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관람
이희근
전북수필문학회에서는 2019년봄철문학기행 대신에 청와대를 관람하기로 했다. 5월 23일(목)에 전주종합경기장 서문(일명 야구장정문) 앞에서 예정된 시간보다 약간 늦게 출발했다. 오전에 국회의사당을 방문했지만 청와대의 일정 때문에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경북궁 주차장에 주차된 관광버스 안에서 일일이 신분증을 확인한 후, 청와대 입구 안내소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지급된 목줄을 차고, 영상을 관람하고, 안내자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노란 병아리 신세가 되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한번쯤 가봄직하다는 생각으로 참가했을 뿐, 처음부터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예상했던 대로 통행하는 길 외에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기념사진을 촬영할 장소도 한정되어 있었고, 안내하는 사람들 말고는 그곳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청와대 ‘관광’이나 ‘방문’이란 용어 대신에 ‘관람’이라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본관 정면에 있는 네 개의 돌기둥이었다. 우리 고장 황등에서 채취한, 하나의 원석으로 된 기둥들이 웅장한 위용을 뽐내며 푸른 기왓장들이 바람에 날리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었다. 반면에 가장 아쉬운 것은 주위의 원시림 같은 울창한 숲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보지 못한 것이었다. 길가에 심어놓은 연약한 화초와 작은 나무들을 보며 걸어다녀야 했다.
경내 관람을 마친 후에, 칠궁과 사랑방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관람할 수 있었다. 칠궁은 왕의 어머니가 된 일곱 후궁의 신주를 모신 곳이고, 사랑방은 대통령의 해외순방 중에 받은 선물들을 전시하는 곳이었다. 나는 칠궁을 택했다. 어차피 사랑방은 주차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나면 들어가 볼 수 있을 거라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칠궁은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와 더불어 조선시대 왕실에서 관리한 사당으로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매년 10월 넷째 주 월요일에 ‘칠궁제’를 지낸다.
청와대 경내에서와는 달리 칠궁 안에서는 발이 닫는 대로 자유로이 돌아다니며 자기가 원하는 것을 골라서 볼 수 있었다. 각 궁 앞에 있는 안내판을 읽으며 육상궁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 안의 한 여인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영조의 어머니이자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였다.
숙빈 최씨는 우리고장 정읍 태인 출신이었다. 구중궁궐에서 외롭게 지내던 여인이 모처럼 동향인과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자기와 인연이 많은 대각교에 대하여 안부를 묻고 있었다.
대각교는 태인 동진강 위에 세워진 다리이다. 지금 그 다리 밑은 태인미륵불교의 성지가 되어 매년 전국에서 찾아오는 많은 신도들의 집회장소가 되고 있다. 그곳에는 숙빈 최씨에 대한 일화가 새겨진 비가 세워져 있다.
숙종 때였다. 둔촌 민유종이 영광군수로 부임하러 가는 도중에 잠시 대각교에서 쉬고 있었다. 그 때 일행 앞으로 지나가는 거지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는 민군수의 여덟 살짜리 딸과 동갑이었고, 얼굴도 많이 닮아 보였다. 출신을 물으니 성은 최씨며 부모가 없는 무의탁 소녀였다. 비록 옷은 남루했지만 그 소녀는 용모가 단정하고 총명해 보였다. 자기 딸과 함께 생활하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함께 가자고 청했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으니, 바로 그 소녀와 대각교가 맺어진 인연이었다.
숙종의 첫 부인인 인경왕후가 승하하고 민씨를 왕후로 간택하니 그가 바로 민유중의 딸이었다. 그때 민씨 왕후는 대각교에서 얻은 최씨를 상궁으로 옆에 두었다. 그 뒤 숙종이 장희빈의 아름다움에 빠지고, 민씨 왕후가 궁에서 쫒겨났을 때, 최씨는 밤낮으로 민씨 왕후를 위하여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렸다.
어느 날 밤에 기도를 올리고 있을 때였다. 마침 암행에 나섰던 숙종이 이를 발견했다. 옛 주인을 사모하는 거룩함에 감복하여 그녀를 왕의 곁에 두었고, 결국은 왕자를 낳았다. 그가 바로 뒷날의 영조였다.
최씨 부인은 상궁에서 숙빈으로 승격되었다. 최숙빈은 고향인 태인의 현감에게 명하여 친척을 찾았으나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었고, 부모의 묘도 찾지 못했다. 숙종 실록에 의하면 「숙종 20년 9월 13일에 양조를 낳았으며 숙종 44년(1718년) 3월 9일에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조 4년에 박필현(朴弼顯)의 난이 일어났을 때 영조 어머니의 고향이어서 관대하게 용서했다고 한다.
육상궁에서 숙빈 최씨와 헤어진 후 사랑방으로 향했다. 사랑방의 1층은 기념품 판매장과 넓은 휴식공간이었고, 2층은 해외순방 중에 받은 선물의 전시장이었다. 선물이란 주고 받는 두 사람의 정표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진열된 선물들에 특별한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듯, 그저 슬슬 눈요기만 하고 돌아다녔다. 오히려 한쪽 빈 공간에 마련된 모의 대통령집무실과 경호차량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념사진을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한바퀴 돌고, 1층으로 내려와 빈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을 때였다. 갈길이 멀다며 서두르자는 소리가 들려와서 얼른 버스에 올라탔다. 기흥휴게소에 도착하여 화장실에 다녀오니, 한쪽 넓은 공간에 간이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여성회원들이 정성껏 마련한 홍어회무침과 막걸리로 기분을 전환하며 청와대 관람행사를 마무리했다. 역시 행사의 마무리에는 막걸리가 최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