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K4리그에서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다. 전년도 16위로 최하위를 겨우 면한 여주FC가 최종라운드를 앞두고 조기 우승과 K3리그 승격을 확정했다. 2021년에도 12위로 하위권에 머물렀기에 여주의 성과는 모두의 예상을 뒤집은 결말이었다. 언더독의 반란, 그 중심에는 심봉섭 감독이 있다. 과거 한국 축구를 이끌 차세대 측면 공격수로 기대를 모았지만 반복된 부상으로 조용히 은퇴했던 그가 지도자 생활 20여년 만에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무대로 돌아왔다.
11월 20일 여주시의 중심가인 세종로 한복판에 여주FC 선수단이 모였다. 선두에 선 경찰차를 따라 가두 행진을 시작한 여주 선수단에 시민들의 박수 세례가 이어졌다. 세종로 끝에 위치한 시청사에 도착하자 이충우 시장이 맞이했다. 이 시장은 심봉섭 감독과 주장 김성현이 함께 전달한 K4리그 우승 트로피를 번쩍 들어올리며 많은 이들에게 자랑했다. 인구 11만이 넘는 도시의 유일한 세미프로 스포츠팀이 거둔 성과가 모두의 환희가 되는 순간이었다. 9일 전 홈인 여주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최종전을 통해 팬들 앞에서 우승 세리머니를 했지만, 시의 초대를 받고 공식 환영 행사를 치른 것이다.
우승이 확정되던 날. 정충근의 득점을 함께 기뻐하는 선수들
고향 여주에 축구라는 기쁨을 담다
심봉섭 감독은 우승의 감격과 여흥을 간직한 모습이었다.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반응이 크네요. 작은 도시이다 보니 저희가 일군 성과가 계속 이슈가 되는 것 같습니다”라며 웃음지었다. 환희의 이면에는 지난 2년 간 힘들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2017년 여주세종축구단이라는 이름으로 창단한 팀은 2018년부터 K3리그(내셔널리그와의 합병 이전)에 참가했다. 2년 뒤에는 여주시민축구단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그해 심봉섭 감독이 부임했다. 여주는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이었다. 심봉섭 감독은 고향팀이 창단된다는 소식에 학원축구 지도자 생활을 접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하지만 부임 1년 만에 팀은 해체 위기에 몰렸다.
“여주는 11만 명이 넘는 인구 중 3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도시입니다. 세미프로 팀을 갖기는 쉽지 않은 조건이죠. 그런 고향에 팀이 생긴다고 하니까 놀라웠고, 학원축구 생활을 너무 오래 했다 싶어 지원을 하게 됐습니다. 창단 당시에 감독으로선임됐는데 개인 사정으로 하루 만에 번복을 했다가 2년 뒤 감독 선임 재공고가 올라왔을 때 지원을 해 오게 됐습니다. 그런데 시 체육회에서 운영이 부담된다는 이유로 해체 결정을 했고,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포기하고 싶지 않아 여주FC로 재창단을 하고 2년 동안 많은 주변 분들의 도움으로 버텼습니다. 재정적인 어려움, 선수 수급 문제는 당연히 매우 컸고 저 역시 2년 간 코치도 없이 무보수로 혼자 일했습니다.”
2021년과 2022년을 돌아보며 심봉섭 감독은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할 시간”이라고 회상했다. 재정 차이가 크다 보니 최저 수준의 수당 지급을 조건으로 선수단을 꾸려야 했다. 지역내 각계각층에서 후원금을 모아줬지만 K4리그의 다른 팀들과 경쟁할 수 있는 수준의 좋은 선수는 꿈도 꾸지 못했다. 축구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은 젊은 선수들이 모였다. 심봉섭 감독 역시 그들의 꿈을 이어주기 위해 또 팀의 존속을 위해 발버둥쳤다. 지인들의 개인적인 후원 외에 지역내 다양한 단체를 통해 경기날 버스를 대여 받고 선수단이 먹을 쌀과 반찬을 제공받으며 버텼다. 당시 팀에 관심을 보인 이가 현 이충우 시장이었고, 지난해 취임 후 여주FC에 대한 지원 결정을 내리며 정상적인 팀 운영이 재개됐다.
시의 지원에도 2년 동안 ‘언제든 해체돼도 이상하지 않은 팀’이라는 인식이 축구계 깊숙이 박혀 있었다. 재정이 확보됐지만 선수들이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심봉섭 감독은 사회복무요원, 산업기능요원 선수를 등록할 수 있는 K4리그의 특수성을 활용했다. 정충근(전 경남), 이동희(전 제주) 등이 새로 합류해 팀의 중심으로 거듭났다. 그제야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유능한 선수들이 입단을 희망해 전력을 꾸릴 수 있었다. 재정적으로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따뜻한 남부 지방으로의 전지훈련은 꿈꿀 형편은 아니었다. 선수단은 여주에 머물며 2023시즌 준비에 돌입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연습 경기 상대를 구하기 어려웠다.
“시즌 시작 전 연습 경기를 3번 밖에 못했죠. 선수 파악이 어렵다 보니 원래 구상했던 전술대로 못 갔습니다. 시즌을 치르는 와중에 선수들 장점에 맞춰 포메이션이나 전술을 계속 바꿔갔습니다. 그럼에도 선수들이 잘 따라와줬어요. 초반에 8연승을 했죠. 저도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잘했습니다. 시즌 중반이 지나니 선두가 됐죠. 후반기에 부상, 경고 누적으로 고비가 왔지만 그걸 잘 버티고 이겨내며 우승까지 도달했습니다. 막판에는 많은 팀들이 우리의 장점을 막기 위한 맞춤형 전술로 견제했지만 그것마저 극복했고, 소설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20승 3무 7패로 정상에 선 여주FC는 시의 지원이 재개되고 1년 만에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증명했다. 다시 축구단을 지원하겠다는 결정에 우려도 있었지만, 지금은 여주시 전체가 우승 소식에 한껏 들뜬 모습이다. 큰 성과를 내다보니 이충우 시장 역시 상당히 고무된 상태라고 심봉섭 감독은 전했다. “시장님께서 처음엔 걱정도 하셨죠. 첫걸음을 뗄 때 이 예산이 제대로 쓰여질지, 결과가 잘 나올지 걱정도 하셨죠. 저 역시 첫해는 중위권 정도를 목표로 했는데 바로 우승을 하고 K3리그로 승격하게 되니까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다른 지자체가 어느 정도 규모로 어떻게 지원하는지 K3리그의 다른 팀들 사례를 백방으로 알아보고 계십니다.”
심봉섭 감독은 모두가 즐겁게 발전하는 축구를 꿈꾼다
절망의 심연에서 빠져나오기까지
축구 명문 경신중-경신고를 졸업하고 한양대에 입학한 심봉섭 감독은 건국대의 고정운(김포FC 감독), 연세대의 김봉길(옌볜 룽딩 감독)과 함께 85학번 최고의 재능으로 꼽히며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올림픽 대표팀을 포함한 연령별 대표를 거친 그는 1989년 당시 최강 팀이던 대우 로얄즈(현 부산아이파크)에 드래프트 1차 지명으로 입단했다. 대학 시절 은사였던 이회택 감독의 신임 속에 이탈리아 월드컵으로 향하는 예선 과정에도 참가했다. 하지만 해외 전지훈련 도중 허리를 다쳐 정작 본선에서는 나서지 못했다. 그때부터였다. 축구 선수 심봉섭 앞에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부상으로 낙마하는 불운한 에이스라는 이미지가 붙었다.
“사실 대학 시절부터 허리 부상이 있었어요. 그래도 당시에는 육체적으로 한창 완성이 되던 단계고, 대학 축구 무대는 완급 조절이 가능하다 보니 정신력으로 고통을 극복하는 게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프로로 가면서 도미노 현상이 왔습니다. 높은 레벨의 선수를 상대해야 했고, 소속팀인 대우 로얄즈 자체가 준 국가대표급 멤버들이다 보니 그 안에서 경쟁하는 것만으로 이전에 느끼지 못한 피로도가 왔습니다. 그걸 참고 뛰다 보니 허리, 무릎, 그리고 발목 골절까지 이어진 거죠.”
스스로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한 것은 역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앞두고 당한 허리 부상이었다. 예선을 다 뛰고도 꿈의 무대로 가지 못했다. 대신 1990년과 1991년 소속팀에서 외국인 감독들을 만나며 전성기를 맞았다. 동독 출신의 프랑크 엥겔, 헝가리 출신의 비츠케이 베르탈란 감독이 차례로 지휘봉을 잡았는데 훈련량이 당시 국내 감독들에 비해 적던 외국인 감독 체제에서 부상을 털어낸 것이다. 1991년 21경기 연속 무패 기록을 달리며 대우 로얄즈는 우승에 성공했고, 선수 심봉섭은 자신의 프로 커리어에서 가장 많은 한 시즌 출전 기록(30경기)을 세우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1992년 외국인 감독 체제가 끝나고 다시 국내 감독들의 올라간 훈련량은 부상 빈도를 높였다.
“대우에서 6년의 계약 기간을 마치고 많은 생각이 들었죠. 터닝 포인트를 만들고 싶어서 1995년 LG치타스(현 FC서울)로 이적했는데 전지훈련에서 또 다쳤습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수술을 했지만 회복이 더디고, 팀에 민폐만 끼치는 거 같아서 구단 만류에도 조기 은퇴를 결정했습니다. 프로 7년의 생활 대부분이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기억이었네요. 그래도 은퇴를 하면서 이전부터 계획했던 아르헨티나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 곳에서 지도자로서의 철학과 방향성을 잡고 자산을 마련해 왔죠.”
심봉섭 감독은 지금까지 밝히지 않았던 이야기도 공개했다. 그는 왼쪽 귀가 들리지 않는 선천성 난청 장애를 갖고 있다. 전음기관인 고막이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멀리서 얘기하거나 왼쪽 귀와 가까운 각도에서 대화를 하면 들리지 않는다. 입 모양을 보고 알아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두운 곳에서도 대화가 어렵다. 학창 시절에는 부모님을 원망할 정도로 콤플렉스였고, 대인 관계에도 두려움을 줬을 정도다. 일부 지도자와 선배 선수들은 말귀를 못 알아 먹는다고 그를 혼내거나 괴롭히기도 했다.
“어렸을 때는 티를 안 냈고, 못 들어도 듣는 척했죠. 제 유년기는 어두웠어요. 열등감이 많은 자리를 차지했고요. 귀의 형태도 좋지 않다 보니 사람들이 안 좋게 주목한다는 착각이 들어 몇 년 투자해 성형 수술도 받았습니다. 제가 7남매 중 막내에다 늦둥이입니다. 연세 많으신 부모님, 나이 차가 많은 누나들은 늘 노심초사였죠. 경기장에 저를 보러 왔다가 어떻게 알았는지 관중석에서 귀머거리라고 수근대서 큰 상처를 받기도 하셨습니다. 최근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선 너무 힘들었어요. 마스크를 쓰면 난청이 더 심해집니다. 병원에 가도 마스크를 쓴 채로는 대화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보청기를 쓰게 됐고, 지금은 아무 지장이 없는 단계가 됐습니다.”
상처로 남는 줄 알았던 콤플렉스를 서서히 극복하면서 지도자 심봉섭은 새로운 길을 찾았다. 누구보다 선수를 보듬고 가는 말과 행동을 생각하게 됐다. 몸에 나쁜 버릇이 있거나 틱장애가 있는 선수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안아줬다. 자격지심이 심하고 열등감이 심한 선수들에게는 자신의 약점을 공개했다.
“몇몇 제자들에게는 나도 이렇게 살고 있다, 극복할 수 있다고 얘기했어요. 지도자가 된 뒤 항상 면접이 두려웠습니다. 목소리 성량에 따라 질문이 안 들려 경직되고 답을 제대로 못했죠. 이제는 숨기고 싶지 않아요. 단점이 큰 사람이지만 많은 분들 앞에서 당당히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됐습니다. 제 스스로를 위한 답을 찾으려고 심리학이나 자기계발서를 탐독한 것이 선수들을 지도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고요. 예순에 가까워지니 선수들은 나이 많은 꼰대 감독이 아닐까 겁도 먹지만, 선수들에게 더 허물없이 다가가고 용기를 주고 칭찬을 하는 조력자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선수들도 제 진심을 알아주더라고요. 여주FC에서의 힘든 시간도 저의 과거 때문에 오히려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소도시 여주의 시민들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주고 싶다
지도자가 끝날 때까지 놓지 않을 선수우선주의
심봉섭 감독은 34살이던 2000년부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은 사라진 하남고 축구부에서 코치 생활을 1년 한 뒤 감독이 됐고, 이후 대동세무고 축구부 감독으로 긴 시간을 보냈다. 여주FC에서 4년을 보내며 올해 23년 차를 맞았다. 그 시간 동안 지키고 싶었던 철학은 선수의 발전과 성장에 모든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는 선수 은퇴 후 향한 아르헨티나에서 쌓은 철학이다.
“제가 아르헨티나로 간 최초의 한국인 지도자 연수생일 겁니다. 대우 시절 제가 부상으로 고생할 때 구단에서 머리를 식히고 오라고 아르헨티나로 3개월 연수를 보내줬습니다. 그때 아르헨티나 축구를 보며 생각 자체가 바뀌었습니다. 선수들은 자유 분방하고, 편하게 소통을 하며 기술을 쌓아갔습니다. 그걸 이끄는 지도자도 스포트라이트를 받더군요. 3개월 간 머물며 친해진 교포 분이 계신데 만일 은퇴하고 온다면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어요. 한국으로 돌아온 뒤 그날을 대비해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3년 더 현역 선수 생활을 했지만 반복되는 부상과 수술에 지쳐 마무리했고, 더 망설이지 않고 지도자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많은 분들이 말렸지만 아르헨티나의 수준 높은 축구와 경기, 훈련 방식을 보며 다음 인생에 대한 확신을 갖고 건너가게 됐죠. 2년 동안 아르헨티나 현지의 대학원 시스템 속에서 축구 공부를 했고, 산로렌조 구단에서 추가로 배움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주목한 것은 선수들에게 과부하를 주지 않는 즐거운 훈련 내용이었다. 자신을 괴롭힌 많은 부상을 돌아보며 생긴 의문을 품은 상태였다. 이회택 감독을 통해 기술 훈련의 중요성을 배우고, 대우에서 만난 외국인 감독들을 통해 선수 개인에 맞는 훈련과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 심봉섭 감독은 훈련 동안 웃음이 끊이지 않는 아르헨티나의 훈련 프로그램과 피지컬 프로그램을 주목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선수들의 집중력이 흐트려지지 않고, 즐겁게 할 수 있는 훈련을 제 축구 모토로 삼았습니다. 당시 고교 평균 훈련량에 비하면 극단적으로 줄였습니다. 부상을 최소화할 수 있는 데이터를 계속 쌓아갔고요. 훈련에서 힘을 다 쓰지 않고 경기 체력을 준비할 수 있는 양질의 프로그램은 여주에서도 일관되게 하고 있습니다. 코치들도 그 부분을 따라주고요. 그러다 보니 선수들이 시즌 동안 중상 이상의 컨디션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올해 단 한번도 우리가 우승해야 한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소통도 메시지가 너무 많으면 스트레스가 됩니다. 좋은 지도자는 선수 스스로 뭉치게 만듭니다. 부상 없이 즐겁게, 모두가 발전하는 축구를 하는 것. 그 축구가 선수들도 저를 존중해주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앞으로도 이어가고 싶습니다.”
여주는 2024년 K3리그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더 높은 레벨의 팀들과 경쟁해야 한다. 심봉섭 감독은 여주만의 스타일과 운영 방식을 놓지 않겠다고 했다. 피지컬과 개인의 스피드보다는 전체가 공을 소유하고 공유하며 축구에 대한 높은 이해와 기술로 펼치는 공격적인 축구다. 당면 과제는 그런 축구를 할 수 있는 선수 수급이다. 올 시즌 활약한 사회복무요원 선수들과는 K3리그에서 동행할 수 없다. 그래도 올 시즌 여주의 성과가 주목받으며 이전보다 훨씬 다양하고 좋은 선수 프로필이 들어오는 중이다. 12월 중 내년 예산이 확정되면 K3리그에서도 돌풍을 일으키고,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도전을 이어갈 계획이다.
“고정운 감독이 제 절친입니다. 최근 김포FC가 인근의 이천으로 전훈을 왔을 때 만나서 긴 대화를 나눴습니다. 김포도 4부에서 3부로, 그리고 프로로 올라갔습니다. 그런 부분을 지켜보며 친구의 노력과 열정을 인정했고 꾸준히 관심을 가졌습니다. 적은 예산으로 큰 성과를 내는 방식에 대해 조언을 얻었습니다. 저희에겐 롤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프로는 자본을 많이 쥔 팀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곳이지만 세미프로는 반전이 큰 무대입니다. 3부 리그에서 경쟁력을 키워가면 프로와의 격차도 좁혀갈 수있습니다. 시즌 중반부터 K3리그를 관찰하며 다른 팀의 특징과 장단점을 저희 팀과 비교해 왔습니다. 소기의 성과를 내고 싶습니다. K3리그에서 저희 여주시를 홍보하고, 막내 구단으로서의 어려움을 이겨내며 2년 정도 버티면 한 번 더 승격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 이 글은 KFA 기술리포트&매거진 ONSIDE 12월호 ‘LEADERSHIP’ 코너에 실린 기사입니다.
글=서호정
사진=대한축구협회
첫댓글 훈훈한 소식입니다. K3에서도 좋은 성적 쭈---욱 이어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