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한신대 이서영 교수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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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살아가는 거라사 사람의 생존 이야기(막 5:1-20)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신약성서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구원을 이루었다고 믿음으로 고백하고 증언한다. 그래서 믿는 자들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신약성서의 예수 사건은 은혜롭고 감사하지만, 또한 잔인하기도 하다. 모욕적이고 외롭고 잔혹한 예수의 죽음(막 15:16-33)을 발판 삼아 믿는 자들은 영원까지 생존하는 삶을 희망하기 때문이다. 성서를 읽는 독자는 당연히 예수의 죽음이 지향하는 구원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복음서는 예수의 죽음을 드러낼 뿐 아니라 구원을 소망하는 자들의 삶에 드리워진 고난과 죽음의 가능성을 숨기지 않는다. 따라서 구원은 죽음을 경험하는 트라우마와 분리될 수 없고, 구원을 증언하는 신약성서는 죽음을 통하여 생존과 삶의 가능성을 증언하는 트라우마 문학으로 볼 수 있다.
트라우마를 통한 성서읽기는 ‘고통, 두려움, 죽음’을 중심으로 신약성서 사람들의 삶의 역사, 기억, 목소리, 감정에 접근한다. 그러나 그 고통과 죽음을 인내와 극복, 치유 대상으로 쉽게 정리하지는 않는다. 부활의 예수가 십자가의 흉터를 몸에 가지고 있었듯이 고통과 죽음의 경험은 사실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몸과 마음에 남아 있는 고통의 흔적은 삶의 역사를 증언하는 목소리가 될 수 있다. 그들이 경험한 고통의 흔적을 따라가면, 예수뿐 아니라 예수 주변의 사람들과 예수를 따르며 교회를 만들어간 사람들의 위험하고 잔혹한 경험을 상상하고, 그들이 직면한 삶과 세계의 위기를 들을 수 있다. 고통을 따라가는 트라우마 성서읽기는 이천 년의 시공을 넘어 신약 시대 사람들의 위기와 죽음에 동감할 수 있는 공간을 형성한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1세기 예수 시대의 사람들이 고난 속에서 소원한 새로운 삶의 가치와 진실을 마주하고 그들의 증언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 고난, 죽음’이 성서를 통하여 공명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트라우마 읽기는 죽음, 폭력, 기억, 증언, 애도, 정체성 등의 주제를 중심으로 복음서의 고통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추적한다. 고통과 죽음에 대한 이해는 복음서 인물이 경험한 삶의 환경과 사건과 그 영향력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독자를 안내할 것이다. 또한 죽음과 두려움을 넘어 새로운 생명과 영원한 생존을 소망하며 그리스도를 따라 변화된 자들의 정체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이를 통해 믿는 자들은 죽음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생존하게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구원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트라우마와 트라우마 문학
몸에 난 상처를 의미하는 헬라어 ‘트라우마’(τραῦμα, 눅 10:34)는 정신병리학이나 심리학에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지칭한다. 이 단어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폭력, 사건, 사고, 재난, 전쟁 등을 겪으며 ‘죽음’을 경험한 피해자가 그 기억으로 인해 마음과 몸이 지배당하는 상태를 뜻한다. 예기치 않게 죽음의 위협을 경험한 사람은 그 기억에 압도당하여 이를 통제하지 못하고 그것에 종속된다.1 통제되지 않는 죽음의 기억은 피해자의 삶에 수시로 침투하여 공포, 혼란, 무기력을 일으키고 감정, 인식, 의사소통 등에 장애를 일으킨다. 이로 인해 피해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을 다시 경험하게 되는데 바로 이때 회피, 망각, 과(過)각성을 동원하여 자기를 방어하려 한다.
이처럼 피해자가 두려운 기억에 종속되는 이유는 공포를 불러온 죽음의 경험을 스스로 이해하고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사건을 말할 수 없고 진실이 가려진다면, 치유와 회복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트라우마 치료에서는 말할 수 없는 사건을 감정과 언어로 표현하고 증언하는 것이 중요하다. 트라우마 문학은 사라지고 잊혀질 수 있는 피해자의 사건과 상처의 진실이 왜곡되지 않고 복원되어 들려질 수 있는 서사 공간을 창출한다.2 이 공간에서 독자는 피해자가 경험한 죽음을 마주하고, 그의 감정에 동감하며, 피해자의 진실을 자기 삶의 이야기로 전환할 수 있다. 즉 트라우마 문학은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응시하며 사람과 세계를 이해하고 타자들이 서로 공감과 돌봄의 관계를 형성하여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바라보도록 한다.
죽음을 살아가는 거라사 사람
트라우마 문학이 타자의 고통과 상처에 머물며 그것을 직시하고 증언한다면, 복음서는 죽음의 환경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예수의 눈으로 응시하며 그들의 고통을 증언한다. 마가복음의 ‘거라사의 광인 이야기’(막 5:1-20)를 살펴보자. 보통 이 본문을 해석할 때 귀신을 축출한 예수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5:7)로 강조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의 능력뿐만이 아니라, 귀신 들린 사람의 ‘죽음의 경험과 환경’을 자세히 설명하고 증언하는 데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하며 상처와 죽음에 관한 그의 관심을 보여준다. 특히 이 본문은 거라사 광인을 통하여 트라우마 피해자의 증상,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반응, 트라우마 치유의 방향 등을 잘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트라우마 문학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평행본문인 마태복음 8:28-34를 비교하면, 죽음의 환경을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마가복음의 관심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마가복음은 거라사 광인의 비참한 삶을 자세하게 증언하는데, 그는 ‘더러운 영(귀신)에 사로잡혀, 무덤에 살고 있고, 쇠사슬로 묶였지만, 광적인 힘으로 그것을 깨뜨렸고, 누구도 그를 제어할 수 없고, 밤과 낮에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자기 몸을 해친다.’(막 5:2-5) 그러나 마태복음은 광인의 비참한 삶을 단지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마 8:28)라며 간단히 소개한다. 또한 마태는 마가처럼 광인이 치유 받은 뒤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막 5:19-20) 말하지 않고, 단지 예수의 능력으로 ‘온 마을이 예수를 만나러 왔다’(마 8:34)는 기적의 결과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마가는 마태처럼 예수의 치유 능력을 증언하는 동시에,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거라사 사람의 삶에 관여하는 예수의 성격을 강조한다.(막 5:8-9, 18-29)
귀신의 포로가 된 거라사 사람의 처참한 삶은 그가 ‘죽음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음을 증언한다. 그가 사는 곳은 무덤, 곧 죽은 자들의 공간이다. 그는 이천 마리 돼지를 몰살시킬 수 있는 더러운 귀신에 자기 몸을 빼앗겼다. 죽음의 공간에서 더러운 죽음의 영에게 지배를 받는 거라사 광인은 돌로 자기 생명을 파괴한다. 사실 마가복음 4:35부터 6:6으로 이어지는 여러 기적 이야기에서 죽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 풍랑을 잠잠하게 한 기적에서 제자들은 폭풍우 때문에 죽음을 경험한다.(4:38) 이유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야이로의 딸은 죽게 되었고(5:23, 35), 혈우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한 여인 또한 사회로부터 소외당하며 죽음 가까이에 이르렀다(5:26). 이처럼 죽음에 대한 경험은 마가복음의 예수가 기적을 행사하는 중요한 배경이자, 거라사 광인을 포함하여 기적을 체험하는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 기적을 체험하기 전에 사람들은 자연과 사회 그리고 영과 육, 그들이 살아가고 생명이 움직이는 공간에서 쉬이 죽음을 목격하고 죽음의 공포를 가지고 살아갔다.
레기온의 폭력과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
거라사 사람을 트라우마 안에 가둔 귀신의 정체는 ‘레기온’(λεγιὼν, 5:9, 15)이다. 레기온은 로마 군단(약 6,000명)을 가리키지만 9절의 “우리가 많기 때문이다”(ὅτι πολλοίἐσ μεν)라는 구절과 함께 영적인 차원에서 ‘집단적 귀신(악마)’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테오도르 제닝스(Theodore W. Jennings, Jr.)는 레기온이 나오는 이 구절을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침공을 받은 폴란드의 상황에서 읽어보도록 제안한다. “나의 이름은 SS[나치 친위대]다. 왜냐하면 우리가 많기 때문이다.”3 이러한 읽기는 나치 친위대가 가진 강력한 무력을 과시하는 뉘앙스를 독자에게 전달한다. 즉 ‘많음’은 집단적인 귀신 떼거리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레기온이 일으키는 거대한 폭력의 공포를 확대하여 전달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마가복음에서 거라사 사람의 귀신 들림은 로마제국의 강력한 폭력 때문에 발생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요세푸스는 유대전쟁 때(기원후 67-73) 로마군에 의한 거라사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기병부대와 많은 보병부대를 루키우스 안니우스와 함께 거라사로… 1천 명의 젊은이를 살해… 가족을 포로로… 재산을 병사들이 약탈… 집을 불사르고… 약한 자들은 칼에 맞아 죽었다.”4 비록 예수 시대가 아닌 유대전쟁 중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증언이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기원전 63년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한 로마군의 잔혹한 통치방식을 상상할 수 있다. 로마의 폭력 아래 식민지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를 지속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귀신 레기온을 축출한 것은 사회적·정치적 차원에서 악마적 파괴를 일삼는 로마제국의 억압을 거부하고 축출하고자 하는 상징적 저항과 대결 그리고 궁극적 승리로 해석된다.5
그러나 이러한 승리주의는 자칫하면 제국(국가)의 폭력에 쓰러져 간 희생자들의 고통을 도구화할 수 있다. 희생자의 고통과 죽음을 사회정치적 진보를 위한 도구로 바라보는 것은 트라우마를 겪는 피해자들에게 2차 피해를 유발하고 그들의 희생을 부차적인 것으로 후퇴하게 만든다. 필자도 예수의 귀신 축출이 가지는 ‘제국과의 대결’과 ‘대안 질서의 제시’라는 의미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마가복음이 거라사 광인의 죽음에 대한 경험과 그로 인한 피해 증상을 매우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가복음 서사에서 로마의 억압과 폭력으로부터 완전한 승리는 예수의 시각에서 구체적인 희생자들의 피해와 고통을 먼저 직시하고 그들이 어떤 죽음의 상황에 내몰리고 있는지 증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마가복음은 거라사 지역을 점령한 레기온이 그 지역을 나가지 않고 영구히 지배하고(5:10), 이천 마리 돼지 떼를 죽일 수 있는(5:13) 폭력의 진원지임을 폭로한다. 거라사 지역을 점령한 레기온은 당연히 식민지 사람의 몸과 영혼을 장악하고 그의 목소리와 언어를 빼앗는다. 귀신 들린 거라사 사람이 예수를 만났을 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5:7)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는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인 ‘나’의 정체는 모호하다. 자기 목소리와 언어를 폭력적인 레기온에게 빼앗긴 거라사 사람은 예수를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외치지만, 귀신을 파괴할 수 있는 예수의 힘(1:24)을 두려워하며 ‘나를 괴롭히지 말라’고 자기 분열적인 태도를 보인다. 여기서 ‘괴롭히다’로 번역된 헬라어 ‘바사니조’(βασανίζω)는 육체적인 폭력과 고문 등으로 극심한 고통을 일으키는(afflict, torment, torture) 것을 의미한다. 즉 귀신 레기온은 자신이 식민지 사람에게 가한 극악무도한 폭력을 두려워하면서 과각성의 반응으로 큰 소리를 지르며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지 말라고’ 분노와 회피의 반응을 보인다.
레기온의 이러한 모습은, 귀신 들린 거라사 사람의 삶에서 트라우마 피해자가 보이는 과각성의 증상으로 나타난다. 극심한 폭력과 죽음의 경험은 자기를 묶은 쇠사슬을 끊고 타자를 위협할 정도로 폭발적인 폭력으로 표출된다. 또 억압과 폭력 앞에 무력해진 자아의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대신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자해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침투하는 두려움을 표현하고 제어할 언어를 상실한 채 귀신과 같이 밤낮으로 큰 소리를 지르며 죽음의 고통 앞에서 괴로워한다.6
트라우마 피해자는 자기 몸과 영혼이 매일 죽어가는 경험을 한다. 그 과정에서 기본적인 삶의 관계가 붕괴된다. 외상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 다른 사람, 그리고 신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고” 외상 이전에 지니고 있던 “정체성이 파괴된다.”7 자신의 가치관과 질서 체계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경험하며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절은 트라우마 피해자에게 일어나는 또 하나의 비극적 현실이다. 분노를 조절할 수 없는 거라사 광인은 그가 거주하던 가족과 마을로부터 추방되어 죽은 자들의 터와 산에 고립된다. 그는 삶의 통제권을 귀신에게 빼앗겨 자기 목소리와 이야기로부터 단절되고 자기 삶의 서사와 욕구를 제대로 말할 수 없게 된다. 사회적 규범과 질서에서 일탈한 그는 하나님의 보호 안에 있을 수 없는 ‘귀신 들린 자’로 낙인찍힌다.
지워지지 않는 고통과 생존의 가능성
이제 예수는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된 거라사 사람에게서 귀신을 분리한다. 가해 원인을 분리하는 것은 곧 치유의 시작이다. 드디어 그는 자기 몸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옷을 입은 뒤 자리에 앉는다.(5:15) 건강한 정신으로 돌아온 그는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한다.(5:18) 비록 예수와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주님이 하신 큰일을 선언하고, 선포한다.(5:19, 20) 예수가 레기온을 자기 몸에서 몰아낸, 즉 ‘자기에게 행한 일’을 사람들에게 선포한 것이다. 이제 그는 자기 이야기와 자신의 목소리를 회복하고, 많은 이들의 놀라움을 받는 주체가 된다. 자아와 타자 그리고 사회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그의 삶은 다시 연결되기 시작하며 회복된다.
분명 예수는 그를 치유했지만 그가 겪은 과거의 고통을 완전하게 지우지는 못한다. 제정신으로 돌아왔음에도 지역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두려워하고(5:15) 심지어 예수를 마을에서 추방한다(5:17). 귀신에게 압제당한 사람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두려운 기억이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거라사 사람도 그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그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예수를 따라가려 한 것(5:18)은 아닐까? 하지만 그는 예수와 함께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왜곡된 폭력의 기억과 이데올로기에 맞서 생존 투쟁을 펼쳐야 했고, 그가 경험한 예수의 큰일을 당당하게 선포한다.
고통스러운 죽음의 경험과 기억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 기억에 다시 압도당하지 않고 삶의 진실과 진리를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치유와 생존은 계속된다. 거라사 사람이 경험한 로마의 폭력으로 죽은 예수는 치유와 생존의 공간을 만들었다. 예수는 귀신 들린 자의 ‘달려듦’과 ‘공격적인 소리 지름’을 거부하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서 생존을 향한 외침을 들었고, 죽음을 넘어 살고 싶은 소망을 보았다. 예수와의 대화를 통해 그의 목소리는 들려지고, 그의 삶은 보여지게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안전한 치유 공간에서 그는 비로소 자기 삶을 말하기 시작한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음을 경험한 상처, 트라우마가 있는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죽음의 흉터를 가지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 예수는 고통과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죽음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안전한 공간이 된다. 이곳에서 그들의 고통은 있는 그대로 느껴지고 전달되며, 죽음은 삶의 가능성으로 살아난다. 오늘도 그들이 겪는 고통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 삶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필요하다. 세월호, 이태원, 오송 사건 등 트라우마 피해자들이 그들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생존을 소망할 수 있도록, 예수가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가 그들에게 안전한 공간이 되길 희망한다. 고통 앞에서 우리 모두의 삶이 위협받을 때 서로가 서로에게 안전한 공간이 되길 기도한다.
주(註)
1 주디스 허먼, 최현정 옮김, 『트라우마: 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열린책들, 2012), 92-94.
2 트라우마와 트라우마 문학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글을 참고하라. 이서영, “여인들의 두려움에 관한 증언-트라우마 이론으로 본 마가복음 16장 1-8절,” 「신학사상」 193 (2021년 여름): 15-59.
3 Theodore W. Jennings, Jr., The Insurrection of the Crucified The “Gospel of Mark” as Theological Manifesto (Chicago: Exploration Press, 2003), 69.
4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박정수·박찬웅 옮김, 『유대전쟁사 2』(나남출판사, 2008), 4, 487-490.
5 이에 대하여는 다음을 참고하라. 김광수, “예수의 귀신축출 사역의 사회-정치적 이해: 마가복음 5:1-20(Ⅱ),” 「복음과 실천」 25/1 (2000): 105-142.
6 과각성, 자해, 언어 상실 등 트라우마 증상에 대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하라. 쥬디스 허먼, 앞의 책, 91-115, 277-278, 411-445. 그리고 거라사 광인 이야기에서 유추해볼 수 있는 식민주의와 정신질환의 관계는 다음을 참고하라. 체드 마이어스, 황의무 옮김, 『강한 자 결박하기』(대장간, 2022), 377-384.
7 쥬디스 허먼, 위의 책, 148-149.
이서영|트라우마, 감정, 기억을 주제로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여인들의 두려움에 관한 증언-트라우마 이론으로 본 마가복음 16장 1-8절”, “오클로스(ὄχλος)와 두려움-감정사회학으로 접근하는 마가복음의 오클로스” 등 트라우마와 관련된 다수의 글을 발표하였다. 현재 한신대학교 조교수로 신약학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