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十七章 유상장하(幼上長下)
①
석백송은 진실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이미 봉래도에서 누군가 건너왔다는 소문은 구문이 되었고 장강 이쪽저쪽에서
흑마방과 정체 모를 집단간에 격전이 벌어졌다는 소문까지 도는 형국이었다.
자취도 없이 사라진 악불당을 찾는다고 언제까지 소림승들을 끌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칫 이대로 소림승들이 천하를 활보하다가 일이 잘못 풀리기라도 한다면 소
림의 존망이 위태로울지도 몰랐다.
석백송은 마침내 혜명을 찾아 나섰다.
멀리 넘실대는 장강의 물줄기가 석양빛을 받아 붉게 물든 장관이 한눈에 내려
다보이는 유덕산(有德山) 중턱.
삼백여 년 전 소림출신의 선승(禪僧)이 창건했다는 아담한 사찰 운주사(雲舟
寺)가 그림같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 오후 난데없이 들이닥친 대식구의 저녁을 마련하느라 운주사 승려들이
분주한 덕에 법당 안에는 혜명이 홀로 예불을 드리고 있었다.
백팔배를 마친 혜명은 법당 한쪽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석백송을 발견하고
조용히 다가왔다.
"천하가 소란스러울수록 부처님의 미소가 더욱 소중하고 힘이 됩니다."
소림에서 가장 무공이 강하다고 소문난 혜명이지만 그 불심 또한 누구 못지
않게 깊었다.
"그러게나 말일세. 부처님의 상호(相好)를 뵈오니 뭘 감추고 숨긴다는 게 더
욱 부끄러워지는구먼……."
석백송의 자책 어린 말에 혜명은 빙그레 웃음으로 답했다.
"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리 죄스럽게 생각할 것도 없지요."
순간, 혜명이 뭔가를 눈치채고도 침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석백송은
나이 어린 사제의 따뜻한 말에서 한없는 도량을 느꼈다.
"알고 있었던가?"
"글쎄요…… 다른 것은 모르겠고, 사형이 천하의 평안을 위해 남모르는 고생
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 듯 합니다."
"그리 생각해 주니 정말 고맙기 그지없구먼."
"무슨 말씀을, 홍진세상(紅塵世上)에서 천하를 위해 애쓰고 의리를 세우고자
노심초사하는 사형의 노고를 수도정진(修道精進) 한답시고 산중에서 공양미(
供養米)만 축내는 저희들에 비하겠습니까."
무공의 묘리를 깨치느라 밤낮을 잊고 살던 호승심 강한 젊은 무승(武僧)에서
어느새 훌쩍 커버린 사제가 새삼 듬직하게 여겨졌다.
"사실 이번 악불당의 일에는 이면의 진실이 있네."
"이미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서슴지 마시고 말씀 계속하십시오."
한결같이 차분한 혜명의 태도가 석백송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일의 발단은 이렇네……."
석백송은 몇 달 전 금진후가 찾아왔던 일부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번 표행을 둘러싼 사실과 자신의 추측을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
시종일관 말 한마디 끼여들지 않고 석백송의 얘기에 귀기울인 혜명의 표정이
처음과 달리 자못 무거워졌다.
생각보다 복잡하고 중차대한 사건의 전말이 그의 평정심을 흩트린 모양이었다
"해서, 사제는 이쯤에서 제자들을 이끌고 산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는 것이
내 생각일세."
"아미타불……."
나직이 불호를 외운 혜명이 정광이 형형한 눈을 들고 석백송을 바라보았다.
"천하에 혈난의 조짐이 보이는데 불제자 된 몸으로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단
말씀입니까?"
"자칫하다가는 사문에 화(禍)가 돌아가네. 어떤 식으로든 사태가 결말 날 때
까지 은인자중(隱忍自重)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네."
하나 혜명은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천하에 혈난이 닥치기 전에 최선을 다해 막는 것이 옳지,
몸을 빼고 관망만 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불법을 배우고 무공을
익힌 이유가 고작 사문의 안전과 번영을 도모하기 위함이 아닌 줄로 압니다."
혜명의 나직한 음성 속에 꺾이지 않는 의지가 느껴졌다.
"내가 솔직히 털어놓지 않은 탓이네만 사문의 명은 틀림없이 악불당을 치라는
것이었네. 악불당은 실체가 없고 흑마방과 무적세가, 봉래도까지 얽혀 돌아
가는 판국이니 자네가 돌아가지 않으면 사문의 명을 어기는 걸세!"
자기의 욕심으로 사문을 끌어들였다는 자책에 시달려온 석백송은 이제라도 혜
명이 돌아가길 진심으로 바랬다.
사문의 명령 운운하는 석백송의 말에 혜명은 조용히 반문했다.
"사형은 어쩌실 생각입니까?"
며칠 전 장강 건너에서 흑마방과 싸웠다는 무리가 틀림없이 사군명 일행이라
고 확신하는 석백송이었기에 어찌 보면 일은 이미 그의 손을 떠났다고도 할
수 있었다.
청평야의 혈전 이후 다른 소문이 없으니 표사들은 몰살당했을 것이고 표물 역
시 빼앗겼거나 함께 변을 당했다는 소리가 아닌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건 표행의 실패!
하나 석백송은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내게는 아직 백 육십여 명의 수하들이 있네. 안휘성 육안(六安)으로 모이라
는 명을 이미 전달했으니 그들과 함께 표물을 되찾을 생각이네. 만약 표물마
저 변을 당했다면 죽음을 각오하고 놈들에게 책임을 물을 걸세!"
표풍일수 하지철과 번운수 구정이 이끄는 표행 외에는 모두 무사했고 이미 오
규를 통해 집결을 명령한 것이 사실이었다.
담담해서 오히려 비장한 실감으로 전달되는 석백송의 토로에 혜명은 껄껄 웃
었다.
"하하핫! 사형은 그리 좋은 분이 아니십니다."
"……?"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물론이요 무림의 태산북두로 자처해온 소림은 공염불
이나 외우며 천하의 혈난에 나 몰라라 눈을 감으라고 하시면서 사형은 당당히
영웅의 길을 가시겠다니 어찌 공평한 처사입니까?"
"허어……."
석백송은 일순 할말을 잊었으나 그렇다고 혜명의 말에 순순히 동의할 수도 없
었다.
"난 표물에 대한 책임을 맡은 표국의 주인일세. 나를 믿고 표물을 맡긴 손님
에 대해 최소한의 책임을 져야하네. 장사꾼에게는 신용이 생명보다 소중한 법
. 표물을 찾지 못하면 죽음으로라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일세!"
"백 번 옳고 장하신 말씀입니다. 하나 사형에게 상인의 도가 있으면 저에게는
불제자의 도가 있습니다. 말리신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말투는 부드러웠어도 태도는 완강했다.
혜명은 석백송을 똑바로 응시하며 자신의 심중을 밝혔다.
석백송이 모르는 사실을 꺼내는 혜명의 음성이 한결 신중해졌다.
"사형의 말씀대로 사문의 명은 악불당을 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악불당이 흑마
방 무리들의 화신으로 밝혀졌으니 응당 그들을 치는 것이 사문의 명을 따르는
길입니다. 또한, 제가 단순히 의기만 앞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석백송이 뜻밖의 소리에 의문을 표시할 때, 혜명이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를
털어놓았다.
"구대문파의 제자 중에 뜻이 통하는 사람끼리 구룡회(九龍會)라는 모임을 만
들었습니다."
"뭐야! 비밀결사라도 맺었단 말인가?"
석백송은 깜짝 놀라 반문했다.
구대문파 간에 교류가 없는 것은 아니나 무적세가가 천하제일가로 공인된 이
후 구대문파 모두 자파의 비전절예를 연구하며 힘을 기르는데 전념했고 따로
이 특별한 교류를 가질만한 일도 없었다.
그나마, 석백송 자신이 소림에서 수련하던 시절 각파의 후기지수 중에서 돋보
이는 존재였던 무당의 청풍일수 위사무를 따르는 자들간에 사적인 교분이 있
긴 했으나 무슨 모임을 만든 건 아니었다.
한데, 현재 나한전의 전주요 소림의 장로신분인 혜명이 구대문파의 인물들과
모임을 만들었다면 예사로이 넘길 일이 아닌 것이다.
혜명은 석백송의 격동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차분히 설명했다.
"한 십여 년 전부터 명문거파의 자제들 중 내부의 문제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문파를 뛰쳐나가거나, 명망 높은 무림인들이 돌연히 은거하는 일이 적지 않
게 늘었습니다."
분명한 사실이었고 석백송도 그런 인물 중 아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 년 전 본사의 장경각 증축을 축하하는 사절로 온 각파의 장로들과 함께
얘기하는 중에 전자의 경우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 해도 후자의 경우는 하나같
이 흑마방에 수모를 당하고 핍박받았거나 어떤 의미로든 무적세가와 관계된
인물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듣고 보니 그럴 듯 했다.
당장, 그의 벗 중에 도룡객 곽영은 흑마방의 핍박을 못 이겨 은거했음을 석백
송 자신이 잘 알고 있고, 독장나룡 강현괘 또한 본인은 입을 열지 않아도 무
적세가의 인물에게 수모를 당했다는 소문이 있지 않았던가.
석백송은 혜명의 얘기에 점점 빠져들었다.
"한데, 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후자의 인물들과 교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예를 들어 제남 황보가의 황보현포가 무호에 은거한 도룡객
곽영의 곽가무관에 드나드는 것을 본 사람이 있고, 사천당문(四川唐門)에서
가주가 금한 암기를 만들다가 쫓겨난 당고(唐鼓)가 흑마방 분타주에게 당한
후 절치부심하는 회남의 용검문주와 회동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도 있습니다."
회남의 용검문주라면 탁표였다.
순간, 석백송의 뇌리에 금진후를 대신해 금괴를 가져왔던 탁표의 얼굴이 떠올
랐다.
"자네 말과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네 만 이번 표행의 표행료를 가져온 자가 용
검문주 탁표였네. 비록 신분을 밝히지 않았지만 틀임 없이 그자였네."
"흐음…… 그런 일이 있었군요."
처음 듣는 사실임에도 혜명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이미 모종의 흑막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그에게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인
모양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모두 어떤 집단에 소속되지 않았나 하는 의혹의 소지가 충분
하다는 것입니다. 해서 몇몇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었고 진상을 밝
히기로 약조한 것이지요."
혜명의 말에 따르면 구룡회에서는 무적세가의 개입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 분
명했지만 혜명도 석백송도 차마 직접 거론하지는 못했다.
누가 감히 명백한 증거도 없이 백년군림의 천하제일가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
라볼 수 있단 말인가.
설령 무적세가에서 은밀히 세력을 키운 게 사실이라 해도 그 의도가 명백히
불순한데 있으며 그에 따른 결과가 드러나지 않는 이상 무적세가를 의심하거
나 추궁할 수는 없었다.
돌이켜 보면 고만고만한 분란이 끊이지 않았다 해도 지난 백년간 무림에 이렇
다 할 혈풍이 몰아닥치지 않은 것은 무적세가라는 절대의 권위가 창창하게 무
림의 하늘을 덮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래 없는 기세로 흑도를 통일한 흑마방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세력이 과거 흑도를 다스렸던 어느 방파 못지 않음에도 아직 노골적인
야욕을 드러내지 못하고 그나마 천하인의 공분을 피해 절차와 명분을 따르는
흉내를 내는 것도 무적세가가 건재한 까닭이라는데 이론의 여지가 있을수 없
었다.
나름대로 심증을 갖고 있는 구룡회에서 각파의 장문인을 통해 정식으로 문제
를 제기하지 않은 이유도 섣부른 판단으로 의심해서는 안 되는 가문이 무적세
가이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아직은 무적세가의 권위가 흔들리면 무림이 흔들렸다.
석백송은 눈앞의 현실로 화제를 이어갔다.
"하면, 그들을 이번 일에 끌어들일 셈인가?"
"애초에는 단순히 의혹을 파헤치자는 목적이었지만 결국 모두가 무림의 평안
을 위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구룡회의 힘이 비록 크지는 않으나 명색이 각파
의 장로급들이 만든 모임이니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는 될 겁니다."
역사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듯 저력 또한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아
니었다.
무적세가의 위세에 눌려 꼼짝 못한다고 알려졌고, 상당부분 사실이기도 하지
만 구대문파는 무림의 일에 결코 방관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소림 하나라면 몰라도 구룡회가 나선다면 한 번 해 볼 만한 일이었다.
흑마방에서 구대문파를 적으로 돌리고 전면전이라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하
지 않는 이상 상당한 압력이 될게 분명했다.
석백송은 다시 한번 확인했다.
"구룡회가 힘을 합하면 어느 정도 되겠는가?"
"글쎄요…… 문파의 사정과 회원인 사람의 처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략 천명
정도의 제자들을 동원할 수 있을 겁니다. 저만해도 나한전과 달마원의 제자
를 합해 이백여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나왔으니 천명 정도는 무리가 아니겠지
요."
사실 숫자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정식으로 구대문파가 연합한 것이 아니지만 장로 급의 인물들이 모여 힘을 합
했다면 흑마방은 물론이요 무적세가라 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힘과 권위가
있었다.
석백송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쁨에 저절로 힘이 솟았다.
하나 힘이 커질수록 원칙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그 힘이 도리어 화(禍)가 될
가능성 또한 상존 했다.
"명심할 것은 흑마방과 싸움을 벌이려는 게 아니라는 걸세. 우선 표물의 생사
를 확인하고 살아있으면 돌려달라는 요구를 할 것이고, 죽었다면 봉래도와 무
적세가에 대해 책임을 지라고 요구해야 되네. 최악의 경우 봉래도의 무사들이
바다를 건너온다 해도 그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여 중원에 혈풍이 몰아닥치는
것만은 피해야 하네."
흑마방에서 받아들일 까닭이 없으니 결국 싸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해도
명분을 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야만 석백송이 염려하는 최악의 경우가 닥친다 해도 전 중원이 혈난에 휩
싸이는 참극을 막을 수 있었다.
혜명은 석백송의 말을 충분히 이해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시시비비를 먼저 가리지 않으면 공연이 싸움만 커지게
되겠지요. 아마도 무적세가를 위협할 목적이었겠지만 갈천위라는 자가 이번에
는 단단히 악수(惡手)를 둔 듯 합니다."
석백송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아무렴! 표행이야말로 대륙의 구석구석을 누비는 혈맥이라 할 수 있네. 무슨
흑막이 있고 차후에 일이 어떻게 전개되든 표물을 털어놓고 무사하기를 바란
다는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지!"
"하하핫! 사형은 영락없이 표국의 주인입니다 그려."
혜명이 밝게 웃었다.
지극한 정성으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나아가 자기 일을 통해 세상을 보
며 깨달음을 얻는 석백송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담긴 웃음이었다.
깨달음의 길이 오직 하나요, 그 정도(正道)가 염불(念佛)에 있고 좌선(坐禪)
에만 있다고 여긴다면 그 또한 터무니없는 독선 아니겠는가.
장사꾼은 장사에서, 농부는 농사에서, 무사는 칼에서 나름의 깨우침을 얻으면
그만이었다.
한 송이 꽃에 우주의 진리가 담겨있거늘 사람 사는 곳 어디에 진리가 없고 어
느 인생인들 깨달음을 얻지 못하랴.
길은 달라도 결국 함께 갈 수밖에 없는 두 사형제가 천하에 몰아닥칠 혈풍을
막기 위해 의논하는 산사의 저녁놀이 더욱 곱게 물들어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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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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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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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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