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이화여대 임현진 교수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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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존재’와 ‘테크네’ 개념을 통해 보는 기술시대
이제 우리는 ‘인공지능’(AI)이라는 말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매일 삶의 일부가 된 다양한 챗봇 상담 서비스, 쇼핑 앱이나 유튜브의 추천 기능, 특히 챗GPT와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 등은 우리의 일상을 좀 더 편하고 안전하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오늘날 ‘첨단 과학기술’이라는 말은 인공지능 기술과 직결되어 거의 같은 의미가 된 듯하며, “인공지능 기술을 사용한…”과 같은 문구나 로봇의 이미지는 광고의 소재로 흔하게 나타나고 있다.
과학기술 분야와 관련된 과목들이 교육 커리큘럼에서 필수적인 과정이 되어가면서 전반적인 교육 시스템도 변하고 있다. 또한 인공지능 기술이 삶의 다양한 영역에 광범위하게 응용되면서 데이터가 거대한 양으로 축적되고 있다. 이를 통해 인간이 그간 도달할 수 없던 정확도의 결과를 불과 몇 초 안에 얻어내는 이 시대의 경험은 분명히 새롭고 경이롭다.
그러나 사실 기술문명으로의 이 같은 변화가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인지 의문스럽기도 하다. 미래에 대한 수많은 예측은 마치 우리 모두가 빛의 속도에 가깝게 달려가는 열차에 올라탄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막상 주위를 둘러보면 인류는 수천 년 전부터 제자리에 멈춰 서 있는 것 같다. 이 시대가 어떤 새로운 문명의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는 흥분된 대중매체의 알림은 자주 울려오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것은 생활을 좀 더 편리하게 만드는 것에 해당할 뿐이고 인간이란 어떠한 편리함에도 곧 익숙해져 참신함은 금방 진부함이 되어 일상에 묻히기 마련이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독교 신앙의 바탕이 되는 삶의 의미구조가 인공지능 기술로 인해 근본적으로 변할 것인지는 더욱 의문스럽다.
이번 달부터 필자가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하고자 하는 “하이데거 읽기를 통해 보는 인공지능의 신학적 의미”는 이러한 놀라움과 의문스러움을 동시에 일으키며 확대되고 있는 과학기술 주도의 문화를 한 시민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를 잠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은 인간이 도구로 쓰기 위해 생산한 인공지능이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디스토피아적 상상으로 과학기술을 전적으로 거부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유토피아적 희망 속에서 인간과 기계이웃이 평등한 권리를 누리며 공존하는 미래를 준비하자고 제안하려는 것도 아니다. 인공지능이 세탁기나 자동차와 같이 단지 생활을 편리하게 만드는 좀 더 복잡한 기계적 도구일 뿐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연재를 통해 필자는 이러한 다양한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일상에 점점 더 깊게 스며들고 있는 인공지능 기술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경이롭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덤덤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기술의 시대를 진단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필자는 이를 철학자 하이데거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 나타난 용어 ‘공동존재’와 그의 에세이 “기술에 대한 논구”에 나타난 용어 ‘테크네’를 두 개의 키워드로 삼아 논할 것이다.
왜 하이데거인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한 독일 철학자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존재와 시간』(1927)은 서구 전통적 사고의 흐름에 큰 획을 그은 독특한 사유를 드러냈다. 특히 그의 에세이 “기술에 대한 논구”(1954)는 과학기술과 우리 삶의 관계에 대한 통찰을 드러낸 저작으로 잘 알려져 있기에 과학기술과 관련된 현대적 삶을 이해하고자 할 때 자주 거론된다. 따라서 하이데거 사상을 통해 우리의 삶과 과학기술의 관계를 살펴보며 이 시대를 진단하는 것은 유용한 일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주제를 다룬다면 굳이 철학자의 사유 틀을 가져오지 않고 성서에 기반하여 과학기술과 인공지능 중심의 시대를 진단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물론 기독교 신앙과 이를 학문적으로 탐구하는 신학을 합리적 사유와 철학으로 대신할 수는 없다. 신학은 철학이 추구하는 일관된 방법론적 엄밀성을 넘어서는 독특한 기독교 신앙 체험의 의미를 탐구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신학과 철학의 차이를 늘 염두에 두면서 한쪽을 다른 한쪽에 종속시키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철학적 사유는 신앙과 혼돈됨 없이 오히려 신앙을 더 선명하게 밝혀주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면 신학은 철학에 종속되어 유사철학이 되거나 또는 철학과 적대관계에 있거나 하는 양극단에 머무르지 않고 신앙의 주체인 우리 자신이 처한 사상사적 위치와 비판적 시대정신을 일깨워주는 필수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철학의 역할을 통해 얻게 되는 측면을 외면한다면 신학은 기복신앙과 기득권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기 쉽다. 그러면 신학은 각 시대를 지배하는 권력의 입맛에 맞춰진 개인적 또는 사회적 욕망에 신성한 가치를 부여할 방법만을 강구할 것이다. 그러나 철학이 제공하는 비판적이고 합리적 사유를 지금 이 땅의 우리 시대가 처한 사상사적 위치를 둘러보는 데에 활용한다면, 독단과 혐오를 강화하는 권력에 봉사하는 신앙이 아닌, 그 시대가 처한 삶을 늘 새롭게 성찰하게 만드는 살아 있는 신학이 될 수 있다. 사실 서구의 기독교 신학 자체가 유일신관이 제공하는 예언자적 통찰과 고대 그리스로부터 전해진 합리적 사고 간의 긴장을 통해 나타난 탐구의 영역이다. 이러한 점에서 필자는 하이데거 읽기를 통해 과학기술이 주도하는 이 시대의 삶을 신앙인으로서 진단해보는 일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에 따라 필자는 특별히 『존재와 시간』에 나오는 ‘공동존재’와 “기술에 대한 논구”에 제시된 ‘테크네’라는 두 용어를 키워드 삼아 연재를 진행하고자 한다.
할리우드에서 일어난 일
하이데거의 두 용어를 살펴보기 전에 작년 미국 할리우드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회상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사건은 인공지능이 미래의 인간 삶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확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현시점에서는 인간의 창조성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작년 5월 2일에 시작하여 9월 27일에 종료한 미국작가조합과 배우조합의 파업이다.
파업을 시작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제작사가 작가들로 하여금 챗GPT와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을 사용하여 작업을 하도록 강제하고 이 AI를 공동 작가로 간주하여 인간 작가들에게 기존 원고료의 절반만 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이에 격렬하게 반발하였고 결국 타협을 통해 제작사의 이러한 요구가 금지되었다. 그러나 영화나 게임을 제작하는 스튜디오들이 단역 배우들의 이미지를 스캔하고 복사해 붙여 쓰겠다고 하였을 때 이를 완전히 금지시키고자 한 배우조합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만 스캔하려면 해당 배우에게 허락을 받고 출연료도 지급해야 한다는 등의 조건으로 합의가 이루어진 정도이다.1
그런데 만약 당시 할리우드의 작가와 배우들로 구성된 조합원들 대부분이 파업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고 여론의 지지도 그리 높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훗날 우리나라에서 이와 유사한 사태가 일어난다고 가정할 때 언론과 지식인들이 인공지능 사용의 확대로 경제적 이득을 누리는 측의 편에 서서 이 파업을 현대판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 산업혁명 시기에 영국에서 일어났던 기계파괴 운동)이라고 비판하며 시대에 뒤떨어진 행태로 몰아간다면 일반 대중들이 작가나 배우들의 파업을 지지할 수 있을까? 만일 제작사에서 영화나 게임을 만들 때 단역 배우들의 얼굴을 허락 없이 무단으로 복제하여 쓴다 해도 당사자들은 이를 일일이 확인할 방법도 없고, 또 확인한다고 해도 이로부터 보호받을 관련법이 세워져 있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정치적·경제적 차원에서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국회의원들이 이 문제가 자신의 정치력 확보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보고 창작자들을 보호하는 법안 발의를 계속 미룬다면 어떻게 될까? 소수의 기술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인공지능 기술 분야가 자본의 이윤을 창출하는 민간 기업들의 핵심 산업이 되고 언론과 지식인들이 이들의 편에 선다면 주로 소비자 역할을 하는 일반 개인들은 어떤 다른 입장을 취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들은 일반 소비자들과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창작자의 능력이 생성형 인공지능의 사용 기술로 격하되거나 또는 완전히 대체되는 분위기를 따라가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고 해보자.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인이기 이전에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일반 소비자이기 때문에 경제 논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보고 이를 그냥 받아들인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챗봇을 통한 신앙상담이나 설교봇을 도입하는 온라인 교회도 찬성할 것인가? 초지능적 존재자가 신을 대체할 미래에는 현재와 같은 종교가 사라질 것이라는 다소 극단적인 주장에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물론 집 거실에 놓여 있는 인공지능 비서의 수준을 볼 때 챗GPT가 아무리 뛰어난 소설이나 영화 스크립트나 설교집을 작성해줄 수 있다고 해도, 미래의 인공지능이 현재의 오프라인 교회 공동체를 대체하리라 상상하기는 아직 무리가 있다. 그러면 목회자들이 생성형 인공지능을 사용하여 설교 준비를 한다고 하면, 그리고 이에 따라 목회자의 노동시간과 보수를 조정해야 한다고 누군가가 주장하면 이것은 받아들일 만한 일인가?
이런 일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날 때까지 본격적으로 생각해보는 일을 미루어야 할까? 올지 안 올지 확실치 않은 미래, 사람과 인공지능을 전혀 구별하기 어려운 가운데 사람이웃과 기계이웃이 공존하는 그러한 미래가 마치 이미 온 것처럼 논의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미래가 결코 오지 않을 것으로 확신하면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방관만 할 수도 없다. 앞서 언급한 할리우드 파업처럼 인간의 통찰력과 창의성이 비용 절감을 근거로 오히려 평가절하되는 상황을 우리는 이미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태의 의미를 제대로 진단하고자 하는 노력 정도는 해볼 수 있다. 이를 통해 과학기술 주도 문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의미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이 연재의 첫 번째 키워드인 ‘공동존재’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우리 각자는 공동존재
하이데거가 말한 ‘공동존재’(Mitsein)란 우리는 늘 타인과 함께 있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의미로 들린다. 그러나 단순히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사회적 동물이라는 의미인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것은 참 애매한 말이다. 누가 시키는 대로 산다 해도 결국 그것은 나의 선택을 거치는 것이므로 우리의 삶은 각자가 살아가는 삶이다. 그런데 그 선택은 결국 대개 이미 남들에 의해 규정된 바를 따르는 일이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우리가 각자로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 ‘공동존재’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과학기술의 영향이 크게 확대되고 있던 20세기 초에 이러한 ‘공동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이라는 메시지가 담긴 저서 『존재와 시간』을 저술하였다. 서구가 1차 산업혁명을 거친 후 2차, 3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던 시기, 즉 인공지능 산업으로 대표되는 지금의 4차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한 기반이 닦이던 때이기도 하다.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하이데거가 과학기술 자체를 반대하고 기술문명의 혜택을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보다는 삶을 지나치게 규정하는 수량적, 계산적, 정밀과학적인 사고 유형이 주된 가치 판단의 근거가 되어 학문과 삶의 위기를 가져오는 시대 상황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규정이 지배하는 삶의 흐름이 오랜 서구 전통에서 이어져 나오는 존재자 중심의 사고, 즉 존재자 간의 가치서열에 몰입하는 사고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존재자’라는 한자어를 우리말로 이해하자면 ‘있는 것(사람)’ 과 ‘~인 것(사람)’이 될 터인데, 가끔 이 말은 ‘있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에서처럼 굳이 무엇이 있는지를 밝히지 않아도 재력과 같은 힘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들린다. 사실 이것이 전혀 다른 뜻이라고도 볼 수도 없는 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자 중심의 사고는 일상 속에서 우리 각자로 하여금 무엇이 이러하다를 결정케 하는 ‘남들’2의 가치기준에 따라 주로 행해지는 삶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각자는 스스로 남들을 형성하는 한 일원이 되고자 하면서 동시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남들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기에, 우선적으로 남들이 추구하는 것을 이루고 성취한 후 안정감을 얻게 된다. ‘있는 사람들’이라는 우리말 표현에 전제되는 재력은 남들이 보증해주는 안정감을 얻는 여러 수단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인간존재자가 돌이나 기계와 같은 사물이나 동식물 등의 생명체들과 다른 점이 이러한 삶을 규정된 본성을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살아간다는 데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평소대로 살 가능성과 동시에 남들에 얽매이는 평균적 일상을 넘어 자기 자신만의 삶을 물을 가능성도 함께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남들에 속하는 삶이 무의미해지고 본래적인 자기에 직면하는 이 가능성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통해, 즉 나는 없을 수 있었고 제한된 시간 안에서만 있으며 언젠가는 없어질 존재자라는 것을 자각하는 경험을 통해 드러난다. 남들로 사는 나와 참 나로 사는 나의 가능성 사이에서 움직이는 구체적 사태에 각자 처해 있다는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이라는 말 대신 ‘현존재’라는 말을 쓰지만, 무엇보다도 이 현존재라는 말 속에는 우리가 각자 살아가지만 늘 남들을 바라보고 비교하고 남들이 원하면 나도 원하기도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러니까 단순히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우리 각자가 늘 구체적 상황에서 두 가능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보통은 수많은 사물들, 도구들, 타인들에 둘러싸여 이에 몰입하느라 나 자신에 직면하지 못하는 일상을 살아가지만, 또한 이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함을 깨닫고 남들의 눈들에 지배되지 않는다면 ‘나는 본래 누구였던 것일까?’라는 물음에 직면할 가능성도 안고 있는 것이다.3
우리가 이러한 공동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은 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말 같지만 사실 이는 오히려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에 어둠에 싸이고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삶은 우리에게 공기처럼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남들 속에 묻혀 있으면서도 많은 경우 그것이 본래적 내 모습이라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본래의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오히려 불안에 휩싸여 피하고 싶어 한다. 이 글의 첫 번째 키워드인 공동존재라는 말은 우선 대개 존재자 중심적 사고의 일상 속에 사는 우리의 삶을 이렇게 드러내 밝히는 용어이다.
시적인 것, 테크네
우리 각자가 공동존재라는 것은 우리가 존재하는 것들에 우선 몰입하면서, 즉 존재자 중심으로 사고하며 살아가는 상황과 관련된다. 그러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자 중심이 아닌 사고와 삶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물론 그것은 있는 것들을 다루고 쓰는 데에 몰입하기를 그치고 본래적인 자신에 직면하는 가능성 안에서 열리는 사태일 것이다. 즉 존재자들을 있게 하는 존재 자체라는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사유하면서 겪는 체험이다. 그런데 이것은 빅뱅과 같이 자연적 인과관계에서 최초의 원인자를 찾으려는 사고방식과는 다르다. 또한 이 사유는 모든 있을 것들을 창조한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최초의 원인도, 선한 창조자도 결국 이러저러한 규정으로 구성된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사고와 신앙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 사유와 서로 배타적인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있는 것들을 있게 하는 근원적인 존재 사건이 늘 존재자에 몰입하는 우리에게 우선 대개 숨겨져 있는데 서구 사상사에서도 이러한 은폐가 지속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 본래적 자기에 열리는 이러한 시원적 사유가 우리의 주제인 과학기술과 인공지능 시대를 진단하는 일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존재자에 대한 기존의 모든 판단을 잠시 접어두고 존재의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이러한 사유 방식을 과학기술에 적용하면 우리는 과학기술이 드러내는 새로운 사태로 이끌리게 된다. 그 새로운 사태로서 하이데거가 “기술에 대한 논구”에서 제시하는 바는 우선 기술적인 것, 즉 기술적으로 ‘있는 것’들과 기술의 본질이 다르다는 것을 밝히는 데에서 시작한다. 기술적인 것은 구체적인 장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기계적 도구들과 이를 가능케 하는 계산적 능력의 총체이다. 그러나 기술의 본질은 기술적인 것들의 시원을 통해 밝혀지는 기술의 본래적 의미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 시원은 ‘기술’이라는 의미의 ‘테크닉’, ‘테크놀로지’의 어원이 되는 고대 그리스어 ‘테크네’(τέχνη), 즉 이 글의 두 번째 키워드에서 발견된다.4
당시 고대 그리스에서 테크네의 의미는 예술작품과 수공예 등 모든 제작을 아우르는 ‘포이에시스’(ποίησις)의 일종이었다. 포이에시스는 시(詩)의 어원으로서, ‘숨겨져 있던 것을 앞으로 끌어내어 놓는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또 ‘진리’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아’(ἀλήθεια)의 문자적 뜻인 ‘비은폐’라는 의미와도 통한다. 결국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과학기술은 본래 인간의 제작을 통해 숨겨져 있는 것을 드러내어 우리 앞으로 가져다 놓는 시적인 진리의 한 방식이었다. 엉뚱하지 않은가? 기술적인 것들의 근원을 찾아가 보니 ‘시’가 나온 것이다.5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 시적인 것은 과학기술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 바뀌고 있는 취업시장과 대학 커리큘럼도 시적인 사유를 다루는 인문학보다 코딩이나 데이터 사이언스 등의 분야를 더 장려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것만 보아도 두 분야는 서로 상극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것은 서구가 근대 이후 수학적이고 계산적인 정밀함에 우위를 부여하고 이에 과몰입하여 과학기술의 시적인 진리의 차원을 고갈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술은 오늘날 자연과 인간존재자 모두를 몰아세워 에너지 자원으로 비축해두고서 최종적 소모품으로 사용하기 위한 수단적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을 통해 오늘날 비은폐로서의 진리는 그 포이에시스적 진리를 숨기고 가리는 것 자체로서의 ‘진리’가 되고, 수많은 기술적인 것들은 기술의 시원적 본질, 즉 시적인 차원을 숨기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면 테크네로서의 기술에 대한 이해는 앞서 밝힌 공동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의 삶의 기본 사태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또 예시한 할리우드 파업의 경우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후 필자는 이 물음을 다루면서 오늘날 과학기술 시대의 의미를 살피고 진단하는 이 연재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이 물음을 다루기에 앞서 다음 회에서는 먼저 인공지능의 역사를 간략하게 다룰 것인데, 이 역사는 공학적 성취의 역사라기보다는 인간을 닮은 지성적 존재자를 창조하고자 하는 인간 욕망의 역사에 더 가깝다. 오래전부터 인간은 자신과 닮은 사물을 만드는 일에 호기심을 가져왔다. 오늘날 인공지능 기술의 놀라운 성과는 인류의 마음 깊이 늘 자리 잡고 있는, 나와 닮고 편리한 유사인간적 사물을 만들고 싶은 욕구 발현의 현대 버전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음 회에서는 ‘인공 이웃’에 대한 갈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공동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주(註)
1 해당 파업 종료와 함께 작성된 최종 임금 협상 타협안이 다음의 웹사이트에 요약되어 있다.(bit.ly/4avJAad)
2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옮김, 『존재와 시간』(까치, 1998), 159-181. 이기상은 독일어 ‘das Man’을 ‘그들’이라고 번역하였는데, 필자는 우리말의 일상어 어감에 따라 ‘남들’이 더 적절하다고 보기에 이 번역어를 사용하기로 하겠다.
3 위의 책, 159-181, 317-357.
4 마르틴 하이데거, “기술에 대한 논구,” 『기술과 전향』(서광사, 1993), 36-37.
5 하이데거는 “기술에 대한 논구”에서 ‘테크네’와 ‘탈은폐’를 연결시키기 위해 플라톤의 『향연』을 인용한다. 여기서 플라톤은 ‘없던 상태에서 있음으로 넘어가게 만드는 것을 야기시키는 것’을 ‘포이에시스’(ποίησις)라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하이데거는 ‘진리’라는 의미에서의 ‘탈은폐’라는 큰 틀 안에 포이에시스가 있으며 이 포이에시스 아래 ‘퓌지스’(φύσις, 자연적인 야기)와 ‘테크네’(인간에 의한 야기)가 구별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 “기술에 대한 논구”, 29-34.
임현진|이화여자대학교 여성신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종교철학과 기독교윤리에 관심을 두고 과학기술, 여성주의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자본주의 시대, 여성의 눈으로 성서를 읽다』(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