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히로시마·나가사키 시장, 오바마에 美 플루토늄 실험 항의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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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일시 [2014-11-05 02:05:21]
【오사카=신화/뉴시스】정진탄 기자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폭탄 피해를 입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두 시장이 4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지난 9월과 10월 미국의 플루토늄 실험에 항의하는 서한을 보냈다고 교도 통신이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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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http://www.ukopia.com/newsimg/2010/03/02/20100302084104_thumbnail.jpg
Contents
1. 개요
2. 투하 이전
2.1. 투하의 동기
2.1.1. 소련의 동태
2.1.2. 인명 피해
2.1.3. 일본은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아요!
2.1.4. 미국의 여론
2.1.5. 핵의 위력에 대한 무지
2.1.6. 경고 사격만 한다면?
2.1.7. 미군이 내린 결론
2.2. 에놀라 게이
2.2.1. 가로챈 이름
2.3. 위험한 명령불복종
2.4. 원자폭탄
3.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3.1. 죽음의 날
3.2. 일본의 반응
4.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4.1. 여기가 아니다
4.2. 일본의 2번째 반응
5. 일본 외의 반응
6. 전쟁이 끝난 후
6.1. 피해자 행세의 주요 레퍼토리
6.2. 한국인 원폭 희생자들
7. 논란
7.1. 반대
7.2. 찬성
8. 여담
9. 관련 항목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떨어진 팻 맨의 버섯구름을 대기권에서 찍은 사진.[1]
1. 개요
[1]인류가 거주하는 도시에 대한 공격을 목표로 한, 역사상 단 2번 이루어진 핵무기 투하 사건.
[2] 제2차 세계대전이자 태평양 전쟁 종결에 쐐기를 박았다고 평가되는 사건이다.
당시 일제 수뇌부는 소련을 중재자로 하는 화평 공작을 펴고 있었는데, 특히 '조선, 중국, 만주, 사할린 전부 포기하고 당장 항복하자'는 고노에 후미마로 등의 강경파는 이미 1944년부터 항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처음부터 홋카이도 등을 정복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사할린이나 만주 정도로 항복을 중개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미국을 위시로 하는 국제연합군은 정치적 상징성으로든 군사적 실리성으로든 일본 본토를 반드시 점령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화평 공작은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다.
한편 7월 말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었지만, 일본은 국체 보존(즉, 천황제 유지)이 불투명한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여전히 소련의 중재를 통해 조약을 체결한다는 망상에 가까운 꿈을 버리지 않고, '포츠담 선언을 묵살한다'는 발표를 해버렸다.[3] 이렇게 되자 최대한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원자폭탄 투하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사라지고 말았다.
2. 투하 이전
원래 미국은 몰락 작전이라는 일본 본토 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쉽게 생각하던 미국은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처절하게 저항하던 일본군을 맞닥뜨린 후 계획을 변경하게 된다.
2.1.1. 소련의 동태
독소전쟁이 끝나가면서 미국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 얄타 회담에서 소련에게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도록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 그 만큼 소련의 몫도 늘어나니, 태평양에서 소련의 영향을 줄이려면 전쟁을 빨리 끝내야 했다.
2.1.2. 인명 피해
일본을 공격하면 상륙시 너무 많은 피해가 날 것으로 예상했다. 당시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일본을 점령하려면 미국인 100만 명과 영국인 50만 명이 전사할 것이라고 예상할 정도였고,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된 몰락 작전은 핵탄두 20여 발과 그에 상응하는 독가스까지 사용되는 작전이라 너무나 잔혹하기도 했다.
2.1.3. 일본은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아요!
사실은 이게 가장 큰 이유다. 당시 일본의 상황은 항복하지 않으면 다 죽을 판이었다. 일본 해군은 사실상 괴멸되었고 국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렸으며, 자원도 없어서 본토 결전용 병기로 활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지경이면 닥치고 항복해야 했지만, 일본군은 반자이 어택과 카미카제와 옥쇄를 일삼으며 항복을 거부하기 일쑤였다. 일본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미군은 "도대체 일본인은 어떻게 된 놈들인가?" 라는 식의 오리엔탈리즘 연구도 했고 이런 연구의 대표적인 결과물이 바로 루스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이었다.
핵무기의 경우 이미 대전 전부터 이론적으로 가능했고 전쟁 내내 개발한 신형무기를 사용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사실 실용화되기 전인 1945년 5월에 이미 나치 독일이 항복했다.
결국 미군은 1945년 7월 30일에 작성한 '일본의 비밀무기: 자살'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일본군이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에 간다'며 자살공격을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고, 일본인의 완전 소멸 또는 국가존속이 위협받아야 일본이 항복한다고 결론내렸다.
2.1.4. 미국의 여론
그 당시 미국의 여론은 한마디로 눈이 뒤집혀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치 독일이 항복하고 세계적으로 종전 분위기가 강해진 상태에서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의 전투로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하자 미국 국내에선 일본 본토 상륙으로 큰 희생을 치르느니 기뢰 매설과 해상봉쇄로 그냥 다 굶겨 죽여버리자는 여론도 해군을 중심으로 매우 강하게 대두될 지경이었다. 심지어 마침 추수철이 다가오고 있던 시점에 일본의 모든 곡창지대에 제초제를 뿌려버리는 걸 당연시 할 정도였으니 뭐...
더구나 선전포고도 없이 이뤄졌던[4][5] 진주만 공습 때문에 미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증오는 매우 심한 것이어서 히로시마에 대한 핵폭격 당시에도 더 치명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투하 전에 사이렌을 울려서 시민들이 하늘을 보게 하고서 터뜨려서 폭발 섬광으로 인한 실명을 최대한 유도, 인명피해를 조금이라도 더 늘려보겠다고 하거나 핵폭격으로 도시 기능이 마비된 곳에 한 번 더 소이탄 폭격을 감행해서 소방시설이 마비된 상태에서 화재를 일으키면 도시가 완전 전소되리라는 것을 노려서 도시의 흔적도 완전히 사라지게 하자는 과격한 의견이 올라왔다. 당시만 해도 원자폭탄이 히로시마급 도시를 그대로 완파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실제로 히로시마는 핵폭격으로 시 전체의 54% 영역만이 직접 피해를 입었다. 물론 폭풍 및 화재로 인한 간접피해까지 계산하면 훨씬 넓은 영역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원자폭탄의 실전에서의 위력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위의 과격한 주장이 억제된 건 그랬다가 원자폭탄 피해가 다른 피해에 묻히면 원자폭탄의 정치적 상징성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이게 비인도적이라거나 무의미한 공격이라든가라서가 아니었다!
2.1.5. 핵의 위력에 대한 무지
사실 원자폭탄의 위력, 특히 방사능으로 인한 2차 위력은 당시에도 몰랐다. 방사능으로 인한 백혈병이나 암 발생 혹은 열선도 당시에는 생각하지 않을 정도였었다. 전쟁 중 및 전후 기록 필름에서 원폭 실험을 한 뒤 군인들이 원폭이 터진 자리에 진입해 자료를 모으고 청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장 맨해튼 프로젝트의 지도자였던 오펜하이머 박사가 원폭실험 폭심지에서 찍은 사진을 찾을 수 있을 정도.# 또한 전후 원폭 지역을 시찰했던 윌프레드 버쳇이 후일 방사능 후유증이 분명한 병에 걸렸음에도 미 군부는 "우연의 일치이다."라고 했을 정도다.
2.1.6. 경고 사격만 한다면?
그래도 원자폭탄을 실전에 민간인을 대상으로 쓰는 건 너무한다는 의견도 있었던 게 사실이고 그래서 일본 정부에 사전 경고와 더불어 성층권 정도의 고공에서 원자폭탄을 터뜨려서 위력을 시연해 보이거나 인구밀도가 희박한 마을에 투하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줄리어스 오펜하이머의 "성층권에서 거대한 핵불꽃이 터지고 실제 피해는 미미하다면 과연 일본 지도부에서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라는 의견처럼 효과 자체가 미지수여서 묻혀버렸다. 그리고 실제로 고공 폭파시켜서 그 위력을 눈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공포심을 유발한다는 것은 애초에 제정신 박힌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거지 눈 까뒤집고 반자이 돌격이나 해댈 정도로 나라 전체가 미쳐 돌아가는 수준이면 이미 공포심이고 뭐고 생길 틈새조차 남지 않는다. 거기에 당시 그 동네의 사고방식으로 번쩍하고 끝나면 십중팔구는 덴노님의 은총으로 절묘하게 바꿔버리면서 더더욱 자폭 공격에 열을 올렸을 거다.
사실 당시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성층권에서 핵폭발 일으켰으면 EMP로 도시 직접 피해만 없지 본토 섬 하나가 전력이 완전히 나갔을지도 모른다
그 외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곳을 미리 예고해서 민간인이 대피하게 함으로써 실제 피해는 줄이면서 심리적 효과는 더 높이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그 경우 혹시 원자폭탄이 불발되는 경우 차후 미국이 하는 모든 제안이 일본 대본영에게 허세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고 일본인들이 연합군 포로를 히로시마에 끌어다놓고 인간 방패로 삼으면 어쩔 거냐는 의견도 나와서 기각되었다. 원래 미 육군항공대와 영국 공군은 독일을 폭격하던 당시 목표가 된 도시에 아군 포로가 있음이 확인됐더라도 거리낌없이 폭격했는데 아군 포로의 희생을 막으려고 폭격을 중단하면 앞서 말했듯이 중요 지점마다 연합국 포로를 묶어놓아서 인간 방패로 쓸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일단 폭격을 당하는 연합국 포로에게는 가혹하기 그지없었고 유명한 소설가인 커트 보네거트는 악명 높은 드레스덴에서 아군의 폭격을 당한 경험으로 <제5도살장>이라는 소설을 썼다. 게다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히로시마에는 미군 포로가 20여 명 정도 있었다. 전후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그 중 시체가 남아있는 사람은 단 3명. 나머지는 말 그대로 원자폭탄에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여명의 눈동자 원작에서는 이런 것을 감안해서 OSS에서 윤여옥을 보내서 포로수용소 위치를 밝히려는 작전을 한다.
2.1.7. 미군이 내린 결론
그래서 미군은 원자폭탄으로 일본을 항복시키기로 결정했지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기 위해 일본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일본 정부는 7월 28일 오후 4시에 이에 대한 입장을 밝혔는데, 스즈키 총리는 여기서 "(포츠담 선언에 대해) 묵살할 따름"이라고 발언했다. 일본말에서 묵살(黙殺)이라는 말은 2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무시한다(Ignore)'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유보한다(No Comment)'는 의미이다. (한국어에서는 '무시한다'란 의미밖에 없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그 단어를 '유보한다'고 해석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당연히 일본 언론은 "일본 정부가 최후통첩을 무시했다(ignore)"고 보도했고, 이 소식은 전세계에 퍼졌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무시한다(Ignore)라고 써버리면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일본이 최후통첩을 거부했다고 해석하기 마련이고, 서방언론 역시 Ignore를 거부(Reject)라고 해석했다. 당장 영국의 BBC가 "일본이 연합군의 최후통첩을 거부했다(Japan formally rejected the Allied ultimatum)"고 보도했고, 7월 30일 뉴욕타임즈가 "일본이 연합국의 항복촉구를 공식적으로 거부했다(Japan Officially Turns down Allied Surrender Ultimatum)"는 제목으로 보도했으며, 다른 언론도 다 그랬다. 이 보도를 보고 격분한 트루먼 대통령은 8월 3일, 원폭투하를 지시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2.2. 에놀라 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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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격 전 정비중인 에놀라 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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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중인 에놀라 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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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좀 거시기하지만 넘어가자.
에놀라 게이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B-29로 유명하다. 미 육군 항공대 509 혼성그룹 393 폭격비행대대 소속으로 기체번호 44-86292. 기체의 심볼은 노즈아트(Nose Art)로 새겨진 기수의 ENOLA GAY와 수직 미익(꼬리날개)의 R. 맨하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원자폭탄 Mk-1 코드네임 Little Boy의 모기(母機).
1945년 8월 6일 아침 히로시마 상공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한 사실 덕분에 그 이름이 알려졌다. 그 작전을 위해 폭격기 방어용 회전기관총탑도 제거했다고 한다. 2013년 현재는 복원되어 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에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미국 영화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에서도 잠깐 스쳐 지나간다. 에놀라 게이가 나왔을 때 영화관에서 환호성을 질렀다는 사람도 있다.
참고로 나카사키에 팻 맨을 날린 비행기의 이름은 '복스카(Bockscar)'. 해당 B-29 기체의 기장인 프레드릭 복의 이름을 따왔다.
2.2.1. 가로챈 이름
이름의 유래는 본기의 기장 폴 티베츠 대령의 어머니 성함으로 어린 시절 비행사가 되려 했던 그의 꿈을 북돋아줬던 자신의 어머니 이름을 따 'ENOLA GAY' 로 명명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여기에는 뒷이야기가 있다.
폴 티베츠는 부대장이었고 원래 이 기체 담당도 아니었다. 그러나 임무 직전에 지휘관으로서 꼬장 독단을 부려 원래 기장이었던 로버트 루이스를 빼버리고 히로시마 작전만 자신이 맡는 것으로 바꾸었다. 전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 로버트 루이스는 불쾌해했지만 계급이 깡패니까 참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아침에 루이스는 계류장에서 자신의 애기에 커다랗게 '에놀라 게이' 라는 페인팅이 되어있는 모습을 발견하는데 티베츠 스스로도 뒤가 켕겼던지 야음을 틈타 하룻밤 사이에 칠해놓은 것이었다. 이 일만큼은 루이스도 격분하여 티베츠에게 달려가 극력 항의했으나 묵살당했다. 억울하면 군대 일찍 오든가! 티베츠가 이런 무리한 일을 저지른 이유는 물론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기체로써 자신과 어머니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폴 티베츠 본인은 에놀라 게이의 다른 승무원들과 마찬가지로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2005년 원폭 60주년을 맞아 '원폭은 필요했고 우리는 죄책감이 없다' 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다음 해 티베츠 자신은 요미우리와의 인터뷰에서 "똑같은 상황이 된다면 똑같이 할 것" 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트라우마를 이겨내기 위한 방어기제로 그런 생각을 가진 것 아닐까 싶을 수 있지만 티베츠는 전역 후에 원폭 투하를 흉내내 버섯구름을 재현하는 에어쇼를 벌인 적도 있으며 이 때문에 미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게 공식 사과까지 했다.
2.3. 위험한 명령불복종
원래 작전상으로 리틀 보이는 기폭이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기체에 싣고 이륙하도록 되어있었다. 한편 일본으로 가는 도중 추락하게 된다면 임계사고를 막기 위해 폭탄을 분해해 뿔뿔이 흩어놓도록 지침이 내려져 있었지만 지시한 사람도 그게 가능한 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리틀 보이 자체도 매우 무거웠던 데다가[6] 주둔지의 지질 때문에 활주로 노면 상태도 엉망이었기 때문에 이륙이 지극히 불안정했다. 자칫 이륙하다 추락하면 망했어요. 게다가 원자폭탄이 유폭할 경우 해당 비행장과 부대원 전원, 좀 넓게 잡으면 섬 전체가 원자폭탄의 첫 희생자로 기록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폭탄 담당 승무원 윌리엄 파슨스는 명령을 어기기로 결심했다. 작전 며칠 전부터 그는 무단으로 원자폭탄 분해·조립을 반복했다. 까짓 거 조립은 분해의 역순 이륙한 다음에 공중에서 기폭 가능 상태로 조립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공중에서 조립하겠다는 것도 지상에서 연습하겠다는 것도 위험천만한 명령불복종이었지만 대놓고 연습에 매진하는 상황에도 문제삼는 사람은 기지에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7] 그만큼 무기에 관한 파슨스의 뛰어난 재능은 인정을 받고 있었기에 따, 딱히 이륙하다 터질까 봐 눈감아주는 건 아니니까! 원래의 폭탄 담당 승무원을 대신해 히로시마 임무에 발탁된 것이기도 했다.
결과는 아는 대로. 원폭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이 용자짓을 해 결국 폭탄이 제대로 터지게 한 주역인 셈.
[edit]2.4. 원자폭탄
http://www.forgetthebox.net/wp-content/uploads/2010/08/fat-man-and-little-boy.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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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9에 의해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은 '리틀 보이', 나가사키에 떨어진 폭탄은 '팻 맨' 이라는 이명이 붙어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우라늄 235를 이용해서 만들어졌고 후자의 경우는 플루토늄을 이용해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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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외형 역시 그에 따라 달라졌다. 리틀 보이는 두 개의 우라늄 덩어리를 충돌시키는 포신형 구조를 갖고 있었지만 팻 맨은 텅 빈 공간 바깥에 플루토늄을 배치한 후 기폭과 동시에 이 조각들이 안쪽으로 날아가서 공 모양으로 합쳐지고 그것이 폭발을 일으키도록 되어있었다.
물론 원자폭탄의 기밀을 감춰야 하기 때문에 리틀 보이는 루즈벨트[8], 팻 맨은 처칠로 불렸다.
3.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3.1. 죽음의 날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까지 히로시마는 상당한 규모를 가진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이때까지 폭격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9] 이런 도시가 몇 개 있었는데 히로시마, 나가사키, 코쿠라, 니이가타, 교토였다. 이 중 교토를 제외하고는 바로 원자폭탄의 표적으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모두가 '히로시마는 왜 그럴까?' 를 궁금해 하던 어느 날. 아침에 정찰기 3대가 히로시마 상공을 훑어보았고 히로시마에 사는 사람들은 폭격인 줄 알고 급히 대피했다. 물론 피해는 없었고 사람들은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몇 시간 후 B-29 폭격기 하나가 단독으로 날아왔고, 그것을 본 사람들은 늘 오던 기상 정찰용 비행기겠거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10] [11] 그래서 대피를 안 했는데....죽음이 내려왔다.
1945년 8월 6일 8시 15분 리틀 보이는 바람으로 인해, 원래 조준점이었던 T 모양의 아이오이 다리에서 약 240m 정도 빗나가 시마 외과병원의 600m 상공에서 폭발했다.
폭탄이 터지는 순간 히로시마의 시민들은 엄청나게 밝은 빛을 목격했다. 직접 쳐다본 사람들 중에서는 눈이 멀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 수억 도에 달하는 엄청나게 뜨거운 화구가 공중에 생기고, 폭심지 근처의 온도는 약 3,000-4,000도가 넘었다. 폭심지 근처는 모든 것이 문자 그대로 삭제되었다. 계단에 앉아있던 사람이 증발하기 직전에 열선과 방사선으로 인해 계단에 찍힌 검은 흔적(원폭 그림자)[12]은, 현재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뒤이어 열폭풍과 함께 잇따라 충격파로 인하여 최대 초속 340m = 시속 1224km = 음속[13]에 달하는 엄청난 후폭풍이 주변 1.5km 내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 범위 내에 있던 건물들은 아주 튼튼하게 지은 건물을 제외하고 전부 완전히 붕괴되었다.
단 1발의 폭탄은 히로시마를 완벽에 가깝게 파괴하였다. 하필이면 투하 시간이 사람들의 출근 시간이었기에 피해가 더 컸다. 일례로 폭심지에서 불과 몇백 m 떨어진 은행에서는, 일찍 출근한 말단 여직원 2명을 제외하고[14] 출근 중이던 다른 직원들은 모두 절명했다. 당시 폭심지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다고 알려진 생존자는 노무라 에이조라는 남성인데, 폭심지에서 불과 17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고 한다. 콘크리트 빌딩의 지하에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히로시마 시 전체는 방사선과 열로 가득해졌고, 잿빛 대기로 태양마저 가려져 사방이 밤처럼 어두웠다. 사방팔방이 불지옥으로 변한 상태였다. 불교의 지옥도나 단테의 지옥에서나 나올 법한, 현실에 나타난 문자 그대로의 생지옥이었다. 피부가 녹아내린 채 물을 찾으며 방황하는 사람들, 온몸이 불타는 사람이 다리 밑으로 떨어지자 물에 떨어진 불덩이처럼 산산조각나는 모습 등, 끔찍한 참상을 전하는 목격담은 셀 수 없다.
높은 열로 인해 기온이 치솟은 대기는 지극히 건조해져, 도시 전체가 초고온의 건식 사우나 같은 상태로 되었다. 사방에 널려진 죽지 않은 부상자들로부터 신음소리, 비명소리와 함께 물을 달라는 절규가 끊이지 않았다. 몇 시간 뒤 증발한 수분이 모였던 상공으로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검은 비였다. 원자폭탄으로 모든 것이 타버리고 남은 재가 방사성 분진으로 올라갔다가 비에 섞여 내려온 것이었다. 이 시커먼 빗물은 고농도의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있었지만 타는 듯한 갈증에 사람들은 입을 벌리고 빗물을 받아 마셨다. 예외도 많았지만 이 희생자들은 검은 비에 노출된 만큼 더 일찍 죽었다.
의사와 간호사들도 무려 90% 이상이나 죽거나 다쳤다. 도시 주변부에서 살아남은 의사들은 고군분투했으나 피해상황은 초월적인 어떤 것이었다. 끝없이 넘쳐나는 중환자들로 트리아제 같은 분류는 무의미했다. 피부가 녹아내린 환자의 화상치료만 하더라도 약품은 턱없이 부족했다.[15] 다량의 방사선에 피폭된 부상자들은 갖가지 끔찍한 증상에 고통을 호소하며 며칠 만에 죽어갔다. 히로시마의 의사들은 뼈저린 무력감으로 고통 속에 죽어가는 환자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7-8만명의 희생자 중 군인이 2만 명이었다. 2총군 대부분이 죽었다. 이 중 상당수가 원폭에서 800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히로시마 성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10명 이상의 미군 포로들도 대부분 죽었다. 증언에 따르면 몇몇 포로는 살아남았는데 분노한 생존자들에 의해서 맞아죽었다는 증언도 있고 치료를 거부받아 죽었다는 증언도 있다.
폭탄이 터진 직후 에놀라 게이의 승무원들은 '방사선의 맛'을 느꼈다고 한다. '납 맛'이었다고.[16]
3.2. 일본의 반응
"이건 원자폭탄이 아니다. 큰 재래식 폭탄이다!"맙소사
유례가 없는 참혹한 공격이 가해진 이후 일본 군부가 보인 반응은 이것이었다. 일본의 물리학자가 히로시마를 본 순간 '원자폭탄' 부터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군부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히로시마가 괴멸하면서 히로시마 안의 보고체계는 아예 증발해버렸고 피해보고는 외곽 주변의 관찰부터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의 피해보고는 원거리에서의 열풍·열복사 등에 관한 것으로 "두껍게 입은 면옷으로 폭발 당시의 열기는 막을 수 있었다" 라든가 하는 아직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못한 것들이었다. 그동안 혹독했던 미군의 대공습을 뛰어넘는 엄청난 피해 실상이라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부족한 정보를 모아도 해당 폭탄이 재래식 폭탄은 아니라는 점은 아무리 맛이 간 일본군이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 정보부에서는 그것이 원폭이라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상층부가 현실도피&인지부조화를 일으키는 바람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항복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일본이 항복의지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이미 소련을 통한 대미 강화협상은 진행중이고 국체의 온존 및 약간은 온건한 방식으로의 강화를 추진했다. 물론 대일 참전을 생각하던 소련으로서는 그걸 들어줄 리가 없었다. 히로시마 이후 군부와 정부가 모두 항복에 동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천황제를 유지한다는 조건만 붙이고 싹싹 빌어보자는 화평파와 연합군의 일본 점령을 최소한도로 단기간에 끝마쳐야 하며 무장 해제와 전범 재판을 일본이 직접 할 것이라는 조건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강경파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항복은 지체되었고 결국 미국은 일정에 따라 한 발을 더 투하하기로 결정한다. 그렇지만 이 화평파와 강경파의 갈등 자체가 이미 늦었던 것이 화평파가 입장을 확고히 정리한 것이 8월 7일 저녁이었는데 군부가 꾸물거리는 바람에 항복을 결정할 최고전쟁지도회의가 8월 8일 열리지 못하고 8월 9일-즉 나가사키 원폭 투하일-에서야 열렸다. 즉 이들이 무슨 결정을 내리건 일본은 히로시마에 대한 대응 자체가 이미 너무 늦었던 것이다. 더구나 8월 9일 회의 중에 2차 핵 투하 전까지만 해도 일본의 지도부는 미국이 더 이상 핵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4.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4.1. 여기가 아니다
팻 맨을 싣고 이륙한 B-29인 '복스카(Bockscar)(기체번호 44-27297)' 는 에놀라 게이와 동일한 509 혼성그룹 393 폭격비행대대 소속으로 추가적인 원자폭탄 투하를 위해 후쿠오카현 코쿠라(小倉, 현 키타큐슈시 코쿠라키타 구, 코쿠라미나미 구)로 날아갔지만 구름으로 인한 시계 불량으로 폭격을 할 수가 없었다.[17][18]
제조하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며 재고량도 없었던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것이므로 가급적이면 육안 조준으로 정확하고 가장 피해가 크도록 폭격을 할 예정이었기에 폭격기는 기수를 돌렸지만 나가사키 역시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연료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기에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고 이대로라면 폭탄을 버리거나 레이더 조준으로 폭탄을 투하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30초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구름의 틈으로 나가사키 시가지가 보일 정도로 큰 맑은 구역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이 운명을 갈랐다.
그리고 나가사키에도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4만에서 7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그날 사망했다.
플루토늄 폭탄 팻 맨의 위력은 21kt로 히로시마에 터진 우라늄 재질의 16kt짜리 리틀 보이보다도 컸는데 피해는 히로시마에 비해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고 완전 평야지대인 히로시마에 비해 산지투성이라 폭심지에서 발생하는 열선과 폭풍이 산과 계곡에 막혀서 인명 피해가 히로시마의 4분의 1 정도로 더 낮았다. 게다가 조준이 어려웠기에 원래 노렸던 투하지점에서 4km 이상 빗나간 것도 겹쳐서 위력이 그만큼 줄어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피해가 적었다는 것이 아니다!
이번에도 일본 군부는 원폭을 탑재한 복스카가 큐슈를 향해 접근 중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히로시마와 같은 V600번대 콜 사인을 사용하는 B-29가 출격했으며 정보부에서는 그것이 원폭이라 판단하여 보고했지만 당시 최상층부가 소련의 참전으로 인한 긴급회의 중이어서 무시되었다(...) 덕분에 이번에도 공습경보를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 폭격 이후 미국은 소련 참전으로 인한 성과 파악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천명한 포츠담 선언 이행을 다시 한 번 촉구하기 위해서 당분간 원폭 투하를 중지하게 되었다.
게다가 폭격하고 싶어도 폭탄이 없었다. 당시 플루토늄 폭탄용 폭축렌즈는 폭약설계담당자인 키샤코프스키가 한 땀 한 땀수작업으로 만들고 있었고 새 폭탄을 위한 플루토늄 추출은 진행 중이었으며 플루토늄 폭탄의 필수품인 핵기폭기(베릴륨과 폴로늄)도 예비가 없었다. 우라늄 폭탄은 아예 3~4개월 이상 추가 농축 작업을 해야 폭탄을 만들 수 있는데 생산시설에 기계적 문제가 생겨 생산중지 상태였다. 이 때문에 세 번째 폭탄은 플루토늄으로, 그나마도 빨라야 8월 20일에야 준비가 가능했다. 참고로 첫 핵폭격 후 10개월 뒤까지도 미국의 가용 원자폭탄은 7발에 머물렀으며 플루토늄은 9발분 있었다. 22개월 뒤 시점에도 가용 폭탄은 13발에 불과했다.
4.2. 일본의 2번째 반응
소식을 접한 소련은 자기 몫을 챙기기 위해 잽싸게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하게 된다.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소련의 일본공격 준비가 양과 질에서 대단히 우수했고 그 준비기간이 결코 하루이틀로 끝날 수준이 아닌것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는 미국이 소련에게 일본으로의 참전을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었고, 참전시점까지 못을 박은 상황이었다. 소련은 참전약속일의 마지막날에 전격침공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본 일본 군부는 이제서야 무조건 항복을 결정한다. 일단 학자들에 따라서 원폭과 소련 참전 중 과연 어느 것이 항복에 더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일단 다이쇼 이래로 제국의 절대 방위선인 북방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상황에 내지에서도 그러한 공격을 당하면 일단 국체보전만이라도 한 상태에서 항복을 고려하는 건 당연한 일.
항복 내용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절 정오, 이른바 '옥음방송' 이라 하는 덴노의 녹음된 목소리를 직접 방송하였다. 사람들은 덴노를 신적 존재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19] 하지만 실제로는 중계기를 통해 방송되는 방식이라 라디오 음성은 깔끔하지 않았고 또 내용이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면 알아듣기가 매우 힘든 일본어 문어[20] 형식으로 되어있어 처음엔 이 방송을 하였을 때는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를 몰랐다고 한다. 그 후 방송요원이 일상언어로 해석하여 후에 방송하여 드디어 항복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결정된 항복조차도 청년 장교들의 반발로 쿠데타가 발생해 사단장이 총격을 당해 사망하고 일왕이 거주하는 궁성이 반란군에 의해 점령, 쑥대밭이 되는 등 일왕이고 나발이고 화평파를 싸그리 잡아 죽이려고 시도한 궁성사건이 발생했다.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은 자들도 자결하거나 카미카제 공격에 참가하는 식으로 반항했고 그 와중에서 항복 선언이 발표되게 된다. 오죽하면 항복을 결정한 날이 일본의 가장 길었던 날이겠는가. 당시 필리핀에서 미군 포로 생활을 하던 작가 오오카 쇼헤이는 소련의 관동군 공격과 스웨덴을 통한 일본의 항복 요구 타전을 발표한 8월 10일을 포로들에게 사실상의 전쟁이 끝난 날 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사카이 사부로의 자서전에 의하면 비슷한 시기에 항복이 장교들에게 알려졌다. 즉 10일부터 15일까지 죽은 사람들은 무의미하게 죽은 것이고 왜 요타전후 대국민 발표를 늦게 했는지 한탄하고 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전쟁은 끝났다.
5. 일본 외의 반응
숙연하거나 충격에 사로잡힌 반응이 예상되지만 핵이 얼마나 무서운 무기인지에 대한 정보가 없던 당시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다는 사실에 좋아했다.
일본에서 나온 작품에는 핵폭탄 투하 소식에 미군 병사들이 죄책감을 갖고 숙연해하는 장면이 가끔 나온다. 그러나 정작 당시의 미군 병사들은 핵폭탄으로 전쟁을 끝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뻐서 핵으로 전쟁을 끝내준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키스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한다. 반자이 어택이나 카미카제 등 일제의 각종 똘기 넘치는 짓에 죽어나가던 병사들은 지긋지긋한 전쟁을 빨리 끝내준 걸 반길 수밖에 없었으니까.
미국 본토에서도 딱히 동정심이나 죄책감 같은 건 가지지 않았다. 일단 당시 핵의 정확한 위력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원폭 피해자 등을 담은 끔찍한 사진들은 검열되었다. 또 프로파간다와 국민적인 인식의 영향이 큰데, 일단 진주만 공습으로 본토가 사전 통보 없이 공격당한 분노가 큰 데다가, 문화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고 반자이 어택 항목에서처럼 인명 따윈 장식으로 여기는 일본군의 미친 짓거리들 역시도 미국인들에겐 전혀 이해되지 못하고 적개심의 대상이 되었다. 누가 이해하겠어 승리의 영광으로 우쭐거리던 유럽 전선 폭격과 다른 감정이 들었던 것이다. 이는 선전 포스터에서 극명하게 보여진다. 대독 선전 포스터에서는 나치 독일을 뱀 같은 동물이나 사물로 에둘러 비유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 대일 선전 포스터의 경우에는 말 그대로 악의적으로 눈 째지고 광대뼈 튀어나오고 뻐드렁니 나온 일본인(엄밀히 말하자면 도조 히데키의 캐리커쳐)을 직접적으로 등장시키는 데다 가차없이 인간 이하의 존재로 멸시하는 포스터가 그려졌다. 실제로도 인간 이하의 짓을 하긴 했다만
미국에서 사람들이 원폭 투하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냉전으로 핵전쟁에 대한 위협이 커지기 시작한 1950년대 말부터였다.
티베츠를 포함해 조종사 상당수는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았으며, 전쟁을 끝내기 위해 선택한 정당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199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50주기를 맞이하여 당시 MBC에서 에놀라 게이를 몰던 조종사(티베츠는 아니었다) 중 하나를 찾아가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나는 전쟁에서 죽을 뻔한 수백 만을 구했습니다. 조금도 원폭 투하에 대하여 죄책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일본이 원폭을 가졌더라면 그들은 더했을 겁니다." 그건 그래 라 언급했다.
기장 폴 티베츠: 1975년 인터뷰에서 "나는 맡은 바 임무를 완벽히 수행한 것에 대해 자랑스럽습니다. 매일 밤마다 잠을 잘 잡니다."라고 했으며 2005년에는 "만약 같은 상황이 또다시 내게 주어진다면 똑같이 할 것입니다."라고 발언했다. 또 2005년 BBC다큐멘터리에서는 "나는 맡은 바 임무를 다했으며 그것이 성공적으로 끝나 다행스럽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2007년 사망하기 전의 마지막 인터뷰에서도 "올바른 일을 하기 위해서" 라고 말했다. #
폭격수 토마스 W. 페러비: 폴 티베츠처럼 폭탄을 투하한 일에 대해 결코 후회한 적이 없다.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것이) 해야 될 일이었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
레이더 담당 장교 제이콥 베서: "내가 한 일에 대해 슬퍼하거나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진주만과 일본이 한 잔학 행위들을 기억합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
항법사 시어도어 J. 밴 커크: 똑같은 상황이 다시 주어질 경우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네, 저는 다시 할 겁니다. 우리는 5년간 전쟁했고 항복하지도 패배를 받아들이지도 않는 적과 싸웠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사람은 나중에 비키니섬 핵실험에도 참가한 바 있다. #
부조종사 로버트 A. 루이스: 폭탄 투하시 "오 주여,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고 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도 죽을 때까지 그의 임무를 후회한 적은 없었다. 때문에 저 발언은 폭탄의 엄청난 위력에 놀란 것으로는 볼 수 있을지라도 후회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유일하게 죄책감을 보였다고 알려진 것은, 기상정찰 임무를 맡고 에놀라 게이보다 1시간 먼저 비행에 나섰던 스트레이트 플러쉬의 클로드 이덜리 소령이었다. 그는 한두 번 자살시도한 적도 있었고 히로시마에 사과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나중에는 위조죄로 감옥에 가기도 하고 정신병원에 수감되기도 했다.
하지만 기자 겸 작가 William Bradford Huie는 그의 사죄의 진위성의 의심스럽다고 밝혔는데, 이유로 전후 이덜리 소령이 몇 년간 핵폭탄 투하 훈련을 계속 수행했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때문에 프로파간다를 위해 반핵주의자들이 날조하고 이덜리 소령 자신은 명성을 얻거나 주의를 끌고 싶어서 그랬다고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참고로 기장인 폴 티베츠는 그에 대해 "폭탄이 떨어질 때는 거기 있지도 않았으면서 무슨 죄책감을 느낀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
참고로 SF소설 <리보위츠를 위한 찬송>의 저자인 SF작가 월터 M. 밀러 주니어는 이탈리아 몬테카시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수도원 폭격에 폭격기 승무원으로 참전했다가 죄책감에 시달려 결국 1996년에 자살했다.[21] 그러나 알아둘 점은, 히로시마와 달리 베네딕토 수도원 폭격을 비롯한 유럽 폭격 당시 연합군 조종사들은 죄책감을 성토하는 게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연합군 측의 미국인 군인들에게 있어서 가톨릭 등 미국 문화와 정서적으로 가까운 이들을 공격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이 유럽 전선의 경우 미국 본토가 독일에게 공격받지 않아서 병사들이 참전에 의문감을 가지면서도 명령이란 이유로 나갔기에 유럽의 오랜 역사를 가진 문화 유적과 유산을 재로 만든 걸 비난하거나 죄책감을 드러내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원폭 투하에 대한 반응에는 인종적 차별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는 비판도 있다.
그리고 전시에 정보 얻는 게 어려운 식민지 한국인들은 당시의 1차 사료나 해방 직후의 반응을 보면 무언가 무서운 폭탄이 내지(일본 본토)에 떨어졌다 의 수준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기뻐했다. 원폭 투하로 인한 결과물이 바로 8.15 광복이니까. 특히 35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배를 당해왔으니만큼 사실상 조국의 광복이 온다는 신호탄이기도 하였고, 일각에서는 일본의 못된 짓거리에 하늘이 대노하여 천벌(天罰)을 받은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친일파 제외 다만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던 일부 재외 독립운동가들은 원폭 투하에 따른 작전 계획보다 빨랐던 항복 선언에 대해 통탄했다. 김구의 백범일지에 그 대목이 드러나 있다. 광복 이후 한국의 지식인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이 한국의 독립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부국강병뿐만 아니라 국가의 독립에 있어서도 과학 기술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 과학 기술에 관한 도구주의적 인식이 강화되었다.
조병옥의 경우는 일제의 탄압으로 시골에 요양을 살았던 1942년에, 이미 미국에서 원폭을 개발해서 떨어뜨릴 거라는 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몰래 알려주었다고 회고록에 적을 정도였다. 다만 정확하게 원자폭탄이라고 말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당장 원폭 개발은 당시 미국에서도 초극비 프로젝트이다. 심지어 해리 S. 트루먼은 부통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취임시까지 원폭 개발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원자폭탄이 떨어진 것을 정확히 아는 예외가 있다면 핵 개발에 참여해서 그 위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일부 과학자들과 투하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있던 한국인, 중국인, 전쟁포로, 중립국 출신의 선교사들일 것이다. 일단 핵무기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 대부분은 나치 독일이 핵개발을 하고 있다는 첩보를 듣고 독일이 핵을 보유할 때 뒤쳐지지 않으려고[22] 참여한 거지,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런 무기가 나오는 것에 대해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맨하탄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원폭의 사용을 반대했으며 일반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 바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이후 맨하탄 프로젝트를 실시하도록 편지를 보낸 것을 후회했다.
내가 만약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일을 예견했었다면, 1905년에 쓴 공식을 찢어버렸을것이다.[23]
싱가포르에선 축복의 불꽃이라고 대단히 기뻐했다. 4년 동안 일본에게 지배당하면서 중국계들이 학살당하던 지옥을 겪었기 때문.
중국도 물어보면 잔소리다. 철천지 원수였던 일본이 중국 대륙에서 드디어 힘을 잃고 사라졌으니.
1994년 개최된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은 원폭에서 완전히 회생한 히로시마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상징적인 측면도 있었는데, 위원회 측이 정신이 나갔는지 타국(아시아) 선수들과 스탭들을 공식 일정의 관광이랍시고 원폭 희생자 위령 기념물에 데려가는 과정에서 마찰을 겪었다. 원폭 희생자를 기리는 어쩌구 하는 가이드의 말에 "전쟁 일으킨 게 누군데!!!" 라면서 선수와 스탭들이 발끈해서 분위기가 극도로 험악해졌다고.
2005년 아우슈비츠에서 홀로코스트 추모관 야드 바셈 박물관의 개막식에 원폭을 운운하며 피해자 그룹에 참가하려다가 박물관 측에서 나치라는 비난을 들었다... 라는 이야기가 한국 웹에 퍼져있는데 사실 이스라엘 현지신문 Ynetnews에서의 외교부 대표의 말에 따르면 일본의 국가원수가 초대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주 이스라엘 일본 대사관의 직원들은 초청되었다) '원폭을 홀로코스트에 비견하려 할까봐' 초대되지 않았다는 것은 루머이며 단지 일본은 홀로코스트 해방에 기여한 국가도 아니고 홀로코스트에 딱히 관심이 있는 나라도 아니기 때문에 초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피해자 드립' 이나 '나치 비난' 등의 사실은 한국발 루머.
6. 전쟁이 끝난 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로 리틀 보이는 모든 핵무기의 위력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새로 나온 핵폭탄의 위력을 언급할 때 '히로시마의 몇 배다' 는 식으로 언급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히로시마에 떨어진 놈은 16킬로톤(kt). TNT 16,000톤을 동시에 터뜨려야지 발생하는 엄청난 파괴력이다. 자세한 것은 원자폭탄의 위력을 참조할 것.
6.1. 피해자 행세의 주요 레퍼토리
원자폭탄에 대한 직접적인 결과가 산출된 실질적인 사건인 만큼 원폭에 대한 부작용과 그 공포에 대해 실질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이는 만화 맨발의 겐(전 10권)에 아주 자세하게 나와있다. 뒤에서 훈도시를 늘어뜨린 줄 알고 자세히 봤더니 원폭으로 인한 고열에 등가죽의 살이 녹아 늘어난 것이었고 팔의 살도 늘어진 게 땅에 끌리기에 하박을 들고 걷는다거나 입고 있는 옷이 타면서 옷의 무늬가 고열로 살가죽에 아예 녹아 인쇄되어 버린다거나...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은 무사. 폭풍으로 깨진 유리창이 온 몸에 박히고 그 살가죽에 멍이 들어 온몸이 시퍼렇게 되었다거나... 일반 도서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책이기에 관심이 있다면 일독을 권장.
일본인들에게는 이런 핵무기의 공포가 가슴 깊이 각인되어 반전의 상징이 되었으나 일부 우익들에게는 과거에 대한 반성이 아닌 자신들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수단으로, 즉 일본이 전쟁과 서구 패권주의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일본에게 침략당한 아시아인들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24]
일본인들이 일본 제국의 범죄와 그 책임에 대해서는 하나도 기억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일본이 일으킨 침략 전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이 실수였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고 당시 일본 국민의 여론도 태평양 전쟁에 우호적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논리는 자신들이 전쟁의 피해자라는 일본 극우파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이용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원폭 투하가 반전(反戰)의 메세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일본인들에게 같다. 이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이러한 사건을 받아들이는 관점에 따라서 이러한 역사인식은 양면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그것이 전쟁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전쟁에 대한 미화로도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원폭 희생자를 추모하는 움직임은 그 자체로는 순수하지만 그러한 원동력이 역사적 반성의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일본 내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내세워지고 있다. 히로시마의 경우 일본 내에서도 전쟁의 피해자란 인식이 강해서 강한 좌파적 성격을 띠고 있다. 1999년 기미가요(일본 국가) 제창과 히노마루(일본 국기) 게양에 거부하여 교사와 교장의 충돌 끝에 교장이 자살한 곳도 히로시마이며, 나가사키는 시장이 천황의 전쟁 책임을 거론한 이후로 역대 시장 중 두명에 대한 암살 기도가 있었고 그 중 한명은 끝내 사망했다. 기본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다 보니 전쟁에 대한 반성으로도 이어져 일제의 피해를 입은 외국들에 대한 반성도 어느 정도 있다.
당시가 언론 통제가 심한 군국주의 치하였다고는 하나 민중의 여론 역시 전쟁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설령 언론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일본 군부만이 나쁘고 일반 민중은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식의 이원론을 적용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침략전쟁을 일으킨 추축국의 국민 역시 협력자의 위치를 벗어던질 수는 없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이 전쟁을 통해 희생된 것 역시 사실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일본인이 전부 극우에다가 주전파였던 것도 아니고 개중에는 반전운동을 하다가 옥살이를 한 양심적인 일본인도 있다. 원폭의 희생자 중에는 참정권도 없는 아이들도 있었고. 애초에 이 무고한 사람들 모두 일본이 미국의 거듭된 항복하라는 요구에도 반자이 어택으로 미친 짓을 일삼지만 않았더라도 죽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이 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세계인들의 반응이 'OLLEH!! 그간의 악행에 대한 정당한 대가, 신의 심판을 받은 거다!' 정도였던 걸 생각해보면... 나라를 잘못 만나서... 사실 애초에 19세기부터 서양인들이 익숙하게 자행해온 인종학살의 전통이 있었기에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아시아에 대한 비하와 편견이 더해져 이러한 무시무시한 대량살상이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다.[25]
히로시마에서는 원폭 투하를 이유로 국가지원금을 받아내고 있기 때문에 일본인들도 이것을 '원폭산업' 이라고 빈정거리기도 한다.
전쟁을 방관한 히로히토 덴노는 '전쟁을 멈춤으로서 일본을 구했다' 는 말도 안 되는 평가를 받으며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 해외에서는 악마의 화신이자 증오의 전범이라고 손가락질했지만.
6.2. 한국인 원폭 희생자들
아무도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진정한 피해자는 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는 게, 순전히 일본에게 지배당한 식민지의 백성이란 죄로 군수도시에 끌려와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다가 원폭을 맞은 거다. 일본인이 '전쟁을 일으킨 가해자'였다면, 한국인은 '가해자에게 식민지배를 당한 피해자'이므로 일본인 원폭 피해자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원래 히로시마에서 한국인도 원폭 희생자로 많이 사망했다. 당장 대한제국의 황족인 이우 공도 이 투하로 인한 피폭으로 사망하였다. 또한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인 장훈 선생의 큰누나 역시 원폭으로 강한 화상을 입어 사망했다. 또한 장훈 선생은 피폭자 수첩을 가지고 다녔는데 이는 일본 프로야구 선수 중에서 유이했다.
그러나 히로시마 평화공원에는 한국인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가 서있지만 일본의 평화공원 가이드들은 이에 대해 절대로 언급하지 않으며 여행 코스에서도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는 아예 빼버렸다. 이에 대해 해당 공원에 항의하는 한국인도 있으나 공원 측은 항의를 무시했다. 그리고 이 위령비는 구석에 처박혀 있으며 일본인 가이드들은 그 위치에 대해 일절 가르쳐주지 않는다. 자신들이 가해자라는 역사적 증거물에 대해 언급하기 싫은 것이다.
지금은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사이트에도 한국 피폭자와 관련된 내용이 있다. # 물론 분량이 상당히 짧다.
물론 일본에도 제대로 된 사람은 있다. 이를테면 2011년 10월 3일 도요나가 게이자부로 씨가 한국인 원폭 피해자를 40년간 지원해준 공로로 외교통상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2012년 9월 18일, 나가사키 지방재판소가 나가사키시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 장영준 씨에게 원폭 수첩을 교부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장영준 씨는 원폭 투하 3일 후 부친을 찾아 나가사키시로 왔다가 폭심지 근처를 지나면서 피폭당했고 2009년 1월에 수첩교부를 신청했지만 나가사키시가 "증인이 없다" 며 거부하자 소송을 냈다. 안타깝게도 장영준 씨는 승소 소식을 듣지 못하고 8월 17일에 돌아가셨다.
원폭 투하에 대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의 의견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나는 원폭을 투하한 트루먼 대통령의 결단에 지지하는 부분도 있다" 는 견해를 밝힌 사람도 있고 "원폭을 투하하지 않았어도 전쟁은 끝났을 것이다. 미국은 반성해야 한다" 는 견해를 가진 사람도 있다.사실 몰락 작전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작전 때문에 더 참혹하게 끝났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 작전에선 오히려 핵을 쏟아 붓는 계획이지만..
아니면 쏘오련의 물주가 되거나...
7. 논란
원폭 투하가 정당한 일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꽤 뜨거운 논란거리이다.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이 문서를 보시는 분들이 스스로 판단하자.
7.1. 반대
프로파간다를 치워놓고 본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본질적으로 착취자의 입장에 있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다툼일 뿐이었던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패자는 전범이 되지만 승자는 단죄되지 않는다. 베트남 전쟁이나 이라크 전쟁을 떠올려 보자.
전쟁을 벌이는 건 늘 착취하는 자들이고 전쟁에 희생당하는 것은 늘 민중이라는 것이 참으로 딜레마이다. 전쟁을 통한 국익은 정작 국민들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경우가 절대다수이다.[26][27]
원폭 논란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미국이 원폭을 쓰지 않아도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지 않았느냐" 다. 일단 일본은 이미 1944년부터 지속적으로 화평을 시도하는 중이었고 원폭 투하 직전까지 소련과의 교섭에 국운을 걸고 있었다. 역사학자들 중에는 소련의 만주 침공이 항복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는 쪽도 있다. 따라서 소련의 만주 침공까지 기다린다면 일본의 교섭 여지가 붕괴되면서 무조건 항복 이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사라지므로 좀 더 침착하게 기다리면서 협상을 했다면 일본도 알아서 항복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참고로 원폭 투하 전에도 모든 고위급 인사들이 찬성한 건 아닌데 이때 반대하던 고위 장성들 중에는 훗날 대통령이 되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원수,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 체스터 니미츠 원수 등도 끼어있었다. 그런데 이때 반대한 맥아더는 6.25 전쟁 때 만주에 핵을 떨궈야 한다는 주장을...
현실적인 의미에서 보더라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는 한국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이 원폭투하가 조금이라도 일본의 항복을 앞당겼으면 앞당겼지 그 반대의 효과는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만약 원폭투하가 일어나지 않아서 일본 본토 결전이 일어나는 형식을 취하면서 훨씬 뒤에 일본이 항복했더라면 미·소에 의해 분단되는 것은 한국이 아닌 일본이었을 것이다.[28]
7.2. 찬성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직전까지 일본이 항복을 거부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며, 만약 원폭 투하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몰락 작전이 실행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일본인들은 1억 총옥쇄를 향해 달려갔을 것이며 오키나와에서 이루어졌던 자살과 같은 저항을 지속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양측에서 수백만 명의 사상자가 더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이 "일본을 항복시키려면 미국인 백만명과 그 반수의 영국인이 죽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그리고 몰락 작전이 실행되었다면 한국인도 대부분 죽었을 것이다. 1억 총옥쇄를 한다면 당연히 한국인도 일본인과 같이 죽게 되는 것이다! 카미카제 공격에 투입된 조종사 중에도 한국인이 있었을 정도이니 한국인만 열외가 될 리는 없다.
더군다나 미국이 원폭 투하와 전후처리를 서두른 이유 중에 하나가 소련의 대일 행동을 의식해서란 말도 있다. 일본 본토가 직접적인 전장이 된다면 소련이 일본 열도의 일부를 점령할 가능성이 크고 이것은 4년 가까이 태평양에서 거의 혼자서 일본을 상대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실제로도 스탈린이 트루먼에게 8월 내내 홋카이도의 반띵 남북 분할을 요구했지만 트루먼이 무시했던 바가 있다.
8. 여담
히로시마 원폭 투하 상황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은 위키니트께는 <카운트다운 히로시마>라는 책을 추천한다.[29] 방대한 자료 조사와 중립적인 시각으로 원폭 투하 준비과정(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 침몰사건의 비극도 나온다)부터 생존자들의 이야기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든 같은 제목의 BBC 다큐멘터리도 추천한다.
캐나다의 전설적인 프로그레시브락 밴드 러쉬의 대표곡 <Manhattan Project>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소재로 한 노래다. 러쉬의 드러머 닐 피어트는 이 곡을 작시하기 위해 관련 서적을 10권이나 독파했다고 한다.
폴란드의 작곡가인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는 원폭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곡인 '히로시마 희생자들을 위한 비가(悲歌)(Threnody For The Victims Of Hiroshima)' 를 작곡하였다. 다만 흔히 생각하는 진혼곡의 잔잔하고 슬픈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곡이다. 심약자 조심. 소리건 앨범 이미지건 무섭다.
이탈리아의 조각가 페리클레 파치니 (Pericle Fazzini)는 일본이 원폭 공격을 받고 항복하여 피지배 국가들이 해방된 것을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시킨 부활(La Resurrezione)이란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교황이 일반인과 만나는 장소인 바티칸 바오로 6세 알현실에 위치해 있다. 의미와는 별도로 조각의 모습이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매우 특이한 편. #
기타리스트 게리 무어는 1984년 이 사건을 노래한 'Hiroshima(히로시마)' 라는 노래를 냈다. 'Dirty Fingers' 라는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일본 크툴루 신화 관련 소설에서는 이게 일어났을 때 크투가가 강림했다고 쓰는 경우가 간혹 있다.
9. 관련 항목
니고연구
맨발의 겐
몰락 작전
히로시마의 경고문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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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통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당시의 버섯구름 사진은 나가사키 사진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유 중의 하나는 사진빨(...). 히로시마의 버섯구름 사진은 나가사키의 것에 비해 어딘가 흐릿하고 구름의 형태가 살짝 뭉개진 듯한 모습이다. #
[2] 핵무기 투하 자체는 네바다 핵실험장 등에 수백번 이루어졌다(…). 그러나 공격용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2번 뿐.
[3] 이 '묵살'이 거부한다는 뜻이 아닌 No comment의 의미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당시 발표 내용을 놓고 보면 그런 해석은 불가능하며, 당연히 '묵살'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일본인 기자들도 모두 ignore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오역/일반사회 항목 참조.
[4] 정확히는 선전포고가 없었던 건 아닌데 공습 후에 선전포고가 도달했다. 후전포고?
[5] 선전포고를 한 뒤에 공격한 것이라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왜곡된 주장도 있지만 그런 주장을 믿으면 골룸하다. 게다가 선전포고라고는 했지만 명시적으로 개전을 의미하는 단어가 없었고 대단히 엉망진창이라서(문맥이 안 맞는다던가, 이리저리 헛소리만 잔뜩 들어있다던가...) 선전포고문으로 인정받기 힘들 정도였다. 어쨌든 전쟁은 일어났으니 중요한 건 아니었지만.
[6] B-29의 적재한계가 9톤인데 리틀 보이의 중량은 4.5톤. 혼자서 적재중량의 반을 차지하는 무식한 물건이다.
[7] 타임-라이프 월드워2에 따르자면, 파슨스는 이륙 직전까지 분해 조립 연습에 열중하다가 손을 다치자 한 장성이 파슨스에게 "장갑이 필요하겠군! 내 장갑을 가져가게. 얇고 좋은 장갑이라네." 라고 하면서 자신의 가죽장갑을 내주었다고 한다.
[8] '리틀 보이' 의 보다 먼저 만들었지만 실패한 원자폭탄의 이름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별명인 THIN MAN이었다. 그러나 구조를 단순하게 바꿔 다시 만드는 동안 길이가 줄어서 LITTLE BOY로 바꿨다.
[9] 다만 <맨발의 겐>에 보면 비행기 3대가 총알로 집들을 쏘는 장면이 있다. 소규모 공격은 있긴 있었나 보다.
[10] 하지만 일본 군부는 미국이 7월에 뉴멕시코에서 핵실험에 성공한 후 v600번대 콜 사인을 가진 소규모의 B-29부대가 티니안 섬에 배속되었다는 정보를 감청으로 알고 있었다. 단지 콜 사인만을 알 수 있었고 그 부대가 특수한 임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아냈지만, 원자폭탄 투하 임무를 띄고 있는지는 몰랐다. 원폭 투하 당일 에놀라 게이가 출격한 사실도 알고 있었고, 에놀라 게이가 히로시마 상공에 접근하기 1시간 전에 기상정찰을 위한 또 다른 B-29가 히로시마 상공을 정찰한 것도 알고 있었으나, 대피경보를 내리지 않았다.
[11] 원자폭탄의 역사를 다룬 그래픽 노블 트리니티(서해문집 출판)에서는 일본의 대공 부대는 대규모 폭격에 너무 익숙해져서 비행기 몇대에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12] 대충 해변에서 피부 그을리는 거랑 비슷한 원리.
[13] 이게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잡힌다면 나무를 뽑아버리고 건물에 피해를 입히는 태풍의 초속이 33m 정도라는 걸 생각하면 된다. 간단히 말해 주변의 모든 것이 음속과 비슷한 속도로 개발살난다.
[14] 두꺼운 석조건물의 가장 안쪽에 들어와 있었던 덕분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15] 방사선 화상은 DNA 자체의 파괴를 일으켜 조직 재생이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방사능은 다른 조직도 파괴하여 신체 내외에서 출혈을 일으키고(혈관세포 파괴) 구토, 설사(위장관세포 파괴)를 끊임없이 하게된다. 영양 흡수가 안 되어 아무리 먹어도 영양실조에 걸려 죽게 된다.
[16] 체르노빌 사고 당시 주위를 시찰하던 조종사들과 방사성 폐기물을 치우던 인부들도 이러한 금속 맛을 경험했다.
[17] 일본의 작가 릴리 프랭키의 소설 <도쿄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의 초반부에서 코쿠라가 고향인 주인공 '나' 의 어머니가 이때의 일을 얘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주인공 '나' 는 항상 어린 마음에 "날씨가 좋다든가 나쁘다든가 그런 정도에 그 엄청난 폭탄을 떨어뜨리고 말고 하다니, 미국이라는 나라는 하는 짓이 참 어설프고 바보 같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18] 당시 야하타(야와타) 제철소에서 직원이 콜타르를 태워 연기를 내서 시계를 어둡게 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래서 고쿠라가 가려졌고, 나가사키에 떨어졌다는 것. 영어기사일본어기사(유료)
[19] 실제로 이 방송을 듣고 농촌의 논밭에서 그 자리에서 그대로 할복을 한 사람들도 수십만이 된다는 설도 있다.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이런 사례는 분명 있었다! 그정도로 일본인들에게 덴노는 신적 존재 그 이상이였다.
[20] 흔히 황족 언어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일본어 문어로 구성된 선언이었다. 자세한 설명은 옥음방송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21] 그는 전쟁 후인 1947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22] 나중에는 독일은 핵개발에 거의 관심도 없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23] "if I had foreseen Hiroshima and Nagasaki, I would have torn up my formula in 1905."
[24] 이와 관련해서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항목의 논란 항목을 같이 참조하길 바란다.
[25] 스벤 린드크비스트,「폭격의 역사」를 참조하라! #
[26] 사회과학적인 분석에 따르면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 역시 민족적인 착취 못지않게 조선인끼리의 계급적인 착취가 심했다고 하고 태평양 전쟁이 일본 민중들의 이익에 딱히 도움이 되었다고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아니 사실 일본 민중들 입장에선 망했어요.
[27] 감이 안오면 그 당시 일본문학을 읽어보자 인간실격이라던지
[28] 이 경우엔 전쟁 양상에 따라서 한반도가 전쟁의 직접적인 참화를 입을 수도 있었고, 소련 휘하의 공산국가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다만 이 글에서는 역사의 if속에서 한국이 분단을 회피할 가능성도 있었다는 것만 말해두고 싶다.
[29]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82737862
최종 확인 버전: 2014-11-08 16:32:00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