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일본 메이지가쿠인대학 서정민 교수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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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 사상의 흐름과 기독교주의
* 이 글은 2024년 3월 8일 도서출판 동연 주최로 열린 서정민 교수의 강연을 정리한 것이다. 강연은 서울 동교동 이어진라운지에서 진행되었다. 강연은 1강(마이너리티를 위한 레퀴엠: 정의가 무엇인지 다시 묻기)과 2강(일본 근대사상의 흐름과 기독교주의)으로 이루어졌는데 다음은 2강을 요약한 것이다.-편집자
오늘 강연의 제목은 일본 근대 사상의 흐름과 기독교주의입니다. 우선 일본 기독교 역사는 우리보다 훨씬 앞섰어요. 가톨릭은 1540년대에 들어왔으니 우리보다 200년 앞섰고, 개신교만 해도 우리보다 30년 정도 빠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늘 이렇게 얘기하죠. “한국은 그리스도인 비율이 20-25%인데, 어떻게 일본은 아직도 0.8%냐?”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일본 그리스도인 비율은 0.8%도 안 됩니다. 현장에서의 느낌으로는 0.5% 될까 말까 하는 정도입니다. 저의 일본 대학 선후배 목사들에게 목회 잘 되냐 물으면 요즘 장례 사업밖에는 안 된다고 합니다. 노인들만 교회에 오니 장례식 담당 목사가 된 거죠. 장례가 많다는 것은 점점 교인 수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일본 기독교의 현황은 표면적으로 아주 미미합니다. 하지만 일본 기독교 역사를 보면 깊이 생각해야 할 요소가 상당히 많습니다. 먼저 기리시탄 역사를 한번 살펴보지요. 기리시탄이 일본에 들어오기 이전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서 처음으로 전국이 하나의 통합 세력권으로 들어온 상황이었어요. 그러한 상황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체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었는데 그때 기리시탄이 처음 일본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도요토미 정권이 처음에 기독교를 막지 않은 이유가 있어요. 먼저 일본은 고대, 중세 국가를 통틀어 종교에 대해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였습니다. 일본은 시대가 바뀌어도 주류 종교가 바뀐 적이 없습니다. 일본에서는 종교가 나라의 근간이 아니라 종교를 문화적으로 접근해서 보기 때문입니다. 반면 한국은 다르잖아요. 삼국시대는 샤머니즘이 주류 종교이고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는 국교가 불교라고 볼 수 있지요. 조선 또한 정치적 혁명만이 아니라 불교에서 유교로 종교가 바뀐 역사였습니다. 즉 국교가 바뀌는, 중심 가치관이 바뀌는 나라가 한국이라면 일본은 그런 게 없습니다.
그냥 있는 종교 위에 또 하나 쌓고 그 위에 하나 더 쌓는 방식입니다. 다다익선인 거지요. 일본 선교 성공하고 싶으면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너희가 믿고 있는 신사, 불교, 신종교, 남묘호렌게쿄 다 그대로 믿고 예수도 하나 더 믿어.” 그러면 박수받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이 신에게 축복받고 저 신에게 축복받습니다. 다다익선이면 훨씬 많은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해요. 그게 일본 사람들의 종교관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이 종교관이 문제가 됩니다. 기독교에서는 다른 종교가 우상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일본 선교가 어려운 것입니다.
다시 돌아오자면, 일본에서는 기독교가 처음 들어올 때 탄압하지 않고 오히려 편의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심지어 지방을 장악하고 있는 영주가 솔선해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도 했는데, ‘기리시탄 다이묘’라고 부릅니다. 규슈 지역에 많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기독교를 권장했지요. 그래서 짧은 시간에 기리시탄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일본의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은 상당수가 불교 사원을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초기 기록을 보면 불교와 가톨릭이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이 ‘남만종’이라고도 불린 거지요. 불교의 한 종파로 알았지, 새로운 종교라고 생각을 안 했어요. 그래서 빠른 시간에 상당히 많은 세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예수회 소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최초로 가톨릭을 전했고, 이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던 중 중요한 정치적 사건 하나가 일어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 말기인 1596년 우라도(고치현)에서 대규모 스페인 상선인 산 펠리페호가 표류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배가 태평양에서 조난되어 우라도항으로 피항하게 된 거죠. 그런데 이 표류선의 자세가 아주 건방졌습니다. 당시 스페인은 필리핀과 마카오를 점령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일본 관리들이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의 조건을 제시했고 그래서 갈등이 생겨났습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노하여 중간 교섭을 담당하던 가톨릭 선교사를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가톨릭 금교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렇게 기리시탄 박해의 역사가 시작된 거죠. 당시 도요토미는 그리스도인을 하나의 신앙인 혹은 종교인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여겼습니다. 특히 스페인 함대와 일본 사이에서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한 스페인 출신의 선교사들이 더욱더 정치적으로 오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일본 내에서 활성화해 놓으면 단순히 신앙인들이 아니라 서구 세력의 프랜차이즈 혹은 브랜치(branch)로서 언제 어느 때라도 일본을 배반하고 본국에 종사할 수 있는 스파이로 규정된 겁니다.
지금도 일본 안에는 그런 의식이 팽배합니다. 일본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 진짜 일본인 맞아?’ 하는 의식이 있는 거예요. 적어도 우리는 민족 기독교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 믿는다고 해서 ‘한국 사람 맞아?’ 이렇게 비난하지는 않잖아요.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도요토미의 기독교 금교 정책을 이어받아 더 강력한 박해를 시작합니다. 도쿠가와는 이들을 정치적 세력으로 여겼기 때문에 무력으로 진압하면 곧 사라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이라는 게 꼭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일본의 그리스도인들은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역사적으로 가톨릭 수난 역사를 지닌 대표적 나라, 즉 26위의 순교 성인을 보유한 나라거든요. 한국은 103위이지요. 순교 성인이 그 정도로 많다는 것은 그 저변에 정말 많은 순교자가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게다가 ‘가쿠레 키리시탄’이라고 표현하는 ‘숨은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당시 표면적으로는 기독교가 완전히 금교 상황이었잖아요. 그런데도 규슈의 여러 중요한 마을마다 대를 이어 비밀리에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고 지켜온 사람들이 존재한 거예요. 나중에 이를 알게 된 로마가톨릭교회 바티칸도 깜짝 놀랐다고 해요. 로마 교황청과 전혀 관계없는 가톨릭 공동체가 생긴 거죠. 표면적으로는 신도 아니면 불교로 보여졌으니까요. 그들의 집에는 지금도 그 흔적이 그대로 있는데 지하 공간과 뒷방 어디에 가톨릭 성물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예수상, 마리아상 등을 보관한다든가 아니면 교묘하게 불상 뒤에다 십자가를 새겨 넣는다든가 하는 식이었죠. 지금도 작은 유물들이 지역마다 박물관에 다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백몇십 년간 숨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지켜온 전통이 있어요.
최근 자료에 따르면 위정자들은 숨은 그리스도인들의 존재를 다 알았다고 해요. 그런데 왜 끝까지 추적해서 없애지 않았을까요? 사실 일본은 우리처럼 중앙집권적이라기보다 지방분권적인 특성이 강합니다. 지역사회의 특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정치 전체가 혼란스러울 가능성이 있어서 알면서도 그냥 넘어간 거예요. 또한 일본은 지역 문화 공동체가 강해서 자기 옆집 사람이 가쿠레 키리시탄이라는 것을 대충 알죠. 그 사람들은 장례식도 두 번 했거든요. 겉으로는 신도식 장례식을 하고 비밀리에 또 가톨릭식 장례식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웃 사람들은 대개 알아요. 하지만 이웃 사람들은 밀고하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여전히 일본 사회와 일본 정권은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어요. 먼저 일본은 아직도 국가와 교회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고 같은 부류로 봅니다. 우리나라가 미국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신앙과 국가 체제를 분리해서 보는 경향이 있는 것과 다르지요. 일본 사람들은 국가와 관계없는 기독교 개인의 종교, 개인의 신앙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당시 일본은 역사적으로 에도시대인데, 지방분권 사회에서 중앙집권 사회로 가면서 더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고 국가주의로 가는 프로세스였거든요. 그 최고조가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 일본이었고 그다음에 아시아를 제패하고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국가주의, 전체주의까지 진행하는 과정이었지요. 일본 전 열도가 전부 별도의 나라였었는데 말이죠. 그걸 억지로라도 중앙집권적 국가, 전체주의 국가로 만든 게 일본의 근대화 프로세스예요.
일본 사회가 근대 이후에 가장 큰 콤플렉스를 가진 세계적 흐름이 제국주의입니다. 다시 말해 일본이 아주 지독한 제국주의 국가가 된 이유는 제국주의 콤플렉스 때문이었어요. 일본의 사료나 정치사의 과정을 보면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통치받거나 식민지화되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일본 저변에 그대로 흘러왔어요. 그래서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을 굉장히 싫어한 것이죠. 유일하게 정치적 관심이 약한 네덜란드하고만 친했어요. 사실 네덜란드도 정치적 야심이 있었지만 네덜란드는 그것을 철저하게 감추고 장사꾼이라는 것만 드러냈어요. 이익과 장사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여야 했기에 네덜란드 사람들은 일본과 오랫동안 접촉하면서도 기독교 선교를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초기부터 기독교에 대한 경계심으로 인해 기독교를 박해하고 싫어하는 흐름이 있었죠. 기독교를 두려워하고 배제하는 역사였습니다. 기독교를 가까이하면 서구 세력에 의해서 잠식당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개신교 선교가 성립되고 나서도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여론을 이끌어 가요. ‘그리스도인=비(非)국민’이라는 이미지, 즉 그리스도인이 되면 일본 국민이 아니라는 이미지를 심어줍니다. 그래서 일본 사회 전체가 저항적 안티 기독교 교육을 받아온 거예요. 보이지 않는 사회 교육을 한 것이지요. 지금은 어떨까요? 과거보다는 많이 좋아졌습니다만 아직도 그 바탕이라고 할까요? 지하수는 그대로 흐르고 있죠.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나 일본도 결국 세계화하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와 소통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의 역사가들이 일본 기독교 역사를 공부할 때 하나를 놓쳐요. 메이지유신 때 기독교를 어떻게 다뤘는지만 고려하는데 사실 그 이전의 전거가 있습니다. 메이지 이후 일본 사상사의 맥락은 에도 후기에 형성된 일본 국학이라는 학술 전통에서 결정됩니다. 그 국학자들이 메이지 사상 흐름에 기초를 쌓았습니다. 세 사람의 대표적 국학자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라고 하는 철저한 국수적 사상가가 있는데요, 에도 후기의 사상가죠. 이 국학자는 외국의 종교 사상이 전혀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진짜 세상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사상은 일본의 신토이즘, 즉 자신들의 국수적인 사상이 세계 사상을 이끌 수 있고 다른 사상은 전부 아류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노리나가의 제자들이 굉장히 많아서 일본 국학자 그룹을 형성하는데요, 저는 노리나가의 국학을 ‘절대적 일본주의의 국학’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어딜 가나 여당이 있으면 야당이 생기듯, 노리나가를 반대하는 한 그룹이 나오는데 우에다 아키나리입니다. 소수파입니다. 이 소수파는 이렇게 주장을 하죠. ‘일본 사상은 정말 엄청 멋있고 대단한 수준이다. 그러나 기독교, 유교, 도교, 힌두교, 이슬람교 다 나름대로 훌륭하다.’ 이것도 저것도 전부 다 훌륭하다고 주장을 해요. 그러니까 ‘상대적 일본주의의 국학’인 것이죠. 당시로 보면 국학자의 20-30%가 우에다 아키나리 쪽이고, 나머지 70-80%가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제자였습니다.
그렇게 두 그룹이 논쟁을 했는데 처음에는 국수주의적인 노리가나 그룹이 훨씬 셌죠. 그런데 서양 세력이 일본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기독교가 가진 국가적 파워가 전해지니, 일본 학자들에게서 약간의 수정주의가 생기게 됩니다. 히라타 아츠타네라는 제3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노리가나의 제자였는데 잔머리가 굉장히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도 안 되는 또 다른 이론을 만들었는데 기독교 문화, 중국의 유교 등이 모두 고대의 일본 사상을 원료로 해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다른 아시아의 모든 사상도 일본 사상이 원형이라는 거예요. 즉 ‘원류적 의식으로서의 일본주의’입니다. 다른 사상도 훌륭하다고 인정은 해요. 기독교가 가진 윤리의식, 즉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 ‘원수를 사랑하라’ 등은 대단하다고 인정해요. 근데 그런 것들이 어디서 왔느냐? 일본에서 배우고 갔다는 거예요. 지금 종교사 연구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그런데 이것이 당시 일본 국학의 주류가 됩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서 메이지유신의 주체자들이 사상적으로 모두 히라타 아츠타네의 후예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근대 일본을 설계한 거예요. 일본 메이지유신 이후의 근대 국가의 사상적 지형도가 바로 히라타 아츠타네의 사상적 기초 아래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실 일본의 엘리트들이 근대 일본 국가의 정신적 토양을 만들 때 굉장히 고민했습니다. 무조건 히라타 아츠타네의 이론을 그대로 쓸 수는 없잖아요. 어떻게든 변형을 시켜야 할 텐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했지요. 그때 현실적으로 당면한 과제가 있었습니다. 근대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빨리 문명화하고 싶고 근대화하고 싶고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똑같이 어깨를 겨루고 싶은데 시간이 없잖아요. 외국 것을 무조건 막 가져와야 했지요. 그래서 메이지유신의 첫 번째 표어는 ‘탈아입구’(脫亞入歐)가 됩니다. ‘아시아를 빨리 탈출해서 유럽 안으로 편입되자’는 겁니다. 그렇다고 일본 땅 열도를 통째로 갖고 이사할 수는 없잖아요. 땅은 그냥 아시아에 있더라도 모든 생각과 문화, 문명, 시스템 등을 다 서구와 똑같이 만들고자 한 거예요.
그래서 이와쿠라 사절단을 미국과 유럽으로 보냈어요. 일본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들을 한꺼번에 훈련해서 파견한 것이지요. 먼저 도착한 곳이 영국이었는데, 여관에서 자면서 매일매일 본 것을 시시콜콜하게 다 써서 메이지 정부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영국 시찰을 마치고 바로 프랑스와 독일로 넘어갔지요. 이렇게 영국, 독일과 프랑스에서 시찰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일본의 사회적 시스템을 바꿉니다. 바로 따라서 합니다. 그러니까 일본 사람들이 흉내 내는 것은 세계 최고입니다.
영국에서는 사회 인프라, 즉 전력, 철도, 도로 등의 근대화를 가져왔습니다. 자동차 진행 방향, 건널목 교통 시스템, 철도, 전력 시스템 모든 것이 영국 모델입니다. 그다음에 교육, 법철학 전부 프랑스와 독일 것을 가져왔죠. 이처럼 일본의 근대 문명은 비빔밥 문명이에요. 서양 것을 잘 비벼서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일본이 20-25년 만에 청일전쟁을 할 정도로 근대화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깜짝 놀랄 정도의 속도예요. 그게 바로 비빔밥 방식으로 철저한 탈아입구 논리로 가능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때부터 사상가들의 이의 제기가 시작됩니다. 우리가 진짜 서구화되고 유럽과 똑같은 국가가 되려면 하나가 더 중요하다. 정신적 기저가 필요하다. 서구 문명, 유럽 근대 문명의 바탕이 기독교인 것처럼 말이죠. 모든 문명의 기저에는 종교나 문명 등 정신적 기저가 있지 않습니까?
제삼자인 제가 봐도 일본이 정말 탈아입구를 하려면 기독교부터 받아들였어야 해요. 기독교를 받아들여서 밑바탕을 깔면 자연스럽게 서구의 문화와 비슷한 문화를 건설하기가 훨씬 쉬웠을 거예요. 그런데 메이지유신을 이끈 근대 사상가들은 끝까지 기독교는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왜냐하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 일본이 정말 서구의 속국이 되어 정신적 지배를 당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즉 서구와 똑같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구보다 훨씬 나은 1등 국가가 되는 것이 일본의 근대 목표였어요. 기독교를 받아들여 봤자 2등 즉 아류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길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죠.
두 번째 캐치프레이즈는 바로 ‘화혼양재’(和魂洋才)입니다. 화혼양재의 의미는 뭐냐? ‘화’가 ‘일본’이라는 뜻인데요, 즉 근대의 ‘혼’은 일본 정신 ‘화’를 근본으로 삼고 바깥 기술, 바깥 문명만 서구 문명을 받아들인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메이지 이후 근대 일본 사상사를 이야기할 때 간추리자면, ‘탈아입구 하되, 화혼양재 한다.’라는 두 마디로 설명이 다 끝납니다. 이처럼 화혼양재를 하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빼야 했던 거죠.
그러면 혼을 무엇으로 할 거냐? 그래도 일본의 가장 고등적인 종교는 불교입니다. 불교 국교론에 대한 주장이 꽤 등장했었습니다만 역시 국학 전통을 이어받은 사상가들에게는 허용이 안 되죠. 불교도 외부에서 온 거라서 안 됐던 거예요. 이제 남는 게 신도밖에 없지요. 신도는 적어도 계산할 수 있는 역사로만 해도 5천 년 역사를 지니고 있거든요. 그런데 일본 사상가들도 다 판단 기준이 있지요. 그냥 신도라고 해서 무조건 일본 국교로 갖다 쓰기에는 별로인 부분도 많잖아요. 예를 들어 일본 사람은 차 한 대를 사면 큰 돈을 신사에 헌금합니다. 그러니까 세계 최고 기술이라고 자랑하는 도요타 자동차를 사더라도 신사의 주술을 받아야 잘 굴러가는 거예요.
이러한 신도를 화혼으로 삼는 건 자존심 상하는 얘기죠. 그리고 신도는 윤리관이 부족했어요. 신도는 길흉화복의 종교이기 때문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옳은지, 어떤 기준으로 죽음과 삶과 생애 가치의 표준을 삼아야 하는지 잘 설명돼 있지 않아요. 국학원 대학에 있는 신도 전문 종교학자 친구가 있는데요, 윤리관을 한번 얘기해보라고 했더니 다들 평화롭게 잘 사는 게 윤리관이래요.
예를 들어 일본에는 마을마다 신사가 있잖아요. 이쪽 A마을, 저쪽 B마을에 따로 신사가 있습니다. 여기에 모시는 신하고 저기에 모시는 신이 전혀 다른 신인 거죠. 대개 지역 문화에 따르면 이쪽 마을과 저쪽 마을이 서로 갈등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그런 게 없어요. 예를 들자면, 이쪽 다나카 상이 저쪽 마을에서 볼일을 보고 시간이 좀 남으면 거기 신사에서 축복을 받습니다. 저쪽 신하고 이쪽 신하고 전혀 다른데 양쪽에 다 헌금하는 거죠. 우리 마을의 신에게도 축복받고 저쪽 마을의 신에게도 축복받으니 다른 사람보다 두 배인 거죠.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이런 삶이에요. 그러니까 신이 달라도 서로 싸우질 않아요. 그래서 그냥 평화라는 거예요.
한발 더 나아가 이 친구가 이렇게 얘기를 해요. 신도의 가장 훌륭한 윤리는 종교전쟁을 일으킨 적이 없는 거다. 유럽은 거의 종교전쟁의 역사 아니겠습니까? 100년 전쟁, 30년 전쟁이 다 종교전쟁이고 심지어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프로테스탄트냐, 가톨릭이냐 해서 목숨 걸고 싸우지 않습니까? 자기들은 이런 갈등이 없다는 거예요. 서로서로 평화롭게 산다는 거예요. 신끼리도 화해하니까 인간끼리도 화해한다고 얘기해요. 그게 윤리관이에요. 그래서 제가 좀 더 집요하게 물었죠. 거기에 개인의 결단적 성찰도 있는지, 개인이 인생을 사는 데 지표로 삼아야 하는 윤리적 어드바이스가 있는지 물었죠. 그제야 이실직고하더라고요. “우리가 기독교처럼은 안 되지 뭐….”
이런 면에서 초기 일본 사상을 설계한 사람들도 신도를 화혼으로 삼는 것은 세계적으로 보면 약점이 있을 것 같다고 느낀 거예요. 그래서 신도 분리 정책을 결단합니다. 국가 신도와 교파 신도로 완전히 나눠요. 교파 신도는 그냥 여러 종교 중 하나이고요, 국가 신도는 일본 전체를 관할하는 국가 전체의 신인데 대표적으로 일본 국가 전체를 관할할 수 있는 신은 천황가의 신밖에 없죠. 천황을 중심으로 모시는 국가 신도를 별도로 만들어 종교가 아니라 초종교로 여긴 겁니다. 이 초종교는 일본인이라면 무조건 다 믿어야 하는 종교 이상의 가치예요. 이 초종교가 메이지 이후에 일본의 혼이 된 거예요. 일본의 국가주의와 전체주의가 절정에 다다르면서 이걸 더 강화했죠. 즉 메이지유신 초기부터 화혼의 베이스는 국가 신도, 즉 천황제 이데올로기예요. 이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일본의 근대의 정신적 기초가 된 거죠.
그러니까 이제 다른 종교는 그냥 선택해서 믿어도 되는 거예요. 1889년 일본의 제국 헌법, 그러니까 근대 헌법이 만들어졌는데 제28조에 모든 일본 신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붙어요. 단 천황의 신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사회 치안에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종교의 자유를 갖는다고 돼 있어요. 이처럼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는데도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죠. 바로 기독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매운맛을 한번 봤거든요. 일본 정치가들이 두려워한 것 중 하나는 이런 거예요. 일본 신도나 불교에는 신앙적 결단 때문에 목숨을 내놓는 경우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기독교는 ‘신앙이냐, 목숨이냐?’ 하면 신앙을 택하고 목숨을 버리는 거예요. 희한한 부류들이죠. 법률적으로는 이미 자유를 주기로 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제압해야 했어요. 그래서 만들어낸 사회적 캐치프레이즈가 ‘그리스도인은 비국민이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일본인답지 않은, 일본 전체 목표에 협력하지 않는, 더 나아가 언제든지 일본을 배반할 놈들, 즉 일본말로 하면 ‘우라기리모노’라는 거였어요. ‘배신자’라는 뜻인데 일본에서는 제일 큰 욕이에요.
원래 일본 초기에 엘리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였어요. 개신교 이후로 외연을 확장해서 이야기하면 지식인들 다음에 사상가들이 받아들였어요. 일본 개신교사에는 3개의 기독교 수용 그룹이 있어요. 먼저는 자발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몰락한 사무라이 그룹, 예를 들어 규슈를 중심으로 한 구마모토 밴드가 있어요. 그다음에 홋카이도에는 유명한 농학자 클라크와 우치무라 간조를 비롯한 농학교 학생들로 이루어진 무교회주의 그룹 중심의 삿포로 밴드가 있어요. 또 하나가 요코하마 밴드인데 제가 있는 대학이 그 요코하마 밴드에서 유래되었어요. 요코하마가 개항장이다 보니 여기야말로 선교사들의 입김이 세죠. 미국 선교사 그룹에 의해서 만들어진 밴드예요. 이렇게 3개의 밴드가 일본 초기 개신교의 바탕이 됩니다. 이들이 일본에서 기독교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론을 생각하기 시작한 거예요.
무조건적 신앙으로는 안 되죠. 그러면 따돌림만 당하니까요. 그래서 이들이 생각한 것이 바로 교육입니다. 교육을 통해 기독교 사상을 일본 사회 안에다 조금씩 전파하자는 것이 초기 기독교 수용자들의 선택적 결단이고, 일본에 온 개신교 선교사들도 이에 호응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주의’를 만들게 되죠. 예를 들면 일본 사립 교육의 40% 가까이 기독교주의 교육, 기독교 학교입니다. 제가 봉직하고 있는 메이지가쿠인대학이 그중 하나이고 교토에 도시샤대학, 코베에간세이가쿠인대학 등이 유명합니다. 대학만 있는 게 아니라 초중고 심지어 유치원까지 기독교계가 있고, 가톨릭계도 강력합니다. 예수회가 세운 죠지대학도 유수의 대학이죠. 성공회 학교인 릿쿄대학도 있고요. 또 감리교 계열의 유명한 아오야마가쿠인대학은 도쿄에서 아주 큰 학교인데, 장로교 계통인 우리 대학과 라이벌이지요.
이처럼 사립학교가 일본 전국에 퍼져 있어요. 이번에 지진이 난 가나자와에도 유명한 호쿠리쿠 학원이 있고 삿포로에 호쿠세이와 센다이에 도후쿠동북 학원이 있고요. 그다음에 규슈에도 침례교 계통인 세이난가쿠인대학이 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계가 일본 사립교육을 꽉 잡고 있습니다.
제가 있는 학교 이야기 하나만 할게요. 메이지가쿠인대학은 1863년에 설립되었는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대학일 뿐만 아니라 사립대학 전체를 놓고 보아도 두 번째로 오래된 학교입니다. 현재 학생 수가 1만 2,000여 명 정도 됩니다. 학생 중에 그리스도인이 몇 퍼센트라고 생각하세요? 극소수예요. 기독교 대학이라 기독교 교육을 하고 매일 채플을 합니다. 그 대학 채플이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입니다. 그리고 파이프오르간도 일본에서 거의 제일 좋은 걸 갖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학생들이 필수 과목으로 1년간 기독교 기초를 공부해야 합니다. 이 과목을 패스하지 못하면 졸업이 안 됩니다. 완벽한 기독교 교육을 하고 있어요. 그걸 가르치는 게 교수들이죠. 그런데 전임 교직원 700여 명 중 그리스도인 몇 명이냐면 10여 명 정도예요. 그들이 1만 2,000여 명 학생들의 기독교 교육을 오롯이 담당하고 있는 걸까요? 10여 명의 힘으로만 됩니까? 안 되죠.
그리스도인의 비율은 적지만 메이지학원의 전임 교직원 대부분은 기독교 사상을 지지하고 동의합니다. 그들 대다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기독교주의자’예요. 그 사람들은 이 세상의 가치 중 기독교적 가치가 가장 높다고 생각해요. 그걸로 교육하는 것이 훨씬 좋다는 사람들이에요.
한국 사회는 어떤가요? 한국 사회는 딱 양분돼 있어요. 그리스도인과 반(反)그리스도인만 있어요. 그리스도인 아닌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를 욕하잖아요. 그런데 일본은 그렇지 않아요. 일본 사회 전체에서 그리스도인은 1%도 훨씬 안 되지만, 60-70% 정도의 사람들이 기독교의 사상을 지지하고 있어요. 그리고 서로 기독교식으로 결혼식을 하려고 해요. 제가 물었어요. “너는 그리스도인도 아니면서 왜 기독교식으로 결혼식을 해?” 하고 물었더니, 폼 난다는 거예요. “성서 위에 손을 탁 얹고 하나님 앞에서 결혼을 약속하는 게 얼마나 폼 납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기독교가 좋고 멋있고 폼 난다는 거예요. 그런데 왜 그리스도인이 아니냐고 물으니, “우리가 어떻게 예수처럼 살 수가 있어요?” 하고 반문하더라고요.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돼서 신앙적 결단을 하면 예수가 가르친 삶을 살아갈 마음으로 어느 정도 실천적 대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한국과 전혀 다르지요? 그렇기에 한국 선교사들이 일본 사람에게 전도해도 씨알도 안 먹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일본의 교회에서 설교나 강연할 때 이렇게 말해요. “기독교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죄 좀 지어도 돼. 꼭 예수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어. 그리고 잘 안 되면 그냥 그때그때 회개해. 예수님이 다 용서해줘. 잘하려고 노력하는 도상이 그리스도인이지, 예수처럼 사는 것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너희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왜 예수가 주는 은혜를 모르고 의무와 윤리만 알아?” 이렇게 제가 목소리를 높여요. 한국과 정반대 상황이지요. 이 문화를 모른 채 일본 선교해봤자 소용이 없어요.
‘기독교주의’라는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한국에서 이 말을 사용합니까? 안 쓰죠. 거꾸로 영어로 번역하면 뭐가 되지요? ‘크리스챠니즘’(Christianism)입니다. 서구에서 ‘크리스챠니즘’이라는 말을 씁니까? 있긴 하지만 거의 안 쓰죠. 기독교를 좀 더 객관적으로 지칭할 때 아니면 비판적으로 지칭할 때만 ‘이즘’(-ism)을 붙입니다. 그러니까 서구권에서는 전부 ‘크리스채너티’(Christianity)라고 부르죠.
그런데 일본만 달라요. 누군가 “메이지가쿠인대학은 어떤 대학입니까?” 하고 물으면 ‘기독교주의 대학’이라고 말합니다. 이유를 물으면 일본 학자들은 먼저 오리엔탈리즘을 가진 서양 사람들의 잘못이라고 이야기해요. 서양 사람들이 동양의 종교들을 다 어떻게 번역했습니까? 불교는 부디즘, 힌두교는 힌두이즘, 신도도 신토이즘이죠. 전부 무슨무슨 ‘이즘’(-ism)이에요. 서양 사람들에게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고 나머지는 아류 사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일본 엘리트들도 기독교를 ‘크리스챠니즘’이라고 부른 거예요.
왜 일본인들이 ‘이즘’을 붙였을까요? 두 가지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하나는 기독교를 좀 더 객관화시키고 싶었던 것 같고, 또 하나는 바로 기독교 정신이나 가치 중에서 윤리적 항목, 사상적 흐름, 예수의 가르침을 굉장히 중요한 항목으로 받아들여 행위적 결단으로 실천하는 문제를 제일 높은 우선순위로 둔 거죠. 1부에서 말씀드린 대로 십자가 상징에서 종선(세로선)에 주안을 두지 않고 횡선(가로선)에 초점을 맞추려는 일본인들의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어요. 하나님과 나의 관계만큼 이웃과의 관계가 똑같은 비중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신앙이 일본 기독교의 가치관입니다. 그러니까 종선만 강조해서 선교해봐야 안 통하는 겁니다.1
강연을 정리하자면, 기독교의 궁극성은 소수자(마이너리티)와 함께하지 않으면 아모스의 정의도 없고 예수의 궁극적 가르침도 없다는 것입니다. 일본 기독교에 대해 접근할 때 그 부분을 같은 필터로 놓고 봐야 합니다. 이러한 면에서 저는 일본 기독교를 존경하기도 합니다.
저는 일본 기독교가 1967년 이전과 이후로 완전히 구분된다고 봅니다. 1967년 이전에는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일본 기독교는 국수적 기독교였습니다. 국가에 영합해야만 기독교의 존재 가치가 있었지요. 그들이 만들어낸 말이 ‘전쟁의 복음’입니다. 일본이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지요. 그때 기독교 지도자들이 기독교 대학 학생들에게 빨리 의용군이 되어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하라고 했어요. 말도 안 되는 일본 기독교의 매니페스토였어요.
그러다가 해방 이후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흐른 후인 1967년에 전쟁 책임에 관한 일본 교단의 고백문이 발표됩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그 문장을 꼭 여러 번 읽게 합니다. 그동안 일본 교회와 정부가 하나님의 길과 전혀 다른 길로 갔다고 아주 철저하게 죄를 고백합니다. 엄청나게 반성하고 엄청나게 실천합니다. 그렇게 일본 기독교의 주된 흐름이 완전히 바뀝니다. 그전에는 힘 있는 자들, 기득권의 편에 교회가 서 있었지만 1967년 이후 일본 기독교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우선 힘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멀리합니다. 첫 번째 재일교포특별위원회, 두 번째 브라크민(部落民, 전근대 일본 신분제에서 최하층에 위치했던 천민) 대책위원회, 세 번째 오키나와 문제 선교 프로그램 어프로치, 네 번째 아이누족(일본의 소수파 원주민)을 위한 특별위원회 등이 만들어집니다. 사회적 소수자들을 위해서 일본 교회가 굉장히 많은 투자를 하고 가진 역량을 다 발휘합니다. 지금도 재일교포 차별 문제 등이 있으면 대부분 그리스도인 인권 변호사들에게 공변론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의 소수파 기독교를 굉장히 존중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바로 그 무렵에 와세대대학 출신의 한 재일교포 청년이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번번이 대기업 공채 면접에 떨어져 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이 공개되었어요. 이에 충격을 받은 일본 그리스도인들이 재일동포 운동을 끝까지 했고요. 이외에도 무수하게 많은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도 국회 앞에서 아직도 소수파 데모를 하고 있어요. 일본의 우익 우경화 반대, 일본의 군대 재조직 반대를 하지요. 끝까지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에요. 지금도 이 릴레이를 계속하고 있죠.
전체 국민의 0.5%밖에 안 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걸 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저는 소수의 일본 기독교를 무시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예수의 길을 걷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들 소수에 의해서 일본의 기독교가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종교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교회가 가난해져야 합니다. 교회가 망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다음에 십자가의 횡선을 회복하고, 희생할 뿐만 아니라 핍박받아야 합니다. 그게 제2차 종교개혁의 모습이 아닐까요? 종교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의 의견을 한 번 말씀드렸습니다. 장시간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註)
1 강연자는 강연의 1부에서 십자가의 종선과 횡선을 설명하였다. 종선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이고 횡선은 이웃과 우리의 관계이다. 장애인 등 소수자(마이너리티)에 대한 문제를 신학적으로 극복하려면 기독교의 상징이 종선 하나에만 매몰되어 있으면 안 된다. 실제 더 중요한 것은 횡선이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두 계명,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편집자
서정민|연세대학교에서 교회사 교수로 재직하였다. 현재 일본 메이지가쿠인(明治院)대학 교수이다. 『日韓関係論草稿』(朝日新聞出版, 2020)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