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해 행해지는 정치의 연장이다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의 전쟁은 과거의 전쟁과는 많은 점에서 달랐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의 전쟁은 과거처럼 왕위계승권과 같은 한정된 문제를 둘러싸고 행해진 것이 아니라 삶의 원칙이나 철학을 둘러싼 투쟁이었다. 한 마디로 과거의 전쟁은 왕과 같은 지배자들에 의해서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참혹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으로 인해 국민이 실질적인 지배자로 등장한 이후에는 그와 같은 우연적인 전쟁의 발발은 줄어들었다. 대신 국민들 사이의 신념 차이로 벌어지는 대규모적이고 필연적인 충돌이 크게 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쟁의 양상도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과거 전쟁의 승패는 소수의 뛰어난 지휘관이나 군인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말하자면 개인들의 역할보다는 전체 국민이 중요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이야말로 이러한 전쟁의 의미와 변화를 꿰뚫어 본 사람이었다. 그의 천재성은 바로 그 점에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나폴레옹의 군사적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것을 이론화시킨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클라우제비츠(Karl von Clausewitz, 1780--1831)였다. 클라우제비츠는 프로이센 출신으로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황태자와 시종부관를 역임하는 등 패기와 야심에 가득 찬 전도유망한 청년 장교였다. 그는 나폴레옹과의 전투인 아우에르스테트 전투에서 포로가 된 적도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것이 "전쟁론"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이러한 과정에서, 전쟁 그 자체 목적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을 수행하는 하나의 도구임을 이해한 것이다. "전쟁의 결과가 결코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그의 말처럼 전쟁의 배후에는 항상 정치가 작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고 한마디로 규정했다. 다만 폭력이라는 수단을 사용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전쟁론"을 쓴 클라우제비츠를 종종 오해하곤 했다. 말하자면 그가 전쟁광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저서에는 '전쟁이란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적을 일소할 목적을 가지는 폭력행위이다.'라든지, '전쟁의 철학에서 완화의 원리를 도입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라든지, 아니면 '유혈없이 정복한 장군에 관한 것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기로 하자.'라는 표현이 많이 있어 충분히 오해를 살 만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군국주의자가 아니었다. 다만 전쟁의 현실적인 성격에 주목했을 따름이었다. 게다가 이 "전쟁론"은 미완성 작품이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논란도 끊이지 않고 있다. 12살의 나이로 프로이센 사관학교에 입교하여 39년 동안 직업군인으로 복무했던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을 다 완성하지 못한 채 콜레라로 죽었던 것이다. 그의 부인이 이 미완성의 유작을 정리하여 출간했던 것이다. 그의 저작이 처음부터 유명해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죽고 20년이 지난 후에 새로 책을 찍어냈지만 거의 팔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은 후에 프로이센의 참모총장을 역임했던 몰트케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제1차세계대전 때 독일측의 전쟁계획을 담당했던 슐리펜에 의해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쟁에 대한 명언을 하나 더 추가하자면, 오스트리아의 명장 라데츠키의 말을 들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쟁이란 분명히 말해 과학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이다. 그것이 예술인 한,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그 장엄함은 누구에게도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