.
이순신은 죽음을 각오하고 솔선수범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전투에 대한 부담감과 두려움에 빠진 장병들의 분투를 이끌어 냈다. 실제로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의 지휘선이 단독으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부하들의 사기를 올리고 전투에 적극적인 동참을 유도했다.
기업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먼저 기업의 리더인 경영자가 희생정신을 발휘해 솔선수범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부도가 난 기업이라 해도 경영자가 모든 것을 걸고 분전하는 모습 앞에서 종업원들이 기업회생에 적극 나서는 경우가 많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하던 때, 해전에서 왜선을 격파하는데 탁월한 성능을 발휘한 거북선을 개발했다. 그는 일본 수군의 강점을 무력화하고 조선 수군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전함개발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따라 나대용과 같은 기술자들과 함께 개발에 주력한 결과 거북선이라는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 탄생할 수 있었다.
왜 수군의 전선은 기동성이 우수한 반면 상대적으로 내구력이 약했으므로 거북선과 충돌할 경우 적선은 쉽게 깨어져 나갔다. 거북선은 등판 위에 쇠못을 꽂아 백병전에 능한 왜병이 전선 위로 올라서는 것을 차단했다. 배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었지만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었으며 전·후·좌·우의 사방에서 화포를 쏠 수 있었다. 이러한 기능으로 거북선은 해전에서 적진을 교란하는 돌격선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 외에도 이순신은 우리가 갖고 있던 승자총통과 쌍혈총통이 총신이 짧고 총구가 얕아 일본의 조총보다 성능이 떨어지므로, 왜군의 조총을 보고 그 성능과 화력을 높여 정철조총이란 새로운 개인화기를 개발했다.
우리의 승자총통이나 쌍혈총통은 총신이 짧고 총구멍이 얕아서 왜적의 조총만 같지 못하며 그 소리도 웅장하지 못하므로 정철을 두들겨 만들었는데 총신도 잘되고 총알이 나가는 힘이 조총과 똑같습니다. 정철로 만든 조총 5자루를 올려 보내오니 조정에서 각 도의 여러 고을에 명하여 모두 제작토록 하여 서로 다투어 만들게 함이 좋겠습니다.
영국의 G. A. Ballard가 “이순신 제독이 넬슨보다 나은 점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계발명에 대한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라고 평가했는데, 이 기계발명은 곧 거북선과 총통을 일컫는 것이다.
이처럼 이순신은 전쟁 전과 전쟁이 진행되는 중에도 지속적인 전비태세를 유지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나가는 혁신적인 면모를 보였다.
근원적인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혁신을 해야 한다. 개발과 품질향상, 기술혁신, 경영방법의 도입과 경영혁신, 마케팅과 서비스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분에 과감한 혁신을 추진하여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다만 어떤 조직과 단체를 불구하고 성공적인 혁신을 위해서는 리더가 선두에 서서 이를 지휘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임진년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까지 7년간의 진중에서의 일을 기록하여 《난중일기》남겼다. 《난중일기》에는 전쟁에 관련된 많은 기록뿐만이 아니라 전란 전반에 걸친 사회·경제·정치·군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사가 남겨져 있다. 때문에 이순신 개인사의 연구와 더불어 조선사 연구에 따른 사료로서도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그는 조정에 올린 장계(狀啓)에서도 전쟁 상황을 상세하게 보고했는데, 이들은 현재 〈임진장초(壬辰狀草)〉로 남아있다. 때문에 우리는 4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임진왜란의 과정과 해전에서의 전투상황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알 수가 있다. 이순신의 투철한 기록정신에 의한 수혜(受惠)이다.
만약 이순신이 《난중일기》를 남기지 않았다면 후세에 사료이자 문화유산을 물려주지 못했을 뿐더러, 자신이 전쟁을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도 시행착오를 거듭했을 수도 있다. 각종 업무를 기록하는 일지와 개인의 일기는 물론 주부의 가계부까지도 그 유용성을 지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록을 소홀히 하여 손해를 보는 경우는 항상 존재한다. 과거의 기술에 대한 기록이 없어 기술재현을 하지 못하거나,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 시절 단기간에 경제발전을 이루었던 기술에 대한 기록이 없어 다른 후진국에 이를 판매하지 못하는 일들이 그러한 경우이다.
지식은 꾸준한 기록에 의해 축적되어야만 활용될 수 있으며, 이러한 지식들이 바로 경쟁력에 직결된다. 오랜 경험을 통해 자기는 알고 있지만 남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노하우 등 암묵적 지식(tacit konwledge)도 끊임없는 기록과 분석을 통해남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는 명시적 지식(explicit knowledge)으로 바꿔야 새로운 지식의 창조로 연결될 수 있다. (지용희,《경제전쟁시대 이순신을 만나다》) 지식경영에 앞선 기업들이 다양한 업무 형태의 방법들을 자세히 기록한 지침서로 만들어 실제업무와 직원교육에 활용하는 것도 기록 활용의 한 형태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이순신의 많은 전략과 전술의 업적은 현대의 경영원리와도 일치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과정들이 성공한 기업가나 기업 등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기존의 관습과 타성에 젖지 않고 항상 초유(初有)의 위기를 개척해 나간 지도자 이순신.
무한경쟁의 시대에 있어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고 26전 26승의 신화를 이룩한 이순신의 정신과 전략은 경영인으로서 배워야 할 CEO의 전범(典範)이며, 오늘날의 모든 이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리더십 감옥에서나 망명지에서 항상 대통령 준비를 해왔다는 그는 일흔네 살에야 꿈을 이뤘지만 정작 부도난 국가를 떠맡게 되었다.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IMF 외환위기라는 폭탄을 맞아 쉴 여유도 없이 당선 다음날부터 실질적 대통령 역할을 하며 나라경제를 챙겼다. 또 햇볕정책을 펼쳐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시켰고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다. 그리고 이제 미국에선 북한인권법이 통과되고 대선에서도 한반도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다. 정부에선 은근히 김 전 대통령에게 대북특사 역할을 기대하기도 하고, 북한에서도 그의 방북을 바란다고 한다. .
[간략] 1925년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출생하였다. 1950년 《목포일보》 사장이 되었고 1960년 민의원에 당선된 후 1971년까지 6·7·8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1963~1967년 민주당·민중당·신민당 대변인, 1968년 신민당 정무위원을 역임하였고, 1971년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朴正熙)와 겨루었으나 패배하였다. 그 후 미국·일본 등지에서 반체제운동을 주도하다가 1973년 8월 8일 도쿄[東京]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하여 국내로 납치(김대중납치사건)되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76~1978년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되었고 1980년 초 정치활동을 재개하였으나, 같은 해 7월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5년 귀국하여 김영삼(金泳三)과 더불어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을 역임하였고 1987년 8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에 취임하였다. 같은 해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전국구)에 당선되었고 1991년 9월 통합야당인 민주당을 창당하여 공동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다시 낙선하여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동시에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1993년 영국으로 건너가 1년 동안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연구생활을 하였고 1994년 귀국,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을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민주당의 최대 계파인 동교동계의 막후인물로서 여전히 제1야당의 실력자로 알려졌다. 1995년 6월에 실시된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적극 참여하여 민주당을 승리로 이끌고, 같은 해 7월 정계복귀를 선언함과 동시에 계파 국회의원 54명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총재가 됨으로써 제1야당의 총수로 정치생활을 재개하였다. 1997년 10월 자유민주연합과의 야권 후보단일화를 이끌어낸 뒤 같은 해 12월 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어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룩하였으며, 1998년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98년 12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중국 및 일본과의 정상회담을 갖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였다. 1999년 5월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으며, 6월에는 미국 경제 주간 《비즈니스위크》가 선정하는 '아시아개혁을 주도하는 지도자 50인'에 선정되었다. 2000년 1월 자유민주연합과의 내각제 개헌논의를 유보하고, 새천년민주당을 출범시켜 초대 총재에 취임하였다. 2000년 6월 13~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대로 평양을 방문하여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또한 50여 년 간 지속되어 온 한반도 냉전과정에서 상호 불신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에의 새로운 장을 여는 데 크게 기여한 공로로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평화적 정권교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하였으며 1998년 12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중국 및 일본과의 정상회담을 갖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업적은 50여 년 간 지속되어 온 한반도 냉전과정에서 상호 불신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에의 새로운 장을 여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IMF 구제금융 관리체제의 극복 및 청산] 김대중 정권은 김영삼 정권으로부터 경제위기를 물려받고 출발하였다. 경제위기는 1997년 11월 금융위기와 함께 시작하였다. 동시에 김영삼은 대통령으로서의 지도력을 상실하였으며 12월에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김대중이 금융위기의 해결에 있어서 국내외적으로 실질적인 대통령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미국과 IMF는 한국의 대외부도를 막기 위해 긴급자금을 지원토록 하면서 동시에 한국에 대하여 한국경제 전반에 걸쳐 이른바 구조조정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1998년에 -7%의 성장률을 보였던 경제도 1999년에는 11%의 성장률을 보이는 등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 그리하여 2001년 8월에는 IMF차입금을 예정보다 빨리 상환하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김대중 정권은 초기의 금융위기와 그 다음의 경제위기를 국민들의 협조로 잘 극복하였다. 김대중대통령과 [국민의 정부]는 97년 대선에서 약속한 대로 2년만에 IMF구제금융의 경제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였음 → IMF 전후 주요 경제지표 변화 설명 경제성장률 : 98년 -5.8%에서 99년 10%로 증가 경상수지 : 97년 82억 적자에서 98년 406억 달러, 99년 260억 달러 흑자로 전환 환율안정 : 98년 1월 달러당 1,573원에서 2000년 1월 1,123원으로 안정 가용외환보유액 : 97년 12월 39억 달러에서 2000년 1월 현재 768억 달러로 증가, 금년중 1,000억달러 예상 단기외채 비율 : 97년 9월말 54.2%에서 99년 11월말 28.0%로 감소 주가지수 : 97년 12월 376.3P에서 2000년 1월 943.8P로 수직상승 물가(전년대비) : 98년 7.5% 인상에서 99년 0.8%로 사상 최저 물가 실업자 수 : 98년 178만명에서 2000년 1월 현재 100만명으로 감소 중소기업 : 97년 2만3천개 도산,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3만개 창업 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 1월 25일자, 깡드쉬 [IMF총재] = 한국 국민들은 김대중 대통령을 지도자로 모신 것을 행복하게 생각해야 한다. 김대통령이 있었기에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경제구조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Asia Weekly 최신호 = 김대통령은 아시아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이다. South China Morning Post誌 = 한국의 경제위기 극복은 침몰하는 타이타닉호를 거꾸로 돌린 것과 같다. 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AWSJ) 1월 24일자 사설 = (대우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한) 김대중정부는 칭송받아 마땅하다. 장기적으로 정부의 역할을 줄여가려는 김대통령의 의지가 있는 한 한국경제는 더욱 건실해 질 것이다. 독일일간지 Handelsblatt(한델스브라트) 2월 26일자 = 한국은 마치 잿더미속에서 날아오르는 불사조처럼 경제위기로부터 회복되었다. 블라드미르 [前 러시아 부총리] = 김대중대통령을 러시아에 2년만 빌려주면 러시아 경제가 회복될 것이다. 윌버로스 [미국 로스차일드펀드 회장] = 인도네시아가 외환위기로부터 조기 탈출하기 위해서는 김대중대통령과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 도널드 그레그 [前 주한미국대사(1989~92년)] = 김대통령이 재임기간 동안 계속해서 개혁의 행보를 늦추지 않는다면, (한국은 물론) 동북아시아 전체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데이비드 앱샤이어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이사장] = 김대통령은 큰 좌절을 극복하고 한국을 자랑스럽고 안전하고 번영하는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하도록 국민을 이끌어 갈 이 시대에 맞는 지도자이다. 존 던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 = 한국 국민은 여전히 정치·경제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위기에 대한 대처의 성공여부는 김대통령의 끊임없는 용기, 의지, 능력에 달려 있다.
[햇볕정책] 김대중위 3단계 통일론: 1) 남북연합단계 2) 연방단계 3) 완전통일단계 김대중 정권은 남북관계에 있어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어 남북 간의 적대관계를 크게 완화시켰다. 그 결과 평양에서 김정일과 첫 번째 남북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이어서 서울에서는 첫 남북 국방장관회의가 있었다. 햇볕정책! 통일을 위한 유화적인 자세, 김대중 대통령이 지난1998년4월3일 영국을 방문했을 때ㅡ런던대학교 연설에서 처음 사용했던 `이솝의 우화'에서의 비유다. 대북 교류협력을 화해, 포용으로 증진하겠다는 우호적인 정책이다. 여기에는 경제적 지원이 크게 저류를 이루고 있다. 첫째는 경제협력의 활성화. 둘째 투자규모의 제한 철폐등이다. 일부 국민은 햇볕정핵에 불만이다.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시기상조론을 주장한다. 현재의 상황으로는 타주적(他主的) 거래의 제물이 되지 않기 위해 지속적인 남북 대화와 북을 돕는 자세가 긴요하다. 햇볕 정책의 본원적 의미가 뭔가? 추운 겨울 두터운 모피 코트를 벗겨주는 온유한 작업이라면, 북에 대한 지원은 복선 없이 증폭시켜 나가야 타당할 것이다. 이 점,역사관이 불건전한 정신 풍토에서 깨어나야 한다. 금강산 관광과 함께 개성공단 건설, 경의선 동해선 철도·도로 연결사업 등 이른바 3대 경협사업도 본궤도에 올랐다. 정부가 지원한 민간 베이스 사업인 금강산관광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육로 버스 관광을 거쳐 승용차 관광의 단계까지 올랐다. 개성공단 건설은 지난해 12월 15일 시범단지에서 첫 제품이 출하되어 당일 생산된 북한산 냄비가 서울의 한 백화점에서 판매돼 서울 시민의 밥상에 오르는 단계에 진입했다. 남북의 허리를 잇는 경의선·동해선도 2002년 9월 18일에 연결을 위한 착공식이 열려 지난해 12월 연결이 완료되어 임시 개통되는 데 이르렀다. 남북은 또 지난 5년간 총 124번, 연 평균 24번 이상의 각종 대화를 가졌다. 장관급 회담의 경우 2000년 7월 이후 지난해 5월까지 모두 14번이 개최되었다. 그 이후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달 21∼24일에 15차 남북 장관급회담이 서울에서 열림으로써 다시 남북 대화가 본궤도에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군사 분야에서도 긴장을 완화할 수 있는 신뢰구축의 단초가 마련됐다. 휴전선에서의 상호 비방방송은 이미 자취를 감췄으며 서해상의 우발적 충돌방지방안에도 합의했다. 남북한 군 당국이 6·25전쟁 정전협정 이후 처음으로 마주앉아 장성급회담(2회)을 개최해 비록 초보적 수준일망정 신뢰구축을 통한 평화공존의 단초를 마련한 덕분이다 "북한인권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북한은 정치-사회적 인권이 아니라 질병으로부터 생명을 유지하는 원초적 인권이 더 중요합니다. 탈북자들도 북한 독재에 대한 반대보다 식량을 구하러 나오는 겁니다. 그런 원초적 인권을 제일 도와주고 있는 게 한국입니다.“ “북핵 문제가 세계적으로 관심을 모으는데 내가 볼 때 북한은 핵은 수단이고 목적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입니다. 북한이 미국과 싸워 이길 수 있나요? 또 북한에 핵이 있다한들 미국에 비하면 장난감 수준이죠. 북한의 목적은 사는 겁니다. 살기 위해서 나 죽이면 너 죽이고 나 죽는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김정일에게 강조한 말: “당신들이 핵이라든가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한다는 말이 있는데 절대 안 된다. 미국 감정 조장하고 남한도 절대지지할 수 없습니다.” 부시 대통령에게는 :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했는데 한국 사람치고 공산주의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전 사회가 감옥 같은 나라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린 같은 민족이고 통일할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대화해야 한다. 대화라는 것은 맞는 사람끼리만 하는 게 아니다. 서로 안 맞는 사람, 심지어 증오하고 싫어하는 사람끼리도 해야 합니다. 레이건 전 대통령도 소련을 악마의 제국이라도 햇지만 소련과 대화했습니다.” 우리는 장구한 수난의 역사 속에서도 단일 민족으로서의 순수성을 지키고 찬란한 민족 문화를 꽃피워 왔다. 그러나 광복 이후, 남북 분단으로 인해 민족의 동질성은 크게 훼손되어가고 있다. 이제는 지난 반세기 동안 지속된 남북 단절에서 비롯된 민족적 장벽을 허물고 통일을 이룩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통일이란 단순히 분단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분단으로 인해 상실된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하나의 민족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이념과 사상, 생활양식, 제도 등의 남한과 북한과의 이질적이 요소를 사회, 문화적으로 통합해 나아가는 것이 선결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김대중의 대북한정책은 그의 대북한 적극정책에 대하여 비판적인 국민들에게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김대중으로 인하여 인해 남한에 있어서 비록 그 방법과 진행속도에 있어서는 이견이 적지 않지만 남북관계 개선은 기본방향에 있어서 움직일 수 없는 정책이 되었다.
[노벨 평화상]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그리고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한 업적을 기려 2000년 노벨 평화상을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한국이 수십년간 권위주의의 통치하에 있을 때, 여러 차례의 생명에 대한 위협과 장기간의 망명생활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점차적으로 한국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1997년 그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한국은 세계 민주주의 국가 대열에 확고히 자리잡았다. 대통령으로서 김대중씨는 확고한 민주 정부의 수립과 한국에서의 내부적 화합 증진을 추구해 왔다. 강력한 도덕적 힘을 바탕으로 김대통령은 인권을 제한하려는 시도들에 맞서 동아시아 인권수호자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버마(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동티모르의 인권탄압에 반대하는 그의 헌신적 노력 역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햇볕정책'을 통해 김대통령은 50년 이상 지속된 남북한간의 전쟁과 적대관계의 해소에 노력해 왔다. 그의 북한 방문은 남북한간의 긴장을 완화하는 과정에 큰 동력이 되었다. 이제 한반도에 냉전이 종식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김대통령은 또한 인근 국가들, 특히 일본과의 화해를 위해 노력해 왔다. 노벨위원회는 한반도의 화해 진전과 통일을 위한 북한 및 다른 국가 지도자들의 기여를 인정하고자 한다.
김대중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의 의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어도, 문학상과 평화상 수상자는 많은 사람들이 알게된다. 그리고 이 상을 받기 전에도 세계 3 대 인권 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14년 동안 꾸준히 수상후보에 올랐던, 영예는 참으로 청사에 빛날 쾌거일 것이다. 그 동안 한국은 수차에 걸친 국제행사를 차러온 문화국민으로 평화를 표방했다.그러나 행사 뒷끝마다 노벨상이 없는 나라라고 부유한 열강들은 한국을 동정했다.
평가 어록: “역사의 가장 값진 승리자, 김대중, 그는 복수하지 않았고 대신 고뇌하였다. 그리고 모든 것을 접었다. 그러나 봄밤이 아플 것이다. 봄이 가기 전에 이제는 늙어버린 가신들을 불러 손을 잡아주길 바란다. 소쩍새 울음을 타서 술 한잔 건네기를 바란다. 그들도 떠나갈 때가 되었음을 알 것이다. ” 경향신문 김택근 부국장 wtkim@kyunghyang
“자유롭고 즐겁게 인터넷에서 놀 수 있는 정보화사회의 기반을 마련해주신 분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서는 망할 찌라시들 덕에 과소평가 내지는 폄하되었으나 해외에서 더욱 존경받고 사랑받는 분....“ (어느 블로그)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과(功過)는 역사가 평가할 것입니다. 단지 저는 대한민국을 위해 바친 그의 열정과 진심만은 우리가 인정해야 된다고 생각하며 비판하기보다 좋은점은 인정하고 후세의 대통령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김정일의 ‘젊은’ 리더십 특히 김위원장의 모습은 철저하게 반공교육을 받고 자라난 우리 젊은 세대를 당황케 했다. 왜냐 하면 김위원장은 귀하게 자라고 예술에 심취해, 성격이 까다롭고 괴팍하며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지도자로 인식돼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TV화면을 통해 여유가 넘치는 그의 모습에서 상당히 호방하고 솔직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더욱이 일부에서는 1인 보스정치에 얽매여 소신과 패기없이 그저 말 바꾸기만 하는 우리 정치인들과 비교해 김위원장을 ‘통이 크고 도량이 넓은’ 인물로 영웅시하는 경향마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김위원장의 독특한 이미지 관리는 영화광에다 TV 등 언론매체에 밝은 그의 리더십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 있다. 즉 정상회담 일정을 하루 연기해 우려를 자아내게 한 후 의표를 찌른 공항영접 등으로 극적 반전을 연출했다는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보여준 김위원장의 자신감 넘치는 행동도 관심의 초점을 자신에게 맞추기 위한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다. 실제로 정상회담 과정에서 김위원장은 예상과는 달리 협상에 강한 면모를 보여줬다는 평가다. 우선 대화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는 적극성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협상에서 주도권 잡기는 김대통령의 장기지만 이번 정상회담에선 오히려 김위원장이 대화를 주도했다. 김대통령은 주로 듣는 자세로 일관했고 다소 위축된 듯한 모습을 보였다. 어떤 면에서는 젊고 패기 있는 김위원장의 자세가 김대통령의 논리와 치밀함을 압도하는 느낌을 주었다. 즉 김위원장은 ‘젊고 패기 있는 리더십이란 이런 것’임을 보여준 셈이다. 특히 2박3일간의 짧은 정상회담이었기에 리더십에 기초한 그의 순발력이 더욱 빛나 보였다. 결과적으로 김위원장은 이번 회담을 통해 단숨에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공산권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한편 이번 회담은 김대통령에게는 대단한 정치적 결단이었다. 집권 3년째인 임기 중반을 맞아 여소야대 정국 아래서 정국의 주도권 확보와 안정적 유지를 위해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일이 요구되던 김대통령으로서는 성공적인 정상회담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므로 일정과 의제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남북정상회담 을 시도한 김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은 매우 도전적인 것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방북 일정이 하루 연기됐을 때 김대통령은 무척이나 긴장했을 것이다. 또 정상회담이 가시적인 성과 없이 끝났다면 대단한 정치적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정상회담 내내 김대통령은 무척이나 긴장하고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차분·논리 VS 활달·감 김대통령은 경험과 연륜을 바탕으로 과장된 표현이나 제스처를 취하는 일 없이 차분하고 노련하게 대화를 유도했다. 김대통령은 원래 꼼꼼한 준비와 정연한 논리, 그리고 정확한 근거 제시를 통해 상대를 설득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그의 이러한 리더십은 100% 발휘됐다. 2박3일간의 짧은 정상회담을 통해 ‘차분·논리’에 기초한 김대통령의 리더십과 ‘활달·감’에 기초한 김위원장의 리더십은 대조와 조화를 이루며 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이제 두 사람의 대조적인 리더십을 좀더 자세히 분석해 보자. 리더십에 관한 연구 중 가장 선구적이고 일반인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분석방법은 개인의 심리적 측면과 특성을 강조하는 ‘바버(James Barber)의 분석틀’이다. 바버는 대통령의 개성(personality)은 크게 성격(character), 세계관(world view) , 행위방식(style)을 포함하며 이러한 개성은 상당히 정형화돼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특정 대통령의 개성은 그가 직면한 국민의 기대감을 포함한 정치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고 설명한다. 나아가 이러한 개성은 대통령의 행태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바버는 대통령의 개성이 그들의 ‘활동 에너지’와 ‘정치적 직무에 대한 태도’로 표출된다고 보았다. 활동 에너지는 개인이 얼마나 활동적이냐 비활동적이냐를 분석하는 것이고, 정치적 직무에 대한 태도는 그가 얼마나 정치적 생활을 즐기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를 기초로 바버는 먼저 역대 미국 대통령들을 성격 또는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활동 에너지와 직무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 ‘적극-긍정형(active-positive)’, ‘적극-부정형(active-negative)’, ‘소극-긍정형(passive-positive)’, ‘소극-부정형(passive-negative)’으로 분류하면서 대통령의 심리적 특성과 국정운영 결과의 관련성을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적극적 대통령은 넘치는 활동 에너지를 갖고 있으며, 소극적 대통령은 쿨리지 대통령(꼭 11시간 잠을 자고, 낮잠을 즐김)처럼 근본적으로 활동 에너지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긍정적 대통령은 대통령직 수행에 큰 기쁨을 가지나, 부정적 대통령은 대통령직 수행에 최소한의 만족을 느낀다고 한다. 이러한 분석에서 중요한 점은 네 가지 유형 중 어느 유형이 다른 유형보다 좋다거나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라 유형마다 장·단점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각 유형의 장점이 발휘될 때는 대통령의 개성이 국정운영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 단점이 드러날 때는 개성이 국정운영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바버는 이러한 분석틀을 이용해 지도자의 개성을 분석하면 향후 그의 국정운영 방향을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바버의 분석틀을 이용해 김위원장과 김대통령의 개인적 특성을 중심으로 리더십을 분석해 보자. 먼저 2박3일간의 김위원장 행동을 보면 그는 ‘적극-긍정형’ 리더십에 해당한다. 이러한 리더십 유형의 장점은 대체적으로 성취욕이 강하고 결과(results) 중심적 국정운영을 추구한다는 것이고, 단점은 끝맺음 없이 너무나 많은 일을 벌이고 단기적 시각으로 단기적 성과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 유형에 속한 인물 중 성공적인 대통령으로는 미국의 제퍼슨, F. 루스벨트, 트루먼, 케네디 대통령을 꼽는다. 포드, 부시 대통령도 이 유형에 속한다. 반면 카터 대통령은 이 유형 중 실패한 대통령으로 분류된다. 실제로 김위원장은 김대통령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고 패기가 있다. 적극적이면서도 긍정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기 때문에 성취욕이 강하고 결과중심적인 국정운영을 추구한다. 그러다 보니 많은 일을 벌이게 되고 단기적 성과를 추구한다. 또한 자기 생각이 강한 탓에 그의 참모들은 종종 그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워 정책집행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김위원장의 경우 공개적으로 활달하고 솔직한 모습을 보이는 태도는 장점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최고지도자로서 다소 경솔하다는 인상도 준다.
...................................................................................... 삼성 초대 CEO 이병철 회장
* 이화여대 이어령 교수의 변 제일제당(1953), 제일모직 (1954) , 동방생명(1957), 안국화재해상보험(1958), 세계백화점(1962), 삼성문화재단(1965), 전주제지(1965), 중앙개발(1966), 한국종합병원(1966) 중앙일보-동양방송(1966), 삼성전자(1969), 삼성전관(1970), 제일합섬(1972), 삼성전기(1973), 삼성코닝(1973), 호텔신라(1973), 삼성석유화학(1974), 삼성중공업(1974), 용인자연농원(1975), 삼성항공(1977), 삼성시계(1977), 삼성건설(1977), 한국엔지니어링(1978), 삼성반도체통신(1980) 그가 사업을 하기 위해 투자한 초기 자본은 쌀300석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50년 후 그가 이룩한 삼성그룹은 166개의 계열기업에 103 조 가량의 매출액(2001년도 8월 기준)을 기록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병철은 원래 부자였으니까 라고 하며 그의 놀라운 업적을 애써 무시하려 한다. 일본의 3 대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내셔널 그룹의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 혼다자동차의 창업주 혼다 소이치로, 소니의 창업주 이부카 마사루가 그들이다. 이 셋을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 사람이 바로 이병철이라는 사람이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기업가라고 말하고 싶다.
-정주영 호암 이병철 회장이 걸출한 사업가였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이들이 알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치밀한 판단력과 혜안으로 삼성이라는 대그룹을 일구었으며, 오늘날 삼성이 한국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놓았다.
- (워싱턴 포스트) 캐서린 그레이엄 명예회장 세상 사람들은 흔히 경영을 간단히 말하자면 돈벌이로 생각한다. 호암 선생도 물론 그런 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호암은 물질에 대한 욕망을 이미 뛰어넘은 대단한 사업가였다. 나는 사업가에도 일류와 이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류 사업가가 되자면 사적인 탐욕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호암은 일류 사업가였다.
- 제너럴 일렉트릭 잭 웰치 회장 호암 선생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은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안색도 좋아보이지 않았다. 호암 선생에게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는데, 호암 선생 역시 자신의 시간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연한 모습이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평생 해왔던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참 아름다웠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대가의 자세가 아닌가 잠시 숙연해졌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진짜 경영자라면 호암선생처럼 최후의 순간까지, 경영 일선에서 자신의 마지막 생명까지 불태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했었다. 한국 경제의 짧은 역사 속에 가장 위대한 인물을 선정한다면 이병철이라고 주저없이 말하겠다. 내가 한국 경제사의 인물로 선정한 기준은 다음과 같다. 경제인, 사업가의 첫 번째 목적은 이윤 창출이다. 두 번째 목적은 일자리 창출, 즉, 경제만 잘하면 되는 것이다. 상공업 천시풍토와 한일합방, 6.25를 겪으면서 한국 무역을 세계 12위까지 끌어올린 장본인인 이병철이라면 한국 경제사에서 가장 뛰어난 경제인으로 선택해도 부족함이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1 . 투기성 사업의 무용성 그는 26세에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쌀 300석 분의 토지로 도정업, 운송회사 , 토지 매입을 차례로 해나갔다. 여기서 도정업이라는 것은 벼를 사다가 껍질을 벗겨 쌀을 만드는 일을 말한다. 이 같은 사업을 하면서 이병철은 경남 일대에서 최대의 지주가 된다. 그러나 1937년 3월 터진 중일 전쟁으로 인해 일본 정부가 은행의 대출을 중단함에 따라 전답의 시세가 폭락, 은행 대출금에만 의존하던 이병철에게는 현금 2 만원과 전답 10만평만을 제외하고 모든게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 때 말한 것이 ` 3利가 있으면 3害가 있다` 이다. `교만한 자 치고 망하지 않은 자 없다.` 그 당시 상황을 통해 얻은 경험을 통해 (1). 사업은 국내외 정세를 정확히 통찰해야 한다. (2). 무모한 과욕을 버리고 자기 능력과 한계를 냉철히 판단해야 한다. (3). 요행을 바라는 투기는 절대로 피해야 한다. (4). 직관력의 연마를 중시하는 한편 제 2 , 제 3 의 대비책을 강구해야한다. (5). 대세가 기울어 이미 실패라는 판단이 서면 깨끗이 미련을 버리고 차선의 길을 택해야 한다. 짧은 보고서에 위에 5가지 경험을 적어놓은 이유는 위와 같은 사항이 현재에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병철은 중일전쟁으로 국제 정세가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을 깨달았다면 현재는 그 당시보다 경제적인 급변은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IMF로 인해 국내 경제는 어떤 보호막도 없이 해외에 그대로 방치되기 때문이다. 요행을 바라는 투기는 주식투자, 떴다방, 복권, 일확천금을 노리라고 언론에서 조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주식투자를 강조하는 언론 때문에 많은 이들이 주식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개미투자자들 중에서 돈을 벌고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기관 과 외국인 투자자, 소수의 몇몇 대규모 자본만이 돈을 벌고 있는 것인 현실이다. 복권 같은 경우에는 언론의 행태가 더욱 심한 편이다. 20억을 벌었다고 광고하고, 언론에서 보도하고, 그런 의도가 어디에 있을까? 그것 역시 사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병철은 도정업, 운송회사, 부동산 투기를 하면서 이처럼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사업은 무익하다고 하였다. 나라를 위해서도, 국민을 위해서도,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소수의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2. 최고라는 것은 무엇일까? 최고라는 것은 삼성의 모토이기도 하다. 최고만이 살아남습니다. 최고가 되는 길! 삼성이 나아가고자 하는 길입니다. 모든 기업이 최고가 되기를 원하지만, 삼성은 원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기업이기도 하다. 그런 최고라는 개념을 심어준 인물이 바로 이병철이다. 이병철에게 최고라는 의미는 최고의 품질, 최고의 인재를 의미한다. 일종의 장인정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것. 이병철이 꿈꾸는 것이다. 평소에 이병철이 자주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노력하는 유전자는 따로 있다. 누구나 성공하기를 원하기는 하지만, 누구나 다 노력하게 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해볼 때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노력은 유전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1) 품질로서의 최고 이병철에게 최고라는 개념이 잡힌 것은 1950년 2월 도쿄를 방문했을 때 라고 한다. 뒷 길에 허름한 이발소에 별생각없이 들어가서 주인에게 말했다. `이발일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제가 3대 째니까, 가업이 된지 이럭저럭 60년쯤 되나 봅니다. 자식 놈도 이어주었으면 합니다만...` 이병철은 사소한 대화에서 일본인들의 투철한 직업의식을 느꼈다. 삼성의 기업정신은 일본의 장인정신과 비슷하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장인정신을 일컬어 잇쇼켄메이 라고 한다. 즉, 한 가지 일에 목숨을 걸고 그 분야에서의 최고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 제일모직이라고 할 수 있다. 1954년에 설립된 제일모직이 설립된 배경은 이렇다. 당시에 사회적 분위기는 돈없는 사람들에게 양복지는 뜬구름 잡는 소리라며 욕먹기 십상이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마카오 신사가 부유함을 상징했던 그런 시절이었다. 물론,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프라다를 입고있어야 부유함을 보여진다고 생각하는 것. 물론, 명품을 선호하는 이유는 디자인, 원단, 브랜드가 주는 이미지이다. 그러나, 그 차이점이 단지 브랜드에서 오는 것이라면 브랜드의 고급성이 주는 인식의 차이만 바꾸어 놓는다면, 우리 제품도 명품이라 불리울 수 있지 않을까. 이병철도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제일모직의 브랜드를 광고하기 시작한다. 해외 유명 브랜드보다 낫다는 광고 문구를 쓰기도 하고, 직접 입기도 하고, 실제로 최고의 품질을 만들기 위해 막대한 자본과 노력을 투자하여 해외 유수의 평가 단체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이병철은 제일 제당과 제일 모직의 성공으로 전국 납세액의 4%를 내는 국내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이것은 이병철 개인만의 성공이 아니라, 마침내 한국 땅에서 외제 양복지를 몰아내고 국민 생활에 새바람을 불어 넣었으며, 연간 25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외화를 절약하게 되었다. 요새 우리 사회를 일컬어 세계화 시대라고 말을 한다. 외국계 기업들이 우리 기업들을 차지하고, 국민들은 국내 제품보다 외국 제품을 선호하는 등, 물론 이러한 과정들이 세계화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일방적인 세계화라면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세계화란 세계 각국의 특성들이 한데 뭉쳐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의 세계화는 서구 선진 몇몇 나라들의 문화만이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것 같다. 이병철의 제일모직이 한국에서도 외국 제품 못지않은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면, 우리들이 해야할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못만드는 최고 품질의 제품을 만드는 것이 우리들의 역할이 아닐까? 2) 인재도 최고 이병철이 삼성물산공사를 주식회사체제로 출범하면서, 회사운영 기본방침을 밝혔다. 첫째, 일정한 자본금의 규모를 정하지 않고 사원이면 누구나 응분의 투자를 하고, 이익의 배당을 투자액에 비례해 공평하게 받을 수 있는 제도를 채택한다. 둘째, 사장이거나 평사원이거나 간에 공존공영의 정신으로 일에 몰두하는 것은 물론, 능력에 따른 대우와 신상필벌의 기풍을 마련한다. 셋째, 사원의 생활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운영에 지장이 없는 범위 안에서 가능한 한 우대해 가족적 분위기가 항상 유지되도록 한다. 당시 이병철은 임원들에게 25%의 출자를 하게 했다. 그 이유는 출자자들에게 회사 이익이 곧 자기 이익이므로 서로 분발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병철의 초기 회사에 대한 생각은 공존공영 이 단어일 것이다. 나만의 회사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회사이니, 우리 모두를 위해 열심히 하자. 이것은 앞에서 말한 일본 경영의 신인 네셔널 그룹의 마쓰시타에게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일본 경제가 불황이어서 모든 회사들이 직원들을 해고할 무렵에 마쓰시타도 임원들로부터 직원들을 해고해야만 한다는 강요를 많이 받았다. 더 이상 버텼다간 회사가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마쓰시타는 우리 모두의 회사이기 때문에 과실이 아닌 이상 회사를 위해 개인을 버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집이 어렵다고 가장이 어린 아이들을 길거리에 내모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모든 직원들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하면서 직원들의 반나절 직장생활을 하자고 주장했다.지금의 노동 시간 단축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현재 우리 노동계가 주장하는 것이 5일 근무제이다. 노동 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인원의 절반이 반나절만 일하고 나머지 반나절은 직접 물건을 들고 파는 것이다. 그런 아주 힘든 시기를 서로 도와가며 이겨낸 것이다. 물론 이 같은 마쓰시타의 희생정신은 나중에 미국이 일본을 점령한 후 대기업 해체를 명령했을 때, 마쓰시타 전기(내셔널 그룹)의 전 직원들이 매일매일 미국방에 항의하는 것으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는 정리 해고와 관련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업의 입장에서는 정리 해고는 기업의 재정상태와 관련해서 극복을 위한 가장 쉬운 지름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리 해고의 대상은 40~50대 젋은 날의 열정을 다바쳐 지금은 신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 과연 이것이 공존공영의 길일까? 기업의 역할은 이윤 획득과 일자리 창출이다. 그 두가지는 어떤 것이 먼저 선행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윤 획득에 약간 지장을 줄지라도 일자리가 창출된다면 기업은 감수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가 힘들다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방법을 강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 기업들은 정부와 해외 기업의 강요에 고용 시장의 유연성이라는 허울좋은 닉네임을 뒤집어쓴 채 정리해고를 감행하고 있다. `3利가 있으면 3害가 있다.`는 이병철 회장의 말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이병철의 인재 양성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얘기하고자 한다. 이병철은 인재를 뽑기 위해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공채 사원을 뽑은 기업인라고 한다. 이전까지는 연고 위주로 사람을 뽑다가 `삼성의 인재는 내가 뽑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1957 년에 시행한 것이다. 당시에는 고위 관직으로부터 인사청탁이 많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채 출신과 인사청탁으로 들어온 사원과는 승진과 봉급을 다르게 했다. 승진과 봉급에서 공채출신이 연고 입사자보다 앞서도록 한 것이다. 이병철의 자존심이 발휘된 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다만 폐쇄적인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래서일까 삼성은 최고 일류 기업이고, 선호도 1위인 기업인 것은 사실이지만, 냉정함이 많이 엿보이는 기업인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 이유를 위와 같은 데서 찾는다면 웃기겠지만. 삼성 그룹의 특징 중 하나는 전문경영인 영입을 통한 경영이다. 이병철이 삼성상회를 만들어서 별표국수를 발매했을 때부터 이순근이라는 전문경영인을 쓴 것이다. 전문 경영인에게 믿고 맡기는 것이다. `못미더운 사람은 아예 쓰지 않고, 쓰거든 믿고 맡긴다.` 는 경영방침은 이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오늘날 삼성은 과장부터 전결권을 갖고 있는 회사라고 한다. 위와 같은 경영방침은 삼성의 모든 사업 분야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병철은 여기다 조건을 달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믿고 맡기되 따질 것은 꼼꼼하게 따진다는 것이다. 과거 삼성이 전주 제지 공장을 지을 때, 이병철은 부지의 입지 조건보다 지역사회에 대한 배려를 먼저 생각했다. 전주에 제지공장을 짓겠다고 하자, 지역 주민들이 땅을 내놓아 부지를 사들였다. 그러나 부지상의 부적합문제로 부하 직원들이 다른 지역을 물색하자, 이병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전주의 입지 조건이 다른 데 비해 나쁘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게 아니오? 내가 항상 말했듯이 기업이란 눈앞의 영리만을 추구해서는 안 되는거요. 기업을 일으킬 때는 국가나 사회에 만들어 바친다는 생각으로 시작해야 하오. 특히 이번 제지공장은 지역사회 발전이라는 전주 시민들의 간절한 소망이 깃들여 있는 사업이 아니오?` 이병철은 되도록 삼성의 기업방향을 자신의 가치관과 병행하여 나아가고자 했던 것 같다. 모든 분야에서 그렇게 하진 못했겠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부분이라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자세가 엿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3. 미래의 계획 1) 나와 나라가 사는 길 이병철은 6.25 후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가 재기한 일화는 다음에 소개하기로 하고, 이병철은 평소부터 가지고 있었던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제조업을 하기로 결심한다. 어떤 제조업을 할 것인가에 대해 치밀한 사전 조사를 한 끝에 당시 우리나라에서 100% 수입품에 의존했던 설탕, 페니실린, 종이 중에서 현실적으로 이병철이 할 수 있는 설탕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제당에 참여를 하고자 하였으나, 막대한 자금과 기술력이 부족했다. 힘든 난관을 이겨내고 1953년 11월 5일 제일제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설탕이 생산된 지 불과 6개월 만에 50 톤으로 늘어났고, 제일제당 설립 4년 째인 1956년에는 150톤, 1957년에은 200톤으로 시설이 늘어났다. 시설만 늘어날 뿐만 아니라 수요도 폭발적이어서 없어서 못팔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지경이 이르자, 주위 사람들은 설탕값을 조금만 올리면 많은 자본을 얻게 될 것이라고 조언했으나, 이병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근당 이익이 10환이 아니라 60환이 되면 이익도 그 여섯 배가 되어 현재 80억 환의 여섯 배가 되니 모두 480억 환인데, 대체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 어쩌자는 거요? 장사에도 도의가 있는 법이오. 나는 독과점업자가 되어 사리사욕만을 채울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 설탕값 올리자는 의견은 없었던 걸로 합시다.` 이 같은 생각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업에서 공존공영은 늘 강조해온 것인데, 과잉경쟁을 하지말고 이익을 서로 보전하면서 연구소에서 생산비용을 낮추고, 질을 높여 이익을 소비자에게 돌려주도록 해야 한다.` 이 말은 이병철이 아랫사람들에게 늘 하달하는 업무지시 내용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홍화상의 `카리스마 VS 카리스마`에서 평한 내용이 있다. `시장은 흐르는 물과 같다. 물을 막거나 흐려놓으면 고기는 그 곳을 떠난다. 현명한 어부는 물의 흐름을 막지 않고 물을 흐려놓지도 않으면서 고기를 잡는 법이다. 시장질서를 지켜가면서 장사를 하는 것이 서로가 잘사는 지혜다.` 1967년 한국 비료 사건 이후 해외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사업을 찾고자 고심하던 터에 평소의 자세대로 치밀한 사업계획을 통해 전자산업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이병철은 전자산업의 사업성을 검토해 본 결과 기술, 노동력, 부가가치, 내수와 수출전망 등 사업 전반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경제실정에 곡 알맞은 사업이었다. 이병철에게는 나름대로의 경영철학이 있었다. 반드시 자기 능력의 한계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업을 시작한다는 걸 철칙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한 철학 하에 이병철은 수원 45만평의 대지를 살 대 삼성이 부동산 사업에 뛰어든다는 비난여론을 뒤에 엎고, 1969년 1울 13일 삼성전자 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미래의 반도체 시장 전망까지 점쳤다고 한다. 그러한 미래 예측은 10여년 후인 1984년 삼성반도체 공장이 준공되면서 현실로 나타나기도 했다. 훌륭한 사업가는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 눈빛은 미래를 향한다고 했다. 세상에는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들도 많고, 미래를 향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이 두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이는 드문 것 같다. ` 무슨 일을 시작해서 끝을 맺으려면 처음부터 철저하게 계획을 새워 밀고 나가는 것과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밀어붙여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2 ) 사업의 성공을 위한 계획 이병철은 미래를 계획할 때 두 가지를 검토한다고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첫째는 국가와 민족을 위함이요, 둘째는 그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치밀한 사전조사를 바탕으로 한 사업계획 이병철의 사업철학은 1976년 5월 (서울 경제 신문)의 `재계회고`에서 밝힌 논문으로부터 알 수 있겠다. `사업의 착수에서 우선 국민과 인류에 필요한 것인지를 살피고, 그 다음 수익성, 자금, 인력, 기술 등을 따져 자기 능력에 맞는 사업을 전개하도록 해야한다.`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전준비와 계획이다. 당초에 계획을 잘못 세워 중도에 자금난으로 허덕인다거나 판로가 막혀 당황하게 된다면 경영자로서의 자격이 부족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내가 부동산에서 실패를 본 것은 이와 같이 "경영"이 처음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자기 능력의 한계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이를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는 또 하나의 기업 철학도 이 때 배운 것이다.` 1998년도 김대중 정권이 들어오면서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면, IT 강국을 강조하면서 벤처붐이 불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한 폐해는 각종 벤처 비리 사건, 또는 벤처 기업체의 부실이다. 이병철이 살아서 이런 상황을 보았다면 이런 말을 했을지 모르겠다. `사전 준비 계획 없이 사업하는 것은 기업이 망하는 지름길이다. 나라에서 장려한다고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사업을 확장한 메디슨이 그 경우이다. 메디슨은 의료 기계 기술이라는 좋은 사업아이템을 가지고도 벤처자금 등 주력 기술과는 상관없는 사업에 치밀한 계획 없이 확장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장려, 혜택으로 인한 사업은 정부의 관리가 소홀해지거나, 정권이 혼란해지는 경제 외적인 상황이 일어난다면 길 잃어버린 미아처럼 헤매는 상황이 발생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경제 상황이 그렇다.` 이병철은 1987년에 이 세상의 생을 마감했다. 15년이 지난 후 우리의 경제 철학은 무엇인가? 이병철이 무의미한다고 강조했던 투기성 사업에만 너무 집착을 하는 것은 아닌가? 설령, 그 사업이 투기성 사업이 아니라 할지라도 투기성 마음은 없는 것인가? 이병철 경영철학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아닌지 생각된다.
4. 외부적 상황이 기업가에게 미치는 영향 외부적 상황의 중요성이 기업가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아주 크다. 물론 기업가에게만 끼치는 것은 아니다. 북한의 주민들이 굶어죽는 상황이 발생한 것도 북한 체제 때문일 것이고, 아프리카 일대의 기아 문제 역시 선진국들의 임시방편적인 대책과 지도층의 부도덕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외부적 상황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전쟁, 재난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고, 중동사태, 흉년으로 인한 물가 인플레, 정책의 변화로 인한 사회 변화 등 예기치 않게 발생되는 상황을 뜻한다. 기업가들은 이런 외부적 상황을 미리 알고있던 것처럼 대처할 수는 물론 불가능하다. 기업가들은 예기치 않은 상황이 왔을 때에 피해를 최소화하고, 최악의 상황에서 길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이병철은 그러한 면에서 최대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 누구보다 실망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희망의 씨앗을 발견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1) 독재 권력과의 관계 돈과 정치는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고 한다. 기업가들에게 권력이 필요한 것인지, 권력가들에게 자본이 필요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독립적인 기업인은 보았어도 독립적인 권력가는 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해답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다. 1995년도쯤 중국에서 이건희 회장이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 `우리나라 경제는 1류고 정치는 3류다.` 이건희 회장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한 마디로 정치가 경제의 발목를 붙잡는다는 말이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국내 정세가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당시 군사정부는 불안정한 위치로 인해 민심을 잡고자 여러 가지 민심정책을 행하였는데, 그 중 한가지가 부정 축재 혐의로 기업 매출액 1위부터 11위까지 열한 명을 부정축재자로 지목했고, 그 첫 번째가 이병철이었다. 당시 이병철은 일본에 체류 중이었다고 한다. 이병철은 6월 24일 제국호텔에서 AP, UPI 등 외신기자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빈곤 제거를 위해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할 용의가 있다. 귀국하는 대로 이에 필요한 절차를 밟고,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겠다.`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 당시 군사 정부도 민심에 끌려서 부정 축재 혐의로 이병철을 지목한 것이지, 근거가 있어서 지목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튼 귀국 후 이병철은 박정희를 만나 자신의 의견을 얘기한다. 기업인의 본분은 사업을 일으켜 일자리를 마련하고 세금을 내고 확대투자를 해서 키워나가는 것이다. 기업인을 활용해야한다. 이 같은 이병철의 입장은 박정희의 의견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병철은 자신의 위기를 넘겼다. 이렇게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이병철의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절에서 밝히겠지만, 이병철은 일제시대, 2차 세계대전, 6.25 , 4.19의거 속에서도 살아남은 경제인이기 때문에 일시적인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 정부에 대한 대처 방법을 알았던 것이다. 그런 이병철도 크게 후회한 사업이 있다. 한국 비료 사업이다. 일반인들에게는 한국 비료하면 삼성이 사카린을 취급했던 범죄 행위로 기억을 한다. 그 사건에 대한 자세한 조사 자료가 없기 때문에 이병철님의 장남 이맹희님의 의견을 참고로 하고 있다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이병철은 비료 사업을 2 차례에 걸쳐 시도하게 되는데, 그 첫 시도는 1960년대쯤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허락 하에 비료 사업을 무난하게 추진 중이던 이병철은 1960년 4.19의거 때문에 좌절을 맛보게 된다. 물론 이때도 부정축재자로 몰려 막대한 벌금을 물기도 한다. 그렇게 첫 시도가 무산된 뒤, 비료사업을 접었다가 군사정부의 요구로 인해 다시 비료 사업을 재개하기 시작한다. 여러 가지 힘든 난관을 극복한 뒤, 겨우 비료 공장이 정상적으로 가동될 무렵 이병철은 `한비 밀수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한비 밀수 사건`이란 사카린-식료품을 만드는 공업재료로써 단 맛을 내는 물질. 당시에는 필수품이었다고 한다.- 이 시장에 누출되어 그것을 조사하던 와중에 삼성이 밀수하게 됐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이맹희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삼성이 미쓰이측의 기계를 사준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100만달러를 주기로 했는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여 박대통령에게 의견을 여쭤본 결과 100만 달러어치 물건으로 들여와 1/3은 정치자금, 1/3건설자금, 1/3은 한국비료의 운영자금으로 쓰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하여튼 `한비 사건`으로 인해 이병철은 10년 간 힘들게 가꾸었던 한국 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게 된다. 물론 한국 비료는 1994년 한국 비료 민영화 방침에 따라 공개입찰을 실시하였는데, 삼성이 최저입찰가보다 1000억이 더 많은 2300억을 제시해 회사를 찾아갔다고 한다. 참으로 삼성에게는 한이 서려있는 기업이었던 것 같다. 한국은 다른 나라보다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이 많았기 때문에 기업인들로 하여금 경영에만 신경을 쏟지 못하게 한 것 같다. 경영만 잘한다고 성장을 못하는 기업이 한국에는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한 곳이 한국이다. 그러한 상황은 시간이 50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내 생각에 그러한 풍토를 없애기 위해서는 정치가 경제계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막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올 연말에는 대선이 있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미래의 대통령에게 한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 무엇을 하겠다고 나서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정치인들의 역할은 일반 국정에 관한 것에만 집중을 하고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달라는 것이다. `무엇을 장려하겠다`는 말만 들어도 겁이 난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옛 속담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2) 예측 불허인 세계 상황과의 관계 이병철이 국제 정세가 일반 경제에도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대공황이었다. 대공황이 일어날 당시에는 이병철은 일본에 있었는데, 일본의 경제 위기를 보면서 느낀 것이 많았던 것 같다. 그 후에 1937년 3월 터진 중일전쟁은 경남에서 대지주로서의 꿈을 부풀던 이병철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었다. 중일전쟁으로 인해 일제는 쌀가게를 문닫게 한다. 정주영이 파산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국민들 대부분이 겪은 것일 것이다. 또 국제 상황이 바뀐 것은 우리 국민들에게 비참한 과거인 1950년 6.25이다. 삼성물산공사가 보관하던 물품들이 모두 타버려 없어진 것이다. 이병철이 41살에 일어난 일이다. 자칫 자포자기할 수 있었던 이병철에게 행운이 돌아왔다. 이병철은 아마 이때도 그 생각을 했을 것이다. `3害가 있으면 3利가 있다.` 그 행운이란 다름 아닌 예전에 과수원과, 양조장을 했었는데, 그만 벌이고 있는 사업들이 너무 커서 대구에 있는 조그만 사업체는 이창업이라는 사람에게 맡기고 잊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쟁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대구에 왔는데, 이창업이 이익금이라고 3억원을 내놓은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운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단순히 행운이라고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이병철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 한국 경제는 현재 IMF 이후 외국 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대부분의 유망한 기업들은 외국에 팔려나간지 오래고, 일반 국민들은 그것에 대한 인식도 가지지 못한 채 자신의 앞 날 만을 염려하며 주식 투자에 정열을 쏟는다. 그런 와중에도 삼성 전자가 성장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 뿌리가 얼마나 튼튼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한때 이건희 회장이 개인의 취미생활인 자동차를 사업으로 확장시키려는 무모한 시도를 해서 위태로워진 적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곤 삼성은 언제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서있었다. - 이화여대 이어령 교수
이병철의 경영 철학 1980년 7월 이병철 회장은 전경련에서 행한 연설에서 자신의 성격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한가한 것을 가장 싫어하고 못 견디는 성미입니다. TV를 보면서도 신문이나 잡지를 읽고 이야기합니다.” 이병철은 대단한 독서광이었고 평생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다. 이병철의 성격은 까다로우면서도 귀족적이었다. 167cm의 키에 60kg의 몸무게, 야무진 입매와 단정함, 예리하면서도 온화한 시선. 이병철은 매사에 제일주의를 고집하여 남에게 지는 것을 생리적으로 싫어했다. 이병철의 인상은 차갑고 매서우며 냉혹했고 예리하며 까다로웠다는 것이 일반인들의 느낌이다. 그러나 그를 가까이에서 본 사람들은 반면에 성격이 둥글며 사교성이 뛰어나고 의외로 온화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이병철 회장은 유교적 선비문화의 소양 위에 서 있던 기업인이었다. 어려서 배운 논어를 기반으로 행동이나 사고방식 그리고 몸가짐에 선비문화와 엄격함이 배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정경학부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술에 남달리 관심이 많았고 사실 경영인으로서 이병철의 일생은 신기술을 도입해 새로운 기업을 일으킨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당, 모직을 거쳐 비료, 전기전자, 반도체에 이르기까지 그는 경영과 기술 두 문제를 놓고 평생을 싸워왔다. 이병철은 한국이 세계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더 좋은 품질을, 더 싸게, 그리고 남보다 앞서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생애 마지막 작품인 삼성종합기술원은 한국 전자산업기술을 선도하고 그의 유언과도 같은 “기술은 돈보다 중요하다”라는 말을 실천하고 있는 한국 기술의 메카가 되었다.
행하는 자 이루고 가는 자 닿는다 보보시도장(步步時道場)이란 ‘한 걸음 한 걸음이 인생’이라는 뜻으로 이병철이 자주 인용하던 구절이다. 1987년 9월말 서울대학병원 내과의 서정돈 교수는 급히 와달라는 전갈을 받고 이병철의 자택에 도착했다. 침대에 누워 있던 이 회장은 서교수에게 와주어 고맙다며 웃음을 띄었다. 한평생 제일주의와 완벽주의로 일관해온 대기업 총수답지 않게 표정이 온화했고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10월 17일 이회장은 병중에도 한국빌딩 준공식에 참석했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공식 행사 참석이었다. 10월 20일 이병철은 안양 골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2층 창가에 앉아 잔디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서서히 날이 어두워질 무렵 이병철은 직원들에게 골프화를 가지고 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프로골퍼 이강선과 함께 카트를 타고 1번 홀로 나갔다. 1번 홀에 선 이병철의 첫 번째 티샷은 헛스윙이었고 두 번째 티샷도 겨우 10미터 정도 굴러갔다. 그러나 세건트 샷지점에서부터는 평상시처럼 플레이했다. 3번 홀에 이르자 날이 어두워져 더 이상 플레이를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못내 아쉬워하는 이병철의 마음을 읽고 주변사람들이 카트와 승용차 헤드라이트를 필드 쪽으로 밝혀주어 9번 홀까지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그의 체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이병철은 카트를 타고 10번 홀 그린을 세 바퀴나 돌아본 뒤 골프장을 떠났다. 이것이 이병철의 마지막 골프였다. 그리고 이병철은 20일 후인 1987년 11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거인의 77년 생애가 끝난 것이다. “행하는 자 이루고, 가는 자 닿는다”라는 명구는 그가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나던 순간까지 일관되게 흘렀던 좌우명이자 그의 행동주의적인 삶과 경영철학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가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가 행했기 때문이고,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가고 또 갔던 것이다. 이병철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참으로 어렵지만 굳이 언급하자면 철두철미함과 추진력을 겸비한 애국 기업가라 정의 내리고 싶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 모든 자료를 수집해 꼼꼼히 따져보는 철두철미함을 가지고 있지만 한번 시작하면 무서운 추진력으로 끝장을 보는 의지력의 소유자이고 중대한 결정에 있어 국가의 발전을 염두에 둔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경영인이었기 때문이다. 무역업으로도 큰 돈을 벌고 있었던 때에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 제조업을 시작한 일이나 73세의 나이에 반도체 사업을 추진한 점은 그가 범상한 경영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여기에 더해 사람을 부릴 줄 아는 리더였으며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멋쟁이였다.
이병철 회장의 경영 신조 1. 신용을 금쪽같이 지켜라 2. 사람을 온전히 믿고 맡겨라 3. 판단은 신중하게, 결정은 신속하게 4. 근검절약을 솔선수범하라 5. 매모광이 돼라 6. 세심하게 일하라 7. 행하는 자 이루고, 가는 자 닿는다 8. 신상필벌을 정확히 지켜라 9. 전문가의 말을 경청하라 10.사원들을 일류로 대접하라
* 이병철 회장의 경영 15계명 1계명 행하는 자 이루고, 가는 자 닿는다 2계명 신용을 금쪽같이 지켜라 3계명 사람을 온전히 믿고 맡겨라 4계명 업의 개념을 알아라 5계명 판단은 신중하게, 결정은 신속하게 6계명 근검절약을 솔선수범하라 7계명 메모광이 되라 8계명 세심하게 일하라 9계명 신상필벌을 정확하게 지켜라 10계명 전문가의 말을 경청하라 11계명 사원들을 일류로 대접하라 12계명 부정부패를 엄히 다스려라 13계명 사원교육은 회사의 힘을 기르는 것이다 14계명 목계의 마음을 가져라 15계명 정상에 올랐을 때 변신하라
“행하는 자 이루고, 가는 자 닿는다”라는 명구는 그가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나던 순간까지 일관되게 흘렀던 좌우명이자 그의 행동주의적인 삶과 경영철학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가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가 ‘행했기’ 때문이고,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가고 또 갔던 것’이다.
현대 전 CEO 정주영회장의 리더십 정주영 회장의 삶의 철학과 이념 - 삶의 철학 (1) 성실성 강원도 아산에서 출생한 정주영은 그의 삶의 전반적인 철학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가진 최고의 재산은 부지런함과 근검 절약이었다. 정주영 스스로 평생의 자본이라고 말하던 것이 부지런함이었다. 매일이 새로워야 하고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하루마다 더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더욱 부지런하기 위해 노력했다. 성실함은 자신감을 갖게 한다. 어떤 일을 할 때는 경력이나 학벌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시점에서 그 사람의 마음가짐과 자세가 일을 한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극복하지 못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이유 같은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성실하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일하는 사람에게는 큰 문제도 차근차근 풀어나 갈 수 있는 해결책이 보이게 된다. 작은 일에 성실한 이를 보고 우리는 큰 일에도 성실하리라 믿는다. 작은 약속을 어김없이 지키는 사람은 큰 약속도 틀림없이 지키리라 믿는다. 그러므로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큰 일에도 최선을 다한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성실한 모습은 신용을 얻는 최고의 방법이 된다.
(2) 결단력 매사에 빠른 결단력과 속전속결의 모습을 보여온 그는 늘 어떤 일이던지 고민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 현대가 주력해왔던 건설업은 즉각적인 결정이 중요한 산업이다. 시간이 곧 돈이기 때문에 무리한 결정이라 할지라도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결정에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주영 회장의 모습은 성공을 가져다준 요인 중에 하나일 것이다. 투자에 있어서도 시기를 놓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일화로 방송국에 2억이라는 기부를 5분도 안 되어서 결정을 내리는 모습은 직접적으로 기업경영과 큰 연관이 없는 듯하지만, 어떤 사안을 두고 빠른 결정을 내는 속전속결 방식 속에 그의 경영 철학이 숨어있는 것이다. 빠른 행동력으로 공사기간을 앞당겨 인력비와 투자비를 줄여야 이익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을 하는 사람은 돈과 시간에 쫓기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인은 그때그때 적응할 수 있는 임기응변적인 민첩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정주영 회장의 맨주먹 마케팅 사진 한 장을 보여주고 돈을 빌릴 수 있을까? '설마?'하고 웃겠지만 우리가 잘 아는 현대그룹의 정주영 왕회장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1972년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 건설을 위한 차관을 빌리기 위해 소나무와 초가가 보이는 울산조선소 부지 사진 한장만 들고 영국 버클레이 은행을 방문했다. "돈을 빌려주면 여기다 조선소를 지어서 배를 팔아서 갚을테니 돈을 빌려 주시오". 그러자 은행장이 미심쩍은 듯 "도대체 배를 만들어 본 경험이 있습니까?"하고물어보았다. 그러자 정주영 회장은 거북선 그림이 그려있는 우리나라 지폐를 한 장 꺼내 보였다. 그리곤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1500년대에 이미 거북선을 만든 나라입니다". 기가 질린 은행장은 까다로운 조건을 하나 걸었다. "앞으로 당신이 만든 선박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차관을 주겠습니다" 아직 조선소도 없는 정주영 회장으로서는 '엄동설한에 딸기를 따오라는 말'과 같은 이야기였지만 정주영 회장의 맨주먹 마케팅은 여기서 위력을 발휘했다. 정회장은 스코트 리스고 조선소에서 26만톤짜리 선박 설계도면을 한 장 빌려서 마침 파리에서 휴가중인 세계적인 선박왕 리바노스를 찾아갔다. "당신이 배를 사겠다고 계약 해 주면 이 계약서를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려 조선소를 지어서 배를 만들겠습니다"라고 맨주먹 마케팅을 전개했다. "현대가 만드는 첫배를 당신한테 바치는 영광을 달라"는 정회장의 맨주먹 마케팅에 감탄한 그리스 3대 선주의 한사람인 리바노스는 선박건조 경험은커녕 조선소조차 없는 현대에 26만톤급 유조선 두 척을 주문했다. 이 계약 덕분에 정주영 회장은 영국에서 돈을 빌려 울산의 한쪽에는 조선소를 짓고 다른 한쪽에서는 유조선을 건조해 2년 3개월만에 완공했다. 무엇이 정주영 회장을 부자로 만들었는가? 그것은 열정과 끈기의 맨주먹 마케팅이 성공비결이다. 점점 경쟁이 치열해지는 시대에 영업활동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정주영 회장의 맨주먹 마케팅을 한번 머리에 떠올려보자. 용기가 날 것이다. 그런 용기로 다시 한번 시작할 때다.
[정주영의 경영철학] - 사람들은 곤경에 처하면 헤쳐나갈 길이 없다고 체념한다. 그러나 찾지 않으니까 길이 없지, 필사적인 노력으로 찾아나서면 다 해결 방법이 나오게 되어 있다. [정주영식 손자병법] - 병사들은 극한 상황에 빠지면 오히려 두려워하지 않고, 갈 곳이 없으면 단결력이 굳어지며, 깊이 들어가면 투지가 생겨나고, 부득이하면 싸움에 임하게 된다.
[정주영 뛰어넘기 성공전략 포인트] 집념이 강한 사람에게는 하늘도 감동한다! (1)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확실하면 집념은 저절로 생긴다. (2) 매일 아침마다 소리 내어 '그 목표는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다짐하라. (3) 말보다 행동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해 다른 사람을 감동 시켜라.
전주영 회장의 성공 비결(MBC) 성공 비결 1 - 내 몸이 담보 강원도 통천,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난 정주영은 16세에 가출, 막노동판을 전전 하다가 서울의 쌀가게에 취직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와 신용밖에 없다고 생각한 정주영은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며, 그 결과 쌀가게 주인과 주위 사람들에게 신용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스물 일곱 되던 해, 정주영은 자동차 정비공장을 차리게 되는데. 자동차 정비공장 문을 연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화재로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빚을 얻어 시작한 정비공장이 전소되자, 정주영은 빚위에 또다시 빚을 지게 되고. 다시 일어서야 할 그때, 정주영에게 돈을 빌려 준 사람들은 쌀가게 시절 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정주영이 다시 일어나 오늘 현대그룹의 발판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신용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이지요.
성공 비결 2 - 구두쇠. 30여년 전에 지은 그의 집엔 20여년이 넘은 소파와 10년이 다 된 17인치 TV가 전부였습니다. 17년전 작업복을 죽기전까지 입고다녓을 정도. 정주영은 젊은 시절부터 아끼는데 있어서는 누구 못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한때 한국 제일의 부자 정주영은 구두쇠엿던것이지요.
성공 비결 3 - 아침형 인간 정주영 회장의 성공비결 또 하나. 그 누구보다 부지런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쌀가게 시절부터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문을 열고 점포를 정리했던 정주영은 자신이 사업을 하던 시절에도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곤 했다고 합니다.. 그리곤 해가 빨리 뜨지 않는다고 역정을 내곤 했다는데. 현대회장으로 있을당시에도 새벽 6시 기상, 7시면 회사로 출근하였다고 합니다.
성공 비결 4 - 빈대만도 못한놈 정회장이 부하직원을 야단칠 때 늘 하는 말은 "빈대만도 못한 놈"이라고 햇답니다. 그것은 부두 노동자 시절 몸으로 익힌 정회장의 철학이 담긴 욕설이라고 합니다. 부두 노동자 시절, 몸에 기어 오르는 빈대를 피하기 위해 네 개의 물그릇에 상다리를 담궈 놓고 상위에서 잠을 자던 정회장은 며칠 되지 않아 다시 빈대에게 시달리게 된다. 살펴 본즉 빈대들이 벽을 타고 올라가 천정 위에서 몸으로 뛰어 내린 것인데. 빈대도 머리를 쓰면 되는데, 사람이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햇습니다. 정주영은 사업에 있어서도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내어 멋지게 성공을 하곤 했지요. 한겨울 보리를 심어 잔디를 대신 했던 부산 UN묘지 공사며, 폐 유조선으로 단번에 물길을 막았던 서산 간척지 공사. 그의 성공은 상식에 매달리지 않는 신선한 발상의 성공이었습니다.
성공 비결 5 - 불도저 정주영 회장의 별명은 불도저. 그것은 한 번 마음먹은 사업을 무섭게 밀어 붙이는 추진력 때문인데. 1970년, 울산 모래 벌판에 세워진 조선소는 모두가 불가능 했다고 말한 사업이었습니다. 자본도, 기술도 없던 시절, 그곳에 조선소가 세워지리라고 믿었던 사람은 오직 정주영 뿐이었습니다. 울산 모래 벌판의 사진 한 장을 달랑 들고 당시 우리나라 1년 예산의 반에 해당하던 4500만불의 차관을 얻어 세계 최대 규모의 도크를 만들었던 정주영. 그는 조선소 도크 건설과 동시에 26만톤 짜리 두척의 배를 만드는 세기적 실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30개월 후, 대한민국 최초로 만든 거대한 유조선은 한국을 세계 제 1위의 조선국으로 도약시키게 됩니다.
........................................................................... 장보고의 리더십 동아시아 바다를 완전히 장악한 장보고는 분명한 역사적 인물로서 현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재해석하고 본받아야 할 점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글로벌 마인드와 네트워크 활용능력은 현대의 경영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으로 손꼽히는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지구촌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고, 국가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개인이 자신의 역량을 국제무대에서 맘껏 펼치게 된 것을 생각해 볼 때, 장보고라는 인물은 확실히 천년의 세월을 뛰어 넘은 통찰력이 엿보이는 인물이다.
그가 천민출신으로 세계에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청해진이라는 해상왕국을 건설하게 된 데에는 개인적인 무술 실력보다는 타고난 지도력과 추진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오늘날 많은 경영인들이 주목하고 있는 해상왕 장보고의 리더십을 몇 가지 꼬집어보자.
1. 장보고는 시대를 읽는 남다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 장보고는 조공무역이 쇠퇴하고 민간무역이 도래할 것을 미리 예측했다. 그리하여 동북아를 각각의 나라로 따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권역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 장보고는 국제적 감각의 리더쉽을 소유하고 있었다. : 청해진은 1만명의 민군(民軍)과 그 가족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구성원들은 다양한 국적과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장보고는 국가별 문화적 차이를 인정했으며, 청해진에 필요한 다양한 기능을 해외에서 아웃소싱하는 등 국제적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3. 장보고는 완벽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 군사력, 조선술, 항해술에서 장보고는 완벽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며, 영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에 잘 정비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해상의 무역을 리드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4. 장보고는 네트워크 활용능력이 뛰어났다. :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그만큼의 영향력을 키워갈 수 있었던 것은 신라, 당,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신라인들을 결속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했는데, 이 네트워크가 바로 장보고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5. 장보고는 글로벌 가치의 중요성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다. : 그는 청해진 중심의 해상체제에서 국제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청해진의 활동에 당과 일본을 참여시키기 위해 당시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던 글로벌 스탠더드를 적극 도입한다. 당나라의 직제를 그대로 차용하고 동아시아 3국의 공통 코드로 불교를 받아들여 국경을 초월하는 등 공감대 형성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참고자료: 삼성경제연구소, 천년 전의 글로벌 CEO 해상왕 장보고)
.............................................................................. 삼성 CEO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
“양과 질의 비중이 1:99도 안된다. 0:100 이 되어야 한다. 10:90 이나 1:99 로 생각한다면 이것이 언젠가는 5:5로 간다. 한쪽을 0으로 만들지 않는 한 절대로 안된다.” - 이 건 희 회장 - 1987년 46세로 회장 취임 - 1993년 신경영 선언 : 프랑크푸르트 선언 : “나부터 변해야 한다.” “ 처자식 빼고 다 바꾸자.” “양 위주의 경영을 버리고 질 위주로 가자” “질만 높이면 양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이 된다.” * 현재 세계 1위: 19개 ⇒ 2010년 50개로 늘린다 - 질경영의 성과 : 1992년 매출 : 35조 7,000억 ⇒ 2004년 매출 135조 5,000억 (4배 증가) - 이익 : 1700억 ⇒ 19조원 (112배 증가) - 삼성전자 브랜드의 가치 : 세계 21위 125억 5,300만달러 (인터브랜드 컨설팅 업체) - 1등주의 삼성 ⇒ 초 일류주의 삼성
소위 ‘한국을 먹여 살린다’는 삼성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삼성의 세계-1등주의 연구’에서는 그 힘을 이건희 회장의 ‘용인(用人)’에서 찾았다. “21세기에는 탁월한 천재가 10만~20만명을 먹여 살리는 인재경쟁의 시대, 지적 창조력의 시대이다.” 2002년 6월 이건희 회장이 삼성 사장단 50여명에게 던진 말이다. 이 회장은 삼성이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성패가 ‘핵심인재의 확보’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이건희 회장이 요구하는 핵심인력은 미래를 움직일 천재를 의미했다. 1만 2000명의 석·박사급 인재가 근무하는 삼성그룹이지만 이 회장은 “아직도 배가 고프다”고 한다. 삼성은 국적을 불문한 석·박사급 인재를 매년 1000명씩 늘려가고 있다고 한다. “초일류 기업이 되려면 모든 삼성인이 인간미·도덕성과 함께 한국인다운 예의범절, 국제인의 에티켓을 갖추고 세계와 미래를 바라보며 크게 생각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강조하는 ‘존경받는 기업’이 되는 한 조건이다. ‘기회경영’에 실패하면 또 다른 기회를 모색할 수 있지만, ‘전략경영’의 실패로 신망을 잃으면 회사의 생존조차 위험하다는 것이 이건희 회장의 생각이다.
1987년이었죠. 이병철 회장의 장례식을 치른뒤 열흘뒤인 1987년12월1일 셋째아들인 이건희(李健熙) 부회장이 회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의 대권을 물려받기까지 21년 동안 아버지로부터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았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점심시간에 계열사 사장들을 불러 업무를 보고 받았는데, 이 자리에는 사돈인 홍진기(洪璡基) 회장과 이건희 부회장이 고정멤버로 배석했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1978년 삼성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한 후에는 회장실 바로 옆방에 대기하고 있다가 아버지의 스케줄에 맞춰 그림자처럼 수행했습니다. 매일 용인에 있는 아버지 숙소로 가서 취침을 확인한 뒤에야 귀가했다고 합니다. 이병철 회장은 자신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비즈니스 감각이 뛰어나고 장사에 대한 관심이 많은 둘째아들 대신, 좀더 멀리 내다보는 시각을 가진 셋째아들을 후계자로 선정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은 이건희 회장이지만, ‘삼성그룹 회장’으로서 경영 스타일은 아버지와 판이했습니다. 물론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고, 인재관을 비롯한 몇가지 사항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외부의 우수인재를 선발하는 일이라면 아버지 못지않게 열심이지요. 이건희 회장은 개인적으로는 자율관리형 시간관을 가지고 있으며, 미래 전략을 구상하거나 거시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 이외에는 삼성그룹의 대부분 사안을 전문경영인들에게 위임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인지 저로서는 다소 헷갈리긴 하지만 어쨌든 ‘인간미’를 강조하는 조직관리에다, 명백하게 듣기(listening)형 리더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면시간도 불규칙합니다. 요즘엔 규칙적으로 수면을 취하려고 노력하고 있다지만, 얼마전까지만해도 24시간 연속 깨어있기와 24시간 연속 수면을 병행하기도 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한남동 집에서 매년 수천 편의 영화나 TV 드라마를 보지요. 삼성 정보팀이 매일 올리는 따끈따끈한 최신 정보에다, 전세계에서 발간되는 최신 과학기술 잡지를 숙독합니다. 휴대폰이든, 오디오든 웬만한 첨단 기기를 직접 분해하고 조립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무엇이든 한가지 깊게 파고들어 사물의 본질을 캐내는 작업이 그의 취미입니다. 그러다보니 상상력과 직관력이 커지게 마련입니다. 미래의 경영이나 기술이 어떻게 변화할지 수(手)를 읽는데 아무래도 유리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삼성이 반도체나 LCD(액정표시장치)의 대형 투자를 할때는 모두 이건희 회장이 결단을 내려주었습니다. 상상력과 직관력으로 단련된 ‘동물적인 감각’이지요. ‘동물적’이라고 한 것은 무슨 논리적인 설명으로는 딱히 납득할 수 없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대신 삼성그룹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업무는 모두 이학수(李鶴洙) 구조조정본부장이나 윤종용(尹鍾龍)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맡기는 스타일입니다. 이건희 회장은 IMF체제 이후 기업들이 구조조정에 들어갔을 때도 ‘집중과 선택’이라는 밑그림만 던져놓고 단 한마디 말을 하지 않은채 실무를 구조조정본부에 일임했습니다. “팔아야 한다고 판단되면 오너 눈치 보지 말고 과감하게 팔아라”고 분명한 방침을 내놨기 때문에 사장단들이 일을 처리하기가 수월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삼성과 빅딜 협상을 벌였던 다른 기업체 임원들은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이 자기 판단에 따라 협상조건을 밀었다, 당겼다 하는 것을 보고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건희 회장은 혼자서 생각을 많이 하다보니 자연히 말하기보다 듣기에 능숙하지요. 물론 1993년 신(新)경영 때는 당시 프랑크푸르트, LA 등지에서 평균 8시간 이상, 최장 16시간짜리 회의를 잇따라 주재하며 3개월 동안 8500쪽 분량의 말을 쏟아냈습니다.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지요. 하지만 그는 보통 때는 열 마디를 듣고 열번 생각을 한 다음에 한 마디를 합니다. 혹시 남에게 말을 걸더라도 "왜" "왜" "왜"를 반복하면서 본질을 캐묻는 습관이 있다고 합니다. 이건희 회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상상력을 중시하다보니 현실의 사업에 대한 감각도 차이가 있습니다. “이병철 회장이 중소기업형 리더라면, 이건희 회장은 대기업형 리더다. 이병철 회장은 직접 주3~4회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챙기고 지시했다. 아마 이병철 회장이 계속 경영했다면 아마 오늘날과 같은 삼성전자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 사장들이 회장이 언제 갑자기 무슨 질문을 할까, 어떻게 대답할까에만 신경써면서 ‘쫄아서’ 정상적인 경영활동이나 아이디어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권한위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다르다. 소소한 일은 관여하지 않고 큰 줄기만 챙긴다. 다만 큰 흐름을 잘못 짚으면 혼이 나는 것은 더 무섭다”고 말했습니다.
큰 그림을 그리는 깊은 생각과 높은 안목 이건희 회장의 폭넓은 안목과 통찰력은 그칠 줄 모르는 지식욕과 깊은 사색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매달 엄청난 양의 책과 잡지를 읽고, 또 틈만 나면 비디오를 시청합니다. 그는 정치·경제·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모아놓고 읽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책만 한 20권이 되며 잡지의 경우는 시사경제에서부터 문화예술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잡지 50종 정도를 구독합니다. 그리고 자택 지하실에는 열 다섯 개의 VTR을 설치해놓고 매일 뉴스, 과학 다큐멘터리, 세계 여러 나라의 프로그램이 녹화된 비디오 테이프를 시청됩니다. 이렇게 매일 접하는 엄청난 양의 정보는 사색을 위한 풍부한 재료가 됩니다. 정보에 대한 갈구와 함께 이건희 회장의 사고를 깊게 해주는 것은 그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생각의 철학'입니다. 이건희 회장은 ?경영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말하며, 경영이든 일상사든 문제가 생기면 최소한 다섯 번 정도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원인을 분석한 후 대화로 풀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모든 문제를 다각적으로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를 ?입체적 사고?라 이름 붙였으며, 빠르게 변하는 21세기 생존의 키워드가 될 것이라 했다. 그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영화 감상을 예로 들어 '입체적 사고'를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영화를 감상할 때, 대개 주인공에 치중해서 보게 됩니다. 주인공의 처지에 흠뻑 빠지다 보면 자기가 그 사람인 양 착각하기도 하고, 그의 애환에 따라 울고 웃습니다. 그런데 스스로를 조연이라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면 아주 색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나아가 주연? 조연뿐 아니라 등장 인물 각자의 처지에서 보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람의 인생까지 느끼게 됩니다. 거기에 감독·카메라맨의 자리에서까지 두루 생각하면서 보면 또다른 감동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회장은 일단 입체적으로 보고, 생각하는 '사고의 틀'이 만들어지면, 음악을 들을 때나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또 일을 할 때에도 새로운 차원의 눈을 뜨게 된다고 합니다. 입체적 사고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건희 회장은 일단 중요한 사안이 하나 생기면, 해결될 때까지 몇 날 며칠이고 생각에 빠집니다. 그리고 나서 결정을 내립니다. 이건희 회장의 정보에 대한 갈구와 입체적 사고는 남들보다 앞서 미래를 구상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 중 기자가 갑자기, 10년 뒤 삼성의 모습은 어떠할 것 갔느냐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머뭇거림 없이 10년 후 삼성의 모습을 그려냈습니다. 10년 후 삼성은 사업구조나 경영구조에서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을 것입니다. 욕심이 좀 지나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삼성은 전자·금융·서비스 사업을 중심으로 세계적 수준의 디지털 기술과 핵심 역량을 갖춘 첨단 기업으로 성장하고, 부채가 거의 없는 탄탄한 재무구조를 보유한 일류 기업으로 변모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전략적 제휴를 맺은 글로벌 기업으로 발전해, 국제사회에서 존경받을 것입니다.
이병철 회장의 경영 신조 1. 신용을 금쪽같이 지켜라 2. 사람을 온전히 믿고 맡겨라 3. 판단은 신중하게, 결정은 신속하게 4. 근검절약을 솔선수범하라 5. 매모광이 돼라 6. 세심하게 일하라 7. 행하는 자 이루고, 가는 자 닿는다 8. 신상필벌을 정확히 지켜라 9. 전문가의 말을 경청하라 10.사원들을 일류로 대접하라
알렉산더의 리더십 알렉산더는 인적 자원을 활용하는 데 천재적인 소질을 갖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1만 명에 달하는 병사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는 전쟁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병사와 함께 먹고, 마시고, 잠을 잤다. 그는 항상 소박한 식단을 즐겼고 추운 곳에서 잠을 청했다. 항상 최일선에서 병사를 이끌었으며 그들과 함께 싸우다 부상을 입는 일도 잦았다. 의사교육을 받은 그는 전투가 끝나고 나면 몸소 병사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심지어 자신이 큰 부상을 입었을 때에도 병사들의 상처를 먼저 돌보았으며, 심각한 부상을 입지 않은 경우에는 다른 병사들이 다 치료를 받고 난 후에야 치료를 받았다. 랜스 커크의 '리더십의 명장 알렉산더' 중......
사족.... 알렉산더..... 마케도니아의 왕 (BC 356-BC 323, 재위 BC 336-BC 323) 마케도니아라는 작은 국가의 왕으로 광활한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고 그리스 문명을 인도와 아프가니스탄까지 전파했던 알렉산더는 세련된 정치가이자 능숙한 전략가이며 잔인한 전사였다. 몽테뉴는 `가장 탁월한 사람들` 이라는 글에서 알렉산더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 "통찰력 인내심 치밀함 관대함 낙천성과 같은 군인적 자질들과 그가 누린 영광스러운 기간과 영토, 잘못을 인정하는 순수한 의지 등은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하게 만든다 ." 세련된 정치가이자 능숙한 전략가이며 잔인한 전사였던 알렉산더는 한마디로 영웅이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프랑수아 슈아르는 저서 `알렉산더` 에서 인간으로 태어나 신화로 남은 한 사내를 조명한다. 단순히 그의 삶만을 조명한 것이 아니라 알렉산더라는 인물이 사후 어떻게 신화가 되어갔는지 그 역사적 궤적을 추적한다. 알렉산더는 산화가 될 조건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인 볼테르는 알렉산더의 구체적인 업적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는 전쟁 중에도 법을 만들었고 상업로를 개척해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도시들을 세웠다. 알렉산더가 세운 도시는 무수히 많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전성기 무렵 남 부유럽과 북아프리카, 서아시아에 알렉산더라는 이름이 붙은 도시가 무려 60개 가 넘었다. 이 도시들은 이름은 바뀌었지만 지금까지도 도시로서의 명성을 누리고 있는 곳들이다. 알렉산더는 지적이면서도 치밀한 근거 위에서 전쟁을 했고 통치를 했다.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 물론 ‘불법과 탈법이 없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독재를 하든 방임(放任)을 하든 실적만 좋다면 대부분 정당화되고 결과적으로 리더십 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실적이 나쁘면 리더십이고 뭐고 갖다붙일 여지가 없어진다. 정치인이나 종교인의 리더십과는 다른 대목이다. 그래서 ‘투명경영’이란 말은 있어도 ‘민주경영’이란 단어는 없는 모양이다. 기자가 고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의 생전에 현대그룹을 취재하면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점은 느닷없는 사장단 인사였다. 그것도 기사마감 시간이 임박해서야 불쑥 내놓는 헤비급 인사로 몇 번이나 소동을 벌였다. 요즘 현대자동차그룹에서도 간간이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올해 초에도 그랬다. 지금까지 몇몇 의외의 인물이 사장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정기 시즌이 아니라 오너의 뜻에 따라 수시로 단행되는 ‘번개 인사’는 현대가(家) 리더십의 한 특징을 보여준다. 정몽구(鄭夢九·67)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그렇듯 가부장적 경영을 해오면서 뛰어난 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집에 은둔해 있는 오너도 아니고, 회사 공장을 한두 번 순시하면서 현장경영한다고 홍보하는 오너도 아니다. 실제 발로 뛰고 몸으로 부딪치고 행동으로 다그친다. 요즘 중국 베이징에서는 ‘현대속도(現代速度)’란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 현대차가 막차로 중국시장에 진입했지만 금방 기존의 메이저 업체를 제치고 상위권으로 도약한 것을 빗대는 말이다. 현대차는 2004년에 세계 최대시장인 미국에서 41만8615대를 판매해 점유율 2.5%의 벽을 넘어섰다. 기아차 판매분을 합치면 점유율은 4.1%에 이른다. 2005년 1분기 성과는 더 좋다. 현대차는 2004년 세계시장에서 228만대를 팔아 판매증가율 16%를 기록했다. 이는 도요타, 혼다의 10%나 GM의 4%를 크게 앞지르는 것이다. 기자는 1990년대 후반 당시 정몽구 현대그룹 회장과 단둘이 만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롯데호텔 세면장에서, 금강산 관광선인 금강호 갑판 위에서, 신라호텔 미니룸에서. 그때 본 정 회장은 상당한 눌변(訥辯)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달라졌다. 각종 국내외 행사를 많이 치러서인지 달변은 아니라 해도 분명하고 명쾌한 의사표시를 한다. 당초 정 회장의 눌변 때문에 그의 경영능력에 의심을 품는 사람도 있었고, 2000년 현대차로 홀로서기를 했을 때는 과연 회사가 제대로 굴러갈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정 회장은 그런 의심과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세계시장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있다.
아버지 정주영 회장은 벤치마킹 대상이자 라이벌 정몽구(MK) 회장을 지켜보면 그 내면에 아버지 정주영 회장에 대한 벤치마킹과 함께, ‘아버지를 라이벌로 설정하고 더 나은 모습을 보이겠다’는 의지가 숨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주영 회장은 매일 새벽 5시의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 여러 동생과 자식에게 근검을 가르쳤다. 정몽구 회장은 수많은 삼촌과 형제 사이에서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물불을 안가리고 뛰었다. 정몽구 회장은 1996년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한 뒤 “내 나이 예순을 앞둔 터여서 아버지가 옛날처럼 무섭지는 않지만 여전히 어려운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의 한 측근은 “정몽구 회장은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일념으로 사업에 매진했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정 회장의 스타일은 그의 아버지와 흡사하다. 외모는 물론 선이 굵으면서도 세밀하고 의리와 인정을 중시하는 것도 닮았다. 솥뚜껑만한 손에다 ‘삼국지’를 애독하는 것도 비슷하다. 부하를 관리할 때 믿고 맡기긴 하지만 상호경쟁을 시키는 방법도 비슷하다. 하지만 아버지를 베끼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5년 전 벌어졌던 ‘왕자의 난’은 한편으로 아버지로부터 정통성을 받고 다른 한편으론 아버지로부터 독립하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결국 2000년 9월 눈물을 머금고 자동차 전문그룹으로 독립하면서 그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정 회장은 일반인에게 ‘뚝심 경영인’과 ‘보스형 경영인’으로 각인됐다. 회사 임직원들은 초기의 정 회장을 ‘보스형 오너’로 불렀다. 임직원에 대한 장악력과 통솔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년 전 미국에서 시작한 ‘10년, 10만마일 무상 보증수리’의 경우 회사 내부에서 반대가 많았다. 하지만 정 회장은 초강수를 두었고 결국 오늘날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0년대엔 일관제철소 사업 진출을 시도했으나 정부와 갈등을 빚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INI스틸을 통해 한보철강 당진공장 인수를 성공시키고, 이곳에 일관제철소를 짓겠다고 선언했다. 아버지보다 더 일찍 일어나고 더 많은 곳을 다니고 더 깊은 생각을 하자고 그는 결심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외환위기 직후 적자였던 현대차를 맡은 지 1년 만에 4000억원대 흑자를 기록했고, 해마다 기록을 경신했다. 환차익(換差益)을 감안해도 대단한 수치다. 현대차는 2004년 국내외에 167만7818대를 팔아 1조7846억원에 이르는 당기순이익을 기록했다. 4년 연속 순이익 1조원을 넘어섰고 조만간 순이익 2조원 시대가 열릴 전망이다. 기아차도 2005년 3월 수출 500만대 기록을 달성하는 등 현대차에 못지않은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결과가 나오자 그룹 안팎에서는 정 회장을 ‘전략가형 CEO’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단순히 부하를 몰아붙이는 데서 벗어나 장기 비전을 세우고 향후 이슈를 예측하여 이를 추진력있게 실행하는 스타일로 변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현대차 측은 “품질경영, 현장경영, 뚝심경영 등 세 가지가 정몽구 회장의 경영철학 요체”라고 말한다. 정 회장은 이를 통해 ‘지옥의 카레이스보다도 더 치열하다’는 자동차 산업에서 세계 톱5로의 진입 가능성을 노크하고 있다.
품질에 진짜 목숨을 걸었다 현대차는 1986년 4995달러짜리 엑셀 승용차를 가지고 최초로 미국에 진출했다. 미국 소비자는 싼 맛에 끌려 현대차를 많이 샀지만 금방 품질이 들통났다. 판매는 하향곡선을 그었고 현대차는 미국인의 조롱을 받았다. 하지만 요즘 현대차는 미국에서 다른 대접을 받고 있다. 올 4월엔 미국 컨슈머리포트지(誌)가 쏘나타를 ‘가장 신뢰할 만한 차’로 선정했다. 타임(TIME)은 4월 25일자에서 “정몽구 회장이 철저한 품질경영을 통해 과거 영욕의 현대차를 글로벌 성공 메이커로 변신시킴으로써 세계 자동차업계 역사상 가장 놀라운 기적을 이루었다”고 칭찬했다. 올 1월 비즈니스위크도 정 회장을 자동차 부문 최고 CEO로 선정하면서 “정 회장은 1999년 현대차를 맡으면서 품질을 최우선에 두는 경영을 시작, 회사를 바꾸어 놓았다”고 보도했다. 모두 정 회장이 광적으로 품질경영에 집착하면서 나타난 결과다. ‘품질’이란 단어는 선대(先代) 때는 그렇게 강조하지 않던 단어였다. 정 회장은 과거 수년간 현대자동차써비스를 맡아보면서 품질 문제가 회사의 가장 큰 걸림돌임을 발견했다. 그는 5년 전 현대차 품질본부 서병기 사장의 방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리고 “품질은 우리 생존의 핵심이다. 얼마의 비용이 들든 간에 품질을 확보해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정 회장의 지시는 단호했지만 현장 직원에게까지 전달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빨리, 값싸게 만드는 습관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 회장은 직접 공장의 세세한 부분까지 품질을 직접 체크했다. 2002년 8월에는 기아 오피러스 수출차량을 직접 시험주행하다가 전문가도 찾기 힘든 미세한 소음을 발견하여 선적을 40여일 미루며 즉각 저소음 엔진으로 바꿀 것을 지시했다. 당시 남양연구소의 한 간부는 “그렇게 하면 손실이 매우 크다”고 보고했으나 정 회장은 “품질 때문이라면 상관없다”고 반박했다. 현재 정 회장의 지시에 따라 서울 양재동의 현대-기아차 사옥 1층은 3개의 품질 관련 공간(품질상황실, 품질회의실, 품질확보실)이 차지하고 있다. 정 회장은 “우리 차가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멈춰 서있는 것을 상상해봤느냐”면서 품질상황실의 설치 이유를 설명했다. 24시간 가동되는 품질상황실은 해외판매망으로부터 제기되는 하자(瑕疵)를 실시간으로 체크한 뒤 연구개발부서에 자료를 넘긴다. 관련 임원은 물론, 정 회장에게도 밤새 발생한 하자가 실시간으로 보고된다. 김동진 현대차 부회장은 “직원 사이에 ‘정몽구 회장은 품질본부장’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고 말했다. 수년 전 현대차에서는 해외시장 전략을 놓고 여러 의견이 나왔다. 그 중엔 ‘렉서스’ 같은 고급 브랜드를 만들어 회사 이미지를 한 단계 상승시키자는 안도 있었다. 하지만 정 회장은 “품질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를 추진하면 도리어 이미지가 실추될 수 있다”면서 ‘선(先)품질향상’을 강조했다. 최고급 브랜드의 유혹을 물리친 정 회장의 결단은 현재까지 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진정한 현장경영은 발로 뛰는 것 기자가 알기로 우리나라에서 진정한 현장경영을 하는 재벌총수는 거의 없다. 정몽구 회장은 예외적인 사례 중 하나다. 현장에서 보고 배우고, 현장에서 느끼고, 현장에서 해결한 뒤 확인까지 한다는 ‘삼현주의(三現主義)’는 정 회장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1998년 외환위기를 불러온 부실기업 기아를 빠르게 정상화시킨 것도 그의 현장경영 덕분이라고 한다. 기아차를 인수한 초기에 정 회장은 한 달에 한 번꼴로 화성을 비롯해 광주, 소하리에 있는 기아차 공장을 찾아가 직접 현장을 점검했다. 피(被)인수기업으로서 인수기업 총수의 방문이 힘이 됐을 것은 분명하다. 그는 엔진공장, 주물공장, 보일러 배관실 등 구석구석을 샅샅이 점검했다. 그의 현장경영 철학에는 배경이 있다. 한양대 공업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현대건설과 현대자동차를 거친 정몽구 회장은 아버지의 지시로 현대자동차의 애프터서비스(AS) 전담회사인 현대자동차써비스를 맡는다. 당시 포드와 손을 잡은 현대차는 포드로부터 자재가 적기에 조달되지 않아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이를 타개하려고 임직원과 함께 자동차 부품을 싣고 전국 순회서비스를 직접 다녔고,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정비차량이 개천에 빠져 낭패를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현장을 누비면서 고객 불만을 직접 접했던 경험이 지금의 ‘현장경영’을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현장경영을 하려면 무엇보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매일 오전 6시30분 이전에 출근해 관련 임원을 불러 밤새 고민한 주제를 일러주고 토론한다. 회장의 생각을 임원들이 따라가기가 벅찰 만하다.
그의 좌우명은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다. ‘부지런하면 세상에 어려울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정주영 회장에게 써주었던 휘호이기도 하다. 그의 현장경영 습관 덕분에 해외 생산거점도 신속하게 구축됐다. 현대차는 5월 20일 준공식을 거행한 미국 앨라배마공장을 비롯, 슬로바키아공장, 중국공장 등 해외거점에 자동차 생산기지를 착착 구축시키고 있다. 정 회장은 인구 25만명의 앨라배마주 소도시 몽고메리를 가로지르는 65번 고속도로에 한글로 적힌 ‘현대자동차를 환영합니다’라는 안내판을 보고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고 한다.
수입 구두 신어본 적 없어 경복고 출신인 정몽구 회장은 운동을 좋아해서 학창시절 럭비부 주장을 맡았다. 그는 “럭비에서 팀워크 정신을 배웠다”고 사석에서 자주 말한다. 듬직하고 의협심이 강했던 정 회장 주변에는 항상 친구가 따랐으며, 지금까지도 그런 유대는 지속되고 있다. 정 회장은 당시 교내 깡패를 혼내주기도 했다. 그의 고교동기인 손병두 전(前) 전경련 부회장은 “몽구가 ‘공부 잘하는 병두 건드리지 마라’며 교내 불량배를 혼내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사람과 함께 있기를 원하고 사람을 거느리고 부리는 데 익숙하다. 현대자동차써비스를 맡았을 때였다. 집이 멀었던 그는 회사 인근의 친구 아파트에서 잠을 자며 감색 점퍼와 군화 차림으로 늘 현장을 지켰다. 밤이면 공장 한편에 드럼통을 놓고 소주와 삼겹살을 수리공들과 나눠 먹으며 동고동락했다. 서울 원효로 3가 정비공장 앞 수퍼에서 작업을 마친 정비공들과 소주를 자주 마셨는데, 당시 함께 근무했던 직원들을 지금도 기억하여 안부를 묻는다. 정 회장은 직원과의 팀워크를 잘 만들어나간 덕분에 1977년에는 현대정공을 설립, 국내 레저용 차량의 새 장을 연 갤로퍼라는 히트작을 내놓기도 했다. 그는 현대·기아차 신입사원 수련회에 2001년부터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다. 재벌 오너 총수가 매년 신입사원을 직접 대하며 기업비전을 제시하고 격려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정 회장이 사람을 모으는 비결 중 하나는 소탈함과 검소함에 있다. 물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가풍이다. 즐겨 신는 신발은 오래된 국산 금강제화다. 외제 브랜드는 신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음식도 설렁탕과 불고기, 삼계탕 등을 좋아한다.
자동차 내수부진·노사분규 등이 과제 정몽구 회장의 앞에는 해결해야할 과제가 여전히 많다. 우선 자동차 내수시장이 계속 부진하다. 세계시장에서는 이제부터 강력한 견제를 받게 됐다. 점점 줄어드는 마진도 또다른 문제점이다. 환율 문제 등으로 2005년 1분기 영업이익은 30.1%나 줄었다. 단골로 터지는 노사분규, 오너 일가와 측근 핵심인력 중심의 의사결정, 다른 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방적이지 못한 이사회 운영 등에 대한 비판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새로 진출한 일관제철소 사업은 조만간 중국의 본격적인 철강공급으로 국내에서 심각한 공급과잉을 빚을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삼성의 이재용 상무 케이스와는 달리, 정 회장은 아직 아들인 정의선(鄭義宣) 기아차 사장에 대한 지분승계를 순조롭게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계열사인 엠코와 글로비스 등을 활용하려고 하지만 감시의 눈길이 워낙 많다. 현대차의 성장은 그야말로 이제 시작이다. 현대차그룹이 최근 눈부신 성과를 내고 있지만 아직은 세계 7위에 머무를 뿐이다. 2010년의 세계 5위 달성은 그리 간단한 과제가 아니다. 과연 정 회장의 리더십은 이 모든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지 주목된다.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회장이 미래 인재경영을 재차 강조하고 나섰다. 미래인재경영 정몽구 회장은 25일 제주 해비치 리조트에서 열린 '2004년 현대·기아차 신입사원 하계수련대회'에 참석, CEO 특강을 가진 자리에서 '글로벌 기업인의 자세'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정 회장은 특강에서 "현대·기아차 신입사원은 ▲투명하고 공정한 일처리로 신뢰받는 인재 ▲전문능력 배양과 상호간 협조 ▲도전과 개척의 벤처정신 ▲현대·기아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 ▲차세대 자동차 산업의 주역 역할 등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를 바탕으로 선배직원들이 노력한 결과 현대·기아차는 획기적 품질향상, 비약적 수출확대, 해외시장에서의 성공경영 등을 이루어 낼 수 있었고 현재 세계7위의 자동차회사로 성장했다"고 밝혔다. 정 회장은 이와 함께 "경기 침체 속에서도 현대·기아차는 정상적인 경영활동으로 고용안정을 유지하고 있고,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높아졌다"며 "향후 국민소득 2만달러 국가가 되는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회장은 그러나 "그동안의 눈부신 성장에도 불구하고 선진업체와의 기술격차, 아직은 약한 브랜드 이미지 등 분발해야 할 부분이 많다"며 "차세대 자동차산업 주역으로서 이러한 과제들을 극복해 세계 초일류 자동차회사를 만드는 주역이 되고, 그에 손색없는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줄 것"을 당부했다.
정몽구 회장의 경영스타일 의사결정이 매우 빠르다. 경쟁업체들 은 현대자동차의 빠른 의사결정을 높게 평가한다. 물론 다른 시각도 있다. 충 분한 검토 없이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정몽구 회장 개인의 경쟁력 매경이코노미는 ‘ CEO 경쟁력’ 평가를 위해 김기찬 가톨릭대 교수, 김성수 경희대 교수, 김태현 연세대 교수, 이항구 산업연구원 팀장, 주우진 서울대 교수(가나다 순) 등 5명 이 참여하는 평가단을 구성했다. 평가위원들은 전략 및 비전수립능력, 업무추진능력, 이해관계자와의 조정능력, 윤리경영 및 투명경영, 경영권 안정 등 5가지 기준으로 ‘CEO’경쟁력을 평가 했다.
현대차 그룹현황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요즘 '엔도르핀'에 충만해 있다. 최근 몇 년간 지속적으로 실천해 온 '월드 베스트 전략'을 열매맺는 시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정몽구 회장은 올해 '중간 시장을 공략하는 그저그런 자동차 메이커'라는 딱지를 완전히 벗어던질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실천 경영, 모범 경영을 몸소 실행하는 등 절치부심한 결과 현대차를 한차원 높은 경지로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시장에서는 여전히 정몽구 회장의 경영을 두고 설왕설래하고 있다. '어눌하다', '2%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차 내부 평가는 사뭇 다르다. '총수'로서 정몽구 회장은 비전, 꿈을 전파하며 미래 경쟁력 확보를 채찍질하는 '승부사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정몽구 회장의 미래 비전은 곧 현대차 미래라는 점에 이견은 없다. 정 회장은 미래에 대한 비전과 확신을 약간은 툰탁하게 느껴지는 언행 속에 감출 줄 아는 진정한 '고수'라는 평가다. 정 회장은 그 자신의 '인생 로드맵'과 '현대차그룹의 발전'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는 '일이 곧 내 인생'이라는 구세대(?)에 속해 있지만 그와 현대차의 향후 업적은 새로운 경지를 펼치려 한다.
정 회장의 경영철학 정몽구 회장은 그룹 '총수'다. 과거 총수는 그 자리에 있는 것만을 대접받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는 모든 것을 매듭짓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변했다. 확실한 비전, 실현가능한 과제, 전체 그룹을 슬기롭게 이끄는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정몽구 회장은 실천을 중시한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지론과 경영철학을 이어받아 현장 제일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정 회장은 말로 하는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실천하고 보여주는 '행동인'을 원하고 있고 스스로 그 같은 면모를 보이고 있다. 2001년. '품질 지상주의'를 표방한 정몽구 회장의 실천력은 그룹 전반에 강력한 파장을 일으켰다. 정몽구 회장은 결단력에서도 남다른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미국 시장에서 '10년 10만마일 보증제도'를 도입한 것이나 그룹 안팎의 우려를 잠재우며 과감히 중국 현지 투자에 나선 것은 정 회장의 '의지'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고 현대차 관계자는 말한다. 정 회장은 2001년 이후 국내 공장을 비롯해 미국 인도 중국 등 해외 생산거점을 직접 돌며 직원들을 두루 격려하고 있다. 일일히 사소한 문제까지 직접 챙기며 '애정어린'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 그를 바라보는 현대차 직원들의 시선은 따사롭다. 다른 그룹 총수들로서는 부러울 법하다. "단순히 그룹 2세라는 지위로 평가할 수 없다. 정몽구 회장은 그룹 창업자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직접적인 개입을 최소화하되 일단 개입하면 '신속, 과감, 결단'을 요구한다. 정몽구 회장이란 존재 자체가 그룹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현대차 고위 임원) 2004년=현대차, 환골탈태의 해 현대차는 이달 '쏘나타(프로젝트명 NF)' 출시를 시작으로 잇달아 세계시장 공략을 위한 전략 차종을 쏟아낼 계획이다. 국내는 물론 해외 유수 자동차 메이커들도 현대차와 정몽구 회장의 변신에 놀라워하고 있다. 정몽구 회장은 지난 2001년 '품질 경영'을 최대 화두로 제시했다. 1999년 이후 옛 현대그룹을 휩쓸었던 '왕자의 난'을 겪은 뒤 정 회장이 제시한 화두는 '월드 베스트 카를 만들자'였다. 자동차 전문그룹으로 거듭나 세계를 종횡무진 누비자는 비전이었다. 시장에서는 여전히 '정몽구 회장을 정점으로 한 현대자동차 과연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을까'하는 물음이 팽배해 있다. 그러나 현대차 관계자가 던지고 있는 답변은 자긍심으로 충만해 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휴대폰, TFT-LCD(초박막액정표시장치) 부문에서 세계 1위 업체로 우뚝 선 것도 몇 년 되지 않았다. 현대차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만년 하위 메이커가 될 것이라고 다른 업체들은 우리를 얕잡아 보지만, 이제 목격하게 될 것이다. 현대차는 새로운 미래를 써 나갈 것이다. 월드 베스트는 가까운 미래다." 정몽구 회장. 그와 현대차그룹의 행보가 한국 기업사에 새로운 장을 펼쳐 나갈 지 예의주시할 때다.
잭 웰치의 리더십 잭 웰치는 미국에서 가장 무자비한 경영자로 불렸던 사람이다. 1981년 그가 GE의 CEO자리를 인계받았을때 GE의 시장 총가치는 130억 달러였다. 웰치 회장은 미국기업 역사상 최고의 CEO로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 20세기를 대표하는 경영자로, 전반기는 GM의 슬로언 회장, 후반기는 GE의 웰치 회장 - 포천誌는 웰치 회장을 「월스트리트의 마이클 조던」으로 칭송 웰치 회장의 리더십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데, 이는 GE가 지난 20년간 탁월한 성과를 올렸기 때문 - 매출은 1981년 270억 달러에서 2000년 1,290억 달러(4.7배)로, 순이익은 15억 달러에서 127억 달러(8.4배)로 증가 ·자본 수익률이 20% 수준을 기록하여 미국 평균 12%를 훨씬 초과 - GE를 시장가치 5,300억 달러(41배)의 기업으로 만들었고, 자신의 연봉 역시 9,400만 달러(스톡옵션 포함)로 업계 최고수준 유지 - 미국 포천誌와 파이낸셜 타임스는 3년 연속(98~2000) GE를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선정
그가 20년간 GE의 CEO로 근무하면서 GE를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키워낸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1. 만약 그 일을 전부터 하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 했겠는가? 언제나 현재를 판단할 때 냉정함을 잃지 않았던 잭 웰치, 그가 지난 20년간 가장 경계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만약, 그 일을 전부터 하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 했겠는가?' 그것은 곧, 지금 하고 있는 사업이, 혹은 업무가 전부터 해 왔던 일이기 때문에, 장기적인 비전은 생각지도 못한채 "그냥" 답습하는 상태는 아닌가 점검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혹시라도 진지한 고민없이 계속 일을 진행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지어 과거나 혹은 인정에 얽매여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2. 1등과 2등이 아니면 버려라 고쳐라! 매각하라! 폐쇄하라! 잭 웰치는 시장 점유율에서 1등이나 2등을 차지하지 못하면 그 사업을 가차없이 정리했다. 1등과 2등...누군가는 결과지상주의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잭 웰치는 1등이나 2등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목표이자,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필수조건이라 믿었다. 때문에 자신들의 주력분야에 힘을 쏟고, 주력분야가 아닌 것은 그 일을 1등으로 하는 전문회사에 아웃소싱을 맡겼다. 결국 1등을 하기 위해선 가능성 있는 것만을 골라내는 뼈아픈 선택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그 선택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3. 당신은 조직에서 꼭 필요한 사람인가? 잭 웰치는 직원들을 상중하로 나누었다. 상위 20%와 중간의 70%, 그리고 하위 10%... 하위 10%로 분류되는 사람은 GE를 떠나야 했다. 모두들 잭 웰치의 이런 전략을 비난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하위 10%에 속하는 직원은 회사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해 이런 평가를 통해 끊임없이 하위 10%를 가려내, GE 직원들의 경쟁력을 높여 나갔다.
4. 차별하라! 하위 10%의 해고가 현실이었던 것처럼, 상위 20%에게 주어진 엄청난 혜택도 현실이었다. 상위 20%는 중위 70%에 비해, 두배, 심지어 세배 이상의 급료를 받았던 것이다. 또한 엄청난 스톡옵션과 승진기회 역시도 상위 20%만 받을 자격이 있었다. 차별화 전략은, GE직원들의 분발에 확실한 동기부여를 해주었고, GE를 일할맛 나는 회사로 만들어주었다. 누구나 상위 20%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자가 발전의 집단으로 변모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5. 열정없는 당신, 떠나라! GE에서 하위 10%로 분류되었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일 자체가 본인의 적성에 맞지도 않았고, 그래서 일을 즐기지도 못한 채 마지 못해 억지로 해왔다는 것이다. 지금 혹시 나의 업무가 재미있지 않다고, 일이니까 그냥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역시도 위험수위에 올라 있다. 잭 웰치는 그런 사람을 가차없이 해고해 왔다.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재미있게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함께 갈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잭 웰치는 어떤 능력보다, 또 어떤 기술보다 우선하는 것은 열정이라고 말했다. 열정없는 존재는 필요치 않다는 것이 잭 웰치의 기준이었다.
6. 항상 점검하라! 항상 체크하라 잭 웰치는 직원들에게 항상 높은 목표치를 던져 주었고, 직원들은 그 목표치를 어김없이 해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항상 점검하고, 항상 체크하라! 잭 웰치는 직원들의 목표에 끊임없는 관심을 표명했고, 단지 결과 뿐만 아니라 과정속에서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끔 일일이 커뮤니케이션하고 문제를 함께 해결해왔다. 심지어 그는 틈이 날 때마다 직원들과 쪽지를 주고받으며 일의 진척사항에 대해 얘기를 나누곤 했던 것이다. 말단 사원 한 명에게 주어진 업무조차도 잭 웰치는 절대 방관하지 않았다.
7. 배워라! 10년을 5년으로 단축시키는 방법 GE를 다른 기업과 차별화시켜 주는 핵심가치는 바로 "배운다"이다. "모토롤라가 10년 걸려 이룩한 것이라면 우리는 5년 이내에 이룩해야만 한다, 대신 우리는 다른 회사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배울 것이다" GE의 방식은 늘 이렇다. 그들이 배워야 하는 대상과 목표가 정해지면, 아마추어 대학생이든, 창업을 한지 1년이 채 안되는 중소기업이든, 그것이 누구고, 어디든간에 달려가 배웠다. 바로 그런 점이 GE의 저력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배워야 할 것이 아주 작은 것이라 해도, 그들이 최강의 기업이 되기 위해 필요한 어떤 것도 사소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배우기 위해 GE는 많은 것을 버렸다. 그것은 절차와 형식, 그리고 관료주의이다.
8. 절차와 형식, 관료주의에 굴복하지 마라 잭 웰치가 처음 GE의 CEO로 부임했을 때, 그가 가장 답답했던 것이 있다. 그가 결재를 하기 위해선, 말단직원부터 회장인 잭 웰치한테 오기까지 총 12단계를 거쳐야 했다. 잭 웰치에겐 그것은 쓸데없는 낭비였다. 결재를 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여러 단계의 인력들도 낭비였고, 여러번의 결재는 또한, 신속한 일의 진행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년 후, 지금 GE의 보고 과정은 12단계에서 6단계로 대폭 줄었다. "쓸데없는 보고서가 아니라면 훨씬 더 창의적일 수 있다!" 잭 웰치는 누누이 강조했다. 절차와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의적인 아이디어! 형식적인 보고서로 시간을 보내고, 인력을 낭비하기보다는 차라리 낙서처럼 갈겨쓴 아이디어 쪽지가 더 효율적이라고... 그 자신 또한 보고서를 기다리기보다는, 틈이 날 때마다 임직원들과 노트 한켠을 찢은 작은 메모 한 장으로 의견을 나누었으며, 절차와 형식의 파괴를 몸소 실천했다.
9. 필요하면 될 때까지 했다! "Boudaryless" 이 단어는 미국인들도 발음하기 힘들어 자주 틀리는 단어라고 한다. 잭 웰치는 GE의 직원들 앞에서 이 "Boundaryless"를 말하다 발음이 안돼 더듬거리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회장이 수많은 직원들 앞에서 발음을 틀려 가면서도 수십번, 수백번 이 말을 강조한 이유는 "Boundaryless" 벽없는 문화를 강조하고 싶어서였다. 이렇듯 잭 웰치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체면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될 때까지 반복하는 집요함을 보였다. 한번도 그 정도면 됐다고 대충 넘겨본 적이 없는 그의 열정 때문이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이 정도면 됐다! 혹은 대충대충 하자!" 잭 웰치가 우리의 이 말을 들었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10. 유리를 깨뜨려 줄 사람이 필요하다 (변화) "우리는 유리를 깨뜨려 줄 사람이 필요하다... GE는 반드시 변화할 것이다" 잭 웰치는 기업의 발전에 가장 필요한 것은 '변화'라고 했다. 그래서 항상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 바로 '유리를 깨뜨리는 사람'을 갈망해 왔던 것이다. 잭 웰치 또한 GE에서 그 자신도 유리를 깨뜨린 사람으로 기록되어 왔다. GE에 불어오는 변화의 새바람을 막지 않았고, 그것이 옳다면 언제든지 환영했던 잭 웰치, 그의 말대로 변화의 물결을 타지 못했다면 GE는 그저 과거의 거대한 기업으로 막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이제 변화는 21세기를 열어나가는 최대 화두 중 하나이다. 누가 먼저 변화의 흐름을 탈 것인가! 누군가의 시도에 그저 팔짱을 끼고 구경하거나, 해봤자 안된다는 패배의식으로 전체의 변화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내가 아니었나를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지도자들이 해야할 일 1. 축하하는 행사를 많이 만들어라. =파티 너무 많이 하면 회사가 너무 노는 분위기로 가서 안좋을 거 같다고요? 아닙니다. 축하할 일 있거들랑 많이 많이 하십시오. 그거야말로 공을 인정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만들어냅니다. 이겼는데, 성공했는데, 그게 소소한 일이라고 무시하고 지나간다고요? 저런... 기뻐할 기회를 마구 갖다 버리시는군요. 리더가 이걸 안해주면 아무도 안합니다. 좋은 일 하고도, 축하할 일 두고도, 썰렁하게 지나가면 안되지요.
2. 부하직원들이 모험을 할 수 있게 하라. 너무나 많은 경영자들이 직원들에게 새로운 일을 하라고 부추기다가도, 막상 시도해서 실패하고 나면 '작살'을 냅니다. 혁신과 실험을 원하거든 모범을 보이세요. 지도자가 과감하게 뭘 해보려다 실수할 수도 있지요. 실수했다구요? 구구절절 이유 설명하고 설교하실 필요 없습니다. 유머 좀 섞어서 가볍게 지나가세요. 그러면 직원들이 실수 한번 했다고 인생 끝나는 거 아니구나 하는 거 눈으로 보고 배우지요. 그럼 되는 겁니다. 또 한 가지, 그 조직 내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라고 해서 제일 많이 아는 사람은 절대 아니라는 거 명심하십시요.
3. 질문을 많이 하십시요. 리더란 질문하는 사람입니다. 회의시간에 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사람인양 직원들에게 물어보세요. "만일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지?" "왜 안될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렇다고 묻기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리더란 자신이 제기한 의문들이 토론을 불러일으키고 이슈를 만들고 나아가 행동으로 이어지는가를 확인해야지요.
4. 배짱과 감으로 밀고 나갈 줄 알아야지요. 지도자란 인기 테스트 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끌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미 '리더'인데, 자꾸 그 자리에 출마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인기에 연연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보세요. 이미 뽑혔다구요.
5.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솔직하세요. 보통사람들이란 당연히 나쁜 소식을 전하는 악역을 맡기 싫어하지요. 다음달에 직원 반 자를 거야, 이런 말 하기 어렵지요. 그래도 솔직하게 말해주어야 합니다. 비즈니스가 잘 안되면 안된다고, ... 지도자란 일이 잘못되면 책임을 지고, 일이 잘되면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넘겨주는 사람들이랍니다.
6. 상사와 부하직원도 결국 유유상종이랍니다. 낙관적인 전망을 갖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지도자들 밑에는 그런 사람들이 모인다네요. 또 그 팀 전체가 그런 분위기가 되고요. 불행한 팀이 승리하기는 어렵답니다. 그렇겠지요. 지도자나 부하직원이나 맨날 심란한 얼굴로 징징 울고 다니면 뭐가 되겠습니까? 결국 지도자의 일이란 부정적 사고와 싸우는 것이 아닐까요?
7. '비전'은 그냥 보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먹는 거냐. 물론 그것도 아니지요. 숨쉬고 더불어 살아가는 거랍니다. 비전을 말할 때는 이상하고 애매한 표현 쓰지 말랍니다. 직원들 헷갈려요. 과녁이 흐릿하면 맞추기 어렵지요? 회사가 직원들에게 어떤 보상을 해줄 것인지 정확하게 밝히세요. 그걸 선명하게 알면 직원들이 변합니다.
8. 최고의 선수를 만들어내라. 운동경기에서 뛰어난 선수가 많은 팀이 이길 가능성이 높지요. 네,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도자는 '우수 선수' 양성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베스트 플레이어는 어떻게 만드느냐? 첫째 평가를 잘해야지요. 그 자리에 제대로 된 사람 데려다 일 시키고 있느냐. 둘째 유능한 코치여야 합니다. 지침을 제시하고 비판하고 도와서 선수가 실력을 증진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셋째 지도자 자신이 자신감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감이 있어야 남을 인정하고 격려하고 신경쓰는 여유도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감있는 지도자와 함께 일할 때 직원들은 기꺼이 위험부담을 질 용기를 내고 꿈을 넘어서고, 별거 별거 다 하게 된다는 거 아닙니까. 여하간에, 이게 성공하는 팀의 '연료'와 같은 거랍니다.
"지도자가 되기 전에는, 당신에게 성공이란 오로지 당신 '자신의 성장'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된 당신에게 성공이란 '다른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잭 웰치
많은 수의 기업들이 리더십 개발에 실패하는 이유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이다. 첫째, 의도만 있고 시간과 자원을 투입하지 않는 경우이다. 실질적인 행동이 없으면 리더는 저절로 길러지지 않는다. 둘째, 말로만 리더십을 강조할 뿐, 실제로 새로운 발상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처벌함으로써 좌절시키고 마는 경우이다. GM이나 DEC, 웨스팅 하우스 등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추진하던 리더가 기존 이사회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중도에 퇴진당하고 만 사례가 있다. 셋째, 막대한 자원과 시간을 투입하지만 컨설턴트나 학자에게서 배운, 말만 잘하는 관리자만 양성하는 경우이다. 진정으로 필요한 리더십 양성은 이론이나 포장에 의해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고 현장에서의 실제 행동에 의해서만 달성된다.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두고 볼 때에, 기업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인재의 육성이며 그 중에서 리더십의 양성이라 할 수 있다. 크로톤빌에서는 매년 약 1만명의 GE 직원들이 리더십 트레이닝을 받고 있는데, 약 10억 달러의 예산이 투입되고 있다. 잭 웰치는 직접 크로톤빌의 교육 현황을 보고 받고 연수 프로그램 개발에 관여하며 직접 강사로도 참여하고 있다. 리더 육성 프로그램에 최고 경영자가 이 정도까지 관심을 가지고 헌신하는 예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GE가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잭 웰치는 GE의 전 구성원이 심득해야 할 GE의 Value 를 설정하고 이를 공유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고 전세계 GE 직원들이 항상 가지고 다니는 GE Value 라는 한 장의 카드를 통해 GE가 추구하는 이념을 살펴볼 수 있다. GE가치를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GE의 리더들은 항상 정직하고 성실함을 추구한다. 둘째, 분명하고 단순하고 현실에 기반을 두며 고객 중심적인 비전을 창조하며 이 비전을 솔직하게 모든 사람들과 공유한다. 셋째, 공격적인 목표를 세우고 과정을 분명히 인식하며 책임감과 열의를 가진다. 넷째, 우수함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으며 글로벌리즘을 이해하며 다양한 구성원의 글로벌 팀을 구성한다. 다섯째, 스스로를 추동(推動)하는 에너지와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며 이끌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변화를 추구한다. 또한 변화를 위협이 아니라 항상 기회로 본다. 여섯째, 경쟁 우위 확보를 위해 질과 비용, 스피드를 추구하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GE는 리더들이 이런 GE가치를 철저히 숙지하고 실천하도록 훈련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이런 훈련이야말로 크로톤빌이 존재하는 목적이다. 또한 "GE가치들을 얼마나 잘 구현하는가" 가 전 직원의 승진을 결정하는 최고의 기준이 되고 있다. GE 인사부는 상사와의 면담과 부서, 사업부문별 토의를 통해 각 직원들을 평가하는데, 이 평가의 두 가지 기준은 업무 실적과 GE가치의 실천 정도이다. 잭 웰치는 '아무리 업무 성과가 좋아도 GE가치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도 없다'고 까지 말한다. 기업의 장기적인 성공을 위해서는 전 직원이 공유하는 가치가 있어야 하며 이 가치에 기반해 리더들이 의사결정을 내려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GE의 리더육성책에서 또 다른 특징은 외부의 우수한 인재를 스카우트하는 데 적극적이란 점인데, GE는 사내 직원들이 차근차근 승진해 올라가는 것 못지 않게 외부의 우수 인력을 스카우트하는 데도 적극적이다. 외부 인력을 적극적으로 발탁하는 개방성을 통해 조직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다는 것이 GE의 정책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 인력들도 예외 없이 GE가치를 익혀야 하며 이 가치 공유를 통해 GE의 리더로서 자격이 되는 지를 평가받게 된다. 결국 GE가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중의 하나는 우수한 리더들 육성에 아낌없이 투자한다는 점이며 이런 리더육성책의 중심에는 GE가치가 놓여있는 것이다.
잭웰치의 인재 고르기 좋은 사람을 채용하는 것은 어렵다. 위대한 직원을 고용하는 것은 훨씬 더 힘들다. 그러나 승리하기 위해서는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하고 그들이 성공하고 성취하고 앞으로 나가도록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우수한 직원을 확보하기 위해선 채용 시 다음 세가지 덕목을 체크해야 한다. 첫째, 정직 순수(Integrity)다. 순수한 사람은 진실을 말하고 자기가 한 말을 지킨다. 둘째 관문은 지적능력(Intelligence)이다. 복잡한 현실 세계에서 똑똑한 사람들과 같이, 또는 그들을 이끌어갈 만한 폭 넓은 지식과 풍부한 지적 호기심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스트레스나 일시적 부진을 잘 콘트롤하고 성공을 즐기면서도 겸손할줄 아는 성숙함(Maturity)이다.
그런 연후에 4-E 1-P를 적용한다. 첫번째 E는 긍정적 에너지(Energy)다. 어떤 역경과 난관도 돌파하고 마침내 변화와 성취를 이뤄내는 마그마같은 꿈틀거림이 있어야 한다.
두번째는 다른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나눠줘 더불어 에너제틱하게 만들고(Energize) 영감을 불어넣어주어 불가능도 가능케 해내는 능력이다.
세째는 예스냐 노냐 양자택일의 결단을 내릴 예리한(Edge) 용기, 네번째 E는 실행력(Execute), 즉 주어진 업무를 완성하는 능력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P, 열정(Passion), 가슴 속 깊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일을 하는지를 본다.
끊임없이 평가 지도하고 자신감을 쌓게 하라. CEO의 비전을 부하들이 보고 체감하고 호흡하게 하라. 일선 직원들까지 비전을 공유하게 하라. 급여든 보너스든 보상책을 사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리더의 긍정적인 에너지와 낙관적인 생각이 전 직원의 피부 속까지 침투하도록 해야 한다. 긍정적이고 쾌활한 리더의 조직엔 긍정적이고 쾌활한 사람들이 가득 차고, 침울한 사람은 비슷한 무리에 둘러 싸인다. 솔직함과 투명함, 신용을 통해 신뢰를 확립하라. 해고 통보등 나쁜 소식을 전해야 할때도 얼버무려서는 안된다. 인기 없는 결정을 내리는 용기와 뱃심있는 결단력을 가지라. 리더는 인기 대회 출전자가 아니다. 리더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고 의문은 반드시 행동으로 답하게 하라. 만약..이라면, 왜, 어떻게를 끊임없이 던져라. 리스크 테이킹을 하고 학습도 먼저 실천, 모범이 되라. 월드시리즈에 우승하고도 샴페인 터트리지 않는 팀을 상상해보라.축하하라.축하는 긍정적인 에너지의 분위기를 만든다.
나는 종종 리더는 타고 나느냐 아니면 만들어지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답은 물론 둘다다. IQ나 에너지같은 타고나는 것도 있지만 자기확신같이 살아가면서....
웰치가 이런 말을 했군요.
"당신이 지도자가 되기 전에는, 성공이란 오로지 당신 자신의 성장을 의미했다. 그러나 지도자가 되었을 때, 이제 당신에게 성공이란 다른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 히딩크의 리더십[Gus Hiddink] TV시청률에서도 알 수 있듯이 히딩크의 등장은 축구에 대한 인식과 재미 를 한 차원 높여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한마디로 스타탄생이다. 축구 대표팀 내부에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선수들간에 경쟁 심이 높아지고 훈련 분위기가 진지해졌다. 무엇보다도 선수들이 '열심히 뛰면 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생각하는 축구'를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러한 히딩크식 축구가 과연 성공을 거둘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고질병을 앓고 있는 한국축구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 으며 설혹 그의 실험이 실패하더라도 비싼 돈이 아깝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정신력 강조하는 ‘심리전 리더십’ 거스 히딩크 감독은 심리전(心理戰)의 대가이자 스포츠계에서의 리더십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표상이다. 히딩크 감독이 이뤄낸 두 차례의 월드컵 4강 진출과 한 차례의 유럽 챔피언스리그 우승, 그리고 한 차례의 4강 진출은 모두 자신이 이끄는 선수들의 정신력과 심리적인 일치단결을 탁월한 용병술을 통해 100%까지 이끌어 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세계 축구의 변방인 한국 대표팀을 이끌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일궈낸 것과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벤에서 유럽 톱클래스의 선수 한 명 없이 이룬 챔피언스리그 우승(1987~1988 시즌), 그리고 올 시즌 4강 진출은 히딩크 감독의 지도력을 빼고서는 모두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다. 히딩크 감독의 리더십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자신이 이끄는 팀 선수들의 심리상태를 장악하고 확실한 동기부여를 통해 자신감과 성취욕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또 프로스포츠와는 필연적인 관계인 언론 관계에 매우 능숙하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히딩크 감독이 팀 관리에서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은 팀의 대표적인 스타플레이어를 확실한 자신의 부하로 만드는 일이다. 팀의 대표격 선수를 굴복(?)시키면 팀 관리는 저절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히딩크 감독의 ‘스타 길들이기’와 관련해서는 유명한 일화들이 있다. ‘선수 길들이기’의 달인 1980년대 말 PSV 에인트호벤에서 지휘봉을 잡고 있을 당시 히딩크 감독은 브라질의 떠오르는 스타였던 호마리우를 영입했다. 그러나 브라질 선수 대부분이 그렇듯 호마리우의 성격은 지나치게 자유로웠다. 지금도 그렇지만 PSV는 당시에도 경기 당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오전 10시에 팀 훈련을 시작하는데 호마리우는 매일 정확하게 10시에 맞춰서 클럽하우스에 나타나곤 했다. 10시가 훈련시작 시간이면 다른 선수들은 9시30분쯤 나와 훈련복으로 갈아입고, 훈련시작 10분 전에는 코칭스태프로부터 오늘의 훈련 내용을 듣는 등 준비를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호마리우는 언제나 딱 10시에 맞춰서 나타났고, 그래서 정작 훈련을 위해 그라운드에 나오는 것은 항상 다른 선수보다 늦었다. 더구나 코칭스태프로부터 훈련내용을 듣는 일은 거의 없었다. 상황이 이랬지만 10시를 넘기면 벌금을 내도록 팀 규칙이 정해져 있어 히딩크 감독으로서는 마땅히 질책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낸 꾀는 이랬다. 히딩크 감독은 “내일 10시에 경기와 관련한 팀 미팅을 할 예정이니 절대 늦지마라. 늦으면 평소의 벌금 두 배를 매기겠다”고 공개적으로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히딩크 감독은 자신의 시계 바늘을 10분 앞당겨뒀다. 물론 다른 선수들은 평소처럼 30분 전부터 클럽하우스로 나왔지만 10시에 꼭 맞춰 나타나던 호마리우는 이날도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히딩크 감독은 작전대로 10시10분 전부터 회의를 시작했다. 팀 전원이 회의 중인 가운데 호마리우는 정확히 10시 클럽하우스의 문을 들어섰다. 그리고는 ‘정각에 나왔으니 아무 문제가 없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곧 “왜 늦어놓고 아무 말도 없이 자리에 앉느냐. 팀 전원에 사과하고 벌금을 내라”는 히딩크 감독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호마리우는 벽에 걸린 시계를 가리키며 “지금이 딱 10시인데 무슨 사과와 벌금이냐”고 항의했지만 히딩크 감독의 답변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내가 말한 10시는 지금 내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의 시간으로 정한 것이다. 내 시계는 이 팀의 보스인 감독의 시계이고 지금은 10시10분이다. 억울하면 다른 팀을 알아봐라.” 호마리우는 잠시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벌금을 내고 사과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부터 그는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훈련시작 30분 전에 클럽하우스에 나왔다. 히딩크 감독은 원하는 것을 얻었다. 한국 대표팀을 맡았을 때 히딩크 감독의 선수 길들이기 대상은 안정환이었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팀을 맡은 지 1년이 지날 시점까지 이탈리아 세리에A 페루자에서 뛰고 있던 안정환을 거의 팀에 합류시키지 않았다. 이탈리아 리그의 일정과 대표팀의 소집일정이 잘 맞지 않았던 탓도 있었지만 당시 국내 유일의 빅리그(이탈리아, 잉글랜드, 스페인의 축구 리그의 규모와 수준이 세계 최고여서 통상적으로 쓰이는 말) 진출 선수인 안정환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감독의 지시사항이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투사로 만들 필요가 있었기에 의도적으로 배제한 측면도 있었다. 히딩크 감독의 노림수는 안정환이 주제로 오른 인터뷰마다 잘 드러났다. 그는 인터뷰 때마다 안정환이 페루자에서 베스트11에 들지 못하는 점을 지적하며 “아무리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라도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컨디션을 유지할 수 없다. 안정환의 기량이 뛰어날지는 모르나 팀에서 정기적으로 경기를 소화해야 베스트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으니 그때쯤 소집하겠다”고 말했다. 때로는 “안정환은 소속팀에서 베스트11으로 뛰지 못하므로 완전한 세리에A 선수가 아니다”는 극언(?)마저 서슴지 않았다. 히딩크 감독의 길들이기는 안정환이 대표팀에 합류한 시점에서 더욱 뚜렷해졌다. 파주 국가대표팀 트레이닝센터에 나타난 안정환의 모습은 벤츠 SL600을 타고 매니지먼트사의 호위를 받는 등 그야말로 개선장군처럼 휘황찬란했다. 히딩크 감독은 이 장면을 2층 감독실에서 창문을 통해 모두 보고 있었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안정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날 오후부터 시작된 훈련에서 안정환은 항상 비주전팀에만 기용됐다. 이런 히딩크 감독의 작전은 이전부터 언론을 통해 칼날처럼 날려댔던 독설과 함께 안정환의 승부욕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안정환은 부드러운 퍼머넌트가 들어간 최신 헤어스타일을 손질하지 않은 채 훈련에만 매달렸다. 항상 깔끔하기만 했던 얼굴도 면도를 하지 않아 꺼칠해졌다. 훈련에 나서는 그의 눈에는 전에 없는 독기가 넘쳐흘렀다. ‘이래도 나를 무시할 수 있느냐’는 무언의 시위가 묻어났다. 안정환이 이처럼 달라진 모습을 보이자 그와 포지션 경쟁을 벌어야 하는 다른 선수들도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고, 결국 대표팀 전체의 훈련 분위기는 한층 고조됐다. 히딩크 감독은 안정환을 ‘왕따’시키는 작전으로 자신이 원하는 팀 분위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후에 “안정환의 능력에 대해서는 이미 확신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정신상태를 좀 고쳐놓을 필요가 있었다”는 말로 자신이 심리전을 펼쳤음을 시인했다. 자신감 불어넣는 능력 뛰어나 그러나 히딩크 감독이 이처럼 선수들과의 신경전을 통해서만 팀 전력을 향상시켰다면 그를 리더십의 대가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 능력에서 더욱 탁월하다.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 선수들은 첫 경기였던 폴란드전 전날 밤 히딩크 감독의 방으로 한 명씩 불려갔다. 좀처럼 개인 미팅을 하지 않았던 히딩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