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의 삶과 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 박재순
2001년은 함석헌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문화관광부는 함석헌을 4월의 문화인물로 지정했다. 젊은이들 가운데는 함석헌을 모르는 이들도 있고 함석헌의 글을 읽어보지 못한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 40을 넘긴 사람 가운데 글줄이나 읽은 사람치고 함석헌의 글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통령에서부터 산골 농부나 바닷가 어부에 이르기까지 함석헌의 강연과 글을 통해 정신적 충격과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이 나라 곳곳에 있다.
나는 1970년에 풋내기 대학 1학년생으로 처음 함 선생의 강연을 들었다. 흰 수염에 한복을 입은 70노인의 꼿꼿한 자세와 날선 소리는 하늘을 찌를 듯했고 나는 그의 비범한 풍모와 말씀에 감동을 넘어 두려움마저 느꼈다. 1950년대에 <사상계>에 주옥 같은 글을 써 서울의 종이 값을 올렸고 나이 70에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군사정권을 꾸짖고 씨알들(민중)을 북돋아주었던 그이는 하늘의 별처럼 높게만 느껴지는 분이었다. 그러나 한번 가까이 다가서면 참으로 부드럽고 편안한 분이었다. 남에게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는 일이 없어서 누가 의견을 물으면 늘 "글쎄"라고 대답해서 "글쎄"가 별명이 되었던 분이다. 80대 후반의 백발노인이 되어서도 꽃과 난을 가꾸는 데 몰두하고 예쁜 조가비와 그림을 모았던 이. 꽃과 백발이 참 잘 어울렸던 이.
그는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심오한 종교사상가로, 시인과 교육자와 예언자로, 겨레의 얼과 혼을 지킨 이로, 비폭력 평화주의자로, 국가와 민족의 울타리를 넘어 세계정부를 꿈꾼 세계시민으로 한국인의 가슴에 새겨져 있다. 이렇듯 만물상처럼 다양한 얼굴을 가진 함석헌은 누구인가?
그는 조선왕조가 망해가고 서구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시기에, 20세기가 시작되는 해인 1901년에 평안북도의 한 바닷가에서 태어났다. 한반도 서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그의 고향은 양반, 상놈의 구별이 없고, 서구문물이 유입되는 길목이어서 서구의 근대교육과 기독교 신앙을 유년시절부터 접할 수 있었다. 3․1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관립학교인 평양고보를 자퇴하고 민족사학인 오산학교에 편입하면서 3․1운동의 주도자이며 오산학교의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 오산학교 교장 조만식, 독창적인 기독교 사상가 유영모를 만났다. 당시 오산학교는 민족혼과 기독교 신앙이 녹아드는 불도가니였으며, 이승훈과 유영모는 함석헌의 평생 스승이 되었다. 이승훈에게서 뜨거운 민족애와 크고 높은 인격을 배웠고 유영모에게서 깊고 독창적인 생각과 동양 고전들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배웠다.
함석헌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군사독재시절까지 5차례 이상 옥고를 치르면서 평생 들사람(野人)으로 살았다. 돈 욕심 몰랐고 누구와 자리다툼한 일이 없다. 가진 게 몸과 원효로 집밖에 없다. 몸은 학생들 공부하는 데 쓰게 하고 원효로 집은 공적인 일에 쓰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세상을 떴다. 험난한 민족사 속에서 지성과 양심을 곧게 지키며 깊고 넓은 독창적 사상을 펼쳤던 함석헌은 민족의 큰 사상가요, 겨레의 큰 스승이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학계와 언론계는 자유당 정권과 군사독재에 맞서 싸운 민주인사로 그를 기억하고 평가할 뿐 그의 사상을 연구하고 평가하는 데는 인색했다.
함석헌 사상의 핵심을 짚어보고 그 의미를 밝혀보자. 독재와 폭력에 맞서 싸우면서 함석헌이 닦아낸 사상의 핵심은 "스스로 함"이다. 그는 특권을 누리지 않는 보통 사람을 씨알로 표현했다. 그의 사상은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씨알사상은 풀뿌리 민주 철학이다. 씨알은 나라와 역사의 주체이다. 씨알 하나 속에 수억 년의 과거가 담겨 있고, 앞으로 펼쳐질 수억 년의 미래가 들어 있듯이, 한 인간 속에는 과거 역사와 미래 역사가 담겨 있다. 「너는 씨알이다. 너는 앞선 영원의 총결산이요, 뒤에 올 영원의 맨 꼭지다․․․지나 간 5천년 역사가 네 속에 있다.」
씨알 속에 하늘의 생명기운이 맺혀 있듯이, 역사와 사회의 밑바닥에서 수천 년 동안 온갖 고난과 시련을 당하면서 민족의 삶을 지탱해온 민중 속에는 큰 힘과 지혜가 숨어 있다. 함석헌은 「민중의 본바탕을 밝혀내기만 하면 큰 기적을 행할 수 있다.」라고 했다. 모든 정치가와 종교지도자는 민중을 가르치기 전에 민중에게 겸허히 배워야 한다. 민중과 유리된 정치는 반드시 타락하고 민중을 떠나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둘째, 생명 철학이다. 씨알의 생명활동은 햇빛과 바람과 물과 흙이 함께 어우러져 벌이는 생명의 춤이고 잔치이다. 하늘과 땅이 서로 울리고 서로 느끼는 생명 축제이다. 한 알의 씨알처럼 한 인간이 역사와 사회의바닥에 서서 자신을 비우면 진리와 사랑,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하늘나라의 생명잔치가 시작된다. 씨알(民)의 삶 속에서 자연생명과 역사와 신앙이 서로 어우러지고 서로 통한다.
셋째, 믿음(종교)과 생각(과학)이 통일된 철학이다. 함석헌은 1950년대 후반부터 줄기차게 "생각하는 씨알이라야 산다", "죽어서도 생각은 계속해야 한다"라고 외쳤다. 생각은 「스스로 하는」 마음의 일차적 기능이다. 생각에는 "하는 생각"과 "나는 생각"(靈感)이 있다. 생각하면 생각(영감)이 난다. "하는 생각"으로 "나는 생각"을 얻고, "나는 생각"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 생각은 믿음(영감)에 이르고 믿음은 생각을 깊게 한다. 신앙과 과학이 충돌하거나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과학이 발달하면 신앙은 과학 위에서 자신의 세계를 펼쳐야 한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신앙의 세계가 요청된다. 현대문명의 근본 문제는 신화를 잃어버리고 하느님을 떠난 데서 생겨났다.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스스로 하는" 자율성의 영역이 급속히 확대된다. 유전자 조작과 생명 복제와 같은 문제는 주체적이고 책임적인 판단이 요구된다. 주체적이고 성숙한 책임성은 깊은 믿음과 생각에서 나온다. 생각함으로써 운명적인 삶에서 "스스로 하는" 주체적인 삶으로 바뀐다.
넷째, 동서문명의 종합을 추구한 통일 철학이다. 함석헌은 서구문화가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시기에 태어나 개인의 인격과 영혼을 쇄신하는 기독교 복음과 신앙에 깊이 들어갔고 서구의 현대학문으로부터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는 비판적이고 저항적인 정신을 익혔다. 그의 삶과 사상 속에서 지구화가 이루어지고 동서문명과 정신의 융합 및 통일이 이루어졌다. 그의 삶과 사상 속에 서구의 기독교 신앙과 비판 정신이 배어 있으며, 그 속에서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정신과 문화가 살아났다. 우리 역사, 우리 문화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 모든 사회의 문화가 "한"(크고 하나임)에서 나왔고 "한"을 목표로 하고 나아간다."한 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는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질인 "한"을 세계통일의 근거와 목표로 제시했다.
함석헌의 사상은 씨알(民)을 역사와 사회의 주체로 놓고 씨알을 하늘처럼 섬기는 풀뿌리 민주 철학, 모든 문제와 일의 중심에서 나를 문제 삼는 주체 철학, 겨레의 얼과 혼을 추구한 민족 철학, 한국․동양의 정신문화와 서양의 정신문화를 융합하려는 세계 철학이다. 그의 사상은 생각(과학)과 믿음(종교), 몸(육체)과 영혼(정신), 삶(실천)과 이론(학문), 남한(자본주의)과 북한(공산주의)의 통일을 추구하고 국가와 민족과 인종의 경계를 넘어 세계정부를 꿈꾸는 통일 철학, 기독교에 바탕을 두면서도 기독교 울타리를 넘어서 유교․불교․도교․힌두교에 두루 통하는 보편적인 진리의 자유로운 세계를 열었던 초종교적인 종교다원주의 철학이다.
연세대학교 신학대학 명예교수인 유동식 박사는 <대표적 한국인>이라는 글에서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로 원효와 율곡과 함석헌을 꼽았다. 이 세 사람은 각기 불교, 유교, 기독교에 뿌리를 두면서도 자기 종교의 울타리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우면서도 "큰 하나됨"(한)을 추구한 종합적인 사상가들이고 이론에 머물지 않고 실천하고 행동한 사상가들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유동식은 세 사람 가운데서도 동서문명이 만나는 세계적인 지평에서 창조적이고 종합적인 사상을 펼쳤다는 점에서 함석헌이 가장 위대하다고 보았다.