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꽃이라는 의미를 지닌 피렌체는 르네상스가 꽃 핀 도시다. 가죽옷의 대명사로서 귀에 익은 토스카나 지방의 주도이기도 하다. 도시 전체가 잘 짜여진 르네상스 박물관이다. 백합과 예술의 도시, 피렌체! 그만큼 드러내놓고 싶은 낭만과 숨기고 싶은 사연이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피렌체를 방문하고 문화적 깊이에 압도당한 작가 마크 트웨인은 피렌체를 가리켜 “예리하게 구분 짓는 선들을 희미하고 고풍스럽게 처리해주는 독특한 색감으로 인해 영원히 살아 잇는 꿈의 도시” 라고 격찬했다. 중세와 현대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 피렌체는 나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며 다가왔다. 르네상스 문화의 한복판에서 문화의 만남과 섞임에 대해 살펴보고 싶은 오랜 기다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이 중세 암흑의 질곡 속에서 허덕이고 있을 때 그리스 로마의 고전과 학문을 고스란히 계승하여 유럽에 전해준 것은 이슬람 세계였다. 그들은 신의 권위 앞에서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던 유럽을 대신해서 인류의 찬란한 문명과 기술을 완벽하게 보존해주었다. 그러한 문명의 계승과 연결이 유럽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익히 들어왔다. 이슬람 문화의 영향과 공헌으로 화려한 꽃을 피울수 있었다는 르네상스의 진수를 피렌체에서 느껴보고 싶었던 것이다.
제노아를 출발해 리구니아 해를 따라 피렌체까지 오는 길은 포근하고 다정한 풍경의 연속이었다. 꼬불꼬불한 산허리를 달리면서 모퉁이 모퉁이에서 작은 바닷가 마을을 만날 때마다 탄성을 질렀다. 녹색 숲과 진푸른 빛깔의 바다, 코발트색 하늘을 이고 발그스레한 지붕을 얹은 마을을 지날 때마다 머물고 싶다는 충동을 이기기 어려울 정도였다. 지중해 입구의 피사를 거쳐 피렌체로 오면서 눈에 담았던 정겨운 산과 들의 모습이 피렌체의 독특한 문화와예술성에 반영되었으리라. 나직하면서도 풍성한 여유로움을 지닌 올리브 나무 숲, 싱그러운 포도밭, 하늘을 향해 길게 뻗은 삼나무, 피렌체를 감싸고 있는 자연의 조화로운 아름다움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15세기 피렌체의 예술 작품과 건축에 표현되었을 것이다.
캄비오(1245~1302년)의 두오모, 브루넬레스키(1377~1446년)의 쿠폴라(돔)와 완벽한 짝을 이루는 조토(1266~1337년)의 두오모 종탑, 알베르티(1404~1472년)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의 정면 파샤드 등이 바로 피렌체 풍의 건축을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야말로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가 이룬 예술의 경지였다. 이런 점에서 인류 역사를 빝낸 수많은 예술의 천재들이 피렌체와 함께 등장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단테, 조토, 브루넬레스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베르디, 푸치니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 벅찬 인물들이 피렌체가 낳은 예술가들이다.
이처럼 길다란 감흥을 가슴에 안은 채 도착하게 되는 도시가 피렌체이다. 백합이 유난히 많은 역사 도시답게 아예 도시의 대부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버렸다. 모처럼 차 없이 마음껏 걸어다니는 자유를 만끽한다.
피렌체를 호흡하는 출발은 대성당이라 불리는 두오모이다. 큰 도시마다 두오모가 있어 사실 이탈리아 여행은 두오모에서 두오모로 이동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러나 꽃의 성모 교회라 이름지어진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델 피요레 두오모는 특별한 데가 있다. 신을 만나겠다며 끝없이 하늘을 찌르는 날카로운 고딕 첨탑이 아니라 기하학적으로 표현된 팔각형 쿠폴라가 초기 르네상스의 분위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다. 각면을 짙은 분홍색으로 장식하고, 8면의 모서리를 하얀 띠를 둘렀다. 초록 빛이 도는 대리석 위에서 쿠폴라의 색감은 최고의 조화와 예술성을 발휘한다. 두오모를 마주하고 있는 로마네스크 풍의 세례당 건물도 눈길을 끈다. 고대 로마의 신전 터에 511세기 사이에 건설되었다고 하니, 아마 피렌체에서는 가장 오래된 교회 건물일 듯 싶다. 『신곡』의 작가 단테도 이곳 세례당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특히 로렌초 기베르티(1378~1455년)가 설계했다는 세례당 동쪽 문의 정교함과 화려함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는데, 이 문은 구약의 이야기를 표현했다고 한다. 기베르티가 누구인가. 당대의 최고 거장들인 브루넬레스키와 그 휘하의 도나켈로, 자코프쿠에르시아 등이 참가한 설계 공모에서 당당이 우승한 경력을 가진 건축가가 아닌가! 오죽하면 미켈란젤로가 동쪽 문을 두고 천국의 문이라고 극찬했을까!
나에게 와닿은 두오모의 의미는 화려한 건축이나 브루넬레스키라는 걸출한 건축가에 의한 뛰어난 설계보다는 오랜 세월에 걸쳐 각각의 시대정신을 차곡차곡 반영해 나가는 문화적인 저력과 역사성이었다. 1294년에 두오모의 건축이 시작되어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대 쿠폴라는 1434년, 랜턴(꼭대기 탑)은 1461년에 완성되었다. 부속 건물과 세부적인 장식을 덧붙여나가는 작업은 19세기까지도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고 한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훌륭한 예술 작품과 건축물은 흔히 볼 수 있지만, 당대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긴 문화의 맥락 속에서 자신의 역할과 의무를 녹여버리는 정신이야말로 드물게 만나보는 진정한 위대함일 것이다. 새로운 시작도 중요하지만 오래된 일을 세대를 이어서 계속해 가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나는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다시 한번 깨달았다.
14세기의 이탈리아 사람들은 고전 시대의 예술과 학문과 기술에 대한 동경이 누구보다도 강했다. 북쪽의 야만인들에 의해 폐허가 된 고전 정신의 부활이야말로 이탈리아를 다시 일으키는 길이라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다. 이러한 자신감과 희망이 다른 어느 곳보다 강하게 나타난 곳이 피렌체였다. 게다가 부유한 상업 도시인 피렌체는 이러한 열망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사회적 여력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단테와 조토는 물론 후일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걸출한 대가들의 출생지로서 대변혁의 기운을 주도하는 세력이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었다.
쿠아트로센토(Quattrocento)라 불린 15세기 피렌체의 패기만만한 새로운 예술가 집단을 이끌었던 인물은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였다. 바로 피렌체 대성당을 완성시킨 위대한 예술가다. 그는 건축과 디자인에서 전통의 방식을 과감하게 버리고, 로마의 영광을 떠올리는 시민들의 간절한 염원을 표현하는 전혀 새로운 건축 양식을 창안했다. 원주와 벽의 기둥과 아치를 자기식으로 결합하고, 거대한 돔을 서당의 지붕에 얹었다. 돔을 받쳐주는 기둥들 사이의 공간을 활용하여 하중을 분산시키는 정교한 계산에다가 로마 건축에 대한 정밀한 연구를 통해 고전 건축과 새로운 조류를 조화시키는 건축 장르를 개척했다. 르네상스 건축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브루넬레스키는 특히 미술 영역에 있어서 원근법을 창안하고, 실제로 작품에 시용한 예술가로도 알려져 있다. 단축법을 이해했던 그리스 미술가들이나 공간의 깊이를 능숙하게 표현했던 헬레니즘 미술가들조차도 물체가 뒤로 물러갈수록 수학적인 법칙에 따라 크기가 작아진다는 사실을 작품에 반영하지는 못했다. 가로수가 늘어서 있는 길이 지평선상의 한 점으로 사라지도록 표현하는 브루넬레스키의 착상은 당시의 작가들에게는 하나의 예술적 충격이었을 것이다.
브루넬레스키의 새로운 화풍에서 피렌체의 위대한 조각가 도나텔로와 미술가 마사초(1401~1428년)등이 배출되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에 소장되어 있는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는 바로 원근법 미술 원칙에 의해 그려진 최초의 그림 가운데 하나다고 한다. 마치 병에 홈을 파고 사람들을 안치해놓은 것과 같은 미술의 마력에 피렌체 사람들이 느꼈을 충격이 상상이 간다. 도나텔로는 종래의 고딕 양식의 섬세함과 세련미에 싫증을 느낀 나머지 힘이 넘치는 장중한 인물상을 조각해냈다. 백년 전의 조토처럼 그는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 초청되어 수많은 조각품을 남겨놓았다.
피렌체는 인류가 배출한 가장 탁월한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고향이다. 다 빈치라 불렸던 레오나르도는 1452년 4월 15일, 피렌체에서 서쪽으로 50km쯤 떨어진 자그마한 산악 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다 빈치가 피렌체에서 이룬 불멸의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모나리자」이다. 모나리자는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정말 다양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다. 살아 있는 것 같은 자태의 특유의 미소를 띤 채 나를 응시하는 모습은 볼 때마다 메시지가 달라 보인다. 영혼을 가득 머금고 무언가를 말하려는 모습으로 다가오다가도 때로는 약간 비아냥거리는 듯한 미소가 만져지기도 한다.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는 유혹의 눈길이나 슬픈 사연을 호소하는 듯한 눈빛이 잡히기도 한다. 이상은 모두 다 빈치가 사용한 절묘한 예술적 감춤과 은유의 기법이 만들어낸 결과일 것이다. 인물 선과 윤곽을 희미하게 처리하고 부드러운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무한한 상상의 여지를 남겨 놓았기 때문에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정말 당신은 놀라운 천재입니다.
피렌체가 낳은 두 번째 예술가는 의심의 여지없이 미켈란젤로다. 조각가, 건축가, 화가, 작가, 학자인 미켈란젤로는 다 빈치 보다 23살이나 아래였지만 다 빈치보다 45살이나 더 살아 피렌체 풍 예술 장르를 개척하고, 르네상스 예술 문화의 황금기를 주도했다. 나에게 미켈란젤로는 조각가로서의 인상이 훨씬 강한 편이지만, 바티칸 궁전 안의 시스티나 성당 천정 벽화로 그려진 「최후의 심판」을 보고 느꼈던 전율과 충격은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 이후로 얼마 동안 화가로서의 미켈란젤로에게 빠진 적이 있었다. 16세기의 전기 작가 바사리 (1511~1574년)가 묘사한 것처럼 그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그림에 담아낸 천재였다. 「최후의 심판」에서 예수는 수염도 나지 않은 강인한 근육을 가진 미소년으로 그려졌다. 푸른 눈과 금발을 휘날리며 연약한 구도자의 모습을 한 게르만풍의 예수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리스 신화의 아폴로를 닮은 르네상스형 예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천사들에게 날개를 붙이지도 않았고, 성인들을 모조리 발가벗겼다. 당시로서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 성직자들은 예배당 천정이 아니라 공중 목욕탕이나 이발소에나 걸어야 할 천박한 그림이라고 공격했다. 그러나 구원을 향한 인간들의 숭고한 희원과 최후의 날을 알리는 천사들의 나팔 소리에 맞춰 주검이 부활하는 생생한 장면에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완성된 벽화를 보고 놀라 무릎을 꿇었다는 교황 바오로 3세의 모습이 상상이 갔다.
155년 교황이 바뀌고 바오로 4세가 주변의 압력에 못 이겨 벽화의 누드 부분을 적절하게 수정하라고 요구했을 때 미켈란젤로는 정중하게 거부한다. “그림을 수정하는 것은 아주 쉬운일입니다. 교황께서 이 그림이 담고 있는 세상을 적절하게 먼저 바꿔주시기만 한다면 말입니다”하고. 그럼에도 불고하고 지금은 누드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수많은 덧칠을 하고 옷을 입힌 반쪽 벽화로 남게 되었지만, 66세에 완성한 이「최후의 심판」으로 인해 미켈란젤로는 나에게 있어 조형의 미술의 개념을 결정적으로 바꾸어버린 위대한 화가로 기억 되고 있다.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까지 작품에서 손을 떼지 않았던 진정한 예술가였다. 미켈란젤로가 80살에 조각을 시작해서 끝내 완성하지 못했던 그 유명한 피에타 상이 바로 꽃의 성다이 두오모 부속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처럼 훌륭한 예술가들의 흔적과 그들의 불멸의 작품들을 오늘날 우리가 즐기고 감탄할 수 있는 배경에는 메디치 가문이라는 부유한 예술 애호 집단 이었다. 13세의 미켈란젤로를 발견하고 그에게 조각 공부를 시킨것도, 라파엘로를 후원해서 그의 천재성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한 것도 메디치가문의 사람들이었다. 브루넬레스키나 방탕했던 화가의 필리포 라피 등 르네상스 시대를 빛나게 햇던 화가나 건축가들 가운데 메디치 가문과 인연을 맺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메디치 가문의 영광과 피렌체의 옛 정취를 느끼기 위해 시뇨리아 광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광장 전체가 하나의 박물관으로 전세계의 르네상스 마니아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미켈란젤로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다비드조각상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다. 책에서 보아온 놀라운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고 즐거워한다. 그러나 정작 다비드 상의 진품은 아카데미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뇨리아 광장을 중심으로 해서 베아트리체를 사랑했던 단테의 생가와 르네사스 미술품의 보고인 우피치 박물관이 바로 인근에 있다. 베키오 궁전이 94m의 종탑을 안고 광장을 압도한다. 화려했던 피렌체 정치의 중심지로서 이곳의 지배자인 메디치 가문의 궁전이다.
아니나 다를까. 광장 중앙에 메디치 가문 코시모 1세의 동상이 당시의 권력을 전해주고 있다. 하지만 광장을 메운 즐거운 표정들 사이에서 언뜻 뼈저린 역사의 편린이 읽혀진다. 시뇨리아 광장은 나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한 시대를 잘못 읽은 이단아 사보나롤라(1452~1498년)를 화형시킨 역사적인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베키오 궁전이 바라보이는 광장 한쪽에 작은 청동 팻말이 놓여 있다. 1498년 5월 23일의 화창한 봄날, 사보나롤라가 목 매달려 화형을 당한 바로 그 장소였다. 시끄러운 군중들 틈새를 비집고 서서 잠시 당시를 회상하였다.
신의 권위와 이름 대신 인간의 자유와 창의성이 빛을 발하는 피렌체의 중심부에서 사보나롤라는 놀라운 반항 정신을 발휘했다. 인근 페라리 출신으로 교조적인 도미니크 수도사인 사보나롤라의 입장에서는 르네상스의 새로운 시대적 상황은 신을 모독하는 혐오스러운 사악함,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메디치 가문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시뇨리아 광장에서 불지옥과 외세의 침략이 닥칠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예언을 외치며 피렌체인 들의 회개를 호소했다. 사보나롤라의 웅변과 솔깃한 호소에 귀기울이는 피렌체 시민들의 숫자는 한때 1만 2천명 까지 늘어났다.
그 중에는 눈물로 회개하는 미켈란젤로도, 더 이상 누드를 그리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보티첼리도 있었다. 그의 예언을 적중했다. 1494년 프랑스가 물러가자 회개의 두려움에 휩싸인 피렌체 시민들은 사보나롤라에게 도시를 맡겼다. 교조적인 기독교 신정 정치가 확립되었다. 1년의 반을 금식일로 정하고, 여성들의 화장품과 악기, 르네상스 화가들이 그린 귀중한 미술푸들이 불 속에 던져졌다. 이제 피렌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정신이 살아 있는 이탈리아의 중심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면서 세속에 찌든 로마 교황 알렉산더 6세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 피렌체는 로마로부터 경제 봉쇄라는 보복을 당해야 했다. 단식 정책에 대해 정육점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경제적 어려움이 가시화되자 피렌체인들은 마침내 사보나롤라를 버렸다. 장작불 속을 기어가며 마지막 권위와 신성성을 회복하고자 했던 불운한 이단자는 끝내 화염 속을 거부함으로써 가장 처참한 몰락의 길을 선책하고 말았다. 성난 군중들은 그를 붙잡아 목매달았고 피워놓은 장작불 속에 그를 던졌다.
15세기가 막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그로부터 피렌체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16세기 시작되면서 르네상스의 화려한 자리를 로마에게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피렌체가 길러낸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가 쓸쓸히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이주해 간 것도 이 무렵이었다.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단테의 생가에서
산타마리아 델라 크로체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