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사 기행> 2. 명혈(名穴)을 강탈당한 해주정씨
정 태 수
어린 조카 단종을 쫒아내고 왕위를 찬탈한지 3년째 되던 해(1457)는 세조에게도 눈물과 액운의 해였다. 왕위 계승자가 될 그의 맏아들인 의경세자(李暲, 1438~1457)가 9월3일에 스무 살의 나이로 요절한 것이다. 백성들은 ‘천벌을 받았다’고 수군거렸다. 노산군으로 강등시킨 단종을 그해 6월에 영월로 유배한지 두어달 뒤에 일어난 불상사였기 때문이었다.
세조가 단종의 유배와 사사(賜死)를 마음먹은 날, 그의 꿈에 형수인 문종비 현덕왕후가 나타나 다음과 같은 악담을 하였다. “내 자식을 끝내 죽이려 하느냐? 나도 네 자식을 살려두지 않겠다.” 이런 호통을 듣고 꿈에서 깬 세조가 황급히 아들 처소에 달려가 보니 벌써 의경세자가 급사한 후였다. 화풀이로 세조는 문종비를 폐위하고 그의 묘를 파헤쳐 바다에 던져버린다. 그리고 10월21일에는 유배된 지 4개월 만에 단종을 죽인다. 실록에는 자살로 거짓기록 되어 있다.
문종과 세조의 형제 싸움은 이 1457년의 의경과 단종 두 종형제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이로써 문종의 혈통이 끊어지고 세조계 혈통으로 완전히 왕통이 바뀌게 되어, 그 뒤의 모든 왕은 세조의 핏줄로 채워진다.
왕세자의 죽음으로 세조는 느닷없이 명당 찾기에 나선다. 왕명에 따라 정창손 신숙주 한명회 권람 등이 모여 상제를 정하고 염빈도감(殮殯都監) 국장(國葬)도감 조묘(造墓)도감 등 3도감을 설치키로 하였다.
9월 5일에 우의정 강맹경과 좌찬성 신숙주 등이 주축이 되어 묫자리 찾기와 묘 만들기 의논을 시작으로, 한성부윤 이순지가 건의한 광주와 과천 등지의 산을 살피고, 풍수들(노목 안효례 조수종)에 명하여 한강 남쪽의 명당자리를 찾게 하였다. 이날이 명당 찾기 서막이 열리는 날이었다.
1주일이 지났다. 강맹경이 세조에게 “한강 남쪽에 금의 산을 얻었다”고 고함에 왕이 친히 가보고는(9월12일) “주맥이 어지럽고 기운이 하나로 뭉치지 않는다”며 헛걸음만 하고 돌아왔다.
세조는 대신들과 풍수를 두 패로 나누어 묘지 찾기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하였다. 제1진은 영의정 정인지를 필두고 신숙주 한명회 이순지 정식과 풍수 안효례 원구 조수종으로, 지금의 강남 서초동 내곡동의 헌릉(獻陵) 방면으로 보내고, 제2진은 우의정 강맹경을 중심으로 황수신 구치관 권지와 풍수 노목을 지금의 구리시 동구릉의 건원릉(建元陵) 방면으로 파견했다. 9월 12일엔 1진 2진 모두가 위 두 왕릉 근처에는 쓸 만한 자리가 없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와 같이 답사를 거듭하는 동안 9월 한 달이 후딱 지나가고 10월로 접어들었다. 그동안 건의되고 확인한 곳은 광주 고양 양주 원평 장단 임진 용인 금천 인천 풍양 토원 원평 교하 등이었지만 적지를 찾지 못했다.
10월 13일 한밤중에 강맹경이 세조에게 급보하기를 “고양 동쪽 도총제 정역(鄭易)의 분묘를 보니 그 산이 쓸만하였습니다”(今見 高陽治東 都摠制 鄭易墳, 其山可用)라는 보고를 해왔다. 바로 다음날 14일, 왕이 지금의 고양군 덕양구 봉현(蜂峴)에 거동하여 정역 공의 묘를 직접 둘러보고, 풍수 임원순 안효례 노목 방문중 등으로 하여금 향배를 정하도록 명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정창손 강맹경 신숙주 황수신 등 몇몇 사람으로 하여금 산봉우리에 올라가 내려다보면서 자세히 살피게 하였다.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곤산(坤山)이 간산(艮山)을 만들었다”고 극찬하니 왕이 옳다고 여겨, 여러 재상과 시위군사에게 술을 하사했다. 세조도 안산에 올라 건너다보며 산세를 보는데, 풍수 방문중이 순산순수지세(順山順水之勢)라 풀이하였다.
그러나 닷새 뒤에는 이곳 선정에 부정적 반응을 보인 이순지의 말이 떠올라, 왕이 10월19일 다시 봉현에 거동하여 현지를 재 답사하고는 흡족하여 마음을 굳혔다. 온 조정이 명혈을 찾아나선지 40일 만의 결론이었다. 세조가 직접 현장답사를 한 것도 여섯 번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최고의 길지로 결론 내린 곳이 이곳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7년(1425) 1월 26일 조의 졸기(卒記)에 보면「정역이 졸하였다. 시호는 정도(貞度)」라 하였으니 이 고양군 벌고개(蜂峴)에 33년간 공이 누워있던 그 명당자리 아니었던가.
10월 24일에 의경세자의 장례령을 내리면서, 조묘도감에 “세자 묘에 석물을 설치하라”는 전지도 내렸다. 11월 15일에는 세자에게 의경(懿敬)이란 시호를 내린 후, 18일에 발인하고, 24일에, 정도 공의 묘를 파낸 그곳 봉현에 매장했다. 묘호를 경릉(敬陵)이라 했다. 의경세자는 그 뒤 아들 성종 때에 덕종(德宗)으로 추존되고 그 부인 한씨(韓確의 딸)는 과부로 살아있을 때 소혜왕후로 추존되었다. 둘 사이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은 월산대군(月山大君), 2남은 생후 1달에 아비 의경을 잃은 뒷날의 성종(제9대왕)이다.
봉현은 명당자리로 이름나 경릉 이외에도 뒤에 네 개의 능이 줄줄이 추가되었다. 예종의 창릉(昌陵), 숙종비의 익릉(翼陵), 숙종과 그 계비의 명릉(明陵), 영조 원비의 홍릉(弘陵) 등이 들어섰다. 이외에도 왕가의 2원(園) 1묘가 더해졌지만 이곳을 서오릉(西五陵)이라 부른다.
이로서 태조 이후 6대(太定太世文端)를 내려오면서 겨우 찾은 장남혈통이 끊어지고, 차남왕계(世睿成)가 새로 시작된다. 말하자면 왕통 핏줄이 확 바뀐 것이다. 이 새 왕통은 세조로부터 시작되어 그 차남 예종을 거쳐 세조의 차손 성종(9대왕)부터는 조선말까지의 모든 왕이 요절한 의경세자(德宗)의 후손으로 채워진다. 즉, 예종 이후 성연중인명선광인효현숙경영정순헌철고순(成燕中仁明宣光仁孝顯肅景英正純憲哲高純)의 19대의 모든 임금 자리를 의경세자의 핏줄이 차지한 것이다. 세조와 그 장남 의경세자가 얻은 이 만고의 큰 경사는 명당자리 봉현으로 인한 천문지리(天文地利)의 음덕이라 믿고 또 믿어진다.
그렇다면 그 명혈에 안장되었다가 세조에게 밀려 서초동으로 쫓겨난 정도공(貞度公)의 후손은 해를 입지 않았을까. 우연인가 필연인가. 해주정씨 대종손가(大宗孫家)는 멸문의 화를 입은 것이다. 즉, 바로 정도공의 외동 장손자 정종(鄭悰, 경혜공주의 남편이며 단종의 자형)이 단종복위운동 끝에 광주 유배지에서 세조 측에 의해 척살당해 시신도 찾지 못하는 화를 당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경혜공주가 낳은 정미수(鄭眉壽)로서 겨우 대종가의 대를 이었지만, 그의 무자식으로 손이 끊어지자, 정도공의 차남가인 정충석(鄭忠碩)공의 증손 정승휴(鄭承休)를 7대 종손으로 양자 들여 끊어진 종가의 대를 이었다. 그뿐인가. 14대 종손도, 17대 종손도, 18대 종손까지 400여 년간에 네 번이나 절손되어, 양자들이기를 되풀이하여 대종가의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다시 말하면 묘의 주인 정도공의 장남가는 핏줄이 완전히 끊어지고, 네 번이나 양자로 대종손의 명맥을 이어왔다. 조선조 초기의 충신가에 이러한 환란이 닥친 것은 명혈을 빼앗긴 풍수지리설의 인과라는 내 생각은 무리일까.
그 뿐만이 아니다. 이때 정도공의 봉현 묘를 경기도 과천면 백석동(지금의 서울 서초동)에 이장하고, 숙종 때 이곳에 정곡(鄭谷)이란 이름도 하사받았기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인줄 알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1979년의 박정희정부 결정에 의하여 그 자리가 대법원과 대검찰청의 청사 부지로 정해지자, 국가권력에 의한 두 번째의 이전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경기도 여주의 북성산(北城山)으로 또다시 천장하게 된 것이다. 이는 1984년의 일로서 500년만의 삼세판째 묘지였다. 세조의 봉현 명혈 강탈에서 비롯된 제2의 여파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묘역에는 18대 후손인 필자가 지은「묘역을 옮기며」라는 제목의 곡절 많은 비문을 두른 비석이, 중시조(中始祖) 할아버지의 600년만의 안정과 명복을 빌며 국궁재배하고 단정히 서있다.
첫댓글 서오릉이 그런 곳임을 이제사 알았습니다. 그러나 서오릉 연연할 것 없다 싶습니다.
더 길게 지금 보면 이왕조는 완전 망하여 버렸고, 해주 정씨는 그래도 무탈하지 않습니까.
김현거사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씨 왕조는 멸망했지만 해주정씨는 건재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했습니다.
제 큰 자형이 해주정씨입니다. 조현두.
파란만장 하군요
사람들이 찾는 명당 자리가 그런거군요
신빙성이가는 내용에 제 마음도 많이 흔들립니다
풍수지리
명당자리
이해가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안병남
귀한글 읽었습니다. 지금 서초동 법원 건물앞에 종으로 나라니 정곡 건물이 들어서 있습니다.물론 후손들이 세웠겠지만 위의내용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해주정씨 중에 부산의 온종합병원 정근원장이 있습니다.
고향이 산청이고 진주고 48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