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정진 시인의 존재론 시 2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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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두 갈래길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두 갈래 길
하나는, 자유로의 한강을 실컷 보는 길
다른 하나는, 고향 같은 금촌(金村)을 돌아오는 길
길은 두 갈래이지만 항상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유장한 자유로 한강은 바다 같은 강
행주산성을 거쳐 오두산통일전망대
새가 되고 싶으면 택하는 길
그리움에 젖고 싶으면 택하는 길
마음속에 빛나는 금빛마을 금촌
경의선 지상철은 문산(汶山)에서 머물지만
독서하고 싶으면 택하는 길
내 독서는 철길처럼 끝이 없네.
참으로 이상하네.
돌아오는 길은 두 갈래인데
항상 집으로 돌아와 멈추고 마네.
언제까지 이 두 갈래 길은 오고갈까.
길에서는
길에서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오고감이 있을 뿐 시작도 끝도 없다.
길에서는 안개처럼 분리되는 것이 없다.
길에서는 땅, 물, 불, 그리고 바람뿐
길에서는 신도 정지할 수 없다.
간간히 영혼이 영원의 냄새를 풍긴다.
길에서는 너와 내가 없다.
길에서는 하늘과 땅도 없다.
길에서는 나아가는 것밖에 없다.
길에서는 신도 그저 돌 하나 놓고 간다.
길에서는 소리와 몸뚱어리만이
마치 최대공약수나 최소공배수처럼 있다.
길에서는 언제나 어머니를 떠올린다.
어머니는 언제나 귀 기울이고
아버지보다 늘 내게 높다.
길에서는 늘 앞으로 나아가지만
언제나 한쪽에선 돌아갈 것을 생각한다.
길에서는 신도 아무 말 없이 돌아간다.
길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하나가 된다.
시간을 잃어버렸을 땐 공간에서 찾고
공간을 잃어버렸을 땐 시간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남자는, 여자는
남자는 “난 알아.”라고 말한다.
여자는 “난 몰라.”라고 말한다.
안다고 말하는 남자는
아는 것이 없다.
모른다고 하는 여자는
모르는 것이 없다.
남자는 전장에서 죽는다.
여자는 제 몸에서 혼절한다.
알고 모름의 비밀
여반장이다.
살고 죽는 비밀
여반장이다.
존재에 대하여
태초에 신이 없는 그곳
이름도 없는 그곳
몸짓만이 설레던 그곳
소리만이 가득 찬 그곳
어디선가, 누군가
부르는 소리, 빛깔, 향기
태초에 신이 등장한 그곳
이제 종말을 기다리는 그곳
존재는 진리가 아니다
존재는 진리가 아니다.
그저 아름다움으로 있을 뿐
말하기 전에 몸짓으로 있는
그것 자체의 세계여
무엇을 향하기도 전에
이미 관심으로 있는
존재여, 꽃이여
마음이여, 몸이여
말하기 전에
이미 아름다움인 그대여!
말하지 않아도 본래 있는 존재
말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것들
그저 선물일 수밖에
눈뜨니 살아있네
꽃의 눈짓
새들의 지저귐
그저 선물일 수밖에
눈뜨니 살아있네
누군가 아침먹자고 하네.
누군가 음악을 들려주네.
그저 선물일 수밖에
눈뜨니 살아있네.
신기한 세계
만화경 같은 세계
그저 선물일 수밖에
아내라는 사람은
천사도 아닌, 악녀도 아닌
가장 많이 길을 함께 걸어간 친구일세.
그저 선물일 수밖에.
있다는 것에 대한 명상
시간도 기억입니다.
언제 시간이 있었습니까?
사람이 무엇을 재려고 만든 것이지요.
언제 내가 있었습니까?
무엇을 말하려고 하다 보니
내가 있게 된 것이지요.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입니까?
흘러가는 것에, 소리 나는 것에
역사는 시간에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역사이니까요.
나는 나에게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나니까요.
나의 밖이라고 생각한 것도 나니까요.
나의 안이라고 생각한 것도 나니까요.
괜히 안과 밖을 구분한 것이지요.
괜히 나와 세상을 구분한 것이지요.
나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열심히 살았다는 말밖에!
(2013년 3월 26일)
진실은
진실은 말하지 않아도 진실이다.
존재는 말할 수 없어도 존재이다.
거짓은 말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는 결코 거짓으로 말할 수 없다.
사람은 말을 사용하지만 말에게 배반당하고 만다.
말은 본래 거짓말의 속성을 완전히 버릴 수 없다.
숨바꼭질
그는 없기에 있었네.
그는 있기에 없었네.
숨어서 달아나고
때론 야옹! 하고 서랍에서 뛰쳐나오고
깊은 해저 골짜기에서
우르릉 쾅쾅! 용솟음쳤네.
때론 햇볕이 또아리를 틀고
어디선가 목동의 피리 소리
아! 어디 있느뇨? 그대여!
내 떨고 있는 영혼을 감싸줄
큰 가슴과 깊은 계곡을 가진 여신이여!
너를 먹고 싶다.
끝없이 열리고 닫히는 문틈 사이로
달아나지 못하게 내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싶다
소리의 용녀(龍女)여!
세상이 힘들고 슬퍼
그대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게 해다오, 소리여! 소리여!
누구도 알아볼 수 없기에
결코 나타나지 않을 예수여!
순환의 영혼이여!
너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누구나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죽기에
누구나 한 사람의 이름을 꽃으로 붙들고 이별하기에
그렇고 그렇지
그렇고 그렇지
(By the way)
그게 그거지
(That’s It)
그것은 무엇인가
(It is what It is)
나는 나대로
(I am as I am)
신은 말했다.
“나는 나야.”
(I am me)
사물들은 말한다.
“나는 존재야.”
(It’s Thing itself)
존재는 말한다.
“나는 나를 잃어버렸어.”
신은 신이 아니고
사물은 사물이 아니다.
사소한 것들에 감사하면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면서
사라지는 것들에 감사하면서
숨어버려야지.
사소함의 절대여!
작은 우주의 절대여!
무대무소(無大無小)여!
무시무공(無時無空)이여!
주체, 대상, 존재
주체, 대상
너희 형제는 하나의 뿌리에서 돋아났다.
절대, 상대
너희 형제는 하나의 부모에서 뻗어났다.
절대여, 하늘에 오를지라도
상대의 땅으로 다시 내려오라.
존재는 뿌리, 혹은 부모
존재는 본래 존재
본래 존재하는 동사를
본래존재라는 명사로 바꾸었거늘.
지상의 양식
나의 이 보잘 것 없는 삶을 위해
수많은 지상의 생명들이 동원되었거늘
하나하나 희생(犧牲) 아닌 것이 없고
하나하나 기꺼이 죽지 않음이 없었다.
이름 없는 풀 한포기
이름 없는 나무 한 그루
수많은 동물들
형형색색(形形色色),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
수많은 식물들
기기묘묘(奇奇妙妙), 산천초목(山川草木)
천지간에 서로 양식이 된 생명들이
얽히고설켜 살았구나, 고맙다.
고희가 되니 고마운 것밖에 없다.
고희가 되니 부끄러운 것밖에 없다.
지상의 양식들아, 수많은 존재들아
내 삶은 본래 너희의 것이거늘.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은 제 자리에 있는 것
아름다운은 제 자리에서 빛나는 것
아름다움은 제 자리에서 선한 것
아름다움은 제 자리에서 진실한 것
진선진미(眞善眞美)
미선미진(美善美眞)
스스로 몸에서 일어나는 광채
강건한 아름다움을 사모하네.
몸에서 길들여진 아름다움
머리에 새겨진 아름다움
우린 너무 오래 동안
나의 아름다움을 너에게 강요했네.
진선진미(眞善眞美)
미선미진(美善美眞)
시와 철학
시는 숨어있는 것을 드러내는 은유
철학은 숨어있는 것을 드러내는 현상
은유는 존재의 실재로 드러남
현상은 존재의 실체로 드러남
시는 어머니를 닮아 딸과 같고
철학은 아버지를 닮아 아들과 같네.
서로 방향과 깊이는 달라도
서로 보완됨으로써 존재라네.
플라톤은 철학과 시에 울타리를 쳤지만
니체는 울타리를 도로 거둬 시철(詩哲)이 되었네.
시와 철학이 함께 있는 철학은 존재론
시와 철학이 장벽을 친 철학은 현상학
백 권의 책, 천 편의 시
백 권의 책을 썼으니
글 쓰는 것이 직업이었다고 할 만하다.
천 편의 시를 노래했으니
노래하는 것이 직업이었다고 할 만하다.
무엇을 그리도 그리워했는지
쓰는 것도 그리워하는 것이고,
그리는 것도 그리워하는 것이고
그리워하는 것도 그리워하는 것이라니.
아마도 그리워하는 것이
이승의 직업인 듯하다.
그리워하는 것은 저승의 유치원이거나
예비학교인 것 같다.
유승앙브와즈 아파트
유승(有勝), 승리한 자가 사는 아파트
겉으로 보기에는 소소하고, 수수하지만
저마다 삶의 훈장을 달고
절망을 양식 삼아 살아온 사람들
유승(有勝), 초탈한 자가 사는 아파트
세상에선 실패했을지라도
마음은 청춘의 훈장을 달고
욕망마저 벗어버린 법 없는 사람들
앙브와즈(Amboise), 아름다운 프랑스 성(城)
다빈치가 설계하고 생을 보냈다는 이름의 성
여행자들이 감탄과 묵상에 잠기는 곳
르와르 강을 끼고 있는 고색창연한 성
앙브와즈(Amboise), 프랑스 르네상스의 꽃
그 이름을 딴 파주의 유승앙브와즈 아파트
소요(逍遙)의 시철(詩哲)이 종생(終生)한 곳
한강을 끼고 있는 소소하고, 수수한 아파트
아름답지 않는 인생은 없다
아름답지 않은 인생은 없다.
삶은 누구에게나 귀하기에
아름답지 않은 인생은 없다.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뿐이기에
흘러가는 것은 흘러감으로 인해 아름답고
머물고자 하는 인간은 그렇기에 또한 아름답다.
아름답지 않은 존재는 없다.
비천한 사물일지라도 존재이기에
아름답지 않은 존재는 없다.
존재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기에
변하는 존재는 변함으로 인해 아름답고
잡고자하는 인간은 그렇기에 또한 아름답다.
성(聖)과 속(俗)
누구는 성스럽고
누구는 속물스러운가.
성(聖)자를 붙이면 성스럽고
속(俗)자를 붙이면 속물스러운가.
새끼치고 사는 것은
동물들의 일상사이거늘
가면(persona)을 쓰고
벗긴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
존재에는 본래 사이(間)가 없는데
괜히 존재에 사이를 붙여
인간(人間)이라고 하네.
그래서 인간은 인간을 바라볼 뿐이네.
무속(巫俗)을 욕하면서 무속을 닮아
유속(儒俗), 불속(佛俗), 기속(基俗)이 되어버린
고등종교의 영혼들이여, 썩을 대로 썩어
속성(速成)으로 속성(俗聖)이 되는 길을 찾고 있는가.
자아와 절대는
자아와 절대는 하나이다.
자아가 있기에 절대가 있다.
생각하는 것은 이미 초월이고,
선험이고, 밖으로 나아가는 욕망이다.
생각하는 것은 이미 주체이고.
부정이고, 변증이고, 영원한 대상을 찾는 것이다.
자아가 있기에 시간과 공간이 있고
시공간이 있기에 순간과 영원이 있다.
순간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영원이 있다.
시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것
그 아래 만물의 본류(main stream)
몸이 있기에 믿음이 있고,
새로움이 있기에 신이 있다.
신은 가장 높은 곳, 가장 바깥에
신은 가장 낮은 곳, 가장 안쪽에 동시에 계신다.
그래서 신은 “나는 나다.”(I am who I am)라고 말한다.
그래서 신은 “나는 존재한다.”(I am)라고 말한다.
비움과 나눔은
비움과 나눔은 같은 것
비우려면 나누어야 한다.
나누면 비워지고
비우면 채워진다.
비워진 하늘은 채워지고
채워진 땅은 비워진다.
우린 생명을 나누고
비우고 채우면서 여기까지 왔다.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함은
추호의 빈틈도 없는 릴레이의 성공이다.
위선과 기만과 허영
위선은 기만이고
허영은 기만의 화려한 꽃이다.
허영은 꽉 차 있는 것 같지만
표피 아래 텅 비어있다.
허영은 위선의 기만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난다.
허영은 망하는 것의 영광이다.
세계는 허영으로 가득 차 있다.
평등이 기만인 것은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며
자유가 존재인 것은
계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악과 진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선이고 악이다.
인간이 참이고 거짓이다.
존재는 아름다울 뿐이다.
신과 인간은 쌍둥이다
신과 인간은 쌍둥이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은 쌍둥이다.
철학은 도시(city)이다.
종교는 공동체(community)다.
인간은 도시이다.
도시는 대뇌이다.
도시는 기계이다.
도시는 추상공동체
기계는 기계인간이다.
기계인간은 기계전쟁이다.
선과 악은 하나이다.
진과 위는 하나이다.
신이 망하면 인간이 망한다.
신은 인간을 위해 발명되었다.
신은 에덴동산(낙원)과 원죄를 만들었고
인간은 도시(기계국가)와 제도를 만들었다.
음악에
자연이 대뇌를 이긴 흔적
신체가 대뇌를 이긴 리듬
말 없는 자연의 상징
상징으로 말을 하는 자연
로고스를 숨긴 파토스
에토스를 이긴 에로스
악보제국의 정령들이 춤추는
태초의 빅뱅, 종말의 블랙홀
유수 같은 빛과 소리의 장엄
비파는 허공의 어디에 있느뇨.
신이 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음악이 세계를 창조하고 있네.
*박정진 시인이 말하는 '존재론 시'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동방문학 통권 제92호 특집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