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고 존경하는 고 신복윤 교수님께서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윤여성 목사님의 전화를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하마터면 목사님의 소천 소식을 장례식을 다 치루고나서 알 뻔 했기에 더욱 마음이 먹먹했습니다. 물론 제가 매일 노회 밴드나 카페에 들어왔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테지만 말이죠. 제가 조금 전에 노회 밴드에도 저희 소회를 잠깐 적었지만, 제가 이렇게 속이 상한 이유가 남다른데 있기 때문입니다.
고 신복윤 교수님, 아니 신복윤 목사님은 저의 담임목사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제 모 교회는 서울 내수동교회(합동측)입니다. 제가 처음 내수동교회에 나가게 된 것은 서울로 이사오면서였습니다. 당시 내수동교회 청년이었던 큰 누님(송탄 서정제일교회 원로목사 최완근 목사님 사모)의 인도로 1970년 5월 10일(어머니주일/ 당시에는 어버이주일이 아니고 어머니주일이었음)부터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내수동교회를 설립하셨던 고 홍근섭 목사님께서 그 다음 해인 1971년에 은퇴하여 사임을 하셨고, 후임으로 대구 서현교회 출신인 김종국 목사님께서 부임하셨습니다. 그러나 김목사님이 담임목사로 계신 1년여 동안 교회는 침체되어갔고, 결국 김목사님께서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약 1년간 교회는 담임목사님이 안 계신 상태에서 노회나 총회의 원로목사님들이 돌아가면서 주일 강단을 지키셨습니다. 그러다가 제 기억으로 1972년 당시 제가 고등부 1학년 때에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시고 귀국하신 신복윤 목사님께서 우리 내수동교회 담임목사님으로 부임하게 되신 것입니다. 물론 당시 총신대 신대원 교수님으로 함께 사역을 하셨습니다. 신목사님께서 부임하시기 전 내수동교회는 그렇게 은혜스러운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어린 제가 보기에 여전도회가 모여서 회의하면서 싸우는 모습을 종종 봤으니까요. 그러나 신복윤 목사님께서 담임목사님으로 오시면서 교회가 안정기에 들어갔고, 약 3년간 목회하시다가 교수사역만 하시기 위해 사임을 하시고 후임으로 고향 후배이신 지금 내수동교회 원로목사님이 되신 박희천 목사님을 모시고 교회를 떠나셨습니다. 제 기억으로 박희천 목사님께서 1975년 12월 혹은 76년 1월경에 담임목사님으로 부임하셨습니다.
내수동교회 출신으로 함께 젊음을 불태운 친구들로서는 지금 미국에서 목회하고 있고 저와 함께 합신 9회로 졸업한 이성주 목사님을 비롯하여,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님(당시에는 절친이었음),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님이 있고, 그리고 후배들로서는 서울 남서울교회 화종부 목사님, 대전 새로남교회 오정호 목사님, 백석대학교 교목실에 있는 황원선 목사님, 부산 부전교회 박성규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제가 고 신복윤 목사님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가 지난 해 추석을 며칠 앞두고였습니다. 작년 10월 25일에 있을 장로,안수집사,권사 임직식을 앞두고 목사님께 임직예배 설교를 부탁드리기 위해 직접 목사님 사택으로 찾아뵈었을 때가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네요. 그때 사택에서 저를 맞이하실 때에 정신은 온전하셨지만 거동이 불편하신 상태이셨습니다. 다리에 힘이 없으셔서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셨습니다. 목사님께서 다리가 불편해서 주일날 교회에도 가실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간곡히 부탁하니 설교는 못하더라도 저희 교회에 오셔서 축사를 하시겠다고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약속을 한 뒤에 저는 오산으로 내려왔고, 그리고 며칠 후에 교단 총회 총대로 경주 코모도 호텔에서 총회참석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신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진목사, 미안하다. 내가 아무래도 임직예배에 축사를 할 수가 없을 것 같애. 미안해!"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상황을 보고 왔기에 더 부탁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금요일(1월 15일) 오후에 윤여성 목사님을 통해서 신복윤 목사님의 소천 소식을 전해 듣고서 부랴부랴 준비해서 서울 삼성병원 장례식장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17호실. 목사님 영전에 헌화하고, 목례를 하고 상주들과 서로 인사를 나눴습니다. 40년 만에 만난 얼굴들이었습니다. 신목사님께서는 3남 1녀를 두셨습니다. 맨 위로 딸 성애(올해 58세, 1959년생), 그 밑으로 성우, 성도, 성철이가 있습니다. 성철은 우리 합신에 교직원으로 있습니다. 성철 형제만 제외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꼭 40년 만에 재회를 한 것입니다. 옛날 얼굴들이 그대로 있드라고요. 큰 아들 성우의 인도를 받아 유가족 휴게실에서 사모님과 큰 딸 성애 권사를 뵙고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 안부를 물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의 자녀 돌잔치에서 설교가 약속이 되어 있어서 오랜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하고 서둘러서 장례식장을 떠나야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신복윤 목사님! 인자하신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재학 시절 내수동 교회 담임목사님이셨을 때에도 교계에서 영국신사로 통하셨던 인자하시고 선하셨던 목사님이셨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선택할 때에도, 주변에서는 제게 총신을 권했지만, 총신을 가지 않고, 합신을 선택한 것도 저의 영원한 담임목사님이셨던 신복윤 목사님이 합신 교수님으로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복윤 목사님께서 조직신학을 가르치셨는데, 늘 수업하시기 전에 <죄짐 맡은 우리 구주>를 학우들과 함께 부르시고 기도하신 후에 강의를 진행하셨던 것도 눈에 선합니다.
지난 번 서울 목사님의 사택에 인사차 들렀을 때에 목사님이 저술하신 <칼빈>책에 사인을 하시면서 제게 주셨습니다. 그 책을 받고서 서고에 꽃아두었는데 이제 시간을 내어서 목사님이 쓰신 마지막 책을 읽으며 목사님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보려고 합니다.
첫댓글 스승을, 아버지를 떠나 보내셨군요. 저도 94년도에 목연에서 한학기 목사님에게 배웠지요. 그때도 죄짐 맡은 우리 구주 부르시고 강의하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