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 개운사 written by 한국의 사찰과 문화유산 |
▲ 개운사 대웅전 전경 |
개운사(開運寺)는 일반적으로 1396년(조선 태조 5)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도성 동쪽 5리쯤에 영도사(永導寺)라는 이름으로 절을 창건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 후 1779년(정조 3)에 원빈(元嬪) 홍씨(洪氏)가 세상을 떠나자, 명인원(明仁園)이라는 무덤을 영도사 부근에 조성하였는데 절이 원묘에서 가깝다 하여 북쪽으로 몇 리 쯤 옮겨 짓고 이름도 개운사라 고쳤다는 것이다. |
▲ 개운사 일주문을 들어서면 넓은 공터가 있으며, 그 윗편으로 개운사 전각들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
▲ 일주문 안쪽 우측에는 시주공덕비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
▲ 공터를 가로질러 긴 계단을 오릅니다. |
이러한 내용은 사실 뚜렷한 문헌에 전하는 것이 아니고 '사전(寺傳)' 또는 '사기(寺記)'라는 표현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즉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서도 무학대사의 창건과 개운사로의 이건 사실은 '사기(寺記)'에 기록되어 있지만 몇 가지 의심가는 사항이 있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
▲ 계단을 다 오르면 좌측에 관음석불과 삼층석탑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
▲ 계단을 한 단 더 오르면 좌측에 장독대가 있고 전방에는 대각루가 올려다 보입니다. |
특히 '사기'에는 1779년이 아니라 1730년(영조6)에 영도사를 이건하였으며, 영도사 이건을 주도했던 스님이 인파당(仁坡堂) 축홍(竺洪)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인파당 축홍스님은 1870년에 조성된 신중탱과 지장탱에 증명(證明)으로 이름이 올라 있어 혼동이 따른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범해각안(梵海覺岸) 스님이 편찬한 『동사열전(東師列傳)』「벽담선백(碧潭禪伯)」조에 실려 있는 내용을 보면 개운사로 절 이름이 바뀐 시기를 추정하는데 참고 가 되고 있다. |
▲ 대각루 앞쪽에 종각이 있으며, 계단을로 오르지 않고 종각길로 올라와도 됩니다. |
“이 무렵 이재황(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고종의 이름) 소년은 한양 영도사의 벽담당(碧潭堂) 도문(道文) 스님 처소에서 주로 양육되고 있었다. 소년은 언젠가 영도사에 가서 노닐다가 절의 벽 한 모퉁이에 이름을 써놓았는데, 뒷날 왕위에 오른 다음 영도사라는 절 이름을 바꾸어 개운사로 고쳤다. 이는 임금의 친필 글씨인데다 벽담스님을 존숭하는 뜻에서 취한 조치이다.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열었다는 뜻이다.” |
▲ 개운사 대웅전 내부 전경 |
이 내용은 영도사에서 개운사로 이름이 바뀐 계기가 고종의 소년시절에 마련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고종의 즉위 이후, 즉 1863년 이후 언젠가 개운사로 사찰 이름을 바꾸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따라서 『동사열전』의 내용과 「봉은본말사지」에서 언급한 '사기'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
▲ 종각에서 경내로 들어서면 전방에 대웅전이 보입니다. |
▲ 대웅전 내부 전경 |
이러한 두 내용 가운데 어떤 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19세기 중후반의 개칭 사실을 전하고 있는 『동사열전』의 내용이 더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추측이 된다. 아무튼 여러 내용을 정리해 보면 개운사의 전신이 영도사였으며, 언제인가 개운사로 절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창건과 개운사로의 개칭에 관계된 역사와 마찬가지로 19세기 전반까지의 역사 또한 뚜렷하게 드러난 것이 없다. |
▲ 대웅전 내부에 걸려있는 탱화 모습 |
다만 19세기 후반부터 1941년까지의 연혁은 「봉은본말사지」에 비교적 자세하게 실려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870년(고종 7)에는 화주 송담당(松潭堂) 수훈(守訓)이 지장탱과 시왕탱, 사자탱 등을 조성하여 봉안하였고, 1873년(고종10)에는 명부전을 중건하였다. 또한 1880년(고종 17)에는 이벽송(李碧松)대사가 대웅전을 중건하였고, 1883년(고종 20)에는 화주 초은선일(蕉隱善一)과 초암기주(草庵基珠)가 불상 2좌를 개금하고 1좌를 개분, 1좌를 개채하였고, 아울러 영산전의 후불탱, 팔상탱, 감로탱, 신중탱, 칠성탱, 원불탱 각 1점과 산신탱 2점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1885년(고종 22)에는 덕해(德海)화상이 아산으로부터 1712년에 제작된 범종 1구를 가져왔으나, 1935년 일제에 의해 국방헌납용으로 강탈당했다. |
▲ 대웅전 내부에 걸려있는 탱화 모습 |
1912년에는 일제의 사찰령 시행에 따라 봉은사의 수반말사로 지정되면서 김현암(金玄庵)스님이 사찰령 시행 후 제1대주지로 부임하였다. 1913년에는 제2대 주지 이벽봉(李碧峰)스님이 이왕가(李王家)에 진정하여 왕가소유 산림 4정 6반보를 사찰소유로 넘겨받았다. 1915년에는 주지 안월송(安月松)스님이 대웅전 및 요사의 개금불사를 하였다. |
▲ 대웅전 내부에 걸려있는 탱화 모습 |
1921년에는 제5대 주지 이벽봉 스님이 큰 방을 중창하고 같은 해에 종각을 세웠으며, 1922년에는 안월송 스님이 시왕전의 각 상들을 개금하고 개분불사를 하였다. 1926년에는 강원을 설립하였으며, 1929년에는 독성전을 중건하였다. 1930년에는 아미타후불탱, 제석탱, 독성탱을 조성하여 봉안하였으며, 1935년에는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
▲ 대웅전에서 내려다 본 종각 방향 전경 |
▲ 대웅전 정면에 위치한 대각루 전면 모습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발원문(보물 1649호) |
▲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조성된지 700년이 넘었다는데 보존 상태가 상당히 좋습니다.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단엄한 상호, 세련되고 뛰어난 조각기법, 장중하면서도 균형감 있는 조형감각, 긴장감 넘치는 선묘 등이 잘 어우러진 매우 완성도 높은 고려후기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
▲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발원문(문화재청 사진) |
특히 이 불상은 1280년에 중수된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더불어 현재까지 발견된 고려후기 불상 중에서 1274년이라는 가장 오래된 중수원문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불상은 적어도 13세기 전반에는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13세기 전반에 제작된 불상이 매우 드문 현실에서 이 불상은 더욱더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었다. |
▲ 대웅전 하단 좌측에 위치한 미타전 내부에 최그에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
1m가 넘는 큰 규모에 아산 축봉사라는 원래의 봉안 장소 및 1274년의 하한연대, 우수한 조형성은 물론 현재의 보존 상태 또한 매우 좋은 편이다. |
▲ 좌우에서 바라 본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나무로 만들었는데 개금을 해서 목조 같지 않습니다.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보물 1650호)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복장 전적의 고사경(古寫經)과 고판경(古板經)은 사경체자(寫經體字)와 사경형식(寫經形式)으로 되어 있어 국내 전존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판본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사경형식으로 되어 있는 자료의 권수제(卷首題)는 수당대(隋唐代) 및 신라사경의 형식과 동일하며 행자수(行字數)도 26행 17자본이 중심을 이루고 있고, 고판경의 경우도 24행과 17자본을 제외하면 대부분 현재까지 발견된 사례가 없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
▲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문화재청 사진) |
대체로 9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사성(寫成) 또는 간행된 화엄경으로 진본(晉本, 60권), 주본(周本, 80권), 정원본(貞元本, 40권)등 3본 화엄경이 모두 고루 들어 있다. 시기적으로 형태적으로 매우 희귀한 자료로서 역사적 가치와 함께 서지학, 서예, 화엄경 판본 연구 및 불교사 연구 자료로서 중요하다. |
▲ 대웅전 하단 좌측에 위치한 명부전과 내부의 시왕상 모습 ▼ |
이후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는 연혁이 제대로 전하지 않으며,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부터 다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었다. 즉 1978년에는 당시 조계종 종정이던 이서옹(李西翁)스님을 불신임하는 재야 측에서 종정에 채벽암(蔡碧巖)스님, 총무원장에 윤월하(尹月下) 스님을 각각 추대하고 이곳에 임시 총무원을 개원하였다. |
▲ 대웅전 좌측 뒷편 계단을 오르면 전각 하나에 산령각/금륜전/천태각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
▲ 산령각/금륜전/천태각 내부 좌우에서 바라 본 모습 |
1981년에는 중앙승가대학이 경내의 개운회관을 인수하면서 교사를 이전해 왔고, 1992년에는 중앙승가대학의 학사인 정진관을 완공하였다. 1993년에는 중앙승가대학의 운동장 확보를 위해 지금의 위치에 대웅전을 새로 건립하였으며, 이후 차례로 사역을 뒤로 넓혀 개운사가 지금의 모습이 되게 하였다. - 전통사찰관광종합정보 홈페이지 내용 발췌 - |
서울 성북동 개운사 위치도 |
지도 중앙의 B 부분에 개운사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안암동5가 157 |
지도 중앙 상단의 B 부분에 개운사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도 하단의 안암역을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
첫댓글 잘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애들 안암오거리 살 때 가보는 건데...
갈 수는 없지만 언젠가 가보도록 계획을 세워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