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잊지 못 할 과거
차(茶), 한 잔의 차맛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내력과 주인의 성품을 알 수 있다고 했던
가?무진은 차를 앞에 놓고 그 향취에 젖어 있었다.
차는 잎을 따는 시기에 따라 이월(二月) 춘분(春分) 전후(前後)에 따는 사전차(社前茶), 한식
(寒食) 이전에 따는 화전차(火前茶), 그 이후에 따는 화후차(火後茶). 곡우절(穀雨節 : 삼월
무렵) 이전에 따는 우전차(雨前茶)와 이후에 따는 우후차(雨後茶) 등으로 나뉜다.
무진이 맛보는 차는 맛이 깨끗하고 정갈한 걸로 봐서 잎을 딴지 얼마 되지 않는 납차(臘茶)
였다. 납차는 정월에 따는 것으로 시기를 놓치면 제맛이 나지 않는다.
특히 차는 잎을 따서 달여 마시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주인의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과정과
다름없다. 그래서 예로부터 차를 마셔보면 그 사람의 심성의 사악함이나 군자(君子)로서의
도를 알게 된다고 했다.
"빌어먹을! 탁문주는 벌써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군."무진의 말 속에는 부러움과 아직
자신은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한탄이 뒤섞여있었다.
홍살문(紅煞門)!
잔혹함을 느끼게 하는 문파의 이름과 달리 차맛에서는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맑고 깊
은 심성이 그대로 우러나왔다.
본래 홍살문은 마도제일의 문파였다.
일장괴 탁수정이 문주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무림인들에게 홍살문은 마도 가운데, 가장
악랄하고 상대하기 어려운 마두집단이었다. 또한 실질적으로 마도를 이끌어가는 선두주자로
정파의 골칫덩어리였다.
하지만 무림공적(武林公敵)으로 몰면서도 정작 제거하자는 얘기에는 모두들 꽁무니를 뺐다.
홍살문의 무공이 너무나 패도적이었기 때문이다. 대대로 살행(殺行)을 주업(主業)으로 삼아
온 그들인지라 칼 하나를 휘두르더라도 정파의 무딘 칼날과는 달랐다. 그러나 그것은 수적
우위를 점하면 해결되는 것이다. 무림인들이 정작 홍살문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홍살문의 특
이한 독문무기에 기인한다. 그것이 바로 무형열장지독.
새로 문주에 오른 탁수정은 마도의 흔적을 쓸어내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은 의도적이지는
않았다.
출발은 단순했다.
마도의 인물 중 보기 드물게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탁수정의 생각에 따르면 정과 마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정이든 마든 그것은 이름 붙여진 것일 뿐, 인간에게는 오직 지켜야 할 만
한 선과 정의만이 존재한다고 믿었고, 그는 자신의 믿음을 홍살문 제자들에게도 전파시켰다.
그는 선대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왔던 문파의 규율(門規)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십악(十
惡)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불문곡직(不問曲直), 문파에서 내쫓았다.
탁수정이 금(禁)한 십악(十惡)은 다음과 같았다.
몸으로 짓는 악을 뜻하는 신악(身惡)의 세 가지.
산 목숨을 죽이지 마라, 훔치지 마라, 남녀가 문란한 행위를 하지 마라.
그 다음은 입으로 죄를 짓는 구악(口惡)의 네 가지.
거짓을 하지 마라, 이간질을 하지 마라, 거친 말을 하지 마라, 간사한 말을 하지 마
라.
뜻으로 죄를 짓는 의악(意惡)의 세 가지.
탐내는 말을 하지 마라, 성내는 말을 하지 마라, 잘못된 견해를 말하지 마라(愚痴).
제자들은 코방귀를 뀌었다.
'우리가 정말 마도 맞아?'
'문주의 말이면 다 되는 줄 아나? 지금까지 홍살문이 어떤 문파였는데, 이건 소림보다 더하
군.' '맞아! 차라리 문주 혼자 머리 깎고 소림으로 들어가라고 그래.'그들이 길길이 날뛰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새 문주, 일장괴 탁수정의 뜻은 단호했다.
자신이 내린 문규를 일컬어 신삼구사의삼지법(身三口四意三之法)이라 칭하고, 이를 어겼을
때는 설령 그 자가 문주의 친족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축출했다.
결국 그 동안 악행(惡行)에 젖어 있던 홍살문의 문도들은 스스로 홍살문을 박차고 나가거나
파문당했다. 이후 홍살문의 세력은 급격히 쇠퇴했지만 문주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자연히 세인들에 입에 홍살문은 흉악한 마도라기보다는 정도의 무리로 인식돼 왔다.
홍살문은 변했고, 탁수정의 뜻대로 정착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무림사상 전무후무한 살
겁이 일어나기 직전의 고요와 같았다. 탁수정과 홍살문이 그 소용돌이의 중심부로 휩쓸려
들어갔다.
그때 문이 열렸고, 무진의 기억도 거기서 멈췄다.
끼이익......!
탁수정은 손녀 탁연을 안고 대전으로 들어왔다. 뒤따라 시백도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들은 솔직했다.
"까르르르......."
무진을 보자마자, 손녀 탁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포복절도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리라. 탁연
은 그렇게 이상한 모양새의 도사를 처음 본 것이다.
키는 자신과 비슷한데 얼굴은 왜 그리 크고 주름살이 많이 잡혔는지, 삶은 호박을 얹어놓은
것 같았고 몸에는 새로 지은 도복을 입었지만 영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난쟁이가 수십 겹
의 옷을 껴입은 꼴이었다.
"이, 이거 죄송합니다."
탁수정은 황급히 손녀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무진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후였다.
아이에게 화를 낼 수도 없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워낙 여러 번 겪은 일이라 이젠 아무렇지도 않습니다."무진은 먼저 그에게
포권의 예를 취했다.
"기억나시는지요, 탁문주? 무당의 무진입니다."
일장괴 탁수정은 무림에서 그가 먼저 예를 표할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만큼 무
진은 탁수정을 인간적으로 존경해 왔다.
"예?"
탁수정도 그 말을 믿지 못했다. 장안의 계집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듬직한 체구의 도사
가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무진은 자신이 태극진기공을 익힌 것과 주화입마에 빠진 후 육체가 변한 과정 등을 간략하
게 설명했다.
"어떻게 그런 변고가......."
탁수정은 탄식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손녀 탁연을 바닥에 내려놓고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포권지례를 취했다.
"죄송합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일장괴 탁수정은 시백에게 눈짓을 보내 희연을 데리고 내전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제가 갑자기 찾아와 놀라셨지요?"
"아, 아닙니다. 귀인(貴人)이 찾아오리란 것은 어젯밤 별자리를 보고 알았지만 무진도사님께
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아!
무진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염병할 벌써 그 경지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탁수정을 쳐다보는 그의 눈길엔 은연중 부러움이 가득했다.
"자, 앉으시지요."
"예."
두 사람은 탁자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저 아이가 그때의 손녀이신가요?"
무진의 말투는 조심스러웠지만 탁수정은 선선히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많이 컸군요."
무진도사의 말에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많이 컸지요."
"......."
탁수정은 고개를 돌려 손녀가 사라진 내전 쪽을 쳐다보며 눈을 끔벅거렸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허허, 생각보다는 좋습니다."
수인사는 길지 않았다. 탁수정 역시 무진도사가 한가롭게 산서성 항산까지 찾아오지 않았음
을 알고 있었다.
한동안 말이 끊어졌다.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무진도사였다.
"십이 년 전 그 일로 가장 많이 고초를 겪으신 분에게 죄송한 말씀입니다만.......""괜찮습니
다. 말씀하시지요."
그렇지만 막상 말을 꺼내기는 쉽지 않았다.
탁수정은 선선히 말하라 했지만 무진도사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지난날 그가 겪었을 고통
을 짐작하기에, 자신이 한 사람의 가슴에 또다시 못을 박는 못할 짓을 하는 것은 아닌가?긴
장으로 입술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더 이상 주저할 수도 없었다. 무진도사는 결심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무형열장지독이 나타났습니다."
"뭐라구요?"
"......."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탁수정은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무형열장지독이 무림에 나타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럴 리가요?"
탁수정은 놀랐다. 그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애당초 어젯밤 손님이 오리란 것을 알았을 때부터 미루어 짐작은 하고 있었다. 무림의 도난
사건과 연관이 있는 것인줄 알았고 여러 문파에서 파열홍염장의 수법이 나타난 것에 대한
의심을 하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무림과 발길을 끊은 그였지만 중원을 온통 떠들썩하게
만든 그 소식은 알고 있었다.
"분명 무형열장지독이?"
"틀림없습니다.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혹시나 했지만 예전 적산령에서의 그것과
같았습니다."탁수정은 말을 못하고 눈만 끔벅거렸다.
"제가 생각하기론 죽임을 당한 자의 상흔(傷痕)이 무형열장지독과 비슷한 무공은 파열홍염
장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봅니다."탁수정은 침묵으로 그의 말에 긍정하고 있음을 나타냈
다.
"하지만 문주께선 십이 년 전, 적산령에서의 무형열장지독을 맞고 심한 내상을 입고 계신
데...... 그 정도 수위의 파열홍염장을 펼쳐내리라고는 판단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무림인들은 제자 시백이라는 자가 예전 탁문주 이상의 무공을 익히고 있다고 생각
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과는 다릅니다만......."탁수정은 침착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시간이 지나서야 헝클어졌던 정신을 수습했다.
"무림에서 있었던 일련의 도난사건에 대해서는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만, 무진도사님의 얘긴 금시초문이라서......."말끝을 흐리며 탁수정은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얘기를 듣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무례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무진도사는 그만둘 수 없었다. 어차피 밝혀야 할 일이었다.
만에 하나 탁문주가 그것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일은 쉽게 풀릴 수 있었다.
무진의 말은 거침없었다.
"문주의 고견(高見)을 듣고 싶습니다."
"어떤......?"
무진도사는 말을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單刀直入)으로 말했다.
"아드님, 현악교주 탁무걸에 대해서."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탁수정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이 노여움 때문인지, 아니면
회한 때문이지 무진도사는 짐작을 하지 못했다.
탁수정은 말이 없었다.
겉으로 태연하게 보이는 무진도사도 무척 긴장하고 있었다. 그의 도포 앞자락이 흥건히 젖
어가는 것이 그 증거였다. 가슴팍으로 땀이 고랑을 파고 흘러내렸다.
현악교주 탁무걸은 홍살문주 탁수정의 아들이자 손녀 탁연의 아버지이다.
순리에 따른다면 응당 아버지의 대를 이어 홍살문주가 되어야 마땅할 그가 왜 따로 현악교
를 세우고 스스로 교주의 자리에 앉았는가?원인은 탁수정이 홍살문의 새로운 문규(門規)로
정한 십악 금지 조항에 있었다.
홍살문에서 탁수정의 말에 가장 완강하게 반대한 자는 바로 그의 아들 탁무걸이었다. 그전
까지만 해도 온순하고 고분고분 아비의 말을 잘 듣던 아이라고 생각했다.
탁무걸은 당돌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아버지가 선을 주장하시는 것은 저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문도들까지 아버지
의 뜻에 따르라 하신다면 전 반대합니다. 아버님이 말씀하시는 선만이 존재하는 문파가 대
체 가능하기나 한 겁니까? 전 선과 악이 나뉘어져 있고 배타적이라 보지 않습니다. 악이라
불리우는 것은 선의 다른 한 양상이며, 선이라 불리우는 것은 악의 다른 양상일 뿐입니다."
아들의 말은 거침없었다.
"지금의 무림을 보십시오. 선을 표방하는 문파들과 악를 표방하는 문파들이 뭐가 다릅니까?
아, 다른 것 있지요. 똑같은 악행을 저지르면서 그들은 양의 탈을 썼다는 것이지요. 단지 선
을 도구로 위장한 간특한 수법일 뿐입니다. 그들의 내부에 얼마나 많은 거짓과 탐욕이 잠재
되어 있는지는 아버지가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기적인 쪽은 오히려 정파를 자처하고 있
는 그들입니다."탁무걸은 몇 번이나 아버지에게 문규를 거두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탁수정은 완고했다.
끝내 아들이 자신의 명을 거역하고 스스로 홍살문을 떠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무예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아들이었다. 그러나 타고나기를 탁무걸은 완전한 반골지체(反骨
之體)로 태어났다. 탁수정이 무리할 정도로 선을 더욱 굳게 고집하는 원인의 하나도 아들의
반골이 언젠가 깨어날 것을 막아보자는 데 있었다.
탁무걸은 아버지의 뜻에 무턱대고 따르는 것을 그 자신이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를 따르는 문도들을 데리고 홍살문을 떠났다.
그리고 삼 년 후 그는 커다란 명성을 얻었다.
천하제일인이라는.......
마침내 탁무걸은 현악교를 세웠다.
현악교가 내건 뜻은 분명했다.
정파가 말하는 선의 기준을 우리는 거부한다.
정파 스스로 행동과 판단의 기준이라고 하는 선이란 것, 그것은 결국 자기 행위를 합리화하
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정파의 선(善) 따위는 거부한다.
그 자들이 우리를 마(魔)라고 부르든......
사(邪)라고 부르든......
그들이 뭐라고 부르든
그것은 그들의 자유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주장한다.
그들 정파에겐 선과 악을 판단할 힘과 능력이 없음을.......
현악교는 급속하게 세력을 확산시켜 나갔다.
그들의 주장은 매력적이었다.
그 동안 정파는 자기들이 아니면 모든 것을 악으로 치부해 왔다. 세인들은 알고 있었다. 정
파라는 가면을 쓰고 악행(惡行)을 저지르는 것을 보아 왔던 그들은 현악교의 등장을 내심
반가워했다.
사회에서 핍박을 받던 사람들, 불우하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 미천하고 배운 것 없는 밑
바닥 사람들을 중심으로 현악교는 점차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들의 믿는 것은 암기였다.
무형열장지독.
현악교 아래 모인 사람들의 대부분이 보잘것 없는 무공의 소유자들이었다. 탁무걸은 그들이
한순간에 무공을 키울 수 없음에 착안하여 무형열장지독을 이용했다.
무형열장지독은 원래 홍살문의 독문암기 수법이다. 파열홍염장도 무형열장지독의 특성을 파
악하면서 익혀낸 독문장법이었다. 장법은 수련 과정이 어려웠지만 독은 사용법이 간단했고
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었다.
무형열장지독은 무공이 약한 사람도, 일곱 살 어린애라도 사용 가능할 정도로 간편했다. 홍
살문이 그때까지 마도로서 악명(惡名)을 널리 이름을 알린 데는 파열홍염장보다 무형열장지
독이 기여한 바가 컸다.
탁수정은 자신이 문주가 되면서 무형열장지독을 홍살문에서 영원히 파쇄(破鎖)시켰다. 그것
의 간편함이 끊임없는 살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악교에선 간편함이 필요했다.
탁무걸은 마지막으로 현악교를 찾아갔다. 지하동부 속에 넣어 영원히 파쇄시켰던 무형열장
지독을 현악교로 가져갔다.
사회에서 핍박을 받던 사람들도, 불우하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도, 미천하고 배운 것 없는
밑바닥 사람들도 무형열장지독은 쉽게 익혔다.
그때부터 어느 누구도 그들을 가볍게 여기지 못했다.
현악교가 위치를 굳힐수록 정파와 마도에서는 불안해졌다.
정파에서는 자신들을 비방하는 현악교가 눈 속에 박힌 가시였다. 마도는 지금까지 그들이
누렸던 위치가 현악교에 의해 상실될 것이란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것이 무림맹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었다.
도저히 한자리에서 양립할 수 없었던 두 파가 공통된 이익을 위해 하나로 뭉치는 순간이었
다.
그때부터 현악교는 위축되기 시작했다.
현악교를 무너뜨리기 위해 온갖 유언비어(流言蜚語)와 모략, 음해가 동원되었다. 후안무치
(厚顔無恥)의 살인집단(殺人集團), 탁무걸 개인을 위한 치부조직(致富組織), 희대의 살인마
탁무걸 등등.......
그것은 실로 치밀하고 은밀하게 조정되었다.
홍살문주 탁수정은 아들을 만나러 현악교를 찾아갔다.
탁수정은 누구보다 따뜻한 가슴을 가진 아버지였다.
아들의 뜻이 자신과 다를지언정 그릇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신변이 위험에 처하자
자신이 직접 뛰어들었다. 중재역을 자임하고 나섰다.
무림맹은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들어주는 대신 조건을 달았다.
탁무걸이 문파를 해산하고 정리한다면 지금까지의 일은 없던 것으로 하고 불문에 부치겠다.
만약 이를 수락하지 않을 때는 당신이 직접 현악교를 제거하는 데 앞장서 달라고 요구했다.
탁수정은 그들의 말에 이의를 달 수가 없었다.
그리 하겠노라, 응낙하고 나섰다. 그러나 탁무걸은 그의 간곡한 부탁을 한마디로 딱 잘라 거
절했다.
현악교의 이름으로 맞는 죽음이라면 달게 받겠다는 것이다. 아니 전체 현악교도들의 뜻이었
다.
"너뿐만 아니라 수백 명 교도들의 목숨이 걸려 있음을 생각해라."탁수정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아들의 의지는 단호했다.
"교도들의 의지가 제가 그렇게 하도록 요구합니다."
탁무걸은 대신 딸 탁연을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일찍 아내를 잃고 혼자서 키우던 딸을 아버
지의 품에 안겨주었다.
탁수정은 강보에 싸인 손녀를 안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의 공격이 시작됐다.
이미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집단으로 낙인(烙印) 찍힌 현악교에 대한 공격에는 전 무림인들
이 들고 일어났다. 현악교의 피는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고 싶은 무림인들의 이름 위에 금
칠로 덧씌워졌다.
공격에 앞서 무림맹은 가장 먼저 탁수정을 불러냈다.
탁무걸의 무공을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아버지 탁수정뿐이었다. 무림맹은 아들을 공
격하는 데 앞장서 달라는, 사람으로선 차마 할 수 없는 부탁이었다.
"당신은 약속을 하지 않았소?"
일평생 한 점 어긋남 없이 살아왔던 탁수정에겐 잘못된 약속이었으나 지키지 않을 수 없었
다.
무림맹의 속셈은 두 가지였다.
'아버지마저 공격해야 하는 희대의 살인조직!'
'천하제일인 탁무걸의 무공을 제압하기 위해!'
이것이 무림맹이 노리는 바였다.
올곧게만 살아온 탁수정 자신의 삶이 무림맹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못하게 했다. 그는 아들
의 뒤를 쫓아 살겁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때마다 차마 탁수정에게 절독을 쓸 수
없었던 탁무걸은 계속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마지막으로 현악교는 적산령까지 몰렸다.
막다른 길이었다.
탁무걸은 부친에게 외쳤다.
"더는 물러설 수 없습니다, 아버님. 현악교의 전체 식구들이 저 때문에 힘없이, 이유없이 죽
어가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저를 막으신다면.......""안 된다. 절대! 지
금이라도 현악교를 해체한다고 말하거라. 애비의 부탁이니, 제발......."전체 무림이 보고 있는
가운데 아들과 아버지는 맞섰다. 서글픈 대치(對峙)였다.
아들과 아버지는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이토록 슬픈 부자관계도 있구나.......
아들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아버지도.......
그렇게 몇 시진이 흘렀다.
무림맹에서 갑작스럽게 공격이 시작됐다.
현악교의 문도들은 죽어갔다.
탁무걸로서도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문도들이 아버지 탁수정에게 추혼절명침통으로 무형
열장지독을 날리는 것을. 쓰러지는 탁수정을 보며 탁무걸은 혼절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앞에
서 본 자식의 심정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그러나 현악교는 더 이상 저항할 힘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안배(按配)한 자멸의 길밖에는 남지 않았다.
벽력탄에 의한.......
탁수정은 죽음만은 피할 수 있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의 내공이 무형열장지독의 침
입을 막아낸 것이다.
산에서 손녀를 찾느라 십 장 높이의 공중으로 신형을 띄웠을 때 가슴에 치밀었던 통증은 그
때의 흔적이었다.
그 흔적보다 그의 가슴을 저미는 것이 아들의 죽음에 대한 기억이었다.
원하지 않았지만 앞장서야 했던.......
이제 손녀의 재롱을 보며 잊고 살 만했는데.......
일장괴 탁수정은 흔들리는 시야를 침착하게 가라앉히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제게 묻고 싶으신 것이?"
무진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말을 털어놓았다.
"혹시 현악교주 탁무걸이 홍살문을 찾아오지 않았습니까?"결국 그 얘기를 하고 말았다.
턱수염을 쓰다듬는 탁수정의 손길이 빨라졌다. 무진도사는 그의 손놀림에서, 그가 겪어왔던
갈등과 고통의 지난 세월을 읽을 수 있었다.
무림은 현악교가 일으킨 평지풍파(平地風波)를 가라앉혔다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동안 탁수정이 견뎌야 했던 시간들은 얼마나 누추하고 보잘것 없었던가? 아들을
잃고 난 후, 아무런 즐거움도 희망도 없이 그가 견딘 오랜 고독과 신산의 대가가 고작 이런
것이었던가?탁수정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수염을 쓰다듬다가 의자의 손잡이를 쥔 그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무진도사, 당신도 사람이라면 생각을 해보시오? 그 아이가 살아 있다는 것도 당장 믿기 힘
든 판에, 어떻게 여기를 찾아온단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이오!'이렇게 화라도 내면 그것을 받
아들이련만 탁수정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것은 수양의 깊이를 얘기해 주는 것이다. 사실 지
금 탁수정의 심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감정을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다시 아들의 얘기라니, 십 년 전의 상처를 간신히 묻고 그럭저럭 살아가나 싶었는데.......'썩
어서 암흑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이럴려고 간밤에 그리 악몽을 꾸었고 그리 진저리를 쳤
던가?"제발!"
갑자기 탁수정이 머리를 감싸쥐며 소리를 질렀다.
무진은 어쩔 줄 몰라했다. 아무 말도, 아무 몸짓도 할 수가 없이 그저 죄인처럼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욱!"
탁수정의 상체가 앞으로 숙여졌다.
입에 대었다 뗀 그의 손에 붉은 피가 고여 있었다.
아까 산에서 간신히 가라앉혔던 가슴의 통증이 다시 도진 것이다.
그때 내전으로 통하는 문이 벌컥 열렸다.
손녀 탁연이었다.
"할아버지!"
탁연은 소리를 지르며 할아버지의 무릎으로 달려갔다. 탁수정의 무릎에 무너지듯 앉았다. 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할아버지의 입을 닦았다.
탁연은 몹시 화가 치밀어오른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을 붉히며 무진도사에게 대들
었다.
"당신이 뭔데 할아버지를 이렇게 아프게 하는 거예요?""......."
"난 그런 아버지 둔 적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그만 돌아가 주세요."그녀는 문 밖에서 두 사
람의 얘기를 모두 들었던 것인다.
"얘, 얘야 이, 이 분 잘못이 아니다. 다, 다 내 잘못이야 내...... 잘못......."탁수정은 고통으로
몸이 허물어지면서도 손녀의 무례함을 막았다.
무진은 난처하기 이를데 없었다.
탁수정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지만 마치 자신이 엄청난 죄를 지은 것 같았다.
'어쩌다 이런 몹쓸 일을 맡았담.'
무진은 눈길을 어디 두어야 할지 몰라 고개만 두리번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