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나는 마음(외 2편)
김산
제 몸이 되지 못한 몇 알의 씨앗들이 구멍 난 정수리 속에서 꿈틀거린다 자꾸만 간지러워, 손톱으로 긁어 보지만 뿌리에 박힌 낯선 얼굴이 고개를 든다 슬픔을 머리에 이고 가만히 웃는 너, 떡잎이 떨어질 때까지 푸드득 춤을 춘다 가는 비를 맞으며 자유공원에서 월미공원까지 사부작 걸어가면 어느새 해가 쨍쨍하다 미워했던 마음 위로 불어오는 따뜻한 공기 가냘픈 이파리들이 머리칼처럼 휘날린다 땅과 물, 불과 바람이 가득 차오르면 겨우내 굳었던 마음들이 새순으로 돋는다
활력
군대 시절, 땅벌에 수십 방을 쏘이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다 오줌과 똥과 분비물을 질질 흘리며 죽었습니다. 새벽 4차선 도로를 비틀비틀 걷다가 시속 80킬로 택시에 치여 분쇄골절과 뇌진탕으로 죽었습니다. 쇠살무사에 새끼손가락이 물려 썩어 들어가는 팔뚝을 부여잡고 서서히 새까맣게 죽었습니다. 썬플라워모텔 506호, 술에 취해 쓰러진 새벽, 4층 화재로 가스를 잔뜩 마시고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죽었습니다.
죽음 위에 죽음이 덧칠돼 팔도 없고 다리도 없고 머리통도 없는 그것이 내 옆을 스칩니다. 아무런 냄새도 없이 무늬만 살아남아 떠돌다가 어떤 생각에 머무르면 잠시 고개를 갸웃합니다. 그것은 살얼음 낀 강을 무시로 건너 맨몸으로 빙벽을 오르고 마침내 절벽 위에서 죽어 있는 것들에게 안녕을 하며 제 몸을 내던집니다.
죽다 살아난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죽다 보니 죽은 채로 사는 것에 이력이 난 생활이 활력이 되어 내 몸속에서 기생합니다. 어디를 가도, 누구를 만나도, 무엇을 해도, 두려움을 모르는 한 마리의 내가 네 발로 나를 끌고 다닙니다. 나는 내가 무서워 오랫동안 나를 가두고 징벌했습니다.
그 길 위에서 만난 꽃들과 흙들과 별들은 아무리 웃고 떠들어도 이미 죽은 것이어서 오래된 슬픔입니다. 오래전 눈물을 다 흘려보내 더 이상 흐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어제도 오늘도 당신만 보면 흘러넘칩니다. 추운 겨울의 아스팔트 위에서 위태롭게 자라나는 민들레 한 송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흰 눈송이가 가느다란 이파리 위에서 떨고 있었습니다.
참깨
기다란 바지랑대로 후려치고 뭉툭한 빗자루로 쓸어 담아 방앗간에서 몇 병의 참기름과 바꿔 왔던 때가 있었다
채마밭에 자갈을 들춰 보면 손톱만한 공벌레들이 꿈틀거렸고 가만히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커다란 참깨들이 기어다녔다
술만 마시면 TV브라운관을 맨주먹으로 박살내던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힘없고 슬픈 참깨였음을 글도 떼기 전에 나는 알았다
할아버지가 속주머니에서 꺼내 주던 말라비틀어진 참깨강정 하나를 오래오래 씹으면 단물로 환해져서 슬픔도 잠깐은 물러서곤 했다
족발 털을 밀어 가계를 꾸린 할머니가 형의 수학여행 때 주려고 참기름병 밑에 숨겨 놓은 거금 일만 원을 쌔벼 강경극장까지 달렸던 적도 있다
칭찬할 사람도 없는 우등상장을 소룡리 저수지에 꽃잎처럼 흩뿌리면 하나둘 모여든 사람의 얼굴을 한 참깨들이 뻐끔거리곤 했다
하나의 참깨에는 한 알의 시간들이 가득 차서 늙은 어머니의 검버섯도 저리 많은 설움들로 몽글몽글 피어나는가
아직도 내 호주머니에는 참깨가 서 말이고 하루에 한 알씩 씹을 때마다 보이지 않던 것들과 들리지 않던 것들이 비로소 맑고 밝게 들어차는 것이다
―시집 『활력』 2023. 7 ------------------- 김산 / 1976년 충남 논산 출생. 2007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키키』 『치명』 『활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