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지하 전쟁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아테네 공항과 민숭민숭한 나무 없는 야산과 하얀 색이 주종을 이루는 도심의 색깔이 퍽 단조롭게 느껴졌다. 나무가 자랄 수 없을 만큼 온통 대리석으로 뒤덮인 산세는 그렇다치더라도 찬란한 문명의 발생지답지 않은 위용인 것 같았다. 탁 트인 바다와 공항이 맞물고 서 있는 것이 그래도 섬의 나라, 바다의 나라답다는 생각을 했다. 기후 때문에 게으른 국민성을 갖고 있다는 나라, 관공서도 오전 근무만 하고 은행은 두 시 이후에 사용해야 하며 물건을 사려면 세 시 이후, 그것도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 세 번 뿐이며 낮잠을 자야만 유럽에서 못 사는 축에 끼이면서도 국민소득은 사천 오백 달러라고 했다. 조상을 너무 잘 만나서 잘 먹고 잘 사는 나라인지도 모른다. 곳곳에 보이는 그리스 정교회당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저 교회당 신부들은 굉장한 부자야.' "세상에...... 우리 나라 부자 목사들이 탐낼라." "여긴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모든 게 교회와 연결이 되어 있어서 신부가 부자일 수밖에 없어. 이름도 지어 주고 결혼신고도 해 주고 사망신고까지도 다 책임지니까." "그렇다고 성직자가 부자 돼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장가나 갔으면 몰라도." 돼도 그만이니까." "소문내지 말아야지...... 우리 나라 사람들 떼로 몰려올까 겁난다." "더 재미있는 건 결혼할 때 여자 쪽에서 집도 사가지고 가고 자동차도 사가고...... 남자는 침대만 사면 되는 제도야." "우와, 소갈머리 없는 우리 나라 사내놈들 벌 떼처럼 몰려오겠다." "대신 재산상속은 모두 여자에게 하게 되어 있어." "그러면 그렇겠지." 사회보장이 잘 되어 있어서 국민학교부터 대학까지 모두 공짜로 다닐 수 있고 장학금 혜택이 풍부해서 생활비와 문화비까지도 충당할 수 있는 나라였다. 내가 공항에서 숙소까지 달리는 동안 차 현수막을 목격한 것도 열 댓 건은 넘었다. 학생은 물론이고 비행기 조종사나, 은행원, 공무원이나 교수들까지도 마음 놓고 데모를 할 수 있는 나라라고 했다. 정기적으로 미국 추방 데모가 열리는데 그리스 시민 가운데 미국 시민권 가진 자가 일백만 명이 넘는다는 사실은 이 나라의 정치가 불안하다는 징조를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리스는 도둑과 거지가 없는 나라야. 십 육 면짜리 신문에 도둑에 관한 기사는 거의 나는 일이 없고 도둑을 잡았다면 거의 외국인 소행야. 얼마나 일하기가 싫으면 껌까지도 외국에서 수입해다 씹는지 알면 이해가 갈 거야. 부활절이면 이 주일간 휴무고 법정 휴가도 "기분 나쁠 만큼 살기 좋은 나라구나. 어째서 우리 나라엔 그런 혜택을 빼놓았을까?" "다른 복을 주기 위해서였겠지." 극장 앞엔 오토바이 행렬 위에 책가방이며 옷가지를 그냥 늘어 놓은 채, 자물쇠도 채우지 않고 팽개쳐 둔 것들이 수두룩했다. 그렇게 한 달을 두어도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것이었다. 가로수의 과일들은 그냥 땅바닥에 떨어져 썩고 있지만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 사람들은 내 물건이 아니면 거들떠보질 않아. 대문이고 창문이고 죄다 열어놓고 살아." "어쨌든 기분 좋은 나라다." 엉망진창이 된다든지, 늦가을쯤 되어야 비가 오고 봄과 여름엔 비 한방울 볼 수 없는 나리이지만 왠지 비행기에서 내려다볼 때와는 다른 썩 기분 좋은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사는 나라들 속에 있는 강탈과 도둑질과 살인과 비열한 행위들에 비하면 조금 못 살더라도 이들처럼 인간답게 사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삶인 것 같았다. 어쩌면 이들처럼 사는 것이 기분 좋은 삶이 아닌가 싶었다. 올리브 나무가 많은 것은 박토인 그리스에 알맞은 나무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일행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안내원으로부터 도시락을 받았다. 작전 개시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 예약된 호텔로 어디로 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바닷가로 시원하게 뚫린 길을 달리고 있었다. 희랍 조각처럼 윤곽이 또렷하고 큰 눈망울을 한 스무 살 남짓 된 여자가 앞자리에 앉아 유창한 불어로 혜라와 얘기를 주고받았다. "조금 가면 고린도 운하가 나온대. 그 근처에서 도시락을 먹고 커피 한 잔쯤 할 시간이 있을 거래." 겨울인데도 바닷가에는 수영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기껏 추워야 영 도 정도라고 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빗낱 한방울 없어 죽은 듯 서 있던 초목들이 겨울이 되면 빗물을 받아 산천이 푸르러지는 이 지중해의 귀빈이라는 그리스가 차라리 부럽기조차 했다. 물론 수없이 열강에 시달려서 살아온 역사를 "여기가 바로 훼드라의 현장이래." 혜라가 언덕 위로 구불구불 경사가 이루어진 길가에서 낭떠러지 아래 바다를 가리키며 말했다. "<<죽어도 좋아>> 란 그 영화 말이지?" "맞아. 희랍 신화에서 소재를 얻어 현대식으로 영화를 만든 거였어." "여주인공이 기가 막혔지." "그 여자 주인공이 지금 그리스 문화공보부 장관야." "현직이란 말야?" "그렇다니까." 훼드라, 죽어도 좋아. 정말 가슴 찡한 영화였었다. 희랍신화를 현대화해서 만들어진 아주 진한 사랑의 종말. 사랑해서는 안 될 사이면서 너무 진하게 그 진하디진한 사랑 이야기를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언제고 다혜를 사랑하다가 그 영화의 주인공처럼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었다. 다혜를 사랑했기에 나는 지금 평생이 가볼까말까한 그리스 땅, 그것도 훼드라의 현장을 지나고 있는 것이었다. 죽어도 좋아. 죽어도 좋아. 나는 자꾸 이렇게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고린도 운하 앞에 차를 세웠다. 깎아지른 절벽의 높이가 팔십 미터나 되고 폭은 이십 오 미터, 길이가 육 킬로미터나 된다는 이 웅장한 운하를 어떻게 팔 수 있었는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대지진으로 땅이 갈라진 듯싶은 이 운하를 보면서 인간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설명했다. 불어로 지껄이기 때문에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눈치로 어딘가에 잠깐 들렀다 가자는 것 같았다. "아크리 고린도에 잠깐 들러 구경하는 게 좋겠대. 작전지시가 아직은 없으니까 괜찮지 않겠느냐는데......" "지금 우리가 구경할 정신이 어디 있어?" "그럴 정신은 만들면 돼. 무슨 뜻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닐까 싶어." "그럼 가보자." "고린도는 고대에 작전상 아주 중요한 위치였거든. 배가 편편한 항구에 들어와 정박하는 게 아니라 깎아지른 절벽에 배를 대면 밧줄로 끌어올려서 항구가 아닌 것처럼 위장을 했다는 곳이야. 그것보다 더 유명한 건 사도 바울이 설교하다가 잡혀와 고린도 전서와 같은 성경은 바울이 이곳 주민들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모아져서 된 것이래. 세계 최초의 공중변소도 있는데 수세식이래. 돌로 만들어졌다는데 수세식이라니까 궁금하기도 하잖아." 혜라는 내가 머물다 가기를 바라는 눈치 같았다. 내 조급함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려는 속셈인지도 모른다. 차를 세우고 고린도 언덕에 올라가 옛 도시국가 자리에 들어선 현대식 도시의 면모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나라의 풍수지리설이 얼마나 현명한 논리인가를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앞이 터지고 뒤를 받쳐 주며 시원한 물줄기가 있는 곳이 바로 사람 살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고린도 지역은 지진으로 유명한 곳이어서 곳곳에 역력히 보이는 곳이 많았다. 다행이라면 지반이 돌이어서 큰 피해는 없다고도 했다. 건물이나 유적지가 무너져도 부서진 그대로 보존하는 특성을 지닌 나라였다. 자연의 힘으로 무너진 것을 인간의 힘으로 다시 바로잡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닦고 조이고 억척스럽게 가두어 놓고 손도 못 대게 하는 문화 보존형태인 데 비해 그리스는 있는 그대로 팽개쳐 둔 것이었다. 하긴 프랑스는 전리품이고 그리스에 비해 월등하게 부족한 숫자에다가 문화재의 연한이 짧은 것이지만 그리스는 밟는 땅, 발에 채이는 돌맹이 하나, 풀 한포기마저도 희랍신화와 얽혀 있거나 전성기의 문명 발생지여서 어느 것 하나 문화재가 아닌 게 없는 나라였다. 말하자면 국토 전부가, 바다와 바닷속 깊은 곳까지도 모두가 가치 있는 문화재였다. 프랑스 문화가 얼마나 좀스러운 것인가를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세계 최초의 공중변소라는 곳은 요즘 생각하는 식의 수세식이 아니라 변기 밑바닥이 수로와 연결이 되어 물이 자연스럽게 흘러 깨끗하게 청소를 해 주는 것이었다. 이천 년 전에 건설된 공중변소치곤 참으로 감탄할 만한 유적지였다. "왜 여길 보여 주었는지 이젠 좀 알 것 같다." 내가 안내원과 거리가 뜸해진 사이에 혜라에게 말했다. "나도 알았어. 안내원 말에서 힌트를 얻었지?" "그래." 언덕에서 공격하고 물길을 따라 숨는 거야. 안내원은 이곳 출신이야. 그래서 당신에게 암시적으로 살 길을 터 주고 싶었던 거야. 작전지역은 배 대기 좋은 곳일테고 수송이 용이한 도로변일 거야. 당신은 노출된 상태로 접근할 수밖에 없을 거고 결국 당신은 희생타가 되는 거야. 안내원이 그랬지. 트로이의 목마를 이 언덕에 얹어놓았다고 생각하고 가장으로 전쟁극을 연상하라고. 트로이의 목마 속엔 한 사람뿐이라는 설명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겠어?" "그래. 내가 게으름을 피우는 거야." "맞았어." 우리끼리는 통하는 게 있었다. 안내원은 희랍 신화와 고대전쟁과 장수들의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제언 비슷한 얘기를 해 주었다. 모두 함정에 빠져 죽지만 게으른 장수만은 늦게 현장에 도착했기 때문에 골육상쟁 속에서 장수로서는 유일하게 살아남아 제왕이 되었다는 얘기는 가슴 철렁한 작전 지시나 마찬가지였다. 하긴 그랬다. 큐와 유다가 나를 앞장 세울 때는 총알받이로 내세웠을 것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수라장이 되었을 때 알맹이만 쏙 빼가면 아주 훌륭한 전쟁을 치른 셈인 것이다. 그들은 내가 살아나는 것을 달게 여길 턱이 없었다. 한두 푼도 아니고 수십만 달러를 내게 줄 까닭도 없고 일단 작전이 성공하면 나 같은 것은 오히려 귀찮은 존재일 게 빤했다. 그 약아빠진 일본녀석과 음흉한 간계의 소련녀석이 이유가 있을 턱이 없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한 군데를 더 봤으면 좋겠대." "어딘데?" "미케네 유적지." "황금덩어리가 쏟아졌다는 데 말야?" "그렇지." "나도 보고 싶다." 그리스인 여자 안내원의 곱고 맑은 눈빛에서 나는 한줄기 구원의 빛 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 그녀도 큐와 유다의 조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여자였지만 내 예견된 죽음에 대해서만은 안타까움을 가졌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선한 면이 있기 마련이고 특히 죽음을 목전에 둔 모른다. 우리는 일부러 최고 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우리를 감시하고 있을지 모를 전자감시자들의 예리한 눈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내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는 여자 안내원에게서 신화에 얽힌 전술이나 내가 살아날 묘안 같은 걸 더 얻어내고 싶었다. 카폰으로 우리의 행방을 체크하는 전화가 금방 왔다. 혜라는 적당히 둘러붙이는 눈치였다. 계곡을 끼고 산등성이엔 삼천 오백 년 전의 찬란한 미케네 문명지가 펼쳐져 있었다. 무덤 자리에서만 십 사 킬로그램의 황금붙이를 꺼냈다는 왕릉, 트로이 전장에 나갈 영웅들이 모여 작전을 짰다는 성곽, 왕궁의 바닥과 벽과 천장이 모두 내부, 바람 잘 통하고 물이 풍부한 계곡, 지금은 허물어지고 옛날의 전성기 모습이 일부만 남아 있는 궁성, 현대장비로도 감히 들어올리기 어려운 어마어마하게 큰 바위덩어리의 사자상이 입구의 기둥 위에 얹혀진 불가사의한 흔적들...... 그 아래의 아가멤논 왕릉이라고 한때 소문이 났던 돌무덤의 웅장함과 그 안에서 쏟아졌다는 보화의 종류들에 얽힌 이야기가 마치 희랍 신화를 활동사진처럼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저 가운데 구멍 때문에 이 무덤이 발견됐대. 열쇠구멍인데 산짐승이 뛰어다니다가 푹 빠지는 바람에 세상에 알려졌대. 발견 당시에 너무 보석이 나오니까 미케네 왕 가운데 가장 보석이 많았던 아가멤논 왕의 무덤이라고생각했다지. 그런데 사실은 도굴꾼들이 먼저 발견해서 좋은 건 다 빼갔는데도 그렇게 무지무지하게 많은 보석이 쏟아졌다니......" "우리 나라에도 유명한 재벌 집안이 도굴 솜씨로 문화재깨나 챙겼다잖아. 그래서 고매한 인격자 대접도 받고 품위 있는 학자 대접도 받고 말야." "그런데 왜 여길 저렇게 강조하며 보여 줄까?" "저 구멍 때문이 아닐까?" "슬쩍 물어볼까?" "그래." 혜라가 구멍을 가리키며 뭐라고 물었다. 나는 그 사이에 제사 지내던 방을 한바퀴 휘둘러보았다. 내려와 부장품을 훔쳤다는 거야. 입구를 찾아 헐게 되면 다 실어갈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들키기 때문이라는 거야. 혼자 줄타고 내려갈 수는 있지만 밖에서 돕는 사람이 없으면 어렵지 않겠느냐고 나한테 되물어. 그래서 까놓고 물었지. 그랬더니 배에 구멍이 뚫리면 어찌 되겠느냐고 또 되물어. 가라앉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말했더니 그렇게 되면 가장 소중한 것부터 옮기지 않겠느냐는 거야. 그러면서 신화에 의하면 필요 없어진 인질은 없애거나 노리개가 된다는 얘기가 있다고 말했어." 그 얘기를 하는 혜라의 낯빛이 별로 좋지 않았다. 안내원의 말뜻을 간결하게 전했지만 그녀가 짐작하는 앞으로의 상황 때문에 표정이 어두워진 것 같았다. 배에 같았다. 그러나 인질의 가치가 상실된 마당에 인질의 앞날이 걱정스럽다는 암시는 가슴 서늘한 것이었다. 다혜는 내가 작전에 돌입하는 순간부터 인질의 가치는 제로가 되는 여자였다. 어차피 나를 작전 도중에 죽여 없애겠다면 더더구나 쓸모가 없어진 존재였다. 쓸모 없는 여자의 효용가치는 노리개이거나 비밀을 위해 없애 버릴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침착하자." 오히려 내가 혜라를 달랬다. 침착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될 불리한 여건만 가진 사람들이었다. 부딪치다 죽을 때 죽더라도 냉정한 가슴을 가질 시간이었다. 자동차가 미케네 유적지를 빠져나와 다시 해안도로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길가마다 십자가를 보였다. "저건 뭐냐?" 내가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혜라에게 일부러 큰소리로 물었다.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워 놓은 거야. 옛날엔 목동들이 일요일에 양 몰고 산에 올라가서 예배를 보던 곳인데......" "내가 여기서 죽으면 저런 거 하나쯤 누가 세워 줄까?"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마." 표독스러우리만큼 큰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답답한 심정을 짐작하는 나로선대꾸할 말이 없었다. 지중해와 바닷가, 잔잔하고 맑아서하고 너무 하늘빛이 짙게 드리워져서 차라리 먹물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하는바닷가. 카폰으로 지시된 장소는 단체 휴양객이 머무를 수 있게 꾸며진 한적한휴양지의 나루였다. 지중해. 그 잔잔하고 널따란 바다 위엔 몇 척의 배가 나루를향해 아주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다. 바닷가엔 요트를 타는 사람들과 수영하는사람들이 있었다. 모래밭 뒤의 아스팔트 길 위엔 세 대의 특수차와 두 대의 지프가한켠으로 늘어서 있었다. 헬리콥터 한 대가낮게 바다 위를 선회했고 국도의중간중간에도 미니버스와 트럭, 승용차와 지프, 냉동차처럼 덮개를 씌운 차량들이일정한 간격을 두고 늘어서 있었다. 우리는 계곡 옆에 차를 세워 둔 채 돌산으로작전을 대조해 보았다. 모터 보트와 소형 선박이 문제의 물건을특수차량에 나누어 실으면 국도를 따라 호위를 받으며 달릴 것이고 나는 반대방향에서 차량사고를 위장한 환자처럼 기다리다가 계획대로 특수차량 경비원들을쓰러뜨린 뒤 큐와 유다에게 인계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미 탈취지점은 결정되었다. 해변을 따라 연결되는 완만한 경사의 도로는 서로 노출되는 지점이어서 우리가 선택한 것은 쌍굴이 있는 벼랑 같은 곳이었다. 멀리서 보면 길 가운데 큰 장난감 물안경 같기도 한 바로 그 쌍굴에서 번개불에 콩 구워먹듯 작전을 끝내고 우리측의 호위를 받으며 도망치는 것이었다. 망원경으로 사방을 살펴본 혜라가 말했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군." "어떻게 할 생각야?" "쌍굴에서의 작전은 그대로야. 그러나 양쪽의 경비가 너무 삼엄해. 경비를 대폭 줄여야 되겠어." "뭐라구?" 혜라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양쪽의 경비원을 줄인다는 것인 이 시점에서 터무니없는 구상이기 때문이었다. "안내원이 준 계책야. 이쪽에서 먼저 배를 공격하게 만드는 거야. 쌍굴 가까이 차가 왔을 무렵에. 그래서 양쪽 경비가 산만해지고 서로 치열하게 붙을 때 우린 탈취해 가지고 절벽 뒤 산으로 빠지는 따라 도망치게 해야지. 그러면 그 차를 따라가는 사이에 우리는 거꾸로 튀는 거지. 그리고 큐와 유다를 잡는 거야. 그러면 다혜도 구하고 물건도 챙길수가 있어." "누가 속을까?" "가짜 무전을 치는 거야. 탈취해 보니까 위장전술이더라, 물건은 하나도 없고 빈 상자더라고. 그러면서 배를 공격하라고 부추기면 큐와 유다가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이니까 공격할 거고 저쪽은 저쪽대로 반격을 하겠지. 그럼 두 팀으로 붙여놓은 우린 사라지는 거야." "그럴 듯해. 하지만 물건이 보통 많은 게 아니고 사람도 우리에겐 없어. 그 물건을 어떻게 운반할 거야?" "절벽 위로 올리기만 하면 돼. 그리고 거니까 울가미에 걸려도 그 물건 때문에 막 다루진 않을 거 아니야." "안내원...... 그래, 당신에게 그 암시를 준 거였어. 미케네 유적지에서 구멍으로 부장품 훔쳐냈다는 걸 쌍굴에서 물건을 빼내고 고린도의 군사기지에서 배까지 끌어올려 감쪽같이 위장하는 방법을 흉내내서 위장전술을 쓴다 이거잖아." "또 있지. 인류 최초의 수세식 공중변소에서 얻은 힌트인데 산위엔 강이나 물길이 없어. 그건 바로 바다로 빠지라는 암시야. 큐와 유다의 작전 지시 위치는 지도로 보면 분명 육지인데 상황으로 보면 배 안에 본부를 설치한 거야. 그러니까 내가 탈취에 성공하면 즉시 차량을 바꿔치기 한 후에 차량째 그대로 배에 싣고 수가 있어. 그것도 흐르는 물이라는 건 바로 섬과 섬 사이에 협로를 지칭하는 거야. 바로 여기와 여기에 섬이 있어. 이 지도가 엉터리가 아니라면 가장 빠르게 피신하는 방법은 섬이고 두개의 섬이라면 감시나 방어나 공격의 사령탑이 될 수밖에 없어. 더구나 무인도 표시가 돼 있어." "그럴지 모르지. 그렇다면 우리는 그대로 감시당하고 있어서 움직이는 대로 포착되잖아." "그 안내원이 들려 준 희랍 신화와 유적지 얘기를 잘 생각해 봐. 늦게 도착한 장수가 게으른 장수가 아니라 현명한 장수라는 말." "늦게 도착하면 일을 그르치잖아." "아니지. 가정 먼저 나타났다가 재빨리 거지. 왜냐면 우리가 너무 빨리 도착했다고 피하라는 연락이 올 거니까 우린 다시 뒤로 달리는 거야. 그래서 두 개의 섬에서 노출되지 않는 지점에서 차에다가 연막탄을 부착하는 거야. 쌍굴 앞에 도착하면 자연 차는 멈출 거고 큐와 유다는 우리가 해치운 줄 알 거고. 그리고 무전으로 속았다는 걸 알리면 공격을 개시할 테지. 그때 우리는 다시 쌍굴로 가서 기중기로 물건을 절벽 위에 감추어 놓고 차를 출발시키는 거야. 연막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숨겨질 거고 그렇게 되면 경찰이나 소방관이 달려오게 돼. 그땐 이미 두 팀이 노출되어 있어서 그리스 정부 대 지하조직의 싸움이 될 테지. 그 승부는 빤해. 정부 팀이 이길 수밖에 없어. 그러면 큐와 유다는 위장하기 미리 그 안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간단히 목을 옭아 쥘 수가 있어." "계획대로 되기만 한다면 절묘한 작전야. 그런데 우리 편은 당신과 나 둘뿐야. 기중기로 올려 줄 사람, 다시 차를 몰고 달릴 사람이 없어. 당신가 내가 아무리 일을 나누어 해도 기중기나 특수차량 세대를 한꺼번에 움직일 수도 없고 특수차량을 멈추게 하고 경비원을 잡을 수도 없어. 우린 둘뿐야." "아냐, 우리 뒤엔 우리 편이 될 녀석들이 한패거리가 있어." "미행시켰어? 언제? 정말?" 혜라가 놀라서 물었다. "안내원 몰래 쪽지를 보냈어." "언제? 왜 진작 말 안했어?" "미케네에서, 혜라한테 말 안 한 건 그쪽의 요구였어." "그쪽이라니?" "큐와 유다의 부하들......" "뭐?" "이해가 안 되겠지. 우릴 죽 미행한 또 다른 팀이 바로 훤틴불루에서 살아난 그 친구들이지." "살다니?" "내가 몰래 살려놨지. 생혈을 짚어서 사혈을 풀었어. 그걸 안 거지. 고수들이니까." "놀랬네." "그런 말을 할 시간이 없다. 서두르자." 혜라는 갑자기 밝아진 얼굴이었다. 그리스인 안내원이 엄지손가락으로 걱정 말라는 신호를 보내 주었다. 해서 가차 없이 죽여 없애는 큐와 유다의 비열한 행위에 반감을 품은 그들이 우리를 미행하고 있다는 걸 안 것은 바로 파리의 뒷골목에서였다. 혜라한테 말하지 않은 것은 그들 패거리가 지켜본다는 걸 알면 다른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혜라를 믿는 만큼 믿지 못하는 면도 적지 않았다. 오로지 나를 위해 죽음을 각오한다든지 내가 다혜에 대한 사랑이 그렇게 뜨거운데도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따위가 보편적 시각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큐와 유다의 조직의 입장으로 보면 혜라의 행동은 죽음을 각오한 것이었다. 내게 죽음을 걸 만큼의 각오라면, 더구나 오래 전부터 사귀어온 사이도 아니고 일방적인 노출시킨다면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헬리콥터가 바다 위에 해변도로를 낮게 감시하며 몇 척의 배 주위를 계?돌고 있었다. 우리 쪽에서도 헬리콥터만 동원할 수 있었으면 우리 작전이 보다 안전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했다. 쌍굴위와 엄폐된 도로 옆과 특수차량을 들어올릴 만한 기중기를 조정할 기사와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경비요원들이 모두 제 자리에 숨어 있다는 엄지손가락 신호를 받고 내 가슴은 또 뜀질하기 시작했다. "한 가지 말해 둘 게 있어." 혜라가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말했다. 플레어 스커트에 어울리지 않는 스포츠화를 신고, 얇은 점퍼 속이 불룩한 것으로 가볍게 어깨에 걸린 가방 속에도 성능 좋은 무기가 하나쯤은 들어 있을 것 같았다. 만약 내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사용할 수 있는 다목적 호신장비를 준비할 정도로 세심한 여자였다. 그래도 내가 막판까지 믿지 않는 것은 그녀의 진정한 속셈이 어디 있는가를 판단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성급한 생각인지 모르지만 내가 승자가 될 수 있게 뒤를 살펴 준 뒤에 그 엄청난 재물을 감쪽같이 빼돌릴 구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품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말해." "당신 작전이 성공해서 그 엄청난 재물을 손에 쥐면 어떻게 하겠어?" 마음 속 한켠이 섬뜩한 얘기였다. "몽땅 널 줄게." 그녀가 원하는 대답일 것 같아 이렇게 말했다. "재물이 탐나면 벌써 얻을 만큼 얻을 수 있었다는 걸 좀 알고 말해." "나도 그까짓 재물쯤은 갖고 싶지 않아. 그렇다면 바다에 아예 수장해서 못 쓰게 해 버리자." "마약 같은 거나 비밀문서들이야 없애도 그만이지만 정말 진귀한 보물들은 어떡하지?" "네가 가져. 시집 갈 때 쓰든지......" "그럼 결국 당신 꺼가 되겠네." "무슨 소리야?" "왜? 뜨끔해?" "그래, 뜨끔하다." "난 살아서든 죽어서든 당신 꺼니까 내 혼백이라도 당신한테 시집 가고 말 거야. 당신은 우습게 듣겠지만 내 말 명심해얄 거야. 내가 내 욕심 채우다 죽으면 가마귀 밥이 되게 내버려 두거나 고기밥으로 바다에 던져넣어도 그만이지만 당신을 살리기 위해 죽는다면 나하고, 성한 당신 혼백하고 혼백결혼을 해 줘야 해." "지금 그렇게 낭만적인 얘기를 할 때가 아니다." "약속해 줄 수 있어?" "그러다가 내가 다혜한테 장가 가면 네가 귀신이 돼서 밤마다 산발하고 나타날 거냐?" "그럴 거야." "무서워서라도 그래야겠구나." "장가 가는 건 찬성, 대찬성할게. 혼백결혼만은 해 줘. 혼자라도 좋아. 맹물 떠놓고 혼자 주례 서고 혼자 신랑되고 혼자 중얼거려도 괜찮아. 어차피 난 당신이 기억해 주는 걸로만 족하니까." "질기다." "난 찰고무니까." "그렇다 치자, 죽은 사람이 뭘 아냐?" "나중에 안 해도 그만야. 그냥 그러마고, 거짓말로라도 대답이나 해 줘." "거짓말로야 무슨 말을 못하냐?" "그러니까 당신을 위해, 당신을 살리기 위해 죽었을 땐 그러마고 대답해 줘. 빨리." "거짓말로 대답하마. 네 말대로 해 줄게 걱정마라." "됐어." 별스런 여자도 다 있었다. 계속 종알거리며 악착같이 내 대답을 들으려 하는 혜라에게 나는 분명히 거짓말이라는 전제 아래 대답을 하고 말았다. 이 절박한 상황 아래서 나는 살 길이 막연했고 그녀가 도와 주면 살아날 가능성과 다혜를 구해 낼 가능성이 더 많아진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죽거든 내 가슴 속에 쪽지가 있으니까 그걸 펴봐." "내가 영화 주인공만 같다. 하도 엉뚱한 소릴 해대니까." "주인공이 될 거야." "그나저나 그 재물은 네가 죽고 나면 쓸모가 없잖아?" "당신 맘대로 해. 어차피 난 그런 재물 따윈 관심도 없으니까." "얼마치쯤 될까?" "그렇게나 많아?" "지하조직이 그걸 입수하면 이것저것 해서 수천억 원도 더 칠 테지만 마약이나 지하조직의 비밀문서 따윈 우리에게 가치가 없는 거니까." "그것만 한몫 잡으면 떼부자가 되는데 왜 싫다는 거냐?" "그런 당신은 왜 싫다는 거지?" 혜라가 밝은 표정으로 물었다. "내 팔자에는 평생 돈하고 인연이 멀지. 물론 엄청나게 부자였으면 싶을 때가 없는 건 아냐. 억울하고 배고프고 돈 없어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볼 경우마다 집어치우고 돈이나 벌어서 신나게 그런 사람들에게 쓰고나 죽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그러다가도 막상 돈 벌 일이 생기면 쑥 사람 되게 해 준 무초 스님이 그랬어. 네 꼴에 재물이 붙으면 큰일 날테니까 아예 평생을 있으면 쓰고 없으면 굶는 그런 신세가 되라고. 그게 가장 마음 편한 거라고." "그럼 이 기회에 그런 사람들한테 쓰지 그래." "그 보물을 팔려고 해도 너무 엄청나서 팔 데도 없고 살 사람도 없겠다." "그렇긴 할 거야. 세상에 진귀하다는 건 죄다 모아가지고 있다는 소문도 있으니까." "우리 나라에서 빼돌린 것도 있겠구나. 청자나 백자, 또는 국보급 유물 같은 거. 일본 애들이 삼십 오 년 가까이를 털어먹으면서 알짜들을 다 훔쳐갔으니까. 또 도굴꾼들이나 돈푼깨나 있는 친구들이 "내가 듣기로도 조금쯤은 있나 봐." "그건 악착같이 챙겨야지. 그리고 나머지 보물은 굶어 죽는 아프리카나 줘 버렸으면 좋겠다. 내 것도 아니고 우리 나라 것도 아니고...... 세상 천지에 탈취해서 모아진 지하조직 거니까 말이다." "그건 아주 좋은 아이디어야. 당신 이름으로 줘 버려." "그건 싫어. 신문에 이름 나는 거 좋아서 의연금 내고 성금 내는 것 보면 구역질이 나는 놈이다. 아마 이름 안 내주면 그렇게 거둬들일 수 없는 세상이긴 하지만. 예수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마저 모르게 선행을 하라고 했는데, 요즘 세상은 온 천하가 다 알아야만 낸다니까. 무기명으로 보내는 게 내 의사다." "잘 산다고 큰 소리 치는 놈의 나라에서 기절하겠지.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 사람으로 이름을 밝히지 않는 사람이 내놨다는 말은 악착같이 하겠다." "좋아." 우리는 의기가 통했다. 하나님. 하나님은 혹시 배고파 보지 않으셨나요? 갈비뼈가 앙상하고 뼈 위에 살짝, 정말 살짝 살가죽만 입힌 어린아이들 사진을 못 보셨나요? 도살장에서 십수 년 소의 살을 바르던 사람의 솜씨처럼이나, 인간의 모습을 그리도 흉하게 기아에 허덕이게 해 놓으신 장본인이 설마 하나님은 아니시겠죠. 온 세상 일을 다 관장하시는 하나님이 설마 그러실 수가 대역죄를 저질렀거나 하나님을 무지막지하게 모독했거나 그랬겠죠. 그것도 아니라면 세상의 인구가 너무 많으니까 나머지 인구나 편히 살라고 아프리카 쪽에다 대고 그렇게 저주하셨을리도 만무하고...... 하나님이 인간의 생사를 좌우하시는 마당에 태어나게 해 놓고 굶어 죽게 내버려 두실 만큼 하나님이 모지락스러운 양반은 아니잖습니까. 하나님. 잘 산다는 미국이나 일본이나 유럽의 여러 나라들, 원조하는 일에 눈의 불을 켜고 무기며 군량품이며를 억수로 제공하는 큰 나라들이 어째서 저리도 얌전해졌습니까? 그 나라에 석유가 펑펑 나오든지 핵무기 만들 때 쓰는 물건이 않겠죠. 도대체 요즘의 하나님은 뭘 하시는 겁니까? 당구나 치고 계신 거 아닙니까? 아니면 백 칠십 육 점 인가까지 난다는 그 무시무시한 팔공산 고스톱을 치시느라고 그렇게 무심하십니까? 그도 아니면 기절초풍 고스톱이라고 해서 팔공산 광 한 장 빼놓고 몽땅 쓸어다가 점수 계산하는 삼백 육십 점 나온다는 고스톱을 치고 계신 겁니까. 그렇잖다면 시간 끌지 마시고 빨리 세상 돌아가는 꼴 좀 보시고 빗자루 들고 내려오셔서 쓸어 버릴 것은 좀 쓸어 벼려 주세요. 이거 매일 아침 저녁 청심환하고 뛰지 않게 하는 약을 먹어야 겨우 살아갈 세상이 아닙니까. 하나님, 하나님도 아실 겁니다. 내 꿈이 황제가 되는 것이라는 걸. 사 년이고 칠 년이고 한 번씩 출마하고 굽신거리고 눈물 흘리고 입술에 침 바르며 사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민주주의인 척하는 선거가 아니라 세세연년 해먹다가 내 자식놈이 또 죽을 때까지 해먹고 또 손주놈이 해먹고...... 그렇게 지구가 없어질 때까지 마르고 닳도록 해먹는 황제 말입니다. 대한민국 황제 말고 세계를 쥐고 흔드는 황제 말입니다. 나를 그거나 좀 시켜 주십쇼. 아마 평생 기도를 하고 헌금을 하고 아양을 떨고 굽신, 꺼벅 기절초풍을 해도 들어 주지는 않으시겠죠. 왜냐면 내가 그런 않는 나라들, 일테면 일본이니 소련이니 미국이니...... 그런 나라들을 싹싹 비질해서 없앨 거라는 걸 너무도 잘 아시는 까닭일 겁니다. 하나님. 부탁이 있습니다. 옛날처럼 가끔씩 핏대 좀 내십쇼. 작전 개시를 알리는 신호가 떨어졌다. 배 턱에서 짐을 부린 배들이 돌아서자 특수차량과 호위차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봉우리에서 가볍게 연기도 솟았다. 그것은 나와 혜라와 안내원 그리고 이제 한패가 된 사내들만이 아는 준비 완료 신호였다. "전속력으로......" 내 명령대로 자동차는 질주하기 살피는지 한바퀴 회전하며 사라졌다. 카폰을 내려놓고 무전기의 주파수를 엉뚱하게 맞추었다. 쌍굴 앞까지 와서 카폰과 무전기를 정상으로 돌려놓았다. 벼락같이 무전기와 카폰이 울렸다. "너무 빠르대, 빨리 비켜서래. 눈치 채지 않게." "으흐흐...... 내가 너무 음흉했나? 그럼 당연히 피해 드려야지." 내 작전이 바로 그거였다. 안내원의 말처럼 늦게 도착하기 위해 너무 빨리 달려와 버린 것이었다. 우리는 또 최고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카폰과 무전기는 개방한 상태였고 속도계는 백 오십을 가리키고 있었다. 엄폐가 되는 지점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도록 조작을 했다. 둑 옆에 숨어 있던 사내들이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지프의 호위를 받으며 달려오던 특수차량들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 순간에 가스총을 맞은 경비원과 운전사들이 맥없이 코를 박았다. 나는 수신호로 빨리 바꾸어 타라고 신호를 보냈다. 순간의 일이었다. 우리 패거리들은 시체 같은 사내들을 계곡 쪽에 밀어놓고 태연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산불난 것처럼 위장을 한 산마루를 감시하던 헬리콥터가 달려왔지만 고장난 우리 차 외엔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은 현장을 한바퀴 돌더니 다시 특수차량 달리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쌍굴에 도착했어. 소리쳤다. "신호를 보내." "됐어." 지프와 특수차량은 짙은 연막 속에 가려졌다. 차량 뒤에 수백 발씩 붙어 있는 연막탄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었다. 안 봐도 상황은 뻔한 것이었다. 쌍굴 안에 숨어 있던 기중기 조작반이 특수차량 안의 재물들을 재빨리 절벽 위로 옮기고 있을 것이고, 헬리콥터도 연막 때문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무전을 보내. 카폰도 좋고, 잘 들리는 걸로." "카폰이 좋아." "그럼 아까 그대로 말해, 속았다고. 위장이라고. 정면전을 하라고. 우리 편이 유리하니까 갈겨 버리라고. 배는 가라앉히면 그만이니까 경찰이나 해안경비대가 오기 전에 기습하라고." 혜라는 아까 우리가 짠 대로 전화기를 잡고 일부러 성급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큐와 유다가 망설이는 눈치였다. 혜라는 마지막 기회라는 걸 강조하는 것 같았다. 조금 뒤였다. 바다 위를 맴돌던 헬리콥터가 불더미로 변하며 추락하더니 연달아 배가 불기둥이 되기 시작했다. 언덕과 해변가에서 섬을 공격하는 포소리가 하늘을 진동시켰다. 특수차량은 일을 끝냈는지 해안도로를 마구 달리고 있었다. 특수차량은 속력을 일부러 더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섬에도 연기와 불기둥이 자욱해졌다. 쌍방이 치열하게 전투를 갔다. 아직도 연막탄의 잔해 때문에 연기가 채 가시지 않은 쌍굴에서 무전기를 열었다. "특수차량 뒤를 추격하래요. 해안선 저쪽에 우리팀이 대기하고 있으니까 거기까지만 몰아붙이래요." "알았다고 해." 무선통화가 끝나자마자 우리는 대기하고 있던 사내에게 우리가 타고 왔던 차를 내 주었다. 무전기와 카폰의 연결선을 빼내고 배터리와 송수화기를 바다에 내던져 버렸다. 어느 정도 우리가 타고 다녔던 차가 해안도로까지 빠져나가도록 우리는 숨어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되짚어 거꾸로 달렸다. 엄폐된 지역에서 망원경으로 섬의 사각지대가 관찰되었다. 것은 이십여 분간 쌍방이 치열하게 격전을 벌인 뒤였다. 바다 위엔 수십 척의 빠른 배들이 멀리서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는 게 보였다. 무인도를 빠져나오는 모터 보트는 큐와 유다가 위장술로 현장을 빠져나오는 전략대로 해안경비정의 눈을 피해 해안선 깊숙한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내 작전 구상대로 한치도 틀림없이 진행된 것이었다. 우리는 해안선 풀더미 속에서 작은 고무 보트, 동력이 장착된 고무 보트를 찾아내서 어선으로 위장된 해상본부로 달렸다. 어선을 경비하고 있던 네댓 명의 경비원들은 우리에게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혜라와 나는 두 손을 들고 배에 간신히 뛰어 올랐다. 그 순간이었다. 바람을 가르며 애써 만든 표창이 날았다. 방아쇠를 잡고 긴장해 있던 사내녀석의 총구에서 총성이 울리기도 했다. 갑판에 쓰러진 녀석들에게서 총기를 회수해 바다에 던져넣은 혜라가 망원경으로 해안선을 막 돌아나오는 모터 보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시체처럼 늘어진 녀석들을 선실에 처넣고 뱃머리 조종실로 들어갔다. 모터 보트가 경적을 두어 번 울렸다. 나도 경적을 같은 식으로 반복해 울려 주었다. 모터 보트가 속력을 줄이더니 강한 후진 엔진을 동작시켰다. 보트가 어선 가까이 왔다. 선실 쪽에서 갑자기 요란한 총성이 들렸다. 모터 보트가 갑자기 속력을 높여 옆으로 비켜섰다. 갑판 밑에 갇혀 있던 녀석이 무기를 찾아내어 난사되듯 갑판과 선미를 마구 갈겼다. 고성능 탄환이어서 금세 조종실이 박살이 났다. 숨어 있던 혜라가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총성이 멎었다. 혜라가 갑판 가운데로 천천히 걸어갔다. 선실에 있던 녀석이 내 등 뒤를 겨냥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나도 별수 없이 선실 밖의 갑판 위에 혜라와 나란히 섰다. 우리를 겨냥하고 있는 모터 보트의 총구가 여러 개였다. 한 방 맞으면 산산이 부서질 수밖에 없는 특수 병기 같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야. 우선 살아놓고 봐야지." "저녀석들이 살려 줄까?" 내가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물건이 우리 손에 있으니까." "내가 표창을 확인하지 않은 게 실수였어. 설맞은 녀석이 있었다는 걸 몰랐어." "선실에 무기가 있었다는 걸 몰라서 생긴 일야. 워낙 급했으니까." "이제 어쩌냐?" "마구 다루진 않을 거야. 야마모도가 챙겨가지고 튀었다고 우선 둘러붙여. 그리고 기회를 봐야지. 구두 밑창에 감춰둔 걸 잊지 마." 혜라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내게 준 다목적 호신장비를 뜻하는 것이었다. "상대는 대여섯 명이다. 기회는 많을 테니까 몸을 아껴." "물건 찾기 전까진 우릴 못 죽여. 그리고 기관실이 엉망이라 이 배는 더 이상 못 움직일 테고." "내가 기회를 얻었다 싶으면 무조건 바다로 뛰어들어. 수영엔 자신이 있겠지? 길으면 십 분야. 그 동안만 떠 있어." "내 걱정 말고......" 모터보트가 어선의 옆에 바싹 붙고 총을 든 사내들이 뛰어 올라왔다. 나와 혜라를 밧줄로 묶고는 기관실을 점검했다. 모터 보트엔 큐와 유다가 상기된 표정으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를 모터 보트에 옮겨 싣고 해안선을 따라 물보라를 남기며 쾌속으로 내 달리기 시작했다. 혜라가 큐와 유다의 말에 뭐라고 대꾸했지만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찾더라도 우릴 죽여 없애겠다고 공갈인데. 야마모도가 챙겨가지고 튀었다고 해도 안 믿어. 생혈을 짚어서 살려 줬다고 해도 말야." "특수차량이 비어 있다는 걸 알 텐데?" "그래도 막무가내야." "우릴 어디로 데려간다는 거지?" "아직은 모르겠어. 예비본부가 있겠지. 어선이나 상선으로 위장된 배가 있을 거야." "야마모도가 눈치를 챘으면 좋겠는데." "어려울 거야. 만나기로 한 지점까지 뒤도 안 돌아다보고 달렸을테니까. 이들이 얼마나 무서운 집단인지를 그들이 더 잘 아니까." 해안선을 돌아 절벽 길 아래의 작은 속력을 줄였다. 유람선 한 척이 휴양지의 배 턱에 비스듬히 서 있었다. 우리는 다시 유람선으로 옮겨졌다. 한 사십여 명이 탈 수 있는 갑판의 좌석과 선실이 준비되어 있는 비교적 깨끗이 단장된 배였다. 유람선에도 서너 명의 패거리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상대할 사내들이 많아진 셈이었다. "물건 있는 곳을 대지 않으면 다혜를 죽이겠대. 당신이 보는 앞에서 직접." "그럼 시간은 벌겠구나." "아니지. 한 시간 이내에 다혜를 데리고 올 수 있대." "예상대로구나. 나를 옭아놓기 위해서 계속 끌고 다녔을 거라는게." "이 사람들이 누군데......" 나갔다. 한 곳에 오래 정박 할 수 없는 이들이 사정 때문이겠지만 육지와 멀어지는 일은 우리에게 점점 더 불리해지는 것이었다. "타협하겠대. 애초 약속한 금액의 두 배를 주고 다혜와 나까지 무사히 보내 주겠대." "그런 조건이라면 당연히 응해야지." "어리석은 생각야. 물건만 찾으면 그 순간에 당신은 죽게 돼." "흥정하는 체라도 해얄 거 아니냐." "그야 물론이지." "다혜를 이곳으로 데려오는 게 우리에게 불리하지 않을까? 만약의 경우에 다혜라도 살아 있게 해야잖아." "당신 차암...... 독해. 나는 그럼 엉겁결에 던진 말이었는데 혜라가 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니고 우리가 행동하는 데 제약을 받지 않겠느냐 이 말이다." "아무래도 좋아요. 다혜는 벌써 이곳으로 오고 있어요." 혜라는 시간을 벌기 위해 흥정에 응하는 척 말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기관총이 겨누고 있는데도 아주 당당하게 말대꾸를 하고 있었다. 중간중간 말을 끊고 내게 딴 소리를 하고는 또 그들과 말씨름을 하곤 했다. 그녀의 작전이리라. 다혜가 오면 다시 흥정을 하자는 식으로 그들은 배짱을 부렸다. 그들의 속셈을 나는 짐작하고 있었다. 내 앞에서 다혜의 옷을 하나씩 벗겨가며 흥정을 하려고 하겠지. 아는 그들이기 때문에 가장 확실한 흥정은 그것이리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부르르 떨리는 일이었다. 선실의 구석 쪽 구명대 보관하는 작은 방에 우리를 처넣고 문고리를 채우는 소리를 들었다. 앉은 키보다도 낮은 선반이 매달려 있어서 행동하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구두를 벗어." 혜라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혜라의 소지품과 내 소지품은 모두 뺏고 발목까지 묶어놓아서 자력으로도 풀고 일어날 가망이 없었다. 내가 구두를 벗자 혜라가 무릎걸음으로 구두를 옮겨놓았다. 뒤로 묶인 손이 너무 조여져 있어서 손가락움직이기도 퍽 힘이 들었다. 구두굽을 힘 주어 밀어내고 혜라가 만들어 준 호신용 장비를 겨우 손에 쥐었다. "이리 줘. 내가 먼저 해 줄게." 혜라가 뒤로 묶인 손으로 내 손목을 당겨잡고 예리한 칼질을 시작했다. 내 손목이 금세 풀렸다. 나는 칼을 받자마자 발목부터 풀었다. 그리고 차근차근 혜라의 몸을 풀어 주었다. "표창은?" "그대로 있어." "그럼 됐어." 혜라가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나는 표창을 양쪽 손에 꼬나잡고 숨소리를 죽였다. "슬쩍 밀어봐." 내 말에 혜라는 문을 살짝 밀었다.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내가 뛰어나가더라도 넌 여기서 꼼짝도 하지 마. 위험하니까." "알았어. 어쨌든 조심해야 돼. 저들은 무서운 상대야. 아까 기관실이 박살나는 거 봤잖아. 무서운 무기들야. 한 방이라도 맞으면 박살나니까." "알았어. 내 손에 표창이 있는 한 염려 없다." "그것 보면 나도 현명했어. 당신 신상을 보고하면서 표창을 어디다 숨기는 거는 다행이 말하지 않았거든." 그녀는 또 뜨겁게 입술을 찾았다. 평소에는 아무리 가벼운 입맞춤이라도 그녀의 입술에는 향기가 있었다. 지금은 달랐다. 사람의 입술이 그렇게 뜨거울 수 했다. 어디에서 그리도 뜨거운 것이 솟구치는 것일까? 그녀의 몸속에 있는 열기를 모두 합해도 그런 열기를 만들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신비로운 것이었다. 칼 끝을 이빨로 빼내어 밖으로 걸린 문고리를 벗겨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소리가 들려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난사하는 기관총세례를 받으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죽을 수밖에 없는 막다른 상황이었다. 안테나처럼 삼단으로 빼낼 수 있는 칼이었지만 문고리를 움직이기에는 여의치 않았다. "표창으로 밑을 받쳐 줘 봐." 혜라가 힘 주어 여닫이 문을 받쳐 주었다. 약한 햇살이 들어왔고 문고리가 그 벗겨냈다. 소리나지 않게 문짝을 들어올리고 천천히 열었다. 선실 안에 한 사람도 없었다. 모터 보트 소리가 요란한 것으로 미루어 다혜를 태운 배가 근접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화약상자와 무기를 넣어두는 진열대가 구명대 옆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혜라가 기관총을 쥐고 싱긋 웃었다. "넌 저 안에 숨어 있어. 나오면 안 돼." "돕고 싶어." "방해만 돼. 싸울 땐 혼자가 편해." "혼자서...... 괜찮겠어?" "그래." 만약의 경우가 닥치더라도 혜라만큼은 살려두고 싶었다. 그녀에게 죄가 있다면 나를 감싸고 돈다는 것뿐이었다. 비밀도 총명하기까지한 여자였다. 어쩌다 이런 조직의 마수에 걸려 나와 동행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정열적으로 사랑할 가치가 있는 여자였다. 배가 흔들리고 모터 보트 소리가 사라진 것으로 보아 다혜 일행이 배에 오른 것 같았다. 나는 선실과 갑판이 연결되는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섰다. 유람선이어서 두꺼운 색유리로 치장을 해 놓은 갑판과 선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큐와 유다는 정면의 등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경비원들은 그 주위에 서 있었다. 어림잡아도 열 두서 명이 되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표창의 수보다 인원이 더 많았다. 한 개라도 잘못 던지면 도리어 내가 당할 판이었다. 녀석은 양쪽 팔꿈치로 급소를 때려눕혔다. 쉭쉭쉭쉭...... 정신 없이 표창이 날았다. 쓰러진 녀석을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모터 보트에서 마악 올라섰던 다혜가 납작 엎드렸다. 무기를 갖지 않은 큐와 유다만 남겨놓고 나머지 녀석들은 모두 쓰러져 버렸다. 총 쏠 틈이나 움직일 사이 없이 표창이 정확하게 꽂힌 것이었다. 유다과 큐가 벌떡 일어섰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요란한 총성이 들렸다. 내가 서 있던 갑판에 주먹만한 구멍이 대여섯 개가 뚫렸다. 갑판 모서리에서 두 명의 사내가 내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손에 든 표창은 한 개뿐이었고 돌아선 상태에서 아무래도 총알이 빠르다는 걸 알았다. 멈칫하고 손을 무성권총을 꺼내들었다. 다혜를 세워 놓은 채 원피스 자락을 부욱 찢었다. 시미즈와 속살이 드러났다. 다혜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ㅇ다. 총성이 들렸다. 나를 겨누고 있던 경비원이 쓰러졌다. 혜라가 뛰어나왔다. 그녀의 손엔 기관총이, 아직도 연기가 나는 기관총이 힘주어 쥐어져 있었다. 혜라가 뒤쪽 문을 열고 경비원들을 쓰러뜨린 것이었다. "옷 입어요." 혜라가 소리쳤다. 다혜가 털썩 주저앉아 옷을 입었다. 내가 달려가 다혜를 안았다. 또 총성이 울렸다. 이번엔 혜라가 쓰러졌다. 그 순간 나는 한 개 남은 표창을 큐에게 던졌다. 다혜 쓰러뜨린 것이었다. 유다가 땅에 떨어진 총을 줍기 위해 엎드리는 순간 나는 녀석의 목덜미를 되게 갈겼다. "총을 전부 바다에 던져. 어서!" 다혜는 시키는 대로 바닷속에 주섬주섬 내던졌다. 혜라를 안아 일으켰지만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이마에 한 발 가슴에 두 발을 맞았다. 혜라는 말 한마디 못하고 저승길을 잡은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가슴을 헤짚었다. 다혜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메모지와 작은 열쇠 두 개가 나왔다. 다혜가 있을 만한 곳의 약도와 서울의 아파트 열쇠였다. 자신에 얽힌 비밀 노트와 부모와 오빠에 관한 기록, 자신의 과거를 낱낱이 기록한 일기장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말 사랑한다는 것과 자신의 한을 풀어달라는 내용의 간결한 얘기가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열쇠를 챙겨넣고 메모지를 다혜에게 내밀었다. 다혜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넋 나간 사람 같았다. 왜 가슴이 이렇게 아픈지, 왜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듯 서러운지 알 수가 없었다. 큐의 왼쪽 어깨에서 표창을 빼고 유다의 사혈을 풀었다. 생각 같아서는 한 방씩에 저승길로 보내고 싶었지만 눌러 참았다. 내겐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다혜에게 통역을 부탁해 큐와 유다의 죄를 추궁하고 싶었지만 그런 절차마저 귀찮아졌다. 울고 싶었다. 혜라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와 다혜를 살려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것이었다. 말로는 목숨을충격이었다. 혜라는 살 수 있었다. 내 술수에 걸려들어 할 수 없이 나를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노라고만 하면 살 수가 있었다. 그녀의 진하디진한 사랑을 읽고 있는 내 가슴은 몹시 아팠다. 다혜가, 내가 그처럼 끔찍하게 사랑하는 다혜가 나를 위해 혜라처럼 죽어 줄 수 있을까? 물론 내가 여기까지 달려온 것은 목숨을 건 것이었지만 다혜를 위해 정말 죽을 수 있는지를 자신 있게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사랑의 힘이란 죽음을 불사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정말 죽음을 앞에 놓고 흔쾌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나는 혜라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혜라를, 가엾은 혜라를 당신의 오른편 자리에 앉혀 주세요. 그녀에게 영생의 기쁨을 주소서. 간절히 바라고 바라는 일입니다. 그녀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살 수 있도록 제게 힘을 주소서. 큐와 유다를 거꾸로 매달아 바닷물 속에 너댓 차례나 넣었다가 꺼냈다. 짠 바닷물을 잔뜩 들이켠 두 사내는 사색이 되어 빌고 있었다. 성질 같아서는 그대로 죽여도 분이 풀릴 것 같지 않았지만 차마 죽일 수는 없었다.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이 내가 배워온 것이고 또 그들을 죽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결코 아니었다. "살려만 주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대." 다혜가 이렇게 통역을 해 주었다. 정당한 법으로 죽는 건 그들의 죄 값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내가 한국인이란 사실이다. 그래서 난 끝까지 비열하게 대하진 않겠다. 너희 일본이나 소련처럼 힘 믿고 비열한 짓을 하듯 했다면 벌써 잘 살고도 남았다. 이 얘길 분명히 전해 줘." 다혜가 불어로 내 얘기를 옮겼다. 사내들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큐와 유다가 보는 앞에서 이들의 범죄에 대한 물증이 될 만한 것을 빼놓고 나머지 마약을 모두 바다에 처넣어 버렸다. "나머지는 경찰에 넘기겠다. 그리고 값진 보물들은 모두 아프리카의 굶주린 사람들에게 보내겠다. 물론 그 가운데 본래 한국의 것, 청자나 백자, 탱화 같은 것은 원어치도 갖지 않겠다. 통역해라." 다혜가 내 말을 전했다. 아쉬움이 남는 눈초리였다. "경찰에 넘기지만 않으면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을 다 내 놓겠대." "지옥에 가서 실컷 쓰라고 해." 야마모도 일행도 내 제안에 그대로 수긍을 했다. 놀아본 가락이 있어서 내 뜻을 쉽게, 아깝지 않게 수락한 것이었다. 야마모도 일행이 큐와 유다의 범죄 사실이 얼마나 악랄한가 하는 증명자료들을 함께 경찰에 넘기기로 하고 우리는 자리를 떴다. 안내원은 내 의사대로 혜라의 시신을 화장해 줄 만한 곳을 찾아 주었다. 장작더미와 기름과 혜라가 마지막으로 입고 갈 옷가지들이 마련되었다. 화장터는 통상 주문대로 장작불로 화장해 주기로 약속이 되었다. 시신이 타고 있었다. 나는 울음을 삼켰다. 기도를 했다. 하루 종일 나는 굶은 채 기다렸다. 다혜한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혜라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선 그럴 수밖에 없었고 또 그것이 내 진심이었다. 다혜도 이해해 주리라고 믿었다. 한줌의 재가 하얀 나무상자에 담아져 나온 것은 지중해의 햇살이 완전히 기운 어둑어둑할 무렵이었다. 그때까지 내 곁을 지켜 준 안내원과 야마모도 일행과 납골 정리하는 인부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다음에 만날 것을 기약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어둡기만 했다. 나 때문에, 나를 위해 죽은 여인의 유골 한줌을 가슴에 안고 어두운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사정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진한 눈물을 흘려본 적은 없었다. 차라리 내 팔이나 다리 한 짝을 잃었다면 이렇게 서러워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그녀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영혼 결혼식과 죽은 날만큼은 재 뿌린 강가를 찾아와 달라는 소리와 나를 정말 사랑한다던 그 생생한 목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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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신] 인간시장(9권) 90. 지하 전쟁
하 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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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6.21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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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혜
08.06.22 07:46
첫댓글
정말 종찬은 인덕이 많은 사람이예요!! 혜라의 희생으로 두사람이 안전하게 고국으로 돌아올수 있었네요!!
새처럼
12.09.19 12:15
좋은글 감사 합니다,,^^^
그리운남촌
14.08.30 11:51
잘 읽고갑니다~~
김성갑
18.06.24 16:12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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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종찬은 인덕이 많은 사람이예요!! 혜라의 희생으로 두사람이 안전하게 고국으로 돌아올수 있었네요!!
좋은글 감사 합니다,,^^^
잘 읽고갑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