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하루가 먼 듯
주룩주룩 내리는 비
구름에 태양 빛은 감춰지고
산과 능선을 따라 바람만이 얹어져
그만 폭우로 변해간다
그제도 오늘도
멈출 기색이 없는 비
우산 위로 물방울은 떨어져
땅의 길바닥은 질퍽하고
어둠은 서서히 짙어만 가는데
이 비는 끝나지 않아
투닥투닥 장마철 빗소리는
어릴 적 자장가인 양
차 한잔을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는 눈가에는
그만 졸음이 사정없이 쏟아진다
자연과 인식의 세상으로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 아래로
광대한 공간의 폭을 따라서
눈에 보이는 가시광선의 조화
햇살이 비추이는 세상으로
일곱색깔의 스펙트럼이
화려하게 펼쳐져 있다
산맥으로 이어지는 장소마다
울긋불긋한 단풍 등이
아름답게 수를 놓고 있으며
드넓은 대지의 들녘엔
바람과 억새풀, 계곡을 따라
넘실대는 풍요로움이 담겨있다
인간의 시야에 보여지는
자연의 세상은 지극히
평화롭기만 한데
시간에 의해 반복된 100여년
그 제한된 세월의 연륜 속으로
우리의 형상은 변함이 없으나
모습은 지난 젊음과 장년을
절절히 보내고 나서야 한 시절이
가고 또 다른 시절이 도래한다
사시사철 피고 지는 꽃들도
푸른 잎이 낙엽이 되는 순간도
떨어지는 잎새의 추레한 빛깔도
변함없이 흘러가는 강물같이
노년의 시기는 한량없고 덧없어
깊은 고독과 회한만이 남겨져 있다
마음을 따라 움직이는 생각과
생각에 따라 변화하는 인식은
자연이 가진 속성으로 그에 따라
삶이 결정되고 지속되며 소멸한다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아라베스크의
문양처럼,지난 과거는
기억의 총량으로서 어느 것이
인생에 올바른지 스스로 판단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인식의 현상도
무엇이 좋고 그른지 분별할 수 있다
자연과 인식은 서로가 깊숙히
공유해야 하는 상생의 관계
노을의 하늘과 지평선 아래로
광대한 공간의 폭을 따라
눈에 보이는 않는 적외선의 조화
햇살이 비추지 않는 세상으로
흑과 백 어둠의 스펙트럼이
장엄하게 펼쳐져 있다
(기행문)
베트남 패키지 여행(하노이/할롱베이 등)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다.개인적으로는 첫번째 27년 전,내가 몸담았던 현대전자의 해당사업부 중역,전무/동료와 함께 지금의 호치민시 주변을 관광했던 기억이 있으며 며칠 전 다녀온 두번째는 가족 및 그 여성 친구(?)들과 함께 한 여행이었다.여행지는 베트남 북부의 하노이와 할롱주변으로 코로나 이후 추진했던 본 여행이 그런데로 함께 갔다왔던 분들의 좋은 호평 속에서 베트남에 관한 본인의 기록을 남겨본다.원래 타국으로의 여행은 나름대로의 정보를 파악하고 그들의 문화/역사 속에 잠시 발을 디뎌본다는 측면과 잠시의 시간이지만 관광지의 자연적인 경관.그 민족이 살아왔던 삶의 흔적과 그들이 갖고 있는 역사에 대한 기억 등을 살펴 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자유여행이 되었든 패키지 여행이 되었든 간에 본 여행이 다소 서정적인 여행이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감사함을 느낀다.
다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베트남에서 가장 무더운 혹서기에 출발(8월 31일)했고 3박5일의 패키지 여행내내 우리나라 8월 중순에 해당되는 섭씨 34도~37도의 날씨에 곤혹을 치렀다.이 나라는 우리와 함께 5천년의 역사를 갖고 있어 대륙으로부터 우리와 비슷한 빈도로 외세의 침략을 받았으며 서세동점의 시기에 어김없이 서구 프랑스의 식민지로 근 100년 넘게 지배를 받았고 치열하게 프랑스로부터 투쟁을 통해 1,945년 독립하였다.그러나 강대국에 의해 다시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나 베트남 전쟁을 거쳐 1,975년에 드디어 국가통일을 이루어냈다.베트남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이들 민족만큼 전쟁에 있어 끈질기게 투쟁한 민족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는 하는데 이들이 생각하는 컴플렉스는 우선 고대에 200년 간을 중국대륙에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과 근세 100년 간의 프랑스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항을 대단히 수치로 여기고 있다.
먼저 근세사에 프랑스와 8년 간의 처절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통킹만 사건을 통해 개입했던 미국과의 전쟁(1,960년~1,975년)을 또한 승리로 마무리한 바 있다.그 이후에 1,979년 중공 30만 대군의 북부지역 침입을 막아냈다는 민족적 자긍심도 있다.물론 우리가 이 나라에 강대국 미국의 요구로 참전했던 슬픈 기억도 있기는 하다.통일 이후에 베트남은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1,986년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는 개혁개방정책(도이모이)을 통해 세계의 초 다국적기업의 자본이 투자되는 지역이 되었고 놀라운 경제발전을 만들어낸다.현재까지도 베트남은 높은 경제성장율을 기록하고 있으며 다양한 통상정책을 펼쳐 경제적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아울러 우리나라의 우수한 기업들도 이 나라에 기여하고 있다.
다시 여행의 기록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패키지 관광을 했으며 짧은 시간 동안 여행이라는 공통의 목표로써 선정된 17여 명의 사람들과 같이하게 되었다.오후 17시쯤 인천공항을 출발하였으며 창문이 옆에 있어 비행기 창을 통해 밖을 보았는데 비행기 아래가 점차 어둠으로 바뀐다.희미하나마 고공아래에 희끄무레한 구름만이 보일 뿐이다.보이지 않는 바깥은 오리무중 속이다.비행기에서 제공되는 기내식이 그런데로 괜찮았고 또한 기내
에 담요가 있어 다소 추웠던 기내에서 도움이 되었다.참고로 고도 11,000m 상공의 바깥온도는 -50도,오전 01시쯤 하노이 공항에 도착했다.패키지의 1/n인 우리는 하노이 공항에서 조우하여 45인승의 버스를 타고 근처의 무엉탄 호텔로 항했다.시차가 2시간이 빠르다.목적지 호텔에서의 첫날 밤.날씨는 열대야를 느끼기엔 총분한 날씨 씻고는 비치된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
다음날 아침.가이드가 설명했던 대로 북부도시 할롱으로 오전 9시에 출발했다.할롱은 베트남 북부 고원지대에 있어 하노이보다는 기온이 3~4도가 낮다고 한다.그래서 그런지 세계 7대 자연경관이 있는 하롱베이가 유명한가 보다.바다 위에 대략 3,000개의 섬이 피크를 이룬다.베트남 사람들도 이곳에 많이들 온다고 하니 대단하기는 한 모양이다.하긴 실제 대단하기는 했다.자연이 만들어낸 그 경관은 참으로 훌륭했다.나는 버스에 승차한 일행을 천천히 바라보았다.창원에서 친구 들과 함께 온 중년여인들.송파에서 온 가족.안산에서 온 부인 아들,딸과 커플 룩으로 차려입은 젊은 아빠.대한민국의 보통 가족들이 추억을 만들어 간다.
할롱을 가는 중간에 엔뜨국립공원에 소재한 이곳 화엔사라는 사찰을 관람하기로 했다.마치 한국에서 강릉을 도착하기 전에 월정사를 들르는 여정처럼 그렇게 길을 나선다.이 나라는 영 교통이 좋지가 않다.대략 180km의 거리가 4시간 30분이 소요된다고 가이드가 설명했다.실제로 한 5시간 걸린 것 같다.하긴 도로에 오토바이와 대형.소형차량들이 엉켜 대략 시간당 40km의 속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차후에 이곳 베트남으로 여행을 오시려는 분은 필히 참고해야 할 사항이다.흔히 동일문화권에 살고 있는 이들의 문화에 견문을 넓히는 자유여행과는 달리 패키지 관광에는 효율성과 함께 여행사가 만들어낸 문화적 체험들과 다소의 흥분이 숨어 있다.빈틈없이 움직이는 일정과 가이드를 좇아서 45인승 관광버스에 시간 맞춰 오르내리는 것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런데로 여행지는 달라도 패키지를 즐기는 것은 대략 비슷한 법이다.
대 자연의 전경,케이블카와 사찰의 모습,테마파크 및 잡화점의 혼잡.그리고 야시장,유람선과 야경,한국 식당의 차림,이러한 스케줄을 따라 즐기고 먹방과 추억을 남기려는 사진들을 찍는 즐거움도 있다.한편으로는 차장 밖으로 보이는 베트남의 농촌 풍경은 우리나라와 별반 차이가 없다.다만 자세히 보면 건물이 우리와는 다른 건축양식으로 단층의 건물은 아주 적다.이 나라는 우리와 같이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유교적 전통이 많이 남아있다.예를 들어 농촌의 10가구 중 7~8가구가 대가족제도로 전통적 문화를 영위해 간다.오늘날 한국이 잊어버리고 있는 전통의 동양문화를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우리나라의 농촌에 가장 많이 시집 온 나라의 처녀들이 거의 베트남인이다.왜 그럴까..내가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
비록 우리보다는 경제적으로 1/8에 해당,추정되기는 하나 워낙 인구가 많은 나라(2,023년 기준)로 1억명에 준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유교적 전통과 윗 어른을 존중하는 문화가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그리고 또 한가지 이곳은 산자와 망자의 경계가 동일지역에 공존하고 있다.이곳에서는 우리나라처럼 산에 무덤을 조성하지 않는다.다시말해 매장문화가 존재하지가 않는다.사람이 생을 마치면 100% 화장을 한다.그래서 남은 뼈를 항아리(유골함)에 넣어서 집에 3개월 정도 보관한 후 근처의 공동공간에 조그마한 집모양의 공동납골당에 안치한다.한데 흥미로운 것은 망자를 기릴때는 납골당의 유골함을 가져와 제사를 지낸다는 점이다.끝나고는 다시 납골함으로 가져가서 보관된다.더구나 이러한 납골당은 대도시 어느 한 지역 대량의 공간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엔뜨 국립공원에 자리한 화엔사의 사찰을 관람하고 그곳에 위치한 해발 600고지의 스님들이 산다는 공간으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는데 인도차이나 반도의 사찰에도 과거 불교의 흔적을 충분히 인식할 수가 있어서 좋았다.다만,그 높은 곳에 더구나 일년 중 평균 낮의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는 험한 곳에 사찰을 짓기 위해 올라 간 사람들의 신앙은 우리나라의 과거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실감한다.이들도 우리나라가 고려시절에 몽골의 침입으로 피해를 입었을때 불교의 호국정신이 나라를 하나의 구심점으로 몰았듯이 이들또한 유일하게 그 당시 몽골의 침략을 막아냈던 몇 안되는 나라로 불교 호국정신의 철저한 수호자였으며 민중을 이끌었다고 한다.(베트남의 왕족/승려들..) 사찰의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내려와서 그곳의 유명한 베트남 음식을 먹고 할롱시로 되돌아오는 코스가 그날 하루의 끝,농촌의 농장에 들러서 배터지도록 맛본 조그마한 남방의 파인애플 시식,그리고는 호텔로 가는 도중에 할롱의 커피(cong 커피)라고 일컫는 커피 맛이 좀 유별났다.아마도 문화적인 차이라 생각된다.
날씨가 매우 더워서 35도를 육박한 온도로 하롱의 야시장에 들러 베트남의 열대과일 망고와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즐겨했다는 망고스틴 등 기타 과일들을 사가지고 할롱의 파라다이스호텔 로 직행.물론,그날 저녁은 한국 전문음식점에서 김치전골로 근데,음식이 영..입맛만 버렸다.나는 호텔에 와서 가지고 간 컵라면으로 요기를 대신 했으며 사가지고 간 망고만 잔뜩 포식했다.그렇게 2일째의 패키지 관광은 마무리 되었고 다음날의 일정은 하롱베이를 배를 타고 하루 종일의 해상 관광과 17시 이후 할롱의 맛사지 체험으로 계획이 된 상태로 또 하루의 시간이 지나갔다.다음날 아침 오전 07시에 기상해서 파라다이스 호텔의 아침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수상선을 타러나갔다.우리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고 관광을 위한 수상선 은 예상을 뛰어 넘어 수십척은 되어 보였다.
어떻게 생각하면 코로나의 발생 전,관광객 수 보다 40%에 미치지 못하나 앞으로의 추세로 보면 크게 늘어날 것 같다는 가이드의 말이 실감났다.실제 우리나라 사람들이 선호하는 해외의 관광지는 일본이 1위,베트남이 2위이다.통계로 해외 관광객 10명 중 4,5명이 일본행이고 2.4명이 베트남행이라고 한다.여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특히 베트남의 여행은 우선 우리와의 경제적 차이가 크고 물가가 대체로 저렴하며 우리나라의 높아진 위상으로 인해 같은 가격으로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점과 한류의 확산과 함께 현재의 패키지형태를 창안해 낸 한국인의 상술을 칭찬하고 싶다. 이를 갖추기까지 여행사 프로모션들은 현지문화와 관광객 욕구를 창출해 왔다.앞서 언급한 한류는 베트남에서 젊은 시대가 갖고 있는 활발함과 함께 우리나라의 젊은 세대와 동시 패션을 구가하고 있다고 본다.
할롱베이..역시 말로만 듣고 인터넷 등으로 확인해본 바다에 늘어선 수많은 섬들의 경관은 마치 신선이 살고있을 법한 파라다이스의 혼돈으로써 문화적 경관의 충격(?)을 받을 만 했다.아름다움의 극치로 이러한 곳도 흔치가 않다.바다사이의 성들을 수상선으로 유람하기 3시간,요란하고 익숙한 노래소리가 들려온다.수상선마다 관광을 위해 노래방이 설치되었는데 다른 수상선의 일부 한국 관광객들이 흥에 겨워 질러대는 노래소리,나는 순간적으로 당혹함이 치밀어오른다.그러면서 어글리 코리안의 모습을 이곳에서까지 본다는 사실이 몹시 언찮기만 하다.한 십년 전에 외국에 가면 온통 울긋불긋한 등산복을 걸치고 돌아다녔던 갈때와 안갈때를 분간 못했던 한국인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물론 그때와는 다르지만..우리의 국민성이 노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는 있다.그러나 아무리 흥에 겹다고는 하나 이 황훌한 관광지의 경관을 두고서 소리를 지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민망스럽다.어쨌든 본말이 전도되었다.수상선에 차려진 화려한 해상의 해물과 함께 점심을 마치고 이후에 바로 아찔했던 제트 수상모터보트와 사람이 노를 젓는 보트를 타고 동굴을 통과해서 펼쳐진 둘러쌓인 절벽의 바다공간에 메아리가 되돌아 오는 환상적인 경험을 했고 하롱베이의 바다가운데 동굴 입구에 배를 세워 내려 송솟동굴을 관람했다.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동굴은 바깥의 기온과 최대 20도의 차이가 나서 속으로 선선하겠구나라는 생각으로 당연히 그렇게 알았으나 이곳의 송솟동굴은 동굴로써 기능(원래의 동굴 안에는 습기가 있고 석순 등이 계속 자라나는 현상이 있음.)이 오랜 세월로 인해 멈쳐버린 동굴로 바깥의 날씨와 큰 차이가 없어서 조금 놀라기는 했다.
마지막으로 티톱섬을 관람했는데 이 섬은 해변 에서 수영을 즐기거나 450개의 계단을 올라 하롱베이가 내려다보이는 절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티톱(소련 조종사로 유리 가가린보다 러시아에서 유명한 인물로 베트남의 독립전쟁에 참가하여 도옴을 줬음.)이라는 구 소련의 장성이 하롱베이를 방문 관광하여 그만 너무 아름다운 본섬에 매료되어 당시 호치민 주석에게 그 섬을 달라고 했으나 호치민은 그것은 나의 소관이 아니고 베트남인의 재산이므로 정중히 거절.단,본섬에 영구히 당신의 동상과 이름을 남겨 두겠다는 약속을 하여 섬의 이름이 소련의 T Top으로 명명되었고 그의 동상이 함께 서 있다.거의 16시가 다 되어 하롱베이의 해상 관광을 마치고 할롱에 도착한 것이 이곳의 커피 전문점 밎 판매점,베트남은 커피가 유명하다.그 중에 사향족제비가 커피열매를 먹고 나온 배설물에서 원두를 채취하여 볶아서 만든 동물성 위즐커피 맛이 독특하였다.
그리고 코코아 커피도 유명하기는 하다.가이드가 인도한 커피점에서 맛도 보고 위즐커피의 가격이 상당하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설명에 홀린 듯이 카드를 긁은 후에 물품을 구입했으나 좀 찝찝하기는 했다.이후 맛사지 업소로 이동하여 맛사지를 2시간의 코스로 받았다.그런데 원래 나는 나의 신체를 남에게 맡겨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다시말해 한국의 목욕탕에 가서도 때밀이 및 맛사 지의 행위를 평생에 걸쳐 해본 적도 없었고 그것을 선호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해서 같이 여행을 함께한 여자들이 예약한 프로그램(?)에 의해 본의아니게 맛사지를 받았다.32살의 여성이 정성스럽게 벌이는 행위가 마치 태권도로 치자면 앞차기,옆차기,돌려차기,올려차기,회전 돌려차기 등으로 묘한 경험을 했으며 맛사지는 깊은 여운을 남긴체 끝났다.
이후 별도의 팁으로 7달러를 주라고 해서 그대로 시행했다.나의 취향과는 맞지가 않았지만 일행 에게는 훌륭한 서비스였다고 거짓말을 했다.한편으로는 이곳 맛사지업체의 기본봉급은 매우 작아 맛사지사들은 대부분 체험자가 주는 팁에 의존 한다고 한다.맛사지가 끝나고 저넉은 한국식 삼겹살 집,고기는 삼겹살이 맞으나 맛은 아니라서 조금만 먹고는 슬며시 수저를 놓아 버렸다.다음의 코스는 할롱테마 파크에 위치한 우리나라로 친다면 용인의 에버렌드를 연상시키는 장소로 케이블카를 타고 이동 높은 곳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전동케이블카 및 관련 시설이 우리나라
로 친다면 삼성그룹이랄 수 있는 베트남 최대의 진이라는 회사가 운영하는 테마파크로 주말이라서 그러한지 베트남의 시민들이 엄청 모여들어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단,테마파크내의 공원시설은 일본의 높은 성과 건물 테마파크의 설계가 아마 일본의 오사까 성을 모델로 그 기술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 확연해서 일본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였다.시간이 흘러 할롱의 호텔로 돌아갈때 이곳 할롱은 아마도 베트남의 계획적인 관광도시로써 우리나라의 경주보문단지 및 제주의 관광단지처럼 도시가 매우 깨끗하고 국가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으며 5성/4성급 높은 호텔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호텔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건너 저편으로 하롱베이의 풍경이 비춰지는 매우 아름다운 도시였다고 생각이 든다.베트남에서 마지막 밤을 어제의 동일한 호텔에서 보내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호텔의 부페식 식사를 마치고 하노이시내를 돌아보기로..그런데 하노이로 되돌아갈 때는 고속도로를 이용하다고 가이드가 사전에 얘기한 덕택에 할롱으로 올때의 혼잡하고 괴기한 오토바이 및 차량들의 혼잡함은 없었다.앞서 언급한 바 있는 베트남의 교통량 및 도로는 우리나라로 친다면 대략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의 상황과 엇비슷하다고 보면 된다.더구나 그간의 경제적 요구가 늘어가는 시기에 우리나라처럼 대부분의 도시가 계획도시가 아닌 자연발생적인 자연 방사형으로 형성되어 도시가 매우 번잡하고 혼란스러우며 교통지옥을 방불하게 한다.특히 하노이의 중심에 자리한 동쑤언/롱비엔시장은 미로처럼 펼쳐진 시장으로 걸어서 다니기에는 도저히 종잡을 수 장소로 우리나라 골프장에서 볼 수 있는 전동차.일반차량.오토바이 택시.각기의 오토바이들과 사람들이 서로 엉켜 혼잡하기 이를데 없으며 그런 가운데서도 사고없는 인적 교통시스템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일행은 개조된 10인승의 전동차를 타고 시장을 대략 30분 정도 돌아보았는데 수 많은 물품들이 시장임을 증명해 주었고 더구나 오토바이에 가족(앞에는 아이.뒤에는 부인.그리고 부인을 뒤에서 안고있는 좀 큰 아이 총 4명)을 태우고 위태롭게 운전해 다니는 모습에 좀 색다르게 느껴봤던 이 나라의 특별한 교통문화가 아닌가 싶었다.근처의 프랑스 풍인 성요셉 성당으로 향했다.그런데 하필이면 그날이 이 나라가 독립을 한 9월 2일의 광복절이며 베트남인들이 지금도 존경해 마지않는 국부 고 호치민 주석이 사망한 날이다.그래서 그런지 수 많은 인파가 거리에 나와있고 성당주변 또한 번잡하기가 이를데 없다.여기서 다시 이 나라의 교통문화를 언급하고자 하는데 오토바이는 이들의 필수품,특히 여성의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비중이 상상을 초월한다.10명 중 3~4명은 오토바이 탑승자라고 보면 된다.
더구나 가이드말을 빌리자면 미혼여성과 기혼여성의 오토바이 승차모습을 금방 파악할 수가 있다고. 뭔 소리인가 했더니 가만보니까 그 말을 터득할 수 있었다.기혼여성은 다리를 벌리고 타는데 미혼어성은 다리를 최대한 오므리고 타고들 있다.아무튼 이러한 교통문화는 내게는 잔잔한 문화충격으로 다가왔다.날씨가 더운 탓에 한번 맛보았던 근처의 유명한 커피솦에서 줄을 기다려 cong 커피를 시켜놓고 잠시 더워를 피했으며 이 나라도 유명한 장소의 식/음료점에도 사람들이 몰리는 현상은 같구나를 느껴본다.번잡한 인파를 뒤로하고 다시 45인승의 버스에 올라 점심식사를 위해 간 곳이 하노이에 우리 교민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지역의 이름난 쌀국수 및 만두집,맛은 그런데로 괜찮았으나 고유의 진한 베트남 음식의 향취가 다소 거슬렸다.아무래도 나는 이곳의 음식문화가 나한테는 맞지가 않는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윽고 간 곳이 호치민 생가,베트남인들의 정신적 지주,평생을 베트남 독립을 위해 싸워 왔으며 죽을때까지 독신을 고집했고 하루 세끼를 반찬 세가지 이상을 상에 올리지 않았으며 사후 그의 유품은 낡은 옷 몇 벌과 신발3켤레가 전부였다고 하며 개인적 재물은 없었다고 하니 거의 말 그대로 성인에 준한 반열에 오를 만한 인물로 그는 죽어서 방부처리 되어 생가의 진열대 위에 누워있다.기실 그는 사망할 당시에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통일(1969년 9월2일에 사망)이 되면 화장해서 유골을 재로 만들어 북부,중부,남부의 산하에 뿌려달라고 했으나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영원히 기억하자는 뜻으로 유지를 무시하고 그의 생가에 모셨다.아마 이러한 사실은 이 나라가 사회주의국가라서 가능했을 것이라고 본다.하지만 이러한 사항은 외형적으로 국가간의 북한의 우상화를 위한 만수대 김일성의 방부처리된 모습과 비슷한 측면은 있을 수 있으나 오늘날 호전적이며 괴상한 우리의 북쪽에 위치한 북의 정권 김일성과 호치민은 절대적으로 그 격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오늘날 우리의 윗쪽에 있는 북한은 극도로 고립된 나라로 이루어질 수 없는 무력통일이란 황당한 강령을 기반으로 세계 최빈국의 자리에서 오로지 국민을 위한 노력은 뒤로하고 핵과 미사일만 쏘아대는 깡패국가로써 세계적으로 낙인이 찍힌 지 오래되었다.만약 이들이 베트남처럼 개혁개방의 정책으로 전환되어 국민들이 어느 정도의 자유와 경제활동을 추구한다면 얼마나 즣을까를 내심 그려본다.이제 이 나라에서의 패키지 여행은 끝을 향해 가고 있다.가이드가 데려간 곳은 베트남이 자랑(?)하는 침향전문점으로 위즐커피와 마찬가지로 한국인 강사의 거창한 입담에 의한 말 재주로써 인체의 여러가지 성인병에 효과가 남다르다는 침향에 관해 나름대로의 과학적 근거와 함께 혹하게 만들어 침향을 구매하게 만들려는 의도로 나는 위즐커피와 마찬가지 순간적으로 카드에 손이 가는 우를 범할 뻔 했다.
가족은 적극적으로 구매하고자 핬으나 약장수(침향소개 강사를 약장수로 표현해서 미안하기는 함.)가 대부분 그렇듯이 효과와 구매가 반비례의 상관관계를 이룬다는 철칙을 갖고 있는 나는 과감하게 손절해 버렸다.하긴 가격이 140만원을 웃둘아 부담이 되었고 더구나 치매예방에 효과가 있다는 말에 넘어 갈 뻔 했으니..동의보감에 침향이 좋다는 것과 세종대왕꺼서 즐겨드셨다 는 점은 인정한다.하지만 어떡하겠는가..(4팀 중 1팀만 구매) 해서 낮은 매상에 어두워진 가이드 안색에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버스에 올라 가이드의 인생역정을 듣고 있노라니 가슴이 짠해 옴을 느껴본다.고향이 경상도 봉화로 6남매의 막내로 서울에서 사업을 벌였다가 IMF 때 쫄닥 망해 생계를 위해 여행사의 직원으로 일했던 일.그게 계기가 되어서 베트남으로 이주한 지가 13년 째라고 한다.
8~9년 전에 불어닥친 세계여행의 호황 속에 베트남의 여행사 관련 가이드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으나 그만 4년 전에 코로나 역풍을 맞아 IMF보다 더 큰 시련을 맛보았다고 본격적으로 코로나 전의 베트남 호황이 다시 오기를 기대한다는 그의 말에 인생역정이 동병상린으로 다가왔다.내가 그에게 물어봤다.그 동안 생활은 어떻게 했느냐고..말 그대로 코로나로 한 장소에서 6개월 정도 있는 돈 까먹으며 격리를 받았으며 한국으로 되돌아와 처가댁에서 3년을 신세졌다고 한다.같은 동포라는 말에 어딘가 애틋한 느낌을 자아낸다.다만 이 친구가 얘기하는 말 가운데 사회주의가 그렇게 무서운 줄은 자기도 그때 처음 알았다는 사실이다.우리가 코로나 한창 심할 때는 베트남에서 5~6명만 발생되었고 1명이 발생된 지역을 반경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예를 들어 시흥시에서 발생시 반경 100km(천안정도의 지역)에는 출입을 전면 통제했으며 이를 어길때는 무차별 감옥으로 격리 그것도 3개월 이상 구류를 살았다고 하니..
어쨌든 이 나라는 체제에 반하는 사항이 발생되면 사회주의 고유의 색깔이 나올 수 있다는 얘기이다.나도 일부 민감한 사항을 느끼기는 했는데 그것은 공항의 출입관세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정형화된 관료의 모습음 보았고 호치민 생가를 통제하는 경찰의 모습에서 적극적 질서와 위엄의 모습을 보았다.다시 말한다면 체제를 위해서는 질서와 자유로움을 바라지만 그것이 반할 때에는 과한 공적인 행동도 가하겠다는 의미이다.이 나라에서 데모의 모습을 보았는가..아울러 파업이란 말을 들어 보았는가..참고로,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하노이에 카퍼레이드를 벌인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한국의 축구감독 박항서의 동아시아축구 우승 때 였다고 한다. 지금도 박항서는 베트남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아울러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나라는 철저히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솔직히 국민들은 정치는 공산당의 위정자가 하는 일이고 경제적이며 먹고사는 일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자..이제 베트남 패키지 여행의 마지막 중심지에 위치한 롯데센타를 찾았다.롯데가 하노이 중심지역에 건설한 65층의 고층건물로 하노이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고있다.우리나라 강남 송파의 102층 롯데빌딩보다는 못하지만 최고층에 전망대가 자리잡아 하노이의 시내를 관망할 수가 있다.오늘날 전세계의 관광지를 섭렵하고 다니는 여행자들과 해당지역의 나라에 뿌리내린 우리 동포들의 상술은 날로 발전해 가고 있다.롯데는 오래 전에 이 나라 유통분야에 뛰어 들어 대단한 상술을 발휘하고 있다.아마 한국의 102층 건물에 준한 건설계획이 곧 발표될 지도 모르겠다.시간은 벌써 17시 근처 비슷한 백화점의 부페를 이번 여행의 마지막 식사로 인도한 같은 동포 가이드의 노고에 감사를 드리며 오후23시 50분에 출발하는 아시아나 항공기로 타고서 한국으로 되돌아오는 패키지 여행이 종료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여행은 이렇다.국내여행이든 국외여행이든 동일한 문명권에 상주하며 무수한 세월을 처절하고 절절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좇아 다니며 역사인식을 넓히고 동일문명권에서 상주하면서 수없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무수한 기억에 대한 총량을 찾아 그들의 문화적 유산과 그것을 채험하는 것이 여행이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말은 아닐 것으로 본다.
첫댓글 원고 주신 선배님 감사합니다.
2024년호 충성문학 편집 시 반영하겠습니다.
베트넘은 가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배알이 틀어진 남자들이 가는곳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