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연세대 의대 여인석 교수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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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 병원과 한국 의학의 발전
한국 의학사의 태두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醫史學) 교수를 역임한 김두종 박사는 자신의 대표적 저서인 『한국의학사』(1981)에서 세브란스 병원의 역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세브란스 병원은… 우리 나라의 서양의학의 발상지로서 서양문화를 직접으로 가져오게 한 영예의 전통을 자랑할 수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에 전해 온 근세의학의 역사 중 가장 광채 있는 페이지를 차지한 것도 세브란스 병원이거니와, 우리 의학의 발전적 과정에서 민족적 고난과 호흡을 같이 하게 된 것도 세브란스 병원이다.(486쪽)
김두종 박사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세브란스 병원이 우리나라 서양의학의 발상지라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세브란스 병원이 우리나라의 의학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전자는 우리나라의 서양의학이 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인 제중원에서 시작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지칭하므로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 즉 우리나라 의학 발전에 어떤 기여를 했는가에 대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이 부분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보편주의적 의료 관념의 전파
제중원의 의의는 단순히 새로운 의학을 수용하여 시술한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의료에 대한 개념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는 신분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의료기관의 종류가 달랐고 그에 따라 제공받을 수 있는 의료도 달랐다. 예를 들어 왕족이나 고위 관료는 궁궐 내 내의원에 소속된 의관의 진료를 받을 수 있었지만, 일반 평민에 대한 의료는 구료 기관인 혜민서가 담당했다. 그러나 제중원에서 이러한 구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중원은 ‘널리 백성을 구제하는 집’이라는 의미처럼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의료기관이었다. 제중원 의사들은 왕과 왕족을 치료하는 동시에 평민도 치료했다.
특히 제중원에는 여성을 위한 별도의 여성 병동이 있었다. 전통사회에서 열악한 위치에 있던 여성은 남성에 비해 의료 접근성이 낮았다. 더구나 여성은 출산이라는 일상적이지만 위험한 상황을 경험하면서 출산의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제중원에서 진료를 시작한 선교 의사들도 이러한 상황에 주목하고 여성을 위한 진료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불평등한 지위 문제 이외에도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적 관념의 영향으로 여성 환자들은 남자 의사에게 진료받기를 꺼려 진료만 받으면 충분히 치료될 수 있는 질병으로도 목숨을 잃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선교본부에서는 현지의 이러한 상황에 부응하여 여의사를 제중원에 파견했고, 남녀관계에 대한 기존의 사회적 관념에 상당한 변화가 올 때까지 꾸준히 여성의 건강을 돌보았다.
이러한 보편주의적 의료 관념은 기독교적 보편주의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의 보편주의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드러나듯이 민족, 성별, 신분 등의 차이를 뛰어넘어 신 앞에서 인간의 평등함과 존귀함을 설파한다. 제중원-세브란스 병원을 통해 기독교의 보편주의 가치는 의료라는 구체적 활동으로 실천되었고, 이는 의료에 대한 한국 사회의 개념과 인식을 바꾸는 데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서양의학의 토착화
제중원은 개원 이후 진료와 함께 의학교육도 시작했다. 제중원에서 시작된 의학교육은 세브란스를 통해 한국인 의사 양성이라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지금까지도 지속되어 한국 사회에 필요한 우수한 의료 인력을 배출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대목은 의학교육이 시행된 초기 단계에서부터 의학의 각 영역을 아우르는 의학 교과서를 국문으로 편찬한 점이다. 에비슨의 주도로 1905년에서 1910년까지 한글 전용을 원칙으로 하는 의학 교과서들이 제중원에서 출판되었다. 비록 5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의학의 중요한 분과 교과서들이 다수 출판되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에비슨은 의학의 전 영역에 걸쳐 국문 의학 교과서 발간을 목표로 했다. 또한 에비슨이 계획하고 또 실제로 출판한 책에는 의학 교과서만이 아니라 물리학, 화학 등 자연과학에 관한 책들도 있었다. 이는 오늘날 예과 과정에서 배우는 자연과학 분야의 교과서에 해당한다.
당시 일본어나 중국어로 번역 혹은 저술된 의학 교과서가 있었음에도, 편찬하기 쉬운 국한문 혼용을 택하지 않고 한글 전용으로 의학 교과서를 만든 의의는 무엇일까? 물론 전문적 용어들은 앞서 번역된 한자 번역어를 사용하였으나 한자는 괄호 안에 넣어 한글 전용의 원칙을 지켰고, 내용을 서술할 때는 한자어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쓰는 표현들을 사용했다. 물론 에비슨이 한글 전용 원칙에 입각해 의학 교과서를 편찬한 것은 당시에 이루어지던 성서 번역이나 선교부의 간행물을 한글로 발간하던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성서 번역이나 다른 기독교 관련 간행물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다시 말해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 한글 전용체로 발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에비슨이 편찬한 의학 교과서는 대중성을 염두에 둔 책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전문서적이다. 그럼에도 한글 전용으로 서술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서양의학이라는 낯설고도 생소한 학문을 한국어로 축적되어야 할 문화적 자산의 일부로 편입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지극히 크다.
국학 분야를 제외하고 현대 한국 사회에서 연구되는 소위 근대 학문들은 빨리는 개항 이후, 늦게는 해방 이후에 서양에서 혹은 일본을 거쳐 수입되었다. 이러한 학문들이 외래 학문이 아니라 이 땅의 학문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토착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학문의 토착화가 의미하는 층위는 여러 차원에 걸쳐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의 차원일 것이다. 다시 말해 그 학문의 개념과 용어가 정확한 자국어로 번역되어 자기네들 말로 이루어진 문화적 세계의 일부를 이룰 때 비로소 그 학문은 토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언어는 인간이라는 종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 물론 다른 동물도 언어와 유사한 방식으로 소통하는 경우가 있지만 문자의 발명은 인간에게만 고유하다. 문자를 통해 지식의 축적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 문명의 발전이 가능해졌다. 문화의 우열을 논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지만, 문명의 우열은 비교적 객관적 기준을 통해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기준의 하나가 해당 문명권의 언어로 축적된 지식의 양과 질이다. 오늘날 영어문명권이 세계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이유는 영어로 축적된, 그리고 생산되고 있는 지식과 정보의 양과 질에 있다. 한글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며, 문자 체계로서의 우수성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글로 기록된 고급 정보와 지식 그리고 아름다운 문학작품이 많을 때 그 우수성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2000년 이후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일본 사람은 17명에 달한다.(2000년 이전은 5명) 매년 1명꼴이다. 흔히 일본도 우리와 유사하게 입시 위주의 주입식 교육을 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어떤 일본 과학 기자의 설명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일본어로 축적된 고급 과학지식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독창적인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지식을 충분히, 정확하게 습득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과정을 모국어로 밟는 일본인과 외국어로 된, 소위 ‘원서’로 느리게, 때로는 부정확하게 이해하는 한국인 사이에 차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 결과 ‘22대 0’이라는 객관적 수치가 나타났다. 불편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모국어로 과학지식을 쌓아가는 일은 이처럼 중요하다. 100여 년 전, 서양의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지식을 한국어로 된 지식체계 안에 쌓아가는 일이 세브란스 병원에서 이루어졌다. 아쉽게도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국문 의학 교과서를 편찬하려는 노력과 그로 인한 성과는 단지 의학 영역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서양 학문 수용사 전체에서 그 의의를 더욱 적극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적 의료문제의 해결과 실용적 의학 전통의 확립
세브란스 병원은 한국 사회에서 제기되는 의료문제에 대해 학문적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실천하였다. 그 기원은 일찍이 1914년 세브란스 병원에 설립된 연구부(Research Department)의 활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구부는 밀즈(Ralph Garfield Mills, 1881-1944), 반버스커크(James Dale Van Burskirk, 1881-1967), 러들로(Alfred Irving Ludlow, 1875-1961)가 주도하여 설립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밀즈의 역할이 컸다.
밀즈는 선교사로서 이러한 연구활동을 시작하며 선교사 사회의 반응에 많은 신경을 쓴 듯하다. 이러한 연구활동이 선교와는 무관한 일, 단순히 학문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학자적 취미 활동으로 보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연구활동이 한가한 시간 보내기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당면한 보건상의 시급한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선교활동에도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을 일반 선교사들에게 인식시키고자 했다.
사실 의료를 선교에서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는 선교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된 문제이다. 즉 의료를 선교의 한 방편으로만 보는 일반 선교사들의 입장과 의료활동 자체의 독자성과 중요성을 인정받으려는 의료선교사들 사이에 지속적인 긴장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때로 현안 문제를 두고 반대 의견으로 대립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세브란스 병원 건립을 둘러싼 서울 측 선교사들과 평양 측 선교사들의 대립이다. 미국의 실업가 세브란스 씨가 서울에 병원 건립을 위해 기부한 돈 1만 달러의 용도를 두고 일어난 이 대립은 병원을 짓는 데 그토록 많은 돈을 쓸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일반 선교사들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만 달러를 절반으로 나누어 절반은 병원 건립에 쓰고 나머지 절반은 일반 선교를 위해 쓰자는 평양 측의 주장은 기증자인 세브란스 씨가 자신은 병원 건립을 위해 돈을 기부했으며, 따라서 병원 건립에 오천 달러가 든다면 오천 달러만 기부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밝힘으로써 정리되었다. 이 사건은 의료를 선교의 도구로만 보는 일반 선교사들의 시각을 잘 보여준 사례였다.
실제 선교활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병원의 건립을 두고도 직접적인 선교와 거리가 있다는 이유로 이러한 갈등이 존재할 정도이니 의학 연구활동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밀즈가 연구부를 만들며 이 점을 우려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밀즈는 이와 관련된 한 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주고 있다. 밀즈는 미국에 있는 동안 어떤 의사에게 한국에 돌아가 한국의 실정에 필요한 의학 연구기관을 만들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글쎄요, 그것은 학문적인 관점에서는 좋지만 어떤 선교부가, 특히 우리나라[미국]의 선교부가 그러한 것[연구활동]을 선교사업으로 간주할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이 말은 의학 연구활동에 대한 일반 선교사들의 회의적 시각을 그대로 보여준다. 밀즈도 자신이 선교지에서 연구활동을 하겠다는 말을 했을 때 선교부나 일반 선교사들의 반응이 어떠할지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연구활동이 순수한 과학적 문제를 탐구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선교지에서 부딪히게 되는 긴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했고 연구의 방향도 그렇게 설정했다.
연구부의 창설과 함께 밀즈는 연구부의 목표를 분명하게 설정하였다. 그는 일반적인 목적과 구체적인 목표를 별도로 설정하였는데, 크게 세 방향의 연구로 요약된다. 한국의 풍토병 연구, 한국인의 식이 혹은 생리적 기준에 대한 연구, 전통의학 연구가 그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현실에 밀착된 연구를 지향하는 세브란스의 실용적 학풍은 학생들에게도 전달되어 졸업생들의 활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우리나라 농촌 의학의 개척자 이영춘(李永春, 1903-80)의 활동이다.
1929년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이영춘은 졸업 후 모교 병리학 교실에 남아 의학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스승 윤일선의 지도로 1935년 교토제국대학에서 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식민지 시기 한국인 교수의 지도로 배출된 최초의 박사였다. 당시 신문의 표현에 따르면 “철두철미 우리 힘으로 길러낸” 인재였다.(「동아일보」, 1935년 6월 19일) 그런데 학계에서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의학자는 돌연 대학을 떠나 전북 옥구군 개정면(오늘날 군산시 개정동)의 한 농장으로 들어가 농민들의 건강을 돌보는 의사가 되었다. 그것은 당시 우리나라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의 열악한 삶과 그로부터 초래되는 여러 건강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결심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이후 이영춘은 농민의 건강과 삶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실천적 활동에 일생을 바쳤다. 그는 이러한 실천적 과업을 튼튼한 학문적 기반, 즉 세브란스에서 배운 의학적 토대 위에서 이루고자 했다. 이영춘은 당시 누구보다도 촉망받는 젊은 실험실 연구자였지만, 실험실에서 나와 농촌이라는 현실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세브란스의 실험실에서 배운 엄밀한 연구방법론을 농촌의 열악한 환경과 농민의 건강을 개선하는 실천적 목표를 이루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1948년 이영춘은 농촌위생연구소를 설립하여 농촌 위생에 대한 그의 구상을 실현하였다. 농촌위생연구소는 그 이름처럼 단순히 학술적 연구만을 수행하는 기관이 아니라 연구와 실천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었다. 그는 연구소를 중심으로 병원과 보건소 그리고 교육기관까지 아우르는 총체적인 농촌의료시스템을 실현했다. 그는 당시 우리나라 농촌에 만연하던 기생충 질환, 결핵, 성병을 농촌 사회의 3대 악으로 규정하고 이를 퇴치하기 위한 실천적·학술적 활동을 병행했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모교인 세브란스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와 함께 농촌위생 개선활동을 한 윤덕진, 소진탁, 윤석우 등은 이후 각각 우리나라 소아과학, 기생충학, 보건학에서 대표적인 학자로 활동했다. 이후에도 세브란스에서는 꾸준히 의료 인력을 파견하여 농촌위생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과제와 도전
지금까지 세브란스 병원이 한국의 의학발전에 기여한 내용을 평소 필자가 중요하게 생각한 몇 가지를 중심으로 기술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일 것이다.
사회적 자원이 부족하던 시절 세브란스와 같은 기독교 병원은 해외 선교단체의 지원으로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는 의료를 펼치면서도 학문적인 우위도 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 국가나 대기업의 충분한 지원을 받는 대형 병원들이 각축을 벌이는 한국의 의료상황에서 세브란스와 같은 기독교 의료기관이 병원으로서의 우수성을 유지하면서 기독교 의료기관으로서의 정체성에 부합한 의료활동을 펼치기는 용이한 일이 아니다.
비슷한 상황이 과거에도 있었다. 일제는 한일합방 직후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국에 병원을 세웠다. 총독부의 충분한 지원을 받는 병원들이 설립되면서 소규모 선교 병원들은 존립이 위태로워졌고, 급기야 의료선교 무용론까지 대두되었다. 그런 가운데서 세브란스 병원은 교파들의 연합을 통해 병원으로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고, 또 사회적 약자들의 치료에 더욱 관심을 가짐으로써 의료선교기관으로서 한국 사회에서 그 존재 의의를 입증할 수 있었다.
현재 세브란스와 같은 기독교 의료기관이 직면한 도전은 일제강점기에 비해 절대 만만치 않다. 세브란스 병원은 세속적 수월성을 유지하려는 노력과 함께 더욱 낮은 곳으로 찾아가 의료를 펼침으로써 급변하는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의료기관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도전과 과제에 직면해 있다.
여인석|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과 교수이다. 저서로 『의학사상사』, 『제중원 뿌리논쟁』(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 『의학, 놀라운 치유의 역사』, 『히포크라테스 선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