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서울대 장회익 명예교수님과 성공회대 양권석 명예교수님의 심포지움 발표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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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세계 안의 인간의 위상과 역할: 과학과 신학의 관점에서
* 최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물론, 세계교회협의회(WCC)도 공격용 자율무기(Killer Robot)에 관심을 두고 있다.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또한 인공지능에 관심을 두고 올여름 한국에서 관련 세미나를 기획하고 있다. 이렇게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인공지능이나 각종 로봇이 인간을 대신하게 되면서 인간의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크다.
이러한 상황에서 창조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과학기술의 도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해보고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크리스챤아카데미, 한신대학교 종교와과학센터가 공동주최하는 ‘과학과 종교’ 연속 심포지엄이 진행되고 있다. 심포지엄은 오는 2024년 11월까지 한국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진행되며(총 7회), 과학기술 발전에 따른 교회와 신학,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논할 예정이다.
이 글은 심포지엄의 첫 번째 강연(2024년 3월 5일)에 나선 물리학자 장회익 교수와 신학자 양권석 교수의 강연을 최병학 목사가 요약정리한 것이다.-편집자
1. 과학의 관점에서(장회익 교수)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 생활에 놀라운 편의와 변화를 가져오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기후변화를 비롯한 전 지구적 생존 여건을 급격히 악화시켜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험해지는 상황을 초래하고 있다. 같은 과학이 이러한 역설을 낳은 것은 인간이 아직도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바른 인식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중세 이래 서구의 학자들은 두 권의 책, 곧 ‘자연에 새겨진 경전’(Book of Nature)과 ‘문자로 기록된 경전’(Book of Scripture)을 읽음으로써 인간의 위상과 역할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각각 과학과 신학의 과제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 한 권의 책, 즉 자연에 새겨진 경전에 담긴 내용에 대해 알아보자.
사실 현대 과학기술은 인간의 자기 이해를 돕는 많은 소재를 제공하고 있으나 이를 제대로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현대과학은 그 어떤 앎보다도 선명하고 신뢰할 만한 내용을 지니고 있지만 과학자들조차도 그 전모를 파악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좁은 전문 영역에 머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현대과학에서는 기존의 관념 틀로는 파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종종 발생하기에 이 관념의 틀을 넓혀나가야 하나, 아직도 전문 과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은 과학이 말해주는 내용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이 새로운 관념의 틀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우주와 인간에 대해 과학이 전해주는 바를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 자체가 바탕으로 삼고 있는 관념의 틀 뿐 아니라, 여러 학문 분야를 근간에서 연결하고 있는 더욱 포괄적인 관념의 틀을 의식적으로 마련하고, 이를 바탕으로 과학이 말해주는 내용들을 심층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이 요청된다. 이때 우리는 우주 안에 놓인 인간의 참모습(심포지엄 주제와 관련해서는 창조세계 안, 인간의 위상과 역할)을 그려볼 수 있고, 이를 통해 ‘나’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앎의 ‘온전한 지도’, 곧 ‘온전한 앎’의 대장정은 [그림]과 같이 잠정적으로 서술할 수 있다. 이 그림에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앎의 주요 구성요소들이 뫼비우스의 띠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자연의 기본원리에서 우주와 생명 그리고 인간의 몸에 이르기까지의 객체적 양상들이 ‘뫼비우스의 띠’의 표면층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인간에 이르러서 객체의 이면에 있던 주체가 드러나면서 주체로서의 활동이 현격해진다. 뫼비우스의 띠가 이 지점에서 뒤집혀 이면이 표층으로 노출되는 상황이다. 이렇게 하여 ‘나’ 그리고 나의 의식적 활동으로서의 ‘삶’이라는 주체적 양상이 새로운 표면층에 자리 잡고 가시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주체적 활동으로 조성되는 모든 결과물이 바로 우리가 ‘문명’이라 통칭하여 부르는 것이다.
한편 이 문명이 이루어내는 중요한 한 요소가 ‘앎’ 곧 사물의 인식 활동이 이루어낸 체계적 지식이며, 이러한 앎 가운데 특히 ‘자연에 대한 사고’ 곧 자연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추구할 때 얻어진 결과가 바로 ‘자연의 기본원리’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뫼비우스의 띠를 한 바퀴 돌면서 최초의 출발점인 ‘자연의 기본원리’로 되돌아오게 된다.
이러한 온전한 앎을 물리학과 생물학, 화학과 철학(형이상학)을 통해 소개한 내용은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철학을 잊은 과학에게, 과학을 잊은 철학에게』(청림출판, 2019)에 자세히 나와 있다. 본 강연은 이 책의 핵심적인 요약이기에 강연의 핵심을 책 소개와 더불어 진행하고자 한다. 이 책에서는 퇴계의 『성학십도』와 12세기 중국의 곽암 선사가 작성한 『심우십도』를 참고로 성리학 이후 새롭게 전개된 앎의 지평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넓혀져 왔는가를 보여준다. 고전역학에서 마음에 대한 탐구까지 인간이 앎의 지평을 넓혀간 과정을 열 가지 결정적인 장면으로 포착하여 서술하였다. 그리고 이 책의 구조, 곧 앎의 구조는 위 [그림]의 뫼비우스의 띠를 자연과학과 종교철학으로 확장하여 10가지 단계로 설명한 것이다.
• 제1장 소를 찾아 나서다(앎의 바탕 구도) 우리는 우주 내의 존재물들을 관찰함으로써 그것에 적용되는 변화의 원리(理)를 찾아낼 수 있고, 이 변화의 원리를 활용하면 그 존재물의 현재 상태를 확인하여 과거 상태와 미래 상태를 산출해낼 수 있다. 이렇게 소(진리, 혹은 자연의 기본원리)를 찾아 나서게 된 것이다.
• 제2장 소의 자취를 보다(고전역학) 자연계에는 기본적인 변화의 법칙으로 네 가지 힘(상호작용)이 있는데, 우리가 경험하는 ‘전자기적 상호작용’과 ‘중력 상호작용’이 있다.(소의 자취만 보고 소를 볼 수 없듯이, 미시적인 거리에서 작용하는 ‘강한 핵력’과 ‘약한 핵력’은 이 단계에서 이해할 수 없다.) 이 단계는 3차원의 세계 인식으로서 뉴턴(I. Newton)의 고전역학 단계이다.
• 제3장 소를 보다(상대성이론) 그러나 아인슈타인(A. Einstein)의 등장으로 마침내 온전한 소를 보게 된다. 그 온전한 소는 상대성이론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볼 수 있다. 특수상대성이론을 통해 관찰한 소의 모습은 시간과 공간이 합쳐서 4차원을 형성한다. 나아가 가우스(C. Gauss) 시대부터 알려진 허수 i(i2=-1)를 통해 실수 축에 대해 수직 방향으로 또 하나의 허수 축을 구축하여 복소수 공간(가우스 평면)을 이루는 4차원 시공간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소를 본 것이다. 그러나 소를 보았지 얻은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미시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 제4장 소를 얻다(양자역학) 미시세계를 인식하여 소를 얻기 위해서는 양자역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사실 양자역학이 밝혀낸 가장 새롭고 중요한 사실은 존재물의 상태가 위치와 운동량의 값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불확정성의 원리), ‘상태함수’로 규정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연계에 있는 존재물의 상태가 어떻게 표현되고 변해가는지를 살펴보는 것을 ‘동역학’(動力學, Dynamics)이라고 한다. 결국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으로 대표되는 동역학을 통해 상태의 변화를 측정하여 소를 얻었으나 길들일 수 없는 상황이 된다.
• 제5장 소를 길들이다(통계역학) 소를 길들이기 위해서는 ‘통계역학’이 필요하다. 통계역학은 볼츠만(L. Boltzmann)의 엔트로피 개념이 확립된 이후 형성된 이론이지만 이미 열역학으로 알려져 있던 것이다. 가령 온도를 우리가 이미 아는 개념인 양(樣)으로 서술해나가는 이론이 열역학(熱力學, Thermodynamics)1이라면, 온도를 더 기본적인 개념 즉 엔트로피를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 이론이 통계역학(統計力學, Statistical Mechanics)2이다. 따라서 소를 길들이는 방법은 자연의 기본원리를 변화의 원리로 파악한 에너지와 엔트로피 개념을 이해할 때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를 ‘자유에너지’라는 말로 좀 더 편리한 형태로 바꾸어 서술할 수 있다. 이것은 물질의 열역학적 성질을 규정하는 함수로, 어떤 화학반응이 계속 진행될 때 유효한 일을 하는 에너지를 뜻하며 모든 피조물의 활동 원천이다. 그 핵심은 발열반응을 진행했을 때 그 계(界)가 갖는 자유에너지는 감소하고 흡열반응을 추진했을 때 계 안의 자유에너지는 증가한다는 것이다. 곧 생명체가 지속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사용할 수 있는 자유에너지가 공급되어야 한다. 소를 길들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 제6장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우주와 물질) 이렇게 자연의 기본원리를 파악하게 되면, 곧 소를 얻고 길들였다면 그 원리로 출현하는 우주를 인식하게 된다. 가령, 빅뱅 이후 지속적으로 낮아지는 우주의 온도는 떠돌던 수소 원자(H)와 약간의 헬륨 원자(He)를 중력으로 뭉치게 하여 오늘 우리가 보는 은하와 별과 같은 대규모 천체를 만들게 된다. 물론 이러한 구조가 형성된 것 또한 전체적으로 자유에너지를 낮추는 방향에 따라 나타난 것이며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질서에 해당한다. 여기서 우리가 별(항성)의 정체와 성격에 주목하면 완전한 앎에 도달할 수 있다. 즉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핵융합 반응이다. 결국 핵융합을 통해 수소(H)에서 철(Fe26)과 아연(Zn30) 규모의 원자핵까지 합성하여 우주에 다양한 물질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 제7장 집에 도착해 소를 잊다(생명이란 무엇인가) 소를 찾고 집에 돌아왔으니 이제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태양-지구 체계 안에 우리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구상에서 접하는 여러 형태의 대상들을 ‘낮은 정교성’(돌 조각, 눈송이)과 ‘높은 정교성’(다람쥐, 민들레)을 갖는 것으로 나누어 생각해보자. 먼저 돌 조각과 눈송이는 어떻게 존재하게 됐을까? 여기에서 ‘국소질서’(local order)가 등장한다. 이것은 작은 공간에서 그 정교성을 준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대상을 말한다. 그러나 다람쥐는 어떤가? 여기에서는 ‘자체촉매적 국소질서’(auto-catalytic local order)가 등장한다. 생물학계에서는 ‘자기복제 기능’이라고 하는데, 자신이 촉매 역할을 해 자신과 닮은 새 국소질서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성격을 지닌 국소질서가 우연히 하나 만들어지고 나면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고등 생명의 탄생 근거이다. 동시에 태양-지구 체계 안에서 태양 빛이 일정한 비율의 자유에너지를 가지고 지구에 도달하면 광합성 생물들은 빛의 일정 비율을 자유에너지로 전환한다. 태양에너지가 내려 쏘이니 생명이 솟아오른 것이다. 목하 생명의 탄생이다. 그리고 이제 소를 잊는다. 자연의 기본원리는 터득되었다!
• 제8장 사람도 소도 모두 잊다(주체와 객체) 뫼비우스 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생명 가운데 의식을 가진 가장 고등생명인 인간은 객체적 양상(몸)과 주체적 양상(마음/정신/영혼)을 함께 가질 수 있는 존재이다. 나아가 인간은 ‘집합적 주체’(너와 나를 아우르는 우리)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집합적 주체인 인간은 자연과 함께 ‘온생명’을 구성한다. 사람도 소도, 우주도 물질도, 주체도 객체도 모두 하나, 아니 그것조차 잊어버린 진정한 앎의 상태가 된 것이다.
• 제9장 본원으로 돌아가다(앎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자연의 기본원리에서 출발해 우주와 생명이 지닌 보편적 존재 양상을 고찰하고, 그 안에 나타난 인간 생명 탄생의 신비를 앎으로써 자연에 새겨진 경전, 곧 앎의 온전한 구조를 알게 되었다. 본원(本原)으로 돌아간 것이다. 물론 인간은 객체적 양상과 주체적 양상을 함께 가진 존재이다. 이 말은 자연에 새겨진 경전만이 아니라 문자로 기록된 경전을 함께 읽을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체적 양상이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면서 의식적 삶을 이루고 집합적 주체를 형성하게 되면 문화 공동체(나아가 종교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문화 공동체의 주된 기능 가운데 하나가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며, 이 인식의 일환으로 ‘자연에 대한 사고’가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종교 공동체에서는 신에 대한 사고가 이루어진다.) ‘뫼비우스의 띠’가 완결된 것이다. 진정한 본원으로 돌아간 것이다.
• 제10장 저잣거리에 들어가 손을 드리우다(온전한 앎) 그렇다면 본원으로 돌아가 만족하는가? 아니다. 다시 저잣거리에 나가 진리를 외쳐야 한다. 그 진리의 음성은 이렇다.
인간은 자연과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이들이 합쳐 비로소 생명이 이루어지는 온생명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인간의 생존은 온생명 안에서 온생명의 정상적인 생리에 맞추어 이루어져야 하지만, 지난 문명의 관성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대다수는 기술력을 동원해 오히려 온생명의 생리를 붕괴시키는 일에 가담하고 있다. 그 결과 온생명 안에는 최근 심각한 문제로 등장한 지구 온난화와 생물의 대규모 멸종 사태와 같은 수많은 병리적 증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인간 자신의 생존마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3
이 말은 창조주가 인간이 된 이유, 낱생명에 온생명의 빛이 제대로 비춰야 할 이유를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자연세계(창조세계)의 위기 앞에서 인간은 온생명의 한 부분으로서 자신의 위상과 역할을 재각성해야 한다. 요한복음 15:1-5를 인용하여 표현하자면 이렇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농부이시다.” 사실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은 ‘온생명’과 그 안에 속한 ‘낱생명’들을 나타내기에 더없이 적절한 표상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을 포도나무(온생명)라고 지칭하신다. 이것은 오직 자신을 ‘온생명’으로 자각한 분만이 말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전체는 이를 거두어주시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를 과학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온생명이고 너희들은 거기에 있는 가지, 곧 낱생명이다. 모두가 온생명으로서의 한 몸이다. 이 전체를 농부이신 하나님이 거두어주신다.”
이러한 ‘온생명의 존재론’은 ‘온생명의 윤리학’으로 이어진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 15:12)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마 19:19) 도대체 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가? 그 대답은 온생명의 관점에서 볼 때 명백하다. “이웃이 곧 내 몸이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이를 깨달아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적어도 마음으로나마 이를 느껴가며 살아가라고 예수께서 타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이 말씀을 포함해 예수의 많은 가르침과 행적을 보면 그분 자신이 온생명을 파악하고 온생명인 ‘나’로 살아가신 분이며 또 거기에 맞추어 살아가도록 우리 모두에게 가르치신 분임이 분명해 보인다. 이것이 창조세계에서 인간의 위상과 역할이다.
2. 신학의 관점에서(양권석 교수)
장회익 교수는 과학적 관점에서 자연의 기본원리를 분석하며 논의를 시작했지만, 이 논의를 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현 상황에 대한 분석이 먼저 필요하다. 사실 오늘날의 위기 상황은 인류세(anthrophocene)를 넘어 자본세(capitalocene)와 대농장세(Plantationcene) 그리고 툴루세(Chthulucene)와 키노세(Kinocene) 등 다양한 이름으로 거명된다.4 이러한 위기 상황은 창조세계 안에서 인간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요청한다.
사실 인간의 경제체제와 지구 행성체제는 끊임없이 갈등과 경쟁, 전쟁과 학살을 벌이고 있다. ‘교황의 통합생태론’에 의하면, 자연환경 파괴와 사회환경 파괴는 같은 악으로부터 나온다. 결국 우리 인간은 인간 아닌 다른 모든 생명이 지적이고 내적인 삶을 경험하고 있고 복잡한 사회적 관계들을 나누고 있음을 망각하고 있다. 사실 단세포 생물부터 포유동물까지, 이들은 여러 부속품이 인과적으로 결합한 기계가 아니다. 장회익 교수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하나의 온생명 안에 있는 낱생명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마음대로 착취해도 좋은 자원이 아니다.
한발 더 나아가 오직 인간만이 행위 주체인 것은 아니다. 모든 사물과 사태가 행위 주체가 된다. 이것은 특별히 성서 말씀에서 증명된다. 가령 “하느님께서 ‘땅은 온갖 동물을 내어라!(낳아라, bring forth) 온갖 집짐승과 길짐승과 들짐승을 내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창 1:24)라는 말씀은 물질의 생성적 힘을 보여준다. 결국 인간 주체는 인간과 비인간 관계의 네트워크에 완전히 들어가 잠겨 있고, 그 관계 네트워크에 내재적인 동시에 횡단적인 실체가 된다.
구세주인 그리스도 예수는 내재적이며 횡단적인 실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골 1:19-20)와 “이리하여 모든 것이 그분에게 굴복당할 때에는 아드님 자신도 당신에게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하느님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하느님께서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게 될 것입니다.”(고전 15:28)5라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목표도 피조세계와 관계적이고 물질적인 얽힘의 일부가 되는 것, 곧 내재적인 실체임을 보여준다.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 인간과 이웃의 관계,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 인간과 지구와의 관계가 불가 분리하게 이미 연결되어 있고 얽혀 있음을 보여주는 성서 본문들은 풍부하다. 결국 인간과 비인간 세계도, 자연과 문화도, 그리고 사회적인 것과 생태적인 것도 서로 떨어진 둘이 아니라 본래부터 하나로 얽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세계 안에서 인간의 위상과 역할은 무엇인가? 사실 하느님의 창조의 동역자로 가장 빛나는 것은 땅이고 물이다. 창세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진짜 하느님의 동역자는 땅과 물이고, 인간은 나중에 수위처럼 세워놓은 존재이다. 결국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세계 안에 책임적으로 참여하며, 자신의 존재와 역할을 확인할 수 있는 피조물인 것이다. 따라서 지구의 모든 피조물과의 공생적 삶의 얽힘에 참여하기 위해서 자신을 다시 조직화하고 변화시켜 갈 수 있는 횡단적 실체, 그런 존재가 인간이다. 그리스도가 그러했던 것처럼, 모든 피조물의 삶 안으로 들어와 참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 모든 피조물이 이미 내 안에 들어와 내 삶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피조물과 다른 이웃들의 아픔이 나에게 직면해 있는 이때, 인간과 피조물의 그 얽힌 관계들을 더욱 깊이 인식하면서 모든 피조물의 삶을 존중하고 보살피는 삶을 향해 나가는 것이 창조세계 안에서 인간의 위상과 역할이다.
주(註)
1 열역학은 에너지, 열, 일, 엔트로피와 과정의 자발성을 다루는 물리학의 한 분야이다.
2 통계역학은 많은 수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거시적인 물리계를 통계적인 방법으로 기술하는 물리학의 한 분야이다.
3 장회익,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철학을 잊은 과학에게, 과학을 잊은 철학에게』(청림출판, 2019), 423.
4 인류를 뜻하는 ‘안드로포스’(anthropos)와 ‘시대’(-cene)가 합해진 ‘인류세’는 ‘홀로세’(Holocene, 약 1만 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지질 시대로, 현세라고 부름) 이후 지구의 엄청난 지질환경적 변화에 인류가 절대적인 책임을 지고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인류세’라는 표현에는 지구를 파괴한 것도 인간이지만 그것을 해결할 주체 역시 인간이라는 인간중심주의가 남아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을 ‘자본의 시대’(자본세)로, 탄소집약적 공장 시스템의 원형으로서 노예 대농장 시스템인 ‘대농장세’로 바꿔 부를 것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특히 도나 해러웨이(D. Haraway)는 대안으로 ‘툴루세’(Chthulucene)를 주장한다. ‘툴루’(chthulu)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피모아 크툴루’라는 거미의 이름에서 가져온 어원으로, 대지와 그것을 둘러싼 자연의 분해 및 생산의 힘과 관련한 시공간성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이를 통해 해러웨이는 공동생성(sympoiesis)을 주장한다. 곧 생명은 다른 존재와 서로를 만들면서 모양새를 갖추게 된다는 것으로 ‘함께 되기’(becoming with), ‘세상 만들기’(worlding)의 과정을 포괄한다.[도나 해러웨이, 김상민 옮김, “인류세, 자본세, 대농장세, 툴루세: 친족 만들기,” 「문화과학」 97호 (2019) 참조.]
그리고 ‘키노세’는 헬라어로 시간적 새로움(νέος)이 아닌, 질적인 새로움을 의미하는 카이노스(καινός)에서 유래했는데, 이 말은 ‘전혀 새로운 변화의 시대’를 뜻한다.
5 헬라어 원어로는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 있는 모든 것’”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세계와 관계하고, 그 피조세계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장회익|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다. 서울대학교와 루이지애나주립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하였다. 『삶과 온생명』,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등의 저서가 있다.
양권석|성공회대학교 명예교수이다. 버밍엄대학교에서 성서해석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공회대에서 성서해석학과 문화신학을 강의하였으며, 총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