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한국교회디아코니아아카데미 이승열 원장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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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평화통일운동과 디아코니아
"한국교회와 디아코니아” 연재의 마지막 글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와 기독교에 가장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디아코니아 신학을 다양한 측면에서 소개하였다. 디아코니아를 신학적으로 깊이 연구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디아코니아 신학은 종합적인 학문이며 독립적인 학문의 체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1 그러나 분명 필요한 일이기에 앞으로도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 과제 중 하나인 디아코니아에 대하여 많은 목회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여섯 번의 연재 기회가 참으로 귀해서 집필을 계획하면서 많이 고민하였다. 마지막 주제는 “한국교회의 평화통일운동과 디아코니아”인데 분단된 우리나라의 평화통일을 염원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선정하였다. 연재를 구상하고 각 소주제를 계획한 작년 가을만 해도 남북관계가 이처럼 경색되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국방부 장관이 교체된 이후 작년 12월부터 지금까지의 남북관계는 매우 좋지 않다. 우리 정부는 원점타격과 선제공격도 불사한다는 발언과 동시에 북한에게 주적 개념을 분명히 선언함으로써 전쟁이 가능한 대적 관계임을 매우 강경한 어조로 표현하였다. 북한도 이어서 남한을 동족으로 인정하지 않고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더욱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이로 인해 수십 년 동안 상호교류와 협력을 통하여 평화통일을 지향해온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올해 1월 북한은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6·15공동선언실천북측위원회 등 공식적인 통일운동 단체들을 모조리 해체해 버렸다. 그리하여 남한의 민간 통일운동 단체들도 자연히 해체되거나 이름만 남아 있는 수준이 되고 말았다. 현재는 정부도, 민간단체도, 기독교와 타 종교단체도 어떤 분명한 통일정책이나 사업을 제시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대한민국 정부는 통일부가 그동안 북한을 돕는 북한지원부 역할만 했다고 폄하하면서 150명가량의 공무원을 해직시켰다. 이로써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민간단체와 협력해야 할 정부 조직이 그저 엄격한 감시 감독기구와 같은 조직으로 역할이 대폭 축소되었다.
2024년은 한반도가 분단된 지 79년, 휴전된 지 71년이 되는 해이다. 필자는 1989년 가을 유학을 위해 독일로 떠났는데 얼마 안 있어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과정을 목격하였다. 독일통일 1년 전의 분위기를 생생히 느낀 것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주말이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동독의 국민차인 트라반트(Trabant, 일명 트라비)를 타고 서독의 도시로 자유롭게 방문하였다. 그들은 서독에서 생필품이나 주로 TV 같은 전자제품을 사서 돌아가는 길에 국경선 가까이에 다다르면 잠시 멈춰 서독의 공기를 마시며 한참 바람을 쐬다가 동독으로 돌아가곤 했는데 이러한 광경이 필자에게 매우 감동적인 장면으로 남아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한반도의 통일을 간절히 염원하며 기도했었다.
독일통일의 교훈
그로부터 약 1년 후인 1990년 10월 3일, 독일통일이 이루어졌다.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지만 구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2의 영향이 컸다. 당시 동독 경제는 너무나 어려워서 모든 것을 서독에 맡기는 차원에서 1990년 5월 18일 통일의 첫 번째 과정으로 경제-통화 및 사회통합을 실현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독일통일의 꿈이 현실화되었다. 동독과 서독은 정치와 군사, 경제 등 통일의 3대 요건 가운데 제일 먼저 경제통합을 이룸으로써 통일을 위한 공식적인 첫 단계를 밟게 되었다.3
그러나 통일이 마냥 장밋빛 미래를 보장해주지는 않았다. 통일 이후 동독지역에서는 개발비가 너무 많이 들었고 경제가 무너지면서 경쟁력이 떨어지고 생산성이 맞지 않아 대량의 실업자가 발생하고 말았다. 그동안 안일하게 살아온 동독 사람들은 자본주의 경쟁체제에 적응하지 못해 삶이 더욱 힘들어졌다. 화폐가 통일되면서 급료가 높아지고 생산가격도 높아지고, 물가마저 오르면서 구동구권에 수출했던 무역 관계도 다 붕괴되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동독의 개발비는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아직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다. 서독 체제에 대한 동독 주민들의 반감뿐만 아니라 동독 출신에 대한 서독 사람들의 편견과 차별도 여전하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사회통합 문제가 커다란 사회문제로 대두된다.4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목숨을 걸고 어렵사리 탈북하여 남한 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새터민들마저도 차별당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언제인가 통일이 된다면 양상은 조금씩 달라도 비슷한 문제를 우리도 겪으리라 예상된다.
독일의 통일은 사실상 1969년 서독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92) 총리의 동방정책(Ostpolitik)5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통 군사적 대립으로 인해 대량 학살무기를 개발하는 등 국방비가 늘어나면 도리어 사회발전이나 국민의 삶의 질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쓸데없는 경쟁으로 재화를 낭비하기에 국가발전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호교류, 인도주의적 구호를 지향하며 동독의 경제개발에 투자한 빌리 브란트의 정책은 독일의 대전환을 이루었다. 특별히 서독의 교회들은 디아코니아 섬김의 정신, 즉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동독교회를 섬겼다. 자동차, 석유, 타이프라이터, 종이, 난방비, 생활비 보조, 식량과 식품 등 동독 목회자들을 돕기 위해 다양하게 지원하였다.6
대한민국의 평화통일 문제는 전 국민적·민족적 공통의 과제이며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과업이다. 그러므로 앞서 평화통일운동을 이끌었던 한국 기독교와 교회는 독일통일의 교훈을 깊이 새기고 성찰해야 한다. 더 발전적인 정책을 개발하고 좋은 관계와 분위기를 이끌어내야 할 과제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한국 정부의 북한관
통일운동과 관련된 우리 정부의 대북 정책과 입장은 정권에 따라서 조금씩 변화가 있고, 따라서 국민과 교회에도 영향을 미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반공적 입장을 견지하며 세계교회협의회(WCC)를 반대하였기에 아직도 보수적인 교단들은 잘못된 인식과 왜곡된 시각으로 에큐메니컬 운동과 WCC를 대하고 있다.7 박정희 대통령은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적 가치관과 안보관으로 국정을 운영하였고, 12·12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도 군사독재정권의 맥을 이어갔다. 시간이 흘러 1980년대 말 민주화의 물결과 운동의 여파로 더 이상 군부독재 정권은 유지될 수 없었다. 정치적 민주화가 실현된 이후 특히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는 햇볕정책과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대북 친화 정책을 펼쳤다. 이 기간에는 남북경제협력사업뿐만 아니라 식량 지원을 포함한 다양한 지원과 교류가 이루어졌다.
구체적으로 남북관계를 발전시킨 역사적인 만남과 회담 그리고 선언을 차례로 살펴보자. 먼저 1972년 최초로 남북한 당국이 분단 이후 통일과 관련하여 합의 발표한 7·4남북공동성명이 있다. 성명의 정신은 훌륭했지만 제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는데 남북 정부가 각자 이 성명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아무런 진전도 없는 가운데 1988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이 있었는데, 이는 통일문제를 한국 사회 민간 차원에서 논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8 이러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보수적 교회와 지도자들은 반공 이데올로기 위에 서 있었으며 통일론 자체도 흡수통일의 개념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이후 NCCK 선언의 영향을 받아 노태우 정부가 1988년 7·7선언9을 발표하며 통일정책을 펼쳤다. 이는 노태우 정부의 통일외교의 기본정책을 제시한 것으로서 북한을 적대적인 경쟁상대로 인식하지 않으며 북한과의 협력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것은 남북국회회담, 고위급회담, 사회주의권과의 경제교류 및 수교 등 북방정책이 추진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다음에는 김대중 정부의 획기적인 햇볕정책과 2000년의 6·15선언10 그리고 2007년 노무현 정부 시기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채택된 10·4남북공동선언11이 있다. 10년 동안 햇볕정책을 통해서 인도주의적 구호사업이나 북한 사회개발을 위한 지원과 협력이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개성공단 개발 등을 비롯한 각종 경제협력 사업은 물론, 금강산 관광개발, 스포츠외교까지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이후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는 남북관계는 더 이상 진전이 없었으며 도리어 후퇴하여 불신과 경계심만 강화되었다. 금강산 민간인 피살사건 이후 금강산 관광 중단, 서해안 교전, 연평도 포격사건, 2010년의 천안함 폭침사건과 5·24조치, 개성공단의 가동중단 등으로 이어지는 경색 국면은 북한의 6차에 걸친 핵무기 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실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순항미사일 등의 개발로 이어졌다.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다양한 크기의 소형 핵탄두 개발의 성공 가능성을 서방세계가 인정하게 되면서 미군의 핵잠수함을 비롯한 B-52 장거리 전폭기 등이 등장하게 되었고 한반도 전쟁 가능성을 염두에 둔 한미군사훈련 등 위협적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이뿐만 아니라 사드배치 문제로 인해 국민적 갈등의 골이 깊어졌으며, 중국과의 갈등으로 심각한 외교·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문재인 정부 이후 2018년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연이어 이루어졌으나 결과적으로는 2019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이후 북한은 계속해서 다양한 미사일 발사 실험을 실시하였다. 더욱이 오늘날 윤석열 정부에 들어와서는 한미일 군사동맹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실제로 동해에서 미국, 일본과 합동군사훈련을 하기도 했다. 북한의 군사적 도발과 군사행동에 대한 우리의 군사정보를 실시간으로 일본 정부가 공유하는 군사정보보호협정(General Security Of Military Information Agreement, GSOMIA)이 완전 회복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 국내외에서는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을 염려하고 있으며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과 관심 그리고 새로운 정부의 획기적인 정책 변화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한국교회의 대북 관련 입장과 디아코니아
한국교회의 대북 정책은 남한 정부의 입장에 따라서 조금씩 영향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대부분 반공 이데올로기적 사고와 가치관에 영향을 받아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에큐메니컬 진영의 교회들은 NCCK를 중심으로 평화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노력을 기울이며 대북 구호를 위한 적극적인 활동과 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쳐왔다. 실제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NCCK가 조그련(조선그리스도교연맹)과 교류협력 관계와 소통을 유지해왔다.
어려운 과정이 많았지만 1984년 10월 29일-11월 2일 일본 도잔소에서 열린 ‘동북아시아의 정의와 평화협의회’ 모임을 통해 남북통일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이 도잔소 회의를 통해서 힘을 얻은 한국교회는 1985년 2월 28일 개최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제34차 총회에서 ‘한국교회평화통일선언’을 발표했으며 이후 세계교회와 더불어 통일운동을 하게 되었다. 1986년 스위스 글리온에서 진행된 제1차 글리온 회의를 기점으로 수차례 해외에서 남북교회의 만남과 교류가 이루어졌다. 1988년 2월 29일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채택하여 발표했다. 그 이후 인도주의적 구호의 명분 아래 북한의 홍수 피해를 돕는 정부의 구호적 지원과 한국교회의 재해구호 및 사회봉사 등 통일운동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식량 구호, 의약품 지원, 비료 지원, 씨감자 지원, 농업개발 사업, 비닐하우스(온실) 건설 및 지원, 교회건축과 지원, 결핵환자 진단 및 치유 활동, 결핵 관련 의료기기 지원, 국수 공장, 빵 공장, 고아원 지원, 장애인시설 지원, 컴퓨터학원, 간호학원 등 다양한 복지 선교가 이루어졌다.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사회 인프라 개발과 운영을 염두에 둔 일들이었다. 이어서 북한교회와 북한 사회개발 차원의 구호와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 여러 단체가 생겨났으며, 특히 민간 차원에서는 ‘북한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라는 이름의 민간단체에 60여 개의 기독교단을 비롯한 민간단체들이 협의체를 만들어 활동해오고 있다.
2018년 6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WCC 창립 70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하였다. 프란치스코 로마가톨릭 교황을 비롯한 세계교회의 지도자들 그리고 북한의 조그련 위원장 강명철 목사를 비롯한 임원들과 특별한 만남을 가졌으며 이어서 한국교회는 ‘한국교회남북교류협력단’12의 이름으로 범기독교적 대북협력 컨소시엄을 조직하였다. 앞으로 통일시대를 대비하는 이 조직을 통하여 다양한 차원의 대북협력 사업과 북한 사회개발을 위한 사업을 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춘 것이므로 큰 기대가 있었다.
한편 보수적 복음주의 계열의 교단들은 조그련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대신 실체가 막연한 가정교회를 인정하면서 적극적인 구호사업이나 지원도 하지 않은 채 통일의 때가 오면 북한에 무너진 교회를 먼저 재건하겠다는 비전으로 교회건축 기금을 저축해놓고 있다. 그들은 조그련을 불신하며 비난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13
특이한 점 하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복음주의 계열의 교단들이 연합하여 북한사회 발전을 위한 특별 사업을 비공개적으로 진행해온 것이다. 그 내용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즉 진보 교단과 보수 교단이 연합하여 일회적 구호사업이 아니라 20여 년 동안 꾸준히 북한사회 발전을 위한 사업을 해온 것이다. 국내 언론에 공개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여러 교단, 여러 교회 그리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와 헌금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사)남북나눔재단을 통해서 진행되었다.
남북나눔재단의 대북지원 사업
남북나눔재단의 시발점은 1992년 1월 당시 NCCK 권호경 총무가 북한을 방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권호경 목사가 김일성 주석과 남북 기독교의 교류와 협력에 대해 대화를 나눈 것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남북나눔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남한이 북한에게 일방적으로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남북이 서로 나누는 것이 운동의 기본취지요 정신이다. 이후 남북나눔운동은 1992년 11월 세 차례의 실무 모임과 준비위원회, 그해 12월 8일 남서울교회에서 열린 창립 준비 및 발기인대회를 거쳐 이듬해인 1993년 4월 27일에 설립되었으며, 홍정길 목사가 초대 사무총장을 맡아서 20년간 많은 수고를 했다.
얼마 지난 후 식량위기로 북한에 아사자가 발생한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1994년 이래로 작게는 수십만 명부터 많게는 300만 명 정도의 아사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 내부적 충격과 연이어 닥친 대홍수 등 자연재해로 인하여 식량위기가 발생했고, 외환난, 에너지난 등 총체적인 경제위기에 직면하면서 극심한 식량난에 처하게 된 것이다.
홍정길에 따르면, 남북나눔운동의 목적은 첫째로 북한의 어린이들에게 어떻게든 우유를 주기 위한 것, 둘째로 북한 주민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다. 홍정길은 북한의 실상을 알고도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리스도인들이 저들을 껴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통일을 위해서 네 가지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첫째는 북한 동포를 사랑해야 하고, 둘째는 북한의 어린이들을 위해 계속 투자해야 하고, 셋째는 남북교류를 계속 이어가야 하며, 넷째는 중립지대로서 피난처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북나눔운동에는 중요한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째,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을 유일한 상대로 협력, 둘째, 현금지원 불가, 셋째, 최소 대답의 원칙, 넷째, 눈높이로 소통하는 원칙, 다섯째, 인내하는 원칙, 여섯째, 홍보를 의도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원칙, 일곱째, 종합백화점식으로 사업을 폭넓게 벌이지 않는다는 원칙, 여덟째, 인도주의 원칙, 아홉째 한국기독교북한동포후원연합회의 원칙14이었다. 남북나눔재단은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북한을 지원하여 사회발전에 기여해왔는데 사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식량지원사업, 감자지원사업, 우유와 밀가루 지원사업, 결핵환자들을 위한 결핵검진용 차량지원사업, 의류지원사업, 조생종 봄보리씨앗 지원사업, 두루섬 수경재배시설 사업, 천덕리 주택개량사업, 텃밭을 통한 작물재배(옥수수, 콩 등) 지원사업, 양돈지원사업, 조림사업, 의료시설 현대화사업, 고소득 작물사업, 못자리요 비닐 지원사업, 라면 지원사업, 북한의 수재 구호사업, 용천역 폭발사고 구호물품 지원사업, 콜레라 백신지원사업, 기타사업으로 영농기계 수리창고, 이발소, 목욕탕 시설지원사업 등이다.15
화해의 디아코니아
디아코니아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근거는,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의의 관계로 회복하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이며 죄로 말미암아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신 칭의의 역사라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과 의의 관계를 회복한 칭의의 역사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했다. 이 십자가 신학의 핵심이 화해의 디아코니아이다.16 즉 하나님의 십자가 화해의 사랑을 믿는 신앙인은 세상과 화해하신 하나님의 봉사가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할 가치가 있는 존재를 찾아 나서시지 않는다. 대신 모든 존재를 의롭고 지혜롭고 강하게 만들기 위해 죄인들과 악한 것들과 우매하고 약한 자들을 그저 사랑하신다.17 이처럼 루터는 그의 십자가 신학에서 화해의 디아코니아 개념을 이끌어냈다.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디아코니아연구소장 테오도어 스트롬(Theodor Strohm)은 그의 논문 “화해의 디아코니아”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화해에 대한 그리스어 ‘카탈라게’(καταλλαγή)는 완전히 달라진 것 내지는 갱신,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을 의미한다. 새로운 존재로의 갱신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대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 대하여 그리고 전체 창조세계에 대하여 하나의 새로운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하나님이 선물하신 이 새로운 존재를 통하여 그리고 새로운 관계를 통하여 화해가 가능하다. 화해의 사건은 교회의 형성과 실재를 위하여 모든 사람의 수고에 앞서 놓여 있다. 화해(고후 5:18)의 디아코니아는 직분과 직무에서, 말씀 선포와 사회적 사업에서 먼저 놓여 있는 기본적인 위탁이다. 화해는 사람들과 피조물들을 위한 하나님의 길의 기본이고 목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새로운 생명의 원천이다. 화해는 단순한 법적 구성요건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 안에서의 실제적인 변화, 즉 신적인 뜻에 적합한 새로운 삶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해는 교회의 공동체적인 삶의 기초이다. 화해는 화해 사건이 일어나는 매번 새로운 희망을 통하여 명확히 자기 본질을 보여준다. 디아코니아는 공동체의 구체적인 활동을 통하여 분열된 것들이 화해될 뿐만 아니라 제외되고 포기된 생명이 조력을 경험하도록 꾀한다.18
나가는 말
오늘날 정부의 강경한 국방정책과 통일정책 때문에 평화통일운동을 이끌고 협력해온 한국교회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어디로 나아갈지 그 방향을 알지 못하는 듯하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어찌하든지 전쟁은 한반도에서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며 대화와 평화적인 방법으로 북한과 소통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남한 사회에서는 반공 이데올로기 위에 서 있는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의 의식이 변화되어야 한다. 한반도의 운명은 전혀 예측 불가능하고 계획도 할 수 없지만, 언젠가 하나님의 카이로스적 역사에 의하여 이루어질 평화통일의 그날을 위하여 계속해서 힘써야 하는 것은 자명하다. 즉 화해의 디아코니아 신학적 관점에서 북한을 섬겨야 한다. 우리 한국교회가 북한의 동포, 형제자매들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강도 만난 자의 처지를 살피는 사마리아 사람인가? 그를 피하여 지나친 레위 사람인가? 강도 만난 자를 응급처치로 도와줄 뿐만 아니라 비용을 들여 여관주인에게 맡기며 추가적인 돈까지 더 지불할 수 있는가? 한국교회는 예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고난 중에 있는 이들의 생명을 살리는 섬김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라는 예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리는 예수의 사랑을 마음에 품고 북한 동포들을 섬기며 진정한 이웃이 되어주는 사명과 책임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무조건적 사랑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19
* 이승열 목사님의 “에큐메니컬 디아코니아”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좋은 글 보내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편집부
주(註)
1 디아코니아 신학은 신구약 성서신학적 근거를 비롯하여 조직신학적 근거, 역사신학적 근거(서양교회사와 한국교회사), 선교신학적 근거, 실천신학적 근거, 사회복지학적 근거 그리고 사회봉사의 실천 현장에 대한 현황과 실제적인 문제점, 현행 사회복지법의 문제 등 연구해야 할 과제가 많다. 그래서 필자가 공부한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의 실천신학연구소에 소속된 디아코니아연구소(Diakoniewissenschaftliches Institut, DWI)는 4학기 석사(Diplom) 과정에서 디아코니아를 깊이 공부하고 나서야 박사 과정을 밟을 수 있도록 제도화하였다.
2 ‘페레스트로이카’라는 말은 원래 1985년 4월에 선언된 구소련의 사회주의 개혁 이데올로기의 이름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구소련의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분야에서 스탈린주의의 병폐, 스탈린주의 사상의 많은 문제점을 개혁하고자 한 사상이었다. 그래서 페레스트로이카는 사회주의의 본질을 재규정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고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고, 국가의 개인 보호를 상대적으로 축소시켰으며, 개인의 자유로운 경쟁과 영역을 조화시키는 과제를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개인의 소유권을 존중하여 과거에는 국가의 소유권만 인정한 것에서 개인에게 다양한 생산수단을 허용하는 제도로 전환한 것이다. 외교적으로 탈이데올로기를 추구하는 등 경제와 외교를 중시하는 정책으로 군비를 축소하는 탈군사화 경제개혁을 이루어냈다. 고르바쵸프가 중심이 된 페레스트로이카는 소련연방이 붕괴되고 해체되면서 사실상 사회주의 체제를 포기하고 시장경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화여자대학교 대학교회에서 발표한 필자의 논문을 참고하라. 이승열, “디아코니아와 독일통일, 사회적 통합 그리고 한반도의 통일,” 2014년 11월 12일.
3 동서독의 재무장관 발터 롬베르크(Walter Romberg)와 테오 바이겔(Theo Waigel)은 서독의 본에서 로타어 데메지에르(Lothar de Maizière) 동독 수상과 헬무트 콜(Helmut Kohl) 서독 수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제·화폐·사회 통합 협약을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동독은 경제주권을 완전히 서독에 이양하였다. 동독의 모든 금융이 서독 은행의 관리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4 참조: 강정숙, “독일의 이민자 동화정책의 현황과 문제점,” FES-Information-Series (2001. 3); 디르크 할름, “독일의 이민 관련 사회적 정치적 여건 및 국민들의 태도,” FES-Information-Series (2011. 3); 베르너 캄페터, “독일통일의 기적과 그 교훈,” FES-Information-Series (2010. 6).
5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아데나워 총리 시기의 외교 원칙이었던 할슈타인원칙(소련 이외의 동독 승인국과는 외교 관계를 가지지 않겠다는 것)을 정식으로 포기하고 동유럽 여러 나라에 대한 접근 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70년 8월에 체결된 서독-소련조약에서 빌리 브란트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동독의 국경선을 인정하는 것으로 대(對)동유럽화해정책을 시작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간섭하에 들어간 동독의 국경은 그 이전보다 축소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러한 국경인정은 많은 서독 사람들에게 반발을 사기도 했다.
6 이승열, 앞의 논문. 구소련점령지역(SBZ)에서의 디아코니아 사역의 발전은 서방 연합국들과 소련 사이의 점령국 정치와 갈등 혹은 긴장과는 상관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디아코니아 사역을 계속해서 수행하거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구소련의 군사행정은 국가사회주의(NS) 시절에 압류한 디아코니아 시설과 건물을 되돌려주었기 때문이다. 1945년 이후 동독지역에서의 디아코니아에 관한 자료는 허우정의 박사학위 논문을 참조하라. Woo-Jung Heo, “Theologie und Praxis der Diakonie in der SBZ und DDR 1945-1989: Das Erbe der Diakonie im geteilten Deutschland mit Perspektive auf das geteilte Korea” (Ph.D. diss., Heidelberg Universität, 2005).
7 윤정란, 『한국전쟁과 기독교』(한울아카데미, 2015).
8 이삼열, 『평화의 복음과 통일의 사명』(햇빛출판사, 1991), 81-101.
9 이 선언은 노태우 정부가 추진한 통일외교 정책의 기본방향을 담고 있다. 북한을 적대적인 경쟁상대로 인식하지 않고 적극적인 대북협력 의지를 표명하면서 각종 대북제의에서 항상 수반된 전제조건을 달지 않았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조치로 평가되었으나, 통일논의와 대북접촉 창구를 정부가 독점함으로써 재야와 학생들의 통일논의를 억압하였다는 비판을 받는다.
10 분단 이래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으로 남북화해 및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남북통일의 자주적 해결,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 인정, 이산가족 친척방문과 비전향 장기수 문제 해결 등 인도주의적 해결, 경제협력 및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 활성화 등 매우 현실적으로 중요하고 필요한 합의를 하였다.
11 6·15공동선언 적극 구현, 상호존중과 신뢰의 남북관계로 전환,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 6자회담의 9·19공동성명과 2·13 합의이행 노력, 경제협력 사업 활성화, 백두산 관광 실시 등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와 합력 발전,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주의 협력사업 적극 추진, 국제무대에서의 민족의 이익과 해외 동포의 권리와 이익을 위한 협력 강화 등이 중심이었다.
12 2018년 8월 31일 한국교회남북교류협력단 발족식 및 감사예배가 있었다. NCCK 화해통일위원장 나핵집 목사, 평통연대 대표 강경민 목사, YMCA 대표와 YWCA 대표 등 4인이 공동대표로 추대되었으며, NCCK 화해통일위원회가 간사단체로 섬기게 되었다.
13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은 북한선교와 통일운동에서 북한교회 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탈북동포를 지원하고 북한 지하교회를 지원하는 사업 그리고 중국에 있는 탈북동포를 복음화하여 북한으로 재입북시켜 북한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 북한에 단일 기독교단을 세우고 북한교회를 독립적이며 자립적인 교회로 세운다는 원칙을 세웠으며, 북한교회 재건을 위해 1995년에 북한교회재건운동본부를 조직하고 북한 교회사료 연구 및 발굴사업(1995-97)을 거쳐서 1999년까지 분단 이전 북한에 존재했던 3,040개 교회 가운데 2,907개 교회를 한국과 해외의 한인교회들과 연계시키는 작업을 마쳤으며, 추가적인 결연과 재건자금을 마련하는 일을 해왔다. 2000년 이후는 북한교회 재건과 함께 남한 내 귀순동포 결연, 통일선교대학, 해외 탈북동포선교, 중국 내 탈북동포지원, 북한 내 북한 지하교회 지원, 통일 전과 통일 과정 그리고 통일 후 북한사회 재건 및 공헌 등 종합적인 북한교회재건운동을 펼쳐왔다. 북한에 재건하는 교회의 모델은 예배당만이 아니라, 의료실, 재활시설, 숙식시설, 육아시설, 선교원, 교육실, 컴퓨터실, 휴게실 등이 구비된 사회문화복지관 방식의 건물을 세우려고 설계도와 모형, 조감도를 만들어 제시한 적도 있다.
14 한국기독교북한동포후원연합회의 원칙이란 1997년 14개 교단과 8개 단체를 모아서 ‘한국기독교북한동포후원연합회’를 조직하여 이를 기독교 대북지원 창구로 정부에 공식적으로 허가를 받은 것을 뜻한다. 그동안은 대한적십자사를 통한 대북 지원만 가능했는데 기독교후원연합회 이름으로 대북지원의 길을 연 것이다. 김영주, “평화의 꽃을 피우기 위하여,” 홍정길, 이만열, 권호경, 강경민, 김영주, 이문식, 신명철 공저, 『화해와 평화의 좁은 길-남북나눔이 걸어 온 20년』(홍성사, 2013), 242.
15 홍정길 외, 위의 책.
16 Theodor Strohm, “Theologie der Diakonie in der Perspektive der Reformation, Zur Wirkungsgeschichte des Diakonieverständnisses Martin Luthers,” in Theologie der Diakonie, Paul Philippi and Theodor Strohm(Hrsg.) (Heidelberg: HVA, 1989), 178; 이승열, “종교개혁과 디아코니아,” 2002년 호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종교개혁기념 학술대회, 4.
17 김옥순, 『디아코니아 신학, 섬김과 봉사-교회의 디아코니아 활동을 위한 신학적 성찰』(한들출판사, 2011), 22.
18 Theodor Strohm, “Diakonie der Versöhnung: eine Perspektive sozialer Ve-rantwortung,” in Compassion Weltprogramm des Christetums Sozialer Verantwortung lernen, Johann-Baptist Metz, Lothar Juld, Adolf Weisbrod(Hrsg.) (Basel, Wien: Herder, Freiburg, 2000), 26-36.
19 이승열, “남북디아코니아/사회경제선교협력과 교류를 위한 신학적 성찰(The-ological Reflexion on Inter-Korean Cooperation and Exchange Diakonia Konvivenia),” 동북아시아 평화와 상생디아코니아 포럼, 2018년 9월 19일.
이승열|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디아코니아학으로 박사학위(Dr.Theol.)를 취득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부산장신대, 숭실대에서 겸임교수로 활동했고, 대치동교회 위임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 사회봉사부 총무, 한국기독교사회봉사회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기독교사회봉사연구소장, 한국교회디아코니아아카데미 원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