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서울한영대 남성현 교수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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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의 탄생과 기독교
병원이 기독교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대개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을 것이다. 구한말 선교사들이 학교와 병원을 세우면서 우리의 선조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니, 서양식 교육과 의료가 선교를 위한 도구였다는 정도이다. 그런데 좀 깊게 파고 들어가서, 서양 사회에서 병원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를 묻는다면 선뜻 답하기가 쉽지 않다. 서양의 민주공화제나 대통령제 같은 정치체제가 그렇듯, 오랜 역사 속에서 사상의 진보와 제도의 개혁을 통해서 오늘날과 같은 병원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헬레니즘 문명의 정신사를 살펴보지 않고는 현대적 제도의 기원을 논하는 게 타당하지 않듯, 병원의 기원 또한 역사의 시계추를 먼 과거로 돌려 살펴보아야 한다.
기원전 4-2세기경 헬레니즘 문화권에서는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서 몽중신탁(夢中神託, incubation)의 방법으로 치료를 하곤 했다. 그럼에도 신전은 병원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기에 이를 병원으로 부를 수는 없다. 그리스와 달리 로마의 경우는 놀랍게도 현대적 개념의 특수병원을 운영했다. 기원후 1-2세기 로마군은 군단이 주둔하는 캠프 내부에 군진(軍陣)병원(valetudinaria)을 설치하여 부상당한 병력을 치료했는데, 이런 형태의 군진병원은 치료 목적의 의료 전문병원이었다.1
그러나 군진병원은 군사력의 보존이라는 제한적 목적을 가진 병원에 불과했고, 2세기 중반 이후 로마군의 전술이 캠프에 주둔하는 형태에서 신속한 기동을 추구하는 형태로 전환되면서 자취를 감춘다. 군진병원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로마인은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위한 무료병원을 설립하지 않았다. 사회 하층민들에게 재원을 쏟아붓는 것을 불필요한 낭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4세기에 이르러 로마제국은 수도주의 영성과 삼위일체 교리라는 새로운 정신적 기둥 위에서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및 예술, 남녀의 결합방식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기독교와 결합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헬레니즘 문명에 바탕을 둔 이교 로마제국이 기독교 로마제국을 넘어 기독교 문명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초의 기독교적 병원도 4세기 중반경 수도사 출신의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수도자 출신으로서 세바스테(오늘날 아르메니아 지역) 교회의 감독이었던 에오스타티오스는 350년대에 나병원을 포함한 대규모 빈민보호시설을 세운다. 뒤를 이어 372년경 역시 일평생을 수도자로 살던 카이사레아 교회의 감독 바실리오스가 대규모 빈민 보호시설을 설립한다.2 이 시설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구빈원, 행려객을 돌보는 호스텔, 병든 자를 치료하는 병원을 포괄하는 거대한 복합시설이었고, 나병에 걸린 자들을 돌보는 별도의 시설도 갖추었다. 4세기 말부터는 주요 도시에 본격적으로 병원이 설립되며 병원, 수도원, 교회는 5세기 중반 이후 기독교의 주요 3대 기관으로 자리매김한다. 극장, 원형경기장, 목욕탕 등이 웅장하게 자리한 도시들이 헬레니즘 문명을 상징하듯, 중세 기독교 도시의 건축은 우뚝 솟은 교회와 수도원과 병원으로 대변된다.
이처럼 병원은 기독교 문명이 탄생하던 4세기에 새로운 문명의 상징물처럼 등장했다. 특별히 강조해야 할 것은, 당시 병원은 오늘날과 같은 의료 전문병원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들고 나그네 된 자들을 돌보는 기관으로 출발했다는 점이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이미 1세기에 로마군이 군사력 보존을 위해 군진병원이라는 의료 중심의 병원을 운영했는데, 왜 4세기의 기독교 병원은 복합적 성격을 갖고 있는가?’ 그것은 이 시기의 교회 지도자들이 마태복음 25:35 이하의 ‘마지막 대심판’의 말씀을 실천하는 데 헌신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마 25:40)이라고 말한바, 가장 작은 자는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에 걸리고 감옥에 갇힌 자였다.(마 25:35-39) ‘마지막 심판’의 구절에서 갖가지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회적 약자는 그리스도와 동일시되었고, 이렇게 약자를 돌보는 이웃 사랑은 곧 하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두 계명의 실천이라면(마 22:40), 그런 실천은 고통 받는 자를 돌보는 한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굶주리고 헐벗은 자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누어 주는 구빈원, 목마르고 곤한 행려자들에게 최소 이틀에서 사흘 동안 안식처를 제공하는 호스텔, 병에 걸린 자를 돌보고 세상을 떠날 경우 매장해주는 병원이라는 제도는 ‘마지막 심판’의 종교적 상상력을 인적 조직과 물적 조직으로 구현한 것이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명제에 익숙하여 이를 바탕으로 성서를 해석하지만, 그 시대의 지도자 계층은 고통 받는 타자를 절대자로 승격시키는 ‘마지막 심판’을 천국의 열쇠로 생각했다. 이런 4-5세기의 ‘병원 영성’을 율법주의로 치부하는 건 타당치 않다. 마태복음 25:35 이하의 구절이 ‘성육신의 역설’과 교리적으로 불가분 연결되어 해석되었기 때문이다.3 성육신의 역설은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난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후 8:9)라는 구절로 요약된다. 요컨대, 성육신의 역설은 우주 만물을 능력의 말씀으로 붙들고 있는 우주의 지배자(Pantokrator) 그리스도가 자신을 낮추어서 인간의 육을 입고 고통을 당하심으로 마치 거지처럼 되었다는 뜻이다. ‘거지가 된 왕’이라는 역설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빌 2:8)라는 신앙고백에서도 확인된다.
우리나라의 설교 강단은 빌립보서 2장의 기독론에서 ‘순종’만을 강조하는 반면, 4세기 목회자들은 같은 구절을 놓고 ‘그리스도의 가난’을 강조했다. 우리나라 교회의 ‘기독론적 순종’은 유교의 바탕에서 기독교를 수용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반면, 4세기 교회 지도자들은 수도적 영성의 빛에서 성서를 해석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난’으로 나아갔다. 대표적으로 닛사의 그레고리오스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우주의 통치자와 인간의 육체라는 극도의 가난이 결합돼 있다고 역설한다.
모두의 왕이신 하나님이 스스로의 자유 의지로 우리의 궁핍한 본성을 나누기 위해 오신 것보다 하나님 편에서 더 자기를 낮추심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순전하고 아무 흠도 없으신 분이 인간이 되는 더러움을 취하고, 삶의 모든 과정에서 혹독한 가난을 겪고, 심지어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가난이(참조, 마 19:21) 어느 정도인지 살펴보십시오.4
그런데 거지가 된 만유의 왕이라는 기독론적 은유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결합된 가난에 그치지 않고 고통 받는 이웃으로 확장된다.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 25:40)이기 때문이다. 요안네스 크리소스토모스의 설교를 보자.
그리스도는 심지어 죽음과 십자가에도 만족하지 않고, 가난하게 되고 나그네가 되고 거지가 되고 헐벗고 감옥에 갇히고 병에 걸렸습니다.(cf. 마 25:35-46) 이는 그분이 이런 수단으로 당신들을 부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너희를 위해 내가 십자가에 달린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해도, 내가 가난하니 나에게 자비를 베풀라. 만일 너희의 마음이 나의 가난에도 꿈쩍하지 않는다면, 내가 병에 걸렸으니 마음을 움직이고 내가 옥에 갇혀 있으니 마음을 움직이라. …십자가에 달렸을 그때에도 나는 목말랐지만 지금 가난한 자 안에서 나는 여전히 목마르다. 나는 과거에도 고통 받았고 지금도 고통 받고 있으니, 너희는 나에게로 와서 너희를 자애롭게 하여 너희가 스스로를 구원하여라.5
고통 받는 타자는 주체인 내가 분석하고 이해하고 지배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섬겨야 하는 절대자이다. 크리소스토모스의 설교는 그 시대의 지도자들이 공유하던 공통분모였다.
그런데 마태복음 25:35 이하에서 발견되는바, 사회적 약자와 무한한 절대자를 동일시하는 시각은 유대교 사상에 그 뿌리가 있다. 구약성서는 거의 매 장마다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 사상을 간직하고 있고, 시편 146:7-9는 ‘마지막 심판’의 구약 버전에 해당한다. 이에 더해 유대교는 자선을 통한 죄사함이라는 이른바 ‘구속적 자선’의 사상까지 발전시켰다.6 하지만 유대교는 이런 사상에도 불구하고 지중해 세계에서 일반적인 호스텔을 설립하는 데 그쳤을 뿐, 4세기 기독교적 병원처럼 독자적인 빈민 복합시설을 설립하지 못한다. 선지자들과 랍비들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기부 문화가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기부 문화가 발달하였지만 이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리스는 강력한 기부문화의 전통을 갖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6권에서 선출된 관료들이 공적인 목적을 위한 기부(leitourgia)를 행해야 한다고 역설한다.7 로마의 경우도 가문의 영광이나 선거의 승리라는 목적을 위해 귀족 가문들이 빵과 서커스를 제공하고 금품을 살포하는 소위 로마적 ‘선행’(beneficium)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은 가난한 자들을 도시의 번영에 불필요한 존재로 여겼고, 이런 이유로 헬레니즘 문명의 기부 전통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보호시설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처럼 히브리 문화의 약자 보호 사상과 헬레니즘 문명의 기부 문화는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서로 만나지 못하고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 1-3세기 기독교는 박해받는 소수 종교라는 한계로 인해 독립적인 자선 기관을 설립할 정도에 이르지는 못한다. 그런데 4세기에 이르러 수도주의 영성으로 무장한 엘리트 계층, 즉 ‘가난한 선행가’ 계층이 교회와 사회의 지도자로 떠오르면서 이런 새로운 유형의 영웅들의 인격을 통해 유대교의 약자 보호 사상과 헬레니즘 문명의 기부 사상이 화학적으로 결합한다.
4세기 기독교 시대의 새로운 영웅들은 마태복음 19:21의 명령에 따라 자발적으로 ‘가난’을 택한 수도자들이다. 또한 자신의 재산 및 기부된 막대한 물적 자원과 헌신된 인적 자원을 결합하여 대규모 빈민 보호시설을 설립했기에 ‘선행’을 행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가난한 선행가’ 계층은 유대교나 헬레니즘 종교가 알지 못하던 전혀 새로운 유형의 영웅이었다. 372년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레아에 병원을 설립한 바실리오스가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이다. ‘가난한 선행가’라는 영웅상은 헬레니즘적 영웅상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그리스는 ‘지혜로운 인간’을 추구했고, 로마는 ‘지배하는 인간상’을 추구했다. 그러나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고 대규모의 빈민 구호시설을 설립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섬기는 인간상’의 표본이었다. 이렇게 4세기에 밝아온 기독교 시대는 히브리 영성과 헬레니즘 정신을 융합하여 섬기는 영웅상을 뿌리 내림으로써 기독교를 문명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거지가 되신 만유의 왕’이라는 기독론적 은유는 기독교적 영웅들의 인격을 교리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이후 비잔틴(동로마 제국)의 병원사(史)는 화려하게 전개되었으며, 일부 연구가들은 비잔틴 사회복지 국가를 언급할 정도이다. 5-6세기의 기독교적 병원은 다양한 형태로 분화되어 영아원, 보육원, 노인원, 나병원, 여성 전용 병원 등이 입법 대상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유명한 삼손병원은 6세기에는 여러 개의 진료과목에 수술까지 하는 의료 전문병원으로 확인된다. 1136년에 설립된 판토크라토르 수도원 병원(Xenon)은 현대적 개념의 의료 전문병원으로 출발했다. 외과, 안질(眼疾) 및 장기치료과, 여성전용과, 일반입원과, 기타질병과 등 5개의 전문 진료과목으로 구분되었고 외래진료실도 운영했다. 65명의 의료 인력과 103명의 보조 인력이 총 61명의 입원환자와 기타 외래환자를 돌보았다.8
동방교회의 영향을 받아 5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서방 지역에도 병원이 설립되지만, 12세기 이전까지는 비잔틴 제국의 병원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다. 12세기 십자군 전쟁을 기점으로 라틴인들은 예루살렘 성(聖)요한병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프랑스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이른바 ‘병원수도원’의 시대가 열린다. 비잔틴의 병원은 주로 수도원이 운영하던 기관이었지만, 라틴 세계의 병원수도원은 병원 자체가 수도원으로서 간호사는 물론 환자까지도 수도 서언을 한 독특한 형태였다. 라틴 세계의 나병원은 흔히 병원수도원이었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사회가 변화되면서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 대한 자선과 돌봄은 개혁의 대상이 된다. 특히 13세기에 설립된 탁발수도회들의 구걸은 심각한 사회적 병폐로 떠올랐다. 인문주의자들은 광범위한 개혁을 요구하였고, 이런 바탕 위에서 루터는 공권력을 통해 각종 수도회와 병원 자산을 몰수하는 혁명적 조치를 실행하고, 공동 금고를 만들어 자선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하였다. 루터는 중세 천주교의 공로사상을 해체하고 믿음의 열매로서의 선행 개념을 제시하면서 개인적 자선을 넘어 시민공동체를 통해 조직적인 돌봄을 제공하는 사회적 공동선으로서의 자선 개념을 제시하였다.
루터의 뒤를 이어 부겐하겐은 빈민에 대한 부조와 병원을 분리하여 발전시켜 나갔다. 스페인 출신의 가톨릭 인문주의자 루이스 비베스는 믿음의 열매로서의 선행이란 루터적 담론에 의지하지 않고, 헬레니즘 전통과 4-5세기 초대교회 전통에 의지하며 정치공동체로서의 공공선 실현을 강조하면서 중세 병원 개혁의 주춧돌을 제공하였다. 이렇게 16세기 이후 병원을 포괄하여 빈민보호의 영역 전체가 시의회나 국가 주도로 변화된다. 18세기 ‘파리임상학파’와 프랑스혁명 세력은 의료의 영역에서 가톨릭을 배제하였고, 이로써 병원은 의료 전문기관으로 진화한다.
병원은 4세기 삼위일체 교리와 수도주의 영성과 더불어 탄생한 종교적 기관이었다. 교회가 일반 신자들의 공동체이고, 수도원이 특별한 부름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라면, 병원은 가난과 질병을 매개로 한 신앙공동체였다. 종교개혁 이후 수도원 제도가 붕괴되면서 수도적 영성은 사실상 그 힘을 상실하였다. 반면, 성육신의 역설과 ‘마지막 심판’이라는 복음의 상상력 위에 가시적 조직으로 설립된 병원은 빈민보호(사회복지)와 의료라는 두 영역으로 구별되어 진화함으로써 오늘날까지도 서양 시민사회를 떠받드는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로마법이 현대 세계를 향한 로마인의 선물이라면, 병원은 인류를 향한 기독교의 선물이다.
주(註)
1 빈도닛사(Vindonissa)의 로마 제11군단(Legio Ⅺ) 캠프는 60개의 병실을 갖춘 군진병원을 운영했다. Graham Webster, The Roman Imperial Army of the First and Second Centuries A.D. (Totowa: Barnes&Noble Books, 1985), 200-201.
2 남성현, “초기 비잔틴 시대(4-7세기)의 기독교적 빈민보호시설의 발전과 병원의 탄생,” 「의사학」 24 (2015): 203-215.
3 피터 브라운, 서원모·이은혜 옮김, 『고대 후기 로마제국의 가난과 리더십』(태학사, 2012), 192.
4 닛사의 그레고리오스, On the Beatitudes, Patrologia Graeca 44.1201B. 피터 브라운, 위의 책, 185에서 재인용.
5 요안네스 크리소스토모스, 『로마서 6장 설교 15』. 피터 브라운, 위의 책, 189에서 재인용.
6 Roman Garrison, Redemptive Almsgiving in Early Christianity (Sheffield: JSOT Press, 1993), 52-55.
7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Ⅵ.7.4-7[Aristotle, Politique, tome 2, texte et tradu-ction par Jean Aubonnet (Paris: Les Belles Lettres, 1973)].
8 Paul Gautier, “Le typikon du Christ Sauveur Pantocrator,” Revue des études byzantines 32 (1974): 1-145.
남성현|서강대학교, 감리교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교에서 4-6세기 수도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기독교 초기 수도원 운동사』,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기독교적 입법정책』, 『고대 기독교 예술사』, 『병원의 탄생과 발전 그리고 기독교 영성의 역할』 등의 저서와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폰투스의 에바그리오스, 실천학』 등의 역서가 있다. 현재 서울한영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