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는 스스로 호를 고산자라 했으며, 본디 솜씨와 재주가 많고 여지학에 몰두했고, 두루 살피고 널리 수집하여 일찍이 지구도를 만들고, 또 대동여지도를 그리고 판각해 세상에 펴냈으니, 상세하고 정밀함은 고금에 비할 바 없으며, 한 질을 구하니 참으로 보배로다. 또 동국여지고 10권을 꾸미다 탈고하지 못하고 죽으니 몹시 애석하다金正浩自號古山子 素多巧藝癖於輿地之學 博攷廣蒐嘗作地球圖 又作大東輿地圖能畵能刻印布于世 詳細精密古今無比 余得一本誠爲可寶 又輯東國輿地攷十卷未及脫藁而沒甚可惜也.”
위의 글은 유재건劉在建이 1862년에 중인 출신 308명의 인물행적을 기록한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권8 ‘김고산정호金古山正浩’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향견문록>과 최한기崔漢綺의 청구도靑邱圖 서문, 신헌申櫶의 대동방여도서大東方輿圖序 등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김정호는 실존 인물임은 틀림없으나,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지금까지 김정호에 대한 정보로는 1804년경에 태어나 1866년경에 사망했고, 그가 편찬한 <동여도지東輿圖志>에 의해 출생지가 황해도 토산兎山이고, <여도비지輿圖備志>에 의해 본관이 청도淸道임이 밝혀졌을 뿐이다. 그의 업적은 1834년 청구도를 제작하고, 최한기의 의뢰로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를 판각했으며, 1857년에 신헌과 함께 동여도東輿圖를 제작하고, 1861년 목판으로 대동여지도를 제작했고,
<동여도지>와 <여도비지>, <대동지지大東地志>를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4년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조선어독본>에 실린 김정호와 대동여지도 제작에 대한 잘못된 내용은 현재 많이 개선되었으나, 아직도 대동여지도가 어떤 목적으로 제작되었으며, 제작주체가 누구인지, 어떤 방법으로 제작되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이러한 의문점을 풀기 위해서는 대동여지도 제작의 저본底本이 된 동여도의 제작은 물론 당시 조선이 처해 있던 상황과 조선을 둘러싼 주변 정세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동방여도서>에 따르면 동여도는 신헌이 자료를 수집해 분석하고 편집한 다음 김정호가 필사했고, <봉상잡록蓬桑雜錄>에 김정호의 신분이 겸인傔人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신헌과 김정호는 주겸主傔 관계 이상의 가까운 사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관이면서 독특한 학문적 소양을 쌓은 신헌은 평소 국방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 정약용丁若鏞의 <민보방위론民堡防衛論>을 깊이 연구하고, 이와 관련해 지리학과 지도에도 관심을 가지고 동여도를 주도적으로 제작했다.
동여도가 제작된 이후 조선 해안에는 이양선異樣船의 출몰이 잦았고, 청나라가 제2차 아편전쟁에 패해 1860년 북경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조선 조정은 물론 백성들까지 놀랐고, 위기의식에 낙향하는 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보방위의 일환으로 전국지도 제작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것이고, 나아가 대동여지도 목판의 재질이나 상태, 판각의 솜씨 등을 파악한다면 대동여지도 제작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목판용 판재는 돌배나무나 산벚나무를 사용하고, 판재의 두께는 3cm 내외에 손잡이인 마구리가 있는 데 반해 대동여지도 목판은 판각이 용이한 피나무를 사용했고, 목판의 두께는 1.5cm에 마구리가 없는 것으로 보아 대동여지도 제작이 긴급했음을 알 수 있다. 또 대동여지도의 각 판본을 비교해 보면 지도의 선이나 글씨체가 일정하지 않아 판각은 김정호 혼자가 아닌 여러 명의 각수가 참여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대동여지도의 내용을 보면 영아營衙·성지城池·진보鎭堡·파수把守·봉수烽燧·목소牧所·창고倉庫 등 국방과 관련된 정보가 많이 기재된 것으로 보아 민보방위용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커 1860년에 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이었고, 1861년에 삼군수군통제사三軍水軍統制使이였던 신헌이 제작주체였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더욱 대동여지도 표지에 써진 ‘古山子校刊’은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이다.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전국을 가로 39.5cm, 세로 29.5cm의 일정한 크기로 동서 2~8폭, 남북 22층으로 잘라 만든 방안(눈금)식 지도로, 전국지도 이외에 한성부를 그린 도성도都城圖와 도성 주변을 그린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가 수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 방격표에 적힌 매방십리每方十里는 눈금 한 칸의 거리가 10리라는 뜻이고, 눈금 한 칸의 실제 길이가 2.5cm이므로 10리를 4km로 환산하면 축척은 16만 분의 1이 되고, 10리를 조선시대 잣대인 5.4km로 환산하면 축척은 21만6,000분의 1이 된다.
대동여지도는 지형을 산줄기와 물줄기로 묘사하고, 해안선과 작은 섬들까지 빠짐없이 그려 넣었으며, 군현의 경계는 점선으로 표시하고, 전국의 읍치와 도로·성곽·역참·창고·봉수·진보·능묘 등은 지도표地圖標에 따라 기호로 표시했다. 이밖에 지도에는 1만1,677개에 달하는 각종 지명이 표기되어 있고, 글자는 판각의 어려움 때문에 약자略字나 속자俗子, 동자同字로 표기된 것이 많다.
대동여지도를 새긴 목판의 크기는 가로 43cm, 세로 32cm, 두께 1.5cm 내외이고, 1861년 신유년辛酉年에 처음 인본했고 1834년 갑자년甲子年에 틀린 것을 수정해 재인본했다. 현재 남아 있는 목판은 모두 12장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11장, 숭실대학교기독교박물관에 1장이 소장되어 있다. 또 휴대하기 편리하도록 전국 22층을 각 층 별로 서로 이어 붙인 뒤 지도 한 장을 반으로 지그재그로 접어 병풍처럼 펼쳐볼 수 있도록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으로 제책했다.
대동여지도는 비록 종래의 지도와 자료를 모아 편집해 제작한 지도이지만, 전국을 방안에 의한 일정한 크기로 제작해 지도의 내용이 현대지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정확성을 지녀 조선의 전국지도 가운데 가장 우수하고, 최고의 지도로 손꼽힌다. 대동여지도 가운데 성신여자대학교박물관 본은 1985년 8월 9일 가장 먼저 보물 850호로 지정되고, 서울역사박물관 본은 2002년 12월 7일 보물 850-2호로, 서울대학교규장각 본은 2008년 12월 22일 보물 850-3호로 지정되었다. 대동여지도 목판은 2008년 12월 22일 보물 제1581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