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소환제
2500년 전 아테네 시민들은 매년 봄이면 아고라(agora)라고 불리는 광장에 모였다. 민의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정치를 하거나 국가에 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지도자(주로 독재자)를 골라내기 위해서다. 도자기 조각에 대상자의 이름을 적는데 시민 6000명 이상의 지목을 받은 사람은 10년간 국외로 추방됐다. 이른바 ‘도편(陶片) 추방제’로 그리스 민주정치의 토대였다. 그러나 당초 취지와 달리 정적(政敵) 제거의 수단으로 악용되는 바람에 90여 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도편 추방제를 본뜬 오늘날의 주민 소환제는 미국 일본의 일부 지방자치단체와 스위스 일부 주에서 시행되고 있다. 영화 ‘터미네이터’로 유명한 미국의 근육질 영화배우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2003년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변신한 것도 주민소환제 덕이었다. 당시 그레이 데이비스 주지사가 재정 적자에다 에너지 가격 급등까지 겹치면서 무능한 지사로 낙인찍혀 주민소환투표 끝에 물러나는 바람에 슈워제네거가 130여 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당선됐다.
▷우리나라에서도 25일 주민 소환법이 발효돼 7월 1일부터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을 대상으로 한 주민소환제가 시행된다. 소환 요건과 투표 회부에 몇 가지 보완장치를 두었지만 대상자들은 오금이 저릴 수밖에 없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언제 주민의 ‘탄핵’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주민의 견제와 감시가 철저해져 지역행정의 투명성과 책임감이 높아지고, 그에 따라 지방자치가 국리민복에 더 기여한다면 이 법 제정의 취지가 살아나는 셈이다.
▷그러나 주민 소환제는 양날의 칼이다. 지자체장 등이 주민의 눈치를 더욱더 살펴야 하기 때문에 공익(公益) 우선 원칙에 따라 소신껏 일하기가 어려워질 수 있다. 선거 낙선자 쪽에서 법을 악용하거나 시민단체, 이익단체 등이 의도적으로 대상자들을 흔들 소지도 있다. 지역이 정쟁(政爭)의 장(場)으로 변질돼 화합을 해칠 우려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지자체장 등이 재선 삼선을 위해 포퓰리즘(populism)적 행정을 펴는 경향이 문제시되는데 이 제도가 그 같은 행태를 더욱 부채질하지 않을지도 걱정이다.
동아일보 2007-05-26 06:55
주민 소환제, 주민이 관심갖고 활용해야
이제 임기 중이라도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을 퇴출시킬 수 있게 됐다. 주민들이 투표로 위법·부당 행위나 직권남용을 저지른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원을 해임할 수 있는 주민소환제가 본격 실시된다. 어제 관련법이 발효됐지만 임기 1년이 지나야 적용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 주민소환은 7월 1일부터 가능하다. 지방권력을 견제할 새로운 장치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우리 모두가 주민소환제를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동안 선출직인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원은 부패하거나 무능해도 마땅한 제재수단이 없었다. 형사적 책임을 묻거나 선거에서 낙선시키는 방법도 있으나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한마디로 실효를 거두기 어려운 것이다. 특히 외유성 연수 등의 심각한 도덕적 해이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주민들이 앞장서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결국, 주민소환제의 정착은 주민 손에 달려 있는 셈이다. 이런 차원에서 일부 시민단체와 주민들이 비리에 연루되거나 외유성 연수 등으로 물의를 빚은 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을 주민소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주민소환제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주민소환제 실시로 소신있는 지방행정을 펴기가 어려워질 수 있을 것이다. 지방행정 주체들이 주민 눈치만 보다 보면 쓰레기 소각장 등의 혐오시설을 건설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 충분히 예상됐던 문제들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성숙한 정치의식과 양보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주요 정당의 지방정치 개입도 자제돼야 한다.
주민소환제의 문제점을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지나치게 까다로운 소환 청구 요건과 소환 투표 요건을 감안하면 현실적으로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 소환을 관철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세계일보 2007-05-26 10:27
주민 소환제 성패, 주민에 달려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들을 임기 중 투표로 해임할 수 있는 주민소환법이 25일부터 발효됐다. 능력 없고 부패한 인물을 중도에 그만두게 하거나 단체장의 독단적인 의사결정을 견제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지방자치는 직접민주주의를 지향하며, 나아가서는 기존 대의제 정치제도의 실패를 보완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주민소환제는 진정한 지방자치 실현을 위한 핵심적 제도라 하겠다.
지방의회가 구성되고 단체장이 주민직선으로 선출돼 형식상 지방자치제의 골격이 갖추어 졌지만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님비현상이 도처에 남아있고, 단체장이나 지방의회 의원 관련 비리가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중앙정부의 권한이 계속 지방으로 이양되면서 단체장과 지방의원들의 권한은 커지고 있으나 견제장치는 미약하다. 선출직인 이들은 비리가 드러나도 법원에서 확정 판결을 받기 전에는 물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주민소환제는 이 같은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꼽힌다. 그러나 주민소환제가 악용될 경우 자칫 낙선자들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당선자들의 발목을 잡는 수단이 될 수 있고, 서로 이해가 상충하는 지역 집단 간 갈등으로 번질 수도 있어 이에 따른 혼란이 상시화될 우려가 있다.
즉 주민소환제 발동만이 능사는 아니다. 주민소환제는 인기에 영합하는 선심행정을 확산시킬 가능성이 있고 지역이기주의에 맞서 소신행정을 펼치기 어렵게 할 수도 있다. 이 제도가 성공적으로 정착하느냐 부작용만 키울 것이냐는 결국 주민에게 달렸다. 무엇보다 선심 행정과 지역 이기주의에 휩쓸리지 않는 성숙한 주민 의식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강원일보 2007-05-26 00:03
지자체 “주민소환제, 님비 시설 반대 악용 우려”
주민들이 제 손으로 뽑은 단체장 등을 낙마시킬 수 있는 주민소환제가 25일부터 시행됨에 따라 각 자자체에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묘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그동안 지자체 정책을 둘러싸고 단체장과 갈등을 빚어온 시민단체 등은 벌써부터 단체장 소환을 공언하는 반면 지자체측은 제도 부작용을 우려하는 등 다양한 모습이 연출되고 있다.
●“악용되면 행정력 낭비”
서울시와 25개 자치구는 주민소환제 악용을 우려하는 분위기다. 화장장이나 교정시설, 소각장 등 ‘님비시설’을 반대해온 주민들이 이 제도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를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행정력 낭비뿐 아니라 사업 추진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구 관계자는 “단체장이 주민소환에 걸릴 가능성은 적지만 님비시설 반대를 주장하는 주민들에게는 압박의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부 지자체 주민들은 주민소환제가 실시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행동에 나서고 있다.
경기 부천시 원미구 춘의동 그린벨트에 추모공원 건립을 추진하는 시와 대립하고 있는 주민과 시민단체들은 홍건표 부천시장이 첫번째 주민소환 대상이라며 기세를 올리고 있다.‘부천시화장장 반대투쟁위원회’는 25일 “2004년부터 주민들의 반대의견을 무시한 채 추모공원 건립을 강행하고 있는 홍 시장에 대한 주민소환을 본격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경기 하남시 주민들로 구성된 ‘광역화장장 유치반대 범시민대책위원회’도 김황식 하남시장을 ‘소환대상 1호’로 지목하고 주민소환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범대위측은 소환 이유에 대해 “김 시장이 광역화장장 유치를 비롯해 각종 독선·오만 행정을 펼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 시장은 이에 대해 “주민과 싸우는 모습으로 비쳐지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소신을 갖고 일해 왔기 때문에 주민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남 합천에 일해공원이 조성되는 것을 반대하는 대책위도 심의조 군수에 대해 주민소환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지역특성상 심 군수를 공천한 한나라당의 협조가 없이는 선뜻 실행에 옮길 수 없는 데다 지역 여론도 각양각색이어서 고민 중이다. 대책위 관계자는 “주민소환을 공식적으로 검토한 적은 없다.”면서 “다른 지역의 예를 봐가면서 결정하겠다.”고 강조했다. 대구 시민단체들은 과태료 대납 사건으로 검찰조사를 받고 있는 윤진 서구청장과 건강가정지원센터 특혜 의혹을 받고 있는 윤순영 중구청장을 겨냥해 주민소환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시민단체 관계자는 “구청장들의 문제가 취임 1주년이 되는 7월1일까지 해결되지 않으면 주민소환을 추진한다는 것이 내부 분위기”라고 밝혔다.
●실제 적용은 적을 듯
이처럼 분주한 주민소환 움직임과는 달리 실제로 이 제도의 유탄을 맞는 단체장은 많지 않을 전망이다. 소환 운동은 시민단체 등 일부 주민들에 의해 주도되는 양상을 띠고 있어 대다수의 주민 뜻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부천의 경우 17만명이 추모공원에 반대하는 서명을 했지만 ‘추모공원조성 추진위원회’가 실시한 서명에서는 30만명이 찬성을 했다.
해군기지 유치 결정과 관련, 김태환 지사에 대한 주민소환이 거론되고 있는 제주도의 경우도 여론조사 결과 해군기지 찬성이 반대보다 높게 나왔다. 소환투표 청구를 위한 서명인수가 투표권자의 10∼20%로 적지 않는 것과 투표권자의 3분의 1 이상이 투표해야 하는 규정도 주민소환 남용을 방지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각종 지방선거 재·보선 투표율마저 10∼30%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서울신문 2007-05-26 03:42
하남시 주민 소환제는 반칙이다
경기 하남시의 ‘광역화장장 유치반대 대책위원회’는 지난 25일 주민소환법이 發效발효되자마자 화장장 유치를 추진하고 있는 市長시장에 대해 주민소환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대책위가 하남시 유권자의 15%인 1만5000명 서명을 받아 소환투표 공고가 나면 그때부터 시장 직무가 정지된다. 그 후 투표권자 3분의 1 이상이 참여한 투표에서 과반수가 찬성하면 시장은 쫓겨나게 된다.
주민소환제는 무능하고 부패한 지자체 長장과 지방의원을 주민이 직접 파면시키는 제도다. 시장·군수 등 선출직은 임기가 보장돼 마땅한 견제수단이 없었다. 非理비리로 기소돼도 재판을 질질 끌면서 임기를 마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땐 주민들이 투표로라도 잘못 뽑은 시장·군수·지방의원을 몰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 화장장 유치처럼 찬반이 있을 수밖에 없는 정책적 선택을 놓고 소환투표를 하는 것은 주민소환법의 제정 취지에 완전히 어긋난 것이다. 주민소환법을 이런 식으로 악용하면 어느 지방단체장도 버텨낼 재간이 없다. 제주 해군기지의 경우 여론조사에서 찬성 54%, 반대 38%였다. 제주도는 광역 지자체이니 유권자 10%만 서명하면 소환투표가 성사된다. 실제론 찬성이 훨씬 많더라도 지사 職務직무가 정지될 수 있는 것이다. 시장·군수·도지사가 이런 일을 겁내게 되면 지방版판 포퓰리즘이 모든 지자체에 癌암처럼 번지게 되고 결국은 나라 전체의 앞날까지 어둡게 만들고 말 것이다.
하남시는 작년 10월 광역화장장을 유치해 얻는 2000억원의 인센티브로 지역발전을 20년 이상 앞당기겠다며 유치 추진을 발표했다. 그 후 시청 앞에선 매일같이 소복 시위, 촛불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공청회·설명회도 반대 단체 때문에 못 열고 있다. 주민소환제는 합리적 토론조차 못하게 하는 이런 단체들에 또 하나의 칼을 쥐어준 셈이다.
국가나 지역에 꼭 필요한 시설의 유치와 관련해서는 주민소환 투표를 제한하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지역 전체의 이익을 위해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가 쫓겨나야 한다면 어느 시장·군수가 ‘님비(내 집 마당엔 안 된다)’를 극복해 보겠다고 팔을 걷어붙일 것인가.
조선일보 2007-05-27 2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