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시대를 거창한 악장에 담아낸 위대한 작곡가 정률성(郑律成)
《연안송 延安颂》, 어머니품에 바치는 송가
1937년 여름에 항일전쟁의 포성이 울렸다. 온 나라 여러 민족의 청년들은 일제를 몰아내고 나라를 구원할 진리를 탐구하기 위하여 항일의 중심인 연안에 밀려들었으며 여기서 항일애국의 사명을 받아 안고 또다시 항일전선으로 달려 나갔다.
이해 10월 열아홉이 된 정률성은 그때 항일구국운동의 지도자들이었던 리공박, 두군혜의 고무와 지지하에 서안 팔로군행정처 주임 림백거동지에게 보내는 지하공산당원 선협부(조선인, 후에 국민당에 의해 암살당했음)의 소개편지를 지니고 남경을 떠나 연안으로 향하였다. 수십일 후, 바이올린을 어깨에 메고 세계명곡집을 가슴에 품은 그는 끝내 왜적의 첩첩한 봉쇄망을 뚫고 수많은 위험한 고비를 넘으며 꿈에도 그리던 혁명의 성지 연안에 도착하였다.
정률성은 어려서부터 음악으로 성공할 결심을 하여 많은 민요와 세계명곡을 익혔고 배의 힘을 키우기 위해 복부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호흡훈련을 하였다. 그는 모든 삶에서 음악을 떼어내지 않아 캄캄한 방안에서도 콧노래로 작곡을 했고 잠자리에서도 악곡을 구상했을 정도였다. 연안의 땅굴집에 살면서 조밥을 먹는 생활은 고통스러웠지만, 어디에서나 항일애국의 기상이 나래치고 명랑한 노래소리가 울려퍼지는 혁명의 성지는 말 그대로 민족애의 정열과 청춘의 기백으로 정률성의 심장을 틀어잡았다. 그는 섬북공학원 제 1기 7대에서 공부하면서 끓어 넘치는 열정으로 가창활동에 참가하였으며 수천명 대중들의 앞에 나서서 대합창을 지휘하고 하였다.
그 이듬해 5월 연안 로신예술학원이 창립됨에 따라 정률성은 섬북공학원으로부터 로신예술학원에 들어가 근 넉달동안 공부하였다. 어느 날 저녁 무렵 군중집회가 끝난 뒤 정률성은 몇 명 학우들과 함께 북문 밖에 있는 산기슭에 올라가서 연안성의 전경을 굽어보았다. 연안의 장엄한 옛성, 석양에 비친 산마루의 보탑, 맑은 연하수, 그리고 동녘에 떠오르는 밝은 달은 예술가의 가슴을 치는 장면이었다. 대열을 지어 보무당당히 행진하는 전사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노래소리, 웃음소리, 보탑산 봉우리와 연하강물결에 비낀 저녁노을, 이처럼 장엄하고 황홀한 화폭 앞에서 정률성은 가슴속에 넘치는 격정을 누를 길 없어 ‘아, 연안!’하고 환성을 올리었다.
연안에 들어온 뒤 몇 달 동안 이 영광의 도시에 드리는 서정적이며 전투적인 송가의 선율 속에 밤낮으로 갈등을 느끼고 있던 그는 옆에 서있는 문학학부의 여학생 막야에게 “나에게 가사를 써주오!”라고 부탁하였다. 그의 정서는 즉시 막야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비록 민족은 달라도 하나의 신념과 이상을 품고 새로운 기상이 나래치는 연안의 품에 안긴 같은 열혈청년으로서 그들의 생각과 지향은 너무나도 일치되었다. 때문에 막야가 쓴 《연안송》의 가사를 받아 쥐었을 때 정률성은 용솟음쳐 오르는 샘물과도 같이 심장의 뜨거운 격정을 쏟아부어 단숨에 작곡을 끝낼 수 있었다.
중국혁명의 역사와 더불어 빛나는 혁명송가 《연안송》은 바로 이와 같이 우리 조선족의 참된 아들 정률성에 의해 작곡된 것이다.
아, 연안!
장엄하고 웅위한 도시
철벽의 성새(城塞), 승리의 요람
그대 이름 세월과 함께
역사에 길이 빛나리
https://www.youtube.com/watch?v=sVn_FWTgsdE
1938年夏日的一个傍晚,当时还是鲁迅艺术学院音乐系学生的郑律成和同学们刚刚参加完一个在延安举行的群众大会,在回校的路上,他看到散会的群众依然兴致勃勃,精神振奋,谈论着国家大事,憧憬着美好的未来;中国人民抗日军事政治大学的学生们英姿勃勃、步伐整齐,抗战的歌声此起彼伏。革命圣地欣欣向荣的动人景象,激发了郑律成的创作激情和灵感,他鼓动身旁的文学系同学莫耶给他写首歌词,同样心潮澎湃的莫耶当即拿出纸笔,一挥而就写下了一首名为《歌颂延安》的歌词 。拿到歌词的郑律成将自己关在房间里,两天后,他完成了《歌颂延安》的谱曲 。随后,由郑律成在延安礼堂表演了该曲 ,表演过后,中国共产党文化宣传团找到了莫耶与郑律成,希望他们将《歌颂延安》改名为《延安颂》。
1939년 봄 어느날 저녁 모택동주석을 비롯한 중앙지도자들이 참석한 련환모임에 《연안송》이 처음으로 무대에서 불려졌다. 끓어 넘치는 정치적 격정을 담은 정률성의 격양된 노래소리는 모주석의 박수와 관중들의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공연이 있은 다음날 중공중앙선전부에서 《연안송》악보를 가져갔고 이 노래는 재빨리 전선과 후방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는데 심지어는 국민당통치구와 동남아의 화교에게까지도 퍼졌다.
송가로서의 정서적 폭과 숭엄한 감정을 잘 살린 노래 《연안송》은 실로 중국인민의 애국투쟁을 승리의 한길로 인도하는 당중앙의 소재지 연안에 대한 열렬한 찬가이며 침략자를 몰아내고 자유로운 땅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그날을 그리는 희망찬 포부와 혁명적 낭만을 그대로 진실하게 담은 불멸의 송가이다. 이 노래의 창작과 유행 과정에 대하여 정률성은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항일전쟁이 진행되던 8년동안에 이 노래는 정식으로 출판된 적이 없지만 나래가 돋친 것처럼 연안으로부터 전선에로 해방지역으로부터 국민당 통치지역에로 심지어는 멀리 동남아세아 지역에까지 날아갔습니다.
실로 이것은 상상밖의 일입니다. 이 노래를 지을 수 있게 된 것은 인민들을 항일투쟁에로 부른 당의 호소가 온 나라 인민의 항일열의를 불어일으키고 우리 음악예술인들에게 넓은 무대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며 이 노래가 이렇듯 널리 유행되고 커다란 생활력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온 나라 인민들이 혁명의 성지이며 항일의 중심인 연안을 무한히 동정하며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로 불멸의 송가《연안송》은 항전시기 중국의 수천수만의 열혈청년들에게 일제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영웅적인 투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때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도 우리들은 이 노래를 부르기만 하면 연안시대의 혁명전통을 생각하게 되며 원로항일애국자들을 그리게 된다. 극악무도한 “4인무리”들이 살판치던 살벌한 나날에도 행동의 자유와 말할 권리마저 빼앗긴 우리 당의 오랜 동지들이 《연안송》을 입속으로 부르면서 서로 고무지지하고 진리를 위하여 용감하게 싸우지 않았던가!
출처: 한국문학예술
게시판 - 한국소통문화연합(한소문) - https://m.cafe.daum.net/hansomun?nil=cafes
한국놈이 일본놈보다 더 잔인했다.
작성자김명희|작성시간21.08.14|조회수58 https://m.pressian.com/m/pages/articles/2737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